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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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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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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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단군조선
위만조선
진국









 
고구려
 
신 라
 
발 해



고 려
고려의 역대 국왕
고려-거란 전쟁
무신정권, 최씨정권
고려-몽골 전쟁
조 선
조선의 역대 국왕
세종대왕한글 창제
임진왜란
병자호란·정묘호란
갑신정변·동학운동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정기
미군정 소련군정

대한민국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한국의 역사(韓國-歷史)는 구석기 시대 이후 주로 한반도만주, 연해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바탕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1] 이 문서는 광복 이전의 한국에 대한 역사를 주로 기술한다.

한국 역사의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되는 선사시대고조선의 성립 이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고려 시대중세, 조선 시대근세,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 등으로 구분된다.[2]

한국의 역사는 고찰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한국의 경제사[3] , 한국의 생활사[4], 한국의 정치사[5] 와 같이 분야별 역사로 나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개관[편집]

고대[편집]

한국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6]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다. 기원전 6000년 이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7] 고 한다. 그 후,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여 여러 나라로 나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삼국시대를 맞아 고구려, 백제, 신라원삼국시대의 여러 국가를 정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들 세 국가는 경제와 군사 면에서 서로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고구려백제는 강력하였고, 특히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하곤 하였다. 신라의 힘은 점진적으로 커져서 결국 676년에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편 전직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중세[편집]

신라가 9세기 후반에 국력이 쇠퇴하자,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 시대에는 고대보다 법률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과거제가 소개되었으며, 불교가 번성하였다. 993년~1019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전쟁을 벌여서 거란을 격퇴하였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였고 30년에 가까운 전쟁 끝에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공민왕의 자주 개혁이 있기 전까지 의 간섭을 받았는데, 이 시기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었다.

근세[편집]

이성계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을 비롯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난 덕분에 결국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근대 태동기[편집]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노론과 남인 위주의 일단 전제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민은 점차 경제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생산력도 증가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영조, 정조 시대에 다시 중흥하였다. 이때 실학이 융성하였고, 천주교가 일부 남인에 의해 학문의 일부로서 전래되었다. 그리고 양명학이 전래되었으며 천문학과 의학,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의 기술적 성과가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양반층이 증가하고 농민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등 반상제의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봉기 등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점과 지방 관리의 학정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생활 도예가 공예의 중심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조선에는 같은 외세의 접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위기 속에 흥선 대원군은 철저한 봉쇄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접근을 막았으나, 이후 주위의 열강들과 무력 분쟁을 겪는 등 제국주의와 맞서게 되었다. 1870년대 초반에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와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잠시 물러섰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8]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와 간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한국의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약 모두 강압에 의한 것이며 법적으로는 무효라고 볼 수 있다.[9] 한국인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제국의 점령에 저항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에는 곳곳에서 비폭력적인 3.1 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이러한 독립운동을 총괄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에는 서로군정서와 같은 독립군일본군과 직접적인 전쟁을 벌였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부터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를 군정기 또는 해방정국이라 한다. 해방정국에서 남과 북은 극심한 좌우 갈등을 겪었다. 북에서는 조만식과 같은 우익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남에서는 여운형과 같은 중도 좌파 정치인이 암살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소련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한국에서의 극심한 반대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가 별도로 수립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는 기준이 되었다. 분단 이후 양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수시로 국지적인 교전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선사 시대[편집]

기원전 4000년 경 빗살무늬 토기, 서울 암사동 선사 유적지 출토

한국의 선사시대구석기 시대 후기로부터 시작되며, 약 70만 년 전에서 청동기 시대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편집]

기원전 70만년 경에서 기원전 1만 년 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약 7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충청북도 단양군의 금굴, 평안남도 상원의 검은모루 동굴, 덕천군의 승리산 동굴 최하층 유적,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 등에는 기원전 70만년 경의 뗀석기와 동물 뼈조각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초기의 인골은 약 10만년 전의 평양시 역포구역에서 발견된 역포인과 덕천군 승리산의 중층에서 발견된 덕천인과 단양 상시바위그늘에서 발견된 기원전 3만 9천년 경의 남성 아래턱뼈 상시인 등이 그들로, 이들은 호모 하이델베르켄시스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정된다. 기원전 4만 년 경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면서 기원전 3만년 경에 한반도에 도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자생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 1962년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를 시작으로 공주시 석장리, 제천군 점말동굴, 덕천 승리산 동굴 등에서 구석기 시대의 인골 발굴이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체질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유골이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10]

  • 연천 전곡리 유적: 전곡리 유적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0여 차례의 발굴 결과 전기 구석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 있는 해발 61m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다섯 군데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적으로는 주먹도끼, 박편도끼, 뾰족찍개 등이 있다. 전곡리 석기는 대부분 석영이나 규암으로 된 자갈을 이용한 것으로 큰 자갈의 박편을 떼어낸 뗀석기나 작은 자갈을 다듬은 원핵석기가 많다.[11]
  • 공주 석장리 유적
  • 단양 금굴 유적
  • 단양 상시리 유적
  • 청원 두루봉 유적
  • 제천 홍수굴 유적
  • 제천 점말 유적

중석기 시대[편집]

한국의 중석기 시대(또는 고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며,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12][13][14] 양양 오산리 유적, 홍천 하화계리 유적, 김해 패총 하층, 제주 빌레못 굴 등에서 발견된 유적들이 중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이들은 구석기인이 중석기시대까지 한반도에 정착한 유형 혹은 초기 신석기인의 유적으로 본다.

신석기 시대[편집]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달리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쓰인 시대이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서 4천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15]

한국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간석기를 비롯하여 빗살무늬토기덧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한반도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 발견되며,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이때문에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도 한다. 간석기는 신석기 초기부터 쓰였으나 농기구무기에 간석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중기 이후이다.[16] 특히 울산 대곡리반구대암각화 (국보 제 285호)는 신석기시대에 조성된 바위그림으로 선사인의 생활상이 잘 나타 나 있다.

상고 시대[편집]

비파형동검

상고 시대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국가성립까지를 가리키는 시대구분이다. 한국의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상고 시대의 중요한 사건은 국가의 형성이다. 그러나, 한국사 학회에서는 최초의 국가가 어떻게 새워졌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 대해서는 부족집단에서 출발하여 국가를 이루었다는 부족국가설, 추장과 같은 지도자의 권력이 커지면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군장국가설, 마을 단위로 모여살던 사회가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는 성읍국가설 등이 있다. 1940년대 이후 주장되어온 부족국가설은 1960년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아 오늘날에는 학계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안된 군장국가설과 성읍국가설은 서로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고대사회 경제, 정치 관계에 대한 연구 성과를 근거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17] 1990년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가 출판한 《한국사》[18] 에서는 성읍국가설을 채택하고 있고, 서울대학교출판부의 《한국사특강》은 고조선의 출현을 군장국가설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다.[19]

청동기 시대[편집]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기원전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고조선[편집]

백두산한민족의 영산으로 자주 언급되며, 고조선의 건국과도 연관되어 설명된다.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요임금 즉위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나라이름을 조선이라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를 근거로 연도를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 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단군 신화와 함께 서술된 것으로 그 정확성을 믿기는 힘들다.[20]

한편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칭호로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단군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이나 재위 연도를 알 수는 없다.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근거로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으나, 환단고기는 많은 면에서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자료로 비판되고 있으며 역사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21]

고조선은 단군조선 시기과 위만조선 시기로 나뉜다. 근대 이전의 옛 역사서에는 기자조선이 등장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평가된다. 고조선이 중국측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쓰인 제나라의 《관자》(管子)로 제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공자는 동방예의지국인 구이로 망명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구이는 중국에서 고조선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22]

  • 강역 문제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이 요동이나 요서에 있는 평양인지 아니면 지금의 평양시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인 세형동검이 만주지역에서도 출토되고 문헌에 고조선이 연나라와 싸워 패했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전 3세기를 전후로 하여 남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23]
  • 문화와 사회 제도
고조선 후기인 위만조선 시대에 대한 기록에는 박사, 경, 대부, 상, 대신, 장군 등의 관직명이 남아있어 중앙정치조직이 있었음을 알게해 준다. 그러나 지방 세력은 독자적인 정치 권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상 역계경이 한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왕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휘하 2천호를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고조선은 노비와 귀족, 왕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고 8조법과 같은 법률이 있었다.[24]

철기 시대[편집]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25]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의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철 기술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당시 주요 유물로는 철제 농기구, 철제 무기와 함께 막대 모양의 쇳덩이인 덩이쇠가 있는데 이 덩이쇠가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 계급이 철의 주조능력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철기 문화는 무쇠와 강철이 거의 동 시대에 발전되었다는 특징이 있다.[26]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편집]

위만조선연나라 사람 위만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27]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진국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기원전 109년 섭하를 보내 우거의 무역독점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우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과 고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한군현은 고구려 미천왕낙랑군대방군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8]

원삼국 시대[편집]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증가된 생산력과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건설되었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되었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고조선 이후 세워진 부여는 철기를 바탕으로한 연맹 왕국이었다. 이후 동예, 옥저,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탐라와 같은 연맹체 왕국들이 출현하였다. 이후 이러한 연맹 왕국에서 출발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주변의 왕국들을 병합하여 성장하게 된 삼국시대까지 여러 소국과 대국이 혼재하여 있던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 또는 열국시대라한다.[29]

기원전 3세기경부터 예맥(濊貊)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인 부여(夫餘, 扶餘)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었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로 구분된다.

  • 부여
부여는 별도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북부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흘승골성에 도읍하였다는 건국신화가 있고 동부여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세웠다고 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四出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제가(諸加)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그 인구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풍속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 특히 엄벌하였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29]
  • 고구려
한군현의 지명에 이미 고구려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작은 소국으로 오랫동안 존재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이후 주몽이라 불리는 군장을 중심으로 한 부여계 지배층이 이주해 와 고구려의 계루부를 형성하였고 기존의 토착세력인 소노부를 대체하여 고구려 연맹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는 땅이 협소하고 산악지역이 많아 주변에 대한 전쟁을 자주하였다. 주변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키며 확장하던 고구려는 부여를 흡수하여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29]
  • 옥저와 동예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동예라 불리는 소국이 있었고,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족(支族)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며, 예맥족의 부족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왕이 없고 각 지방의 맹주인 현후(縣侯)가 군림하였다. 현후 밑에 삼로(三老)가 하호를 지배하였다.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2만호에 이르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을 성립하지는 않았다. 이후 이웃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부족사회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가 통치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29]
  • 삼한
기원전 8세기무렵에 이미 한반도 여러 곳에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는 지배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수 많은 성읍국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과 같은 수 많은 고인돌을 남겼다. 기원전 3세기의 기록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삼한에 속한 나라들이 무려 70~80여 국에 이르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는 6~7백호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고 작은 소국들은 점차 연맹왕국을 이루어 마한, 변한, 진한삼한이 되었다.[29]
    • 마한: 삼한 중 가장 먼저 세력이 커진 것은 마한이었다. 한강 유역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맹 왕국이었던 마한 내의 목지국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을 지배하여 진국의 왕으로 불렸다. 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국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가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 기초를 다졌다.
    • 변한과 진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가 경주평야의 6촌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한편 변한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 삼한의 생활: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였다. 농경과 철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

고대[편집]

한국의 고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900년까지의 시기로, 원삼국시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합쳐진 삼국시대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발해가 세워진 남북국시대, 그리고 신라 말엽 호족 세력에 의해 형성된 후삼국시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삼국시대[편집]

황금으로 만든 고구려 왕의 허리띠 장식(국보 제89호 금제교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각자 고유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30]

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이므로 사국 시대[31]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 삼국시대의 정치
삼국 시대 초기 국가들의 정치는 국왕과 지방세력인 각 부의 연맹 왕국 형태였다.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으며, 백제역시 고구려-부여계의 이주집단이 부를 형성하였고, 신라에는 6부가 있었다. 이들 부는 독자적인 무력 행위나 외교를 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독자적인 자치를 누렸다. 고구려에서는 3세기 전반까지도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져 관등제가 확충되고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왕을 중심으로한 일원적인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 확립의 결과 각 나라에서는 율령이 반포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귀족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였으며 실제 국정의 운영은 이들 귀족들과 왕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정사암 고사, 신라의 화백제도 등은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귀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30]
  • 삼국시대의 언어
삼국사기에는 3국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 별다른 통역이 필요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와 동예 옥저의 말을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양서》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장과 예절, 언어가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어휘와 이두 표기에서도 이들의 언어는 공통점이 많으며 중세 국어와도 통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각 나라의 언어는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같았다고 볼 수 있다.[32]

고구려[편집]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백제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태종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백제[편집]

백제의 왕관 장식

백제(百濟)는 서기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33] 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존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

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중흥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의 무왕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편집]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가야[편집]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이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532년 수도인 금관가야 등이 신라에 정벌, 투항하였고, 결국 대가야가 562년 최종적으로 항복함으로써 가야는 멸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의 패망 원인으로는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남북국시대[편집]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로, 남북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통일신라라는 시각이 강했고, 이러한 관점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나,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발해고를 필두로, 남인 실학파와 노론 북학파 계열 일부로부터 발해역시 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이 시도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근대 이후 결실을 거두어 1980년대 이후 발해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후기 신라[편집]

중대 신라의 건축물인 불국사.

나당 전쟁(羅唐戰爭)의 마지막 해인 676년,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以南)을 완전히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侍中, 중시)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녹읍(祿邑)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 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 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9세기에 들어서 왕위 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고,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워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칭하며, 조정으로부터 자립하였다.

중하대 신라 시대에는 대동강 이남의 통일로 전쟁이 줄어들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불교 문화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발해[편집]

발해의 석판

발해(渤海)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와 동부,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696년, 영주(營州)에서 거란(契丹)족의 반란이 일어나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해졌다. 옛 고구려의 장수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그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은 이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한 후 영주에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698년에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제2대 무왕(武王)은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정하고,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북부여를 계승한 두막루(豆莫婁)를 병합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에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제3대 문왕(文王)은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하였다. 문왕은 영토 확장보다는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문왕은 발해의 수도를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순으로 옮기며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다. 그러나 신라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제10대 선왕(宣王)은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하여 발해 역사상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선왕대에 이르러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릴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선 (大諲譔) 의 치세에 멸망하였다. 10세기에 들어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15대 220년간의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발해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와 당의 문화를 수용한 문화국가였다.

발해의 귀족이었던 열만화는 발해의 유민들을 모아 압록강 부근에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고, 2대 왕이었던 오현명은 거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986년 거란의 2차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후삼국시대[편집]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는 892년 ~ 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신라 말기(9세기 말)에 들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기에 이르렀고, 이 중 군인 세력인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백제를 세웠고,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고구려를 세웠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편집]

고려의 청자칠보투각향로

고려(高麗)는 918년 태조 왕건궁예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후백제를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 약 470여 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이다. 한국사에서는 이 고려 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34]

전기[편집]

고려는 신라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개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 현재의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이후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자 하였다.

거란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섬멸하였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고려 사회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가 향상 되어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났으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는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중기[편집]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2세기 중반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후로는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전국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한편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로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당시 집권자인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결국 1270년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35] 이들의 항쟁은 모두 진압되었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후기[편집]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새로이 등장한 권문 세족은 불법 행위로 사회 모순을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원이 점차 쇠퇴할 즈음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과 신진 사대부 계층의 성장 기반 마련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등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고려 사회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왜구와 홍건적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의 이성계정도전을 위시한 신흥 사대부들과 결합하였고,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권문 세족을 압박하는 개혁을 확대하여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조선[편집]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조선(朝鮮)시대는 근세에 해당된다.[36]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초기[편집]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1398년, 1400년)이 발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당성이 결여된 집권으로 쇠약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해 나가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육조직계제와 관제 개정 등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민으로 복귀시키는 등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부왕 태조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庶子) 및 서얼(庶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37]

이때 구성된 서얼 금고령적서 차별제도는 성종 때 가서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되어 영조때까지 서얼의 관직 임용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많은 서얼들의 자유로운 활동의 제한 및 사회적 차별을 유발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유신(遺臣)을 자처하며 새 조정에 협력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중반 이후 서서히 고려 유신 세대는 사라졌고, 그 아들, 손자 세대는 새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전기[편집]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역인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시켰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세조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였던 《경국대전》 의 편찬을 완성하고 국가의 의례서인《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또한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들인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 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사림은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중기[편집]

고려 말기의 온건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후예이며 학맥상으로는 정몽주의 후예들이었던 사림은 세조 대에 김종직 등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래 꾸준히 세력을 넓혀 나갔다. 김종직은 비록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찬탈을 비난했지만, 이후 성종 대에 훈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파 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하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한다. 동시에 이들 사림은 향촌에서 향약과 소학 등을 보급함으로써 지역적 기반을 다져놓기도 한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 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전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후기[편집]

정조가 건설한 수원 화성.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 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영조의 강력한 탕평정치로 인해 왕권이 강화되고 붕당정치의 힘은 약화되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38]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이와 전후하여 서양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되었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이 창시되었으나 모두 박해를 당하였다.

말기[편집]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의 어린 둘째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884년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39]

일본은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이에 고종은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을미의병). 한편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근대[편집]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시기로 분류된다.

대한제국[편집]

대한제국의 국기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입헌군주제 추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구본신참' 성격의 점진적인 개혁으로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독립협회도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러시아와 대립하면서 1904년 2월,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게 '한반도내에 영토,시설등 군사적 이용을 협조할것'을 강요하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고, 나아가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1904년 한반도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는데,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이 전략적인 승리를 얻게되어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어서 1905년 11월, 일본은 일방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성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으며, 다시 의병이 조직되어 무장 항전을 벌였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통감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軍隊害刪)하였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의병 운동의 양상은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경술국치)

일제강점기[편집]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는 일본 제국(이하 일제)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로서, 제1기인 무단 통치 시기, 제2기인 민족 분열 통치 시기(소위 문화통치), 제3기인 민족 말살 통치 시기로 나뉜다.

1910년대[편집]

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

산림령, 광업령, 어업령을 공포하여 민족자원약탈을 적극적으로 수탈하였다.

한편 한일병합으로 국내에서 민족 해방 운동이 어렵게 되자 민족 해방 운동가들은 국내에서는 비밀결사형태로 조직되었다. 근대 때부터 존재해왔던 대표적 비밀결사 항일 운동 단체인 신민회안악 사건105인 사건을 계기로 해체되고 말았다.

해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미주 지역 등에서 민족 해방 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많이 이주하여, 간도 일대에 한인촌, 연해주 일대에 신한촌 등을 형성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큰 도움이 되었다.

3·1운동 기념비

일제의 탄압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민족 자결주의 발표는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고, 이는 파리 강화회의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는 것과, 2·8 독립 선언3·1 운동으로 이어진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을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여, 일제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졌다.

1920년대[편집]

이때 3.1 운동의 무자비한 진압을 보고 충격을 받은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는 무장 투쟁론과 외교 독립론 외에 실력 양성론이 나타난다. 윤치호, 안창호, 이광수, 신흥우, 김성수, 안재홍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교육과 문화 사업 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한 뒤에 독립이 가능하다 판단하고, 학교 설립, 신앙 활동, 계몽 활동, 언론 활동, 문화 사업 등을 추진해 나간다.

그리고 일제는 무단통치시기에 금지되었던 언론`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이 때에 탄생한 동아일보조선일보는 후일 한국 사회의 주류 언론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20년대 초 신문에 대한 검열을 통해 삭제, 정간, 폐간을 자행하였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단체의 설립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또 조선인의 교육의 기회를 늘리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노동력 양성을 위한 산학과 같은 초급 학문이나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운동도 탄압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동아일보)

일제는 조선인을 기만하고 식민통치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의 분열과 이간을 조장하였다.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던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자치론자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일본 제국을 상대로 조선인의 자치권을 청원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한편 해외에서는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내부의 독립운동 방법론 차이에 따른 분열과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임시정부 주도의 독립 운동은 한동안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압록강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국내에는 천마산대, 구월산대 등의 유격활동을 하는 게릴라부대 등이 존재하였다. 특히 천마산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역할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계열과 사회주의자의 연대가 계기가 된 6·10 만세 사건(1926년)과, 해외에서의 불어온 좌우합작의 분위기로 인해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때에 만들어진 것이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민족단체였던 신간회이다. 신간회는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세력과 결별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자 계열이 모여 만든 좌우합작단체인데, 국내의 많은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3·1 운동 이후 가장 큰 항일 운동이었던 광주학생운동(1929년)에도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노동운동이 항일운동으로 변화되는 성격을 지닌 원산 노동자 총파업도 지원하였다. 특히 신간회는 많은 사회 대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는데, 대표적인 여성 단체였던 근우회를 자매단체로 두기도 하였고, 형평 운동이나 청년 운동 등 많은 대중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국내외에서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는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 투쟁도 활발하였다.

무장투쟁 외에도 자체적인 실력 양성론이 전개되어 김성수 계열과 조만식 계열을 중심으로 일본과 외국계 자본에 대항하는 국내 자본 양성 노력이 시도되었다. 안재홍정인보 등은 유적지 발굴과 역사 연구를 진행해 나갔고, 장택상 등은 해외로 반출되는 고미술품을 매입하여 유물의 반출을 차단하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편집]

민족말살정책을 실행한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

19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그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보를 통한 블록경제를 선택하였다. 그에 따라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진주만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이른바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되었고, 학도 지원병, 징병제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의 명목아래 성노예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침체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활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의 활약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애국단의 일원이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도 끌어내 후에 중일전쟁 이후에 창설된 한국 광복군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30년대의 독립 운동의 중심점은 김원봉김규식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이후 김원봉과 김규식, 그리고 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만주지역에 자유시 참변미쓰야 협정으로 사실상 중단된 무장 독립 투쟁 노선도 1930년대 초반부터 한중연합작전을 전개해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만주침략이 본격화 된, 만주국 수립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이 힘들어지자, 지청천과 같은 혁신의회 계열의 한국독립군 인사들은 임정의 요청을 받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여건 속에서도 만주에서는 한중연합작전을 넘어선 한중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 관내에서는 많은 항일 무장 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원봉과 김규식, 지청천, 조소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와,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 김두봉 등이 주도한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 인사들이 충칭의 임시정부로 합류하자, 당 산하의 조선의용대의 다수의 세력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그 후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독립동맹의 산하 군조직으로 편성되었다.

1910년 이후로 침체되었던 외교독립론은 1933년 이승만제네바 회의에 참석한 것을 이후로 여러 국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외교 활동은 1930년까지도 미미하다가 1932년윤봉길, 이봉창의거를 계기로 활기를 띄게 된다. 이승만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청했고, 1941년태평양 전쟁 이후 그의 노력이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국 광복군을 연합군과 연합작전을 시행하였다. 미얀마와 인도 일대에서는 영국군의 지원요청으로 주로 심리전 역할을 담당하였고, 미국의 OSS 전략사무국과 함께 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니, 도중에 일본이 항복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현대[편집]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광복을 맞이했으나, 곧이어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해 주둔함으로써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 기간에 좌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결국 1948년대한민국(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된 후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면서 남북이 분단이 되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을 거쳐 한반도 이남의 대한민국과 한반도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확실히 나뉘게 되었다.

대한민국[편집]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와 한민족의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1945년 8월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한반도내에는 건국준비위원회등이 치안과 행정권을 담당하여 혼란한 해방정국 상황을 일시적으로 수습하였으나, 9월 한반도 분할 정책과 포고령으로 불인정 되었고, 곧이어 한반도에는 군정기를 맞게 된다. 군정기 기간동안 좌∙우익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좌우합작운동등 추진되었으나 구심점을 잃게되었다. 트루먼 독트린이 계기가 되어 냉전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좌,우익 세력의 대립으로 인해 남북 각각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각자 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된다는 여론이 우세하게 작용했다.

한국 전쟁 당시 입대하는 장정을 마중나온 여성 (대구)

특히, 1950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였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남북한 사이간의 상호 불신이 더욱 깊어 갔다.

현대의 서울.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참상과 깊은 후유증속에, 1950년대에는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받는등 삼백산업의 발달로 전쟁의 참혹한 폐허의 상처를 딛고 복구해나아갔다. 이후 이기붕부통령으로 선출하여 자유당의 영구집권 음모로 발생한 3·15 부정 선거의 후유증으로 부정선거 개표와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가 4·19 혁명으로 번지면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허정의 과도내각을 거쳐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정권교제인 제2공화국은 그러나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구파, 신파간 갈등으로 1년만에 5·16 군사 정변으로 몰락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에는 경공업 및 경제개발계획등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1970년대들어서 중화학공업에 육성에 크게 기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등 크게 발전해나아갔고, 1980년대에는 '3저 호황'으로 경제안정기를 맞아 첨단산업 발달하였다. 1990년대말에 IMF로 경제위기난을 겪기도 하였지만, IMF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광복 직후에 대한민국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또한, 4∙19 혁명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으로 부패한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었으며,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넓어지면서,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는 점이 있다. 오늘날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20세기 말 찾아온 IMF 경제위기로 인해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나, 금모으기 운동 등 국민의 뛰어난 단합력을 보여주면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빠른 경제회복을 맞았다. 대한민국은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나, 높은 교육열과 학생들의 뛰어난 학습력 및 공부에 대한 의지로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가진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배출된 수많은 인재가 대한민국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 역량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바이다. 또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국민들은 단합의 기회를 갖고, 그 이후 시민의식 수준이 더 높아지게 되었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의 저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단연 교육의 힘만이 아니다. 현대 대한민국은 문화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그 종류도 세분화되었다. 또한, 학습적인 교육에만 국한된 교육이 아닌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융합형 인재는 물론이고 음악, 미술, 체육 등에 능통한 예술 인재 또한 배출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 인재들은 대한민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육이 다른 분야에 영향을 미친 예이다. 대한민국의 노래들은 K-Pop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아이돌 및 가수들은 해외로 나가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계인들은 K-Pop에 열광하며 엄청난 규모의 해외 팬까지 생겼다.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소위 '문화 강국'이 된 것의 배후에는 또 교육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단연 '학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이란 광의(廣意)의 교육으로써 모든 분야에서의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아이돌은 어려서부터 특화된 교육-가창력 향상 관리나 춤(안무) 테크닉 교육 등-을 받아 노래, 춤, 작곡 등에 모두 능통한 '융합형 인재'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것 역시 교육이다.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은 단순히 많은 융합형 예술인재가 배출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신인 예술인재들은 선배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문화를 이어간다. 즉, 일관성 있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가수들은 1960~1990년대의 대한민국 선배 가수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한다. 이것은 예전 세대와 현재 세대의 문화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주며 이렇게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문화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화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그 예가 정치 관련 홍보를 콘서트 등의 문화 행사로 시행하여 그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의 대한민국은 과학기술, 산업, 인재, 교육, 시민의식과 예술, 문화, 경제 등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는 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1945년 8월광복을 맞이함과 동시에, 한반도 분할 점령과 한국내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간의 갈등이 깊어져 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집권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김일성의 공산주의 계열은 조만식을 주축으로 한 민족주의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했다. 이어서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토지 및 주요 산업을 국유화 시켰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후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격렬한 전쟁 속에 1953년 휴전함으로써 이후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고, 남북한 모두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서로간의 상호 불신이 깊어져만 갔다.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은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하고자 내부에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다. 김일성은 남로당계에게 전쟁의 패한 책임을 물린다는 명목으로 전쟁 직후 숙청하였다. 소련파, 연안파는 김일성의 독주를 견제를 시도하다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고, 갑산파의 대대적인 숙청 등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5개년 경제계획, 천리마 운동, 모든 농지의 협동농장화 등을 단행하였다. 1972년에는 남한의 유신 체제와 함께 주체사상을 헌법에 명문화하여 김일성 유일 독재체제로 가게 되었다.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의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0년대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 갔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그리고 1998년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산력 저하,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하여 교역 상대국이 상실되었고, 에너지와 원자재, 식량 등의 자원에서 심각한 부족을 겪게 되며, 1990년대 이후 들어서는 매년 마이너스 성장율을 보이고 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는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고자 1984년합영법 제정, 1994년에는 신합영법 개정을 통하여 일부지역에 한해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고 '제한적 개방'을 표방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대한민국 학계의 편년을 기본으로 하였다.
  2. 한국 역사의 시대 구분은 강만길, 한국사, 한길사(총 26권)에 의한 것이다. 다음의 자료를 참고할 것
    강만길, 한국사 연표 1, 한길사, 1995, ISBN 89-356-0094-6
    강만길, 한국사 연표 2, 한길사, 1995, ISBN 89-356-0095-4
  3. 한국의 경제사와 관련한 문헌으로는 《한국근대경제사 특강》(김준보, 연세대학교출판부, ISBN 89-7141-355-7)등이 있다.
  4. 한국의 생활사와 관련한 문헌으로는 《한국 근대 민중 생활사 읽기》(김주관, 하우, ISBN 89-7699-300-4)등이 있다. 생활사와 관련한 화보를 자세히 수록한 책으로는 《한국생활사박물관》(사계절, ISBN 7051769000091)이 있다.
  5. 조선 이후 한국 역사의 정치사 연구 문헌으로는 한국학중앙연구회의 《한국정치사상사 문헌자료》(ISBN 89-303-1160-1 , ISBN 89-7105-568-5 , ISBN 89-7105-609-6)가 있다.
  6. 박용만 외, 한국의 제4기 환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ISBN 89-521-0294-0, 446쪽
    한국의 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은 전곡리 유전, 단양 도담리 금굴, 파주 주월리·가월리 유적, 연천 원당리 유적, 상원 검은모루 유적 등이다.
  7. “中 요서지역 홍산문화는 고조선문화권”
  8. 설사변비 살해
  9. 강요된 합병
  10. 송호정, 한국인의 조상은 누구인가, 역사비평 1999년 봄호, 역사비평사, ISBN AA-B1-99903-0, 207쪽
  11. 박용만 외, 한국의 제4기 환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ISBN 89-521-0294-0, 447-448쪽
  12. 중석기 시대 - 소로리 볍씨 사이버 박물관
  13. 최복규, 「홍천 하화계리 Ⅲ 작은 솔밭 구·중석기 유적 조사연구」, 2002
  14. 최몽룡, 「선사문화의 전개」, 《고등학교 국사》 상, 교육부, 2002
  15. 박용만 외, 한국의 제4기 환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ISBN 89-521-0294-0, 539쪽
  16. 국립진주박물관, 신석기 시대 유적
  17. 최광식, 고대국가 형성에 대한 연구사 검토, 역사비평 1990년 봄호, ISBN AAB1990030
  18. 한국사,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ISBN 90-70-00546-0
  19.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ISBN 89-7096-115-1
  20.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89-8341-057-4, 75-77쪽
  21. 내일을 여는 역사, 서해문집, 2002년, ISBN 89-7483-159-7, 156쪽
  22.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89-8341-057-4, 78-79쪽
  23.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ISBN 89-7096-115-1, 41-43쪽
  24.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ISBN 89-7096-115-1, 43-45쪽
  25. 최근에는 기원전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철기가 발굴되었다. 기원전 7세기 철기 유물 강원도 홍천에서 출토 - 동아일보 참조
  26. 전상훈,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연세대학교출판부, 1998, ISBN 89-7141-429-4, 19-20쪽
  27. 강만길,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역사비평사, 2000, ISBN 89-7696-247-8, 74-75쪽
    강만길은 일본인 2세가 페루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페루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에 편입되지 않듯이 위만이 연나라 출신이라하여 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28. 백유선 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두리미디어, 2003, ISBN 89-7715-137-6, 64-65쪽
  29.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ISBN 89-8341-057-4, 85-94쪽
  30.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ISBN 89-7096-115-1, 62쪽-67쪽
  31. 김태식, 〈4~5세기 국제정세와 가야연맹의 변동〉, 《4~5세기 동아세아 사회와 가야》, 김해시, 2001년.; 홍익대 김태식 교수의 주장; 김태식, 〈사국시대론〉, 《한국고대사연구》 46, 한국고대사학회, 2007년 6월, 101~150쪽.
  32. 박찬흥, 〈삼국간에 말이 통했을까?〉,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ISBN 89-7278-328-5
  33.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가 아닌 (晉)의 진수가 쓴 《삼국지》이다.
  34.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70쪽(〈중세의 정치〉), 146쪽(〈중세의 경제〉), 198쪽(〈중세의 사회〉), 264쪽(〈중세의 문화〉) 등에서 한결같이 고려를 중세로 지칭하고 있다.
  35.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86~7쪽.
  36. 국립국어원
  37. 이이화,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225페이지
  38.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27쪽.
  39.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5쪽.

참고 문헌 및 바깥 고리[편집]

역사 일반[편집]

  • 《한국사 - 1.총설》, 국사편찬위원회, 2002
  • 국사 편찬 위원회 : 한국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 정리, 편찬하는 국가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연구 기관. 소장 자료, 논문, 저서 검색, 한국사 관련 안내
  • 국사 전자 교과서 : 현직 교사들이 연구.감수하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지원하였다. 2007년 개정된 국사교과서의 내용이 아직 반영되지 않았다.
  • 한국 역사 정보 시스템 : 한국사 연표, 한국사 기초 사전 및 신문 자료, 문헌 자료, 문집 등을 제공
  • 한국학 중앙 연구원 : 한국 문화 및 한국학 여러 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연구 기관. 디지털 한국학 개발, 정보 광장, 전자 도서관, 전통 문화 등 수록
  • 역사 문제 연구소 : 순수 민간 연구 단체, 근현대사 자료실, 간행물 자료, 한국사 학습 자료 등 수록
  •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단, 기타, 정부 기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