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한국의 역사 (연표) | |||||||
| 선사 (유적)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
환인 환웅 (신시) |
||||||
| 시 대 ‥ 고 대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 후 삼 |
고조선 - 단군 | ||||||
| 진국 | |||||||
| 삼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
| 진 한 |
변 한 |
마 한 |
|||||
| 가 야 |
백 제 |
||||||
| 고 구 려 |
|||||||
| 신 라 |
|||||||
| 발 해 |
|||||||
| 후 백 제 |
태 봉 |
||||||
| 고려 |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원의 간섭기 / 삼별초의 난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
| 조선 |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 대한제국 |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
| 군정기 |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
| 건국 년도 | 698년 |
| 정치체제 | 봉건주의, 군주제 |
| 해체 년도 | 926년 3월 |
| 인구구성 | 고구려인, 말갈족 |
| 국교 | 불교, 유교 |
| 수도 | 상경 용천부 |
| 행정구역 | 5경 16부 |
| 수출 | 말, 모피, 철 |
| 수입 | 금, 은, 귀걸이 |
| 무역상대국 | 당나라, 일본 |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쳐서 229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중상(또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1월에 기마대를 이끌고 침략한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목차 |
[편집] 역사
- 이 부분의 본문은 발해의 역사입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후에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나라를 세우고 정복전쟁을 하였다. 고왕(대조영)의 아들인 대무예(무왕)가 나라를 다스렸을때에는 연해주와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고있었고 무왕 말기에는 요동을 당나라로 부터 다시 점령하였다. 발해의 전성기 선왕때에는 당나라와 교역을 많이했고(고왕,무왕때에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교역을 하지않고 적대관계에 있었다.) 일본, 동남아시아의 나라와도 교역을 하였다. 물론 신라와도 무역을 하였지만 당나라만큼 크게 무역을 하진않았다. 10세기 초엔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던 거란이 다시 요서지방에서 건국되었다. 거란은 송나라(당나라가 멸망한뒤의 나라)를 위협했고 만리장성 이북지역을 점령하였다. 거란은 눈을 동쪽으로 돌려 발해를 공격하였다. 마침내 발해는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발해의 태자는 발해의 유민들을 데리고 고려의 왕건(태조)으로 와 고려에서 살게된다. 이로서 고구려의 문화는 고려에 까지 미치게 된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요라고 고친다.
[편집] 건국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은 평양에 설치된 당나라의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나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집단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나라를 건국하였다.
건국할 당시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대신국(大辰國), 또는 대진국(大震國)이라 칭하였으나 이후 발해로 바꾸었다. 사료에 따르면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의 국왕에 책봉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이 책봉 이후로 진국이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고 하며, 북조선 학계에서는 진국이 스스로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는데 당나라가 이를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환단고기》에서는 대진국이라고만 기록돼 있고 발해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교수는 발해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발해인 스스로가 부른 국호는 대진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자처한 바 있으나 그 밖의 나라들과의 외교 관계에서는 고구려와의 계승 관계를 주장한 일이 없다.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발해인이 남긴 역사적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의 사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발해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 일연의 《삼국유사》, 유득공의 《발해고》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막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의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걸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편집] 발전 과정
고왕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당나라는 발해 북쪽의 흑수부 말갈을 끌어들이고 이에 대응해 나갔으며, 신라도 북방 국경에 성을 쌓아 경계를 강화하고 발해와의 대결에 대비하였다.
이에 발해는 흑수부 말갈을 먼저 친 다음 당나라를 직접 공격하였다. 발해는 거란족과 손을 잡고 당나라를 공격하였으며, 발해의 장군 장문휴가 이끈 수군은 당나라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여 순식간에 점령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나라군과 격돌함으로써 당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후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구성하여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발해의 성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무왕의 뒤를 이어 문왕 때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고민 또한 커지고 있었다. 우선 넓디넓은 면적에 비해 발해의 자연 환경은 너무 거칠었다. 모진 추위와 눈으로 덮히거나 얼어붙은 땅은 농사를 어렵게 하였고, 사냥이나 가축을 기르기가 발해의 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발해의 두 번째 고민은 여러 종족을 잘 통합하여 국력이 하나로 일치된 나라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만주 지역에는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훗날 여진족, 혹은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고구려인이 된 세력이 있었던 반면, 이 때 새롭게 정복된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
756년, 오랜 고민 끝에 문왕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들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상경에 자리잡은 뒤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음으로써 거친 자연 조건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9세기 전반의 선왕 때부터 발해는 다시 중흥되었다. 발해의 국력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지방 제도를 완비하였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15개의 부로 나누고 부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다.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편집] 멸망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자 발해는 다시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외부에서는 부족을 통일한 거란족이 동쪽으로 점차 세력을 확대해 오고 있어 발해의 국력은 크게 쇠퇴해졌다. 결국 23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오던 발해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아 926년에 멸망하였다.(일부 학자들은 발해가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황폐화가 되어 거란족에 의해 쉽게 멸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후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마저 실패함으로써 그동안 한민족의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편집] 정치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성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교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1]
[편집] 사회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고구려계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발해인들이며 다수를 차지한 것은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 이들은 피지배층이 되어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 사람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해는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하층 촌락민들은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사용 언어는 발해어였다.
[편집] 경제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콩·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명주·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숭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철의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고, 구리의 제련술도 뛰어나 좋은 품질의 구리를 생산하였다.
한편,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품매매에는 현물 화폐를 주로 썼으나 다른 나라의 화폐도 함께 사용하였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 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당나라와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나라는 산둥 반도와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2]
1930년대 상경 용천부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 금속화폐 ‘발해통보’(渤海通寶) 5점이 한국의 어느 교수가 감정한 결과 발해의 금속화폐로 판정되었다. 이 금속화폐에는 ‘발해통보’와 ‘천통팔년’(天統捌年)이라는 글자가 확실히 새겨져 있다. 이 화폐가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중국의 동북공정을 뒤집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3]
[편집] 군사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4]
[편집] 외교 관계
[편집] 일본과의 관계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후일에는 문화적 교류와 상업적 목적이 더 강했다.
[편집] 연표
| 연도 | 성명 | 연호 | 설명 |
| 668 | 고구려 멸망. 걸걸중상, 식구를 이끌고 영주로 옮김. | ||
| 698 | 대조영 | 천통원년 | 인구 10여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대진 건국. 고왕 즉위, 연호 천통. |
| 713 | 천통16년 | 국호를 발해로 고침. | |
| 719 | 대무예 | 천통21년 | 고왕 사망. 무왕 즉위, 연호 인안. |
| 732 | 인안14년 |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 |
| 733 | 인안15년 |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 |
| 737 | 대흠무 | 인안19년 | 무왕 사망. 문왕 즉위, 연호 대흥. |
| 756 | 대흥20년 | 상경으로 수도를 옮김. | |
| 793 | 대흥57년 | 문왕 사망. 동생 원의가 즉위했으나 1년 후 사망. | |
| 794 | 대화여 | 성왕 즉위, 연호 중흥. | |
| 794 | 대숭린 | 중흥원년 | 강왕 즉위, 연호 정력. |
| 809 | 대원유 | 정력16년 | 강왕 사망. 정왕 즉위, 연호 영덕. |
| 812 | 대언의 | 영덕4년 | 정왕 사망. 희왕 즉위, 연호 주작. |
| 817 | 대명충 | 주작6년 | 희왕 사망. 간왕 즉위, 연호 태시. |
| 818 | 대인수 | 태시2년 | 간왕 사망.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침공, 북쪽 부락을 공략. |
| 830 | 대이진 | 건흥13년 | 선왕 사망.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
| 857 | 대건황 | 함화26년 | 대이진 사망. 대건황 즉위. |
| 871 | 대현석 | 15년 | 대건황 사망. 경왕 즉위. |
| 894 | 대위해 | 24년 | 경왕 사망. 대위해 즉위. |
| 906 | 대인선 | 13년 | 대위해 사망. 애왕 즉위. |
| 906 | 7년 |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 |
| 924 | 19년 | 요나라 공격,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 |
| 925 | 20년 |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요나라가 발해에 침입. | |
| 926 | 21년 | 부여부 요나라에 함락. 이듬해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요나라 태자가 통치. |
[편집] 발해의 역대 국왕과 연호
- 고왕 대조영, 재위 698년-719년 - 천통(天統)
- 무왕 대무예, 재위 719년-737년 - 인안(仁安)
- 문왕 대흠무, 재위 737년-793년 - 대흥(大興), 보력(宝暦)
- 폐왕 대원의, 재위 793년-794년
- 성왕 대화여, 재위 794년-794년 - 중흥(中興)
- 강왕 대숭린, 재위 794년-808년 - 정력(正暦)
- 정왕 대원유, 재위 808년-812년 - 영덕(永徳)
- 희왕 대언의, 재위 812년-817년 - 주작(朱雀)
- 간왕 대명충, 재위 817년-818년 - 태시(太始)
- 선왕 대인수, 재위 818년-830년 - 건흥(建興)
- 대이진, 재위 830년-857년 - 함화(咸和),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대건황, 재위 857년-871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경왕 대현석, 재위 871년-895년
- 대위해, 재위 895년-906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애왕 대인선, 재위 906년경-926년
《환단고기》의 〈대진국본기〉에는 이와는 약간 다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학자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위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편집] 발해의 역사서
유득공의 발해고에 의하면, 18세기의 규장각에서도 발해의 정식 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들 중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으나 발해 때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들이 있다.
- 《규원사화》의 토대가 된 《진역유기(震域遺記)》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할 때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대기》를 근거로 쓰여졌다고 한다.
- 《단기고사》는 그 서문에서 고황제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편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단기고사는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내용의 상당 부분이 위작으로 여겨진다.
[편집] 발해 멸망 후의 국가
발해 멸망 후에 발해의 터와 유민들에 의해 여러 나라가 재건되었다가 멸망되었다. 그 중 다음과 같은 나라들이 알려져 있다.
[편집] 주석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64쪽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44쪽
- ↑ 「발해 화폐로 추정되는 금화 첫 공개」, 〈세계일보〉, 2006.10.3.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64쪽
[편집] 참고문헌
[편집] 바깥고리
- 「해동성국 발해, 그 자취를 찾아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주)오픈에스이
- 박현배의 발해사
- 발해의 성립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