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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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渤海

698년 ~ 926년
 

 

 

History of Korea-Inter-country Age-830 CE.gif
기원후 830년경. 보라색이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
정치
공용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말갈어
정부 형태 군주제
가독부
698년 ~ 719년
820년 ~ 830년
906년 ~ 926년

고왕(초대)
선왕 (10대)
대인선(말대)
현재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러시아

발해(渤海, 존속 기간: 698년 ~ 926년)는 대조영당나라신라 연합군에게 망한 고구려를 계승하여 건국한 나라를 말하며, 이후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기병 부대를 이끌고 침략한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발해의 멸망이 상고의 백두산 폭발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일고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를 계승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걸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건국할 당시 대조영은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진국(震國)으로 정하고, 그 후에 713년 당에게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명목상 책봉된 후로는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또한 고려라는 국호도 사용 하였는데,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고, 일본도 발해를 고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발해는 처음에 국호를 진국이라 정하고 명목상 발해군왕으로 재수 되고나서는 발해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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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편집]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1] 기슭에 발해(渤海)를 세우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때부터 발해를 자주국가로 인정하였다.

발전 과정[편집]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 하였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말갈족들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당나라는 발해 북쪽의 흑수부 말갈(흑수말갈)이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등주(登州)[2]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하는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후 당나라가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면서까지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발해의 성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 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그 무렵 발해의 고민 또한 커지고 있었다. 우선 면적에 비해 발해의 자연 환경은 너무 거칠었다. 모진 추위와 함께 눈으로 덮히거나 얼어붙은 땅은 농사를 어렵게 하였고, 사냥과 가축을 기르기가 발해의 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발해의 두 번째 고민은 여러 종족을 잘 통합하여 국력이 하나로 일치된 나라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만주 지역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구성원 중 하나인 훗날 여진족 혹은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족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고구려인이 된 세력이 있었던 반면, 이때 새롭게 정복된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

오랜 고민 끝에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선 756년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상경에 자리잡은 뒤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그밖에 3성(三省)[3]과 6부(六部)[4]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음으로써 거친 자연 조건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5]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력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일시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간왕의 종부(從夫)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발해를 중흥시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으며,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을 기습적으로 점거 하고,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잠시 동안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지방에는 부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고,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무렵, 발해는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와 사방 5천리의 영토를 다스렸다. 그 영토는 동북으로는 흑룡강,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압록강, 남으로는 원산만까지 진출 하였다.

멸망[편집]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916년 거란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년 - 926년, 재위 : 907년 - 926년)는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 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 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925년 음력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년 3월 1일(음력 1월 15일)에 멸망하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요나라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아울러 한민족은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연표[편집]

연도 성명 연호 설명
668 고구려 멸망. 걸걸중상(乞乞仲象, ? ~ 698년), 대조영 부자 영주로 강제 이주 됨.
698 대조영 인구 10여 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발해 건국. 고왕 즉위.
719 대무예 고왕 붕어. 무왕 즉위, 연호 인안.
732 인안 14년 장문휴를 보내어 수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733 인안 15년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737 대흠무 인안 19년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756 대흥 20년 상경으로 천도(遷都).
793 대흥 57년 문왕 붕어. 동생 대원의가 즉위했으나 수 개월 후 사망.
" 대화여 성왕 즉위, 연호 중흥.
794 대숭린 중흥2년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809 대원유 정력16년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812 대언의 영덕4년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817 대명충 주작6년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818 대인수 태시2년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830 대인수 건흥13년 선왕 붕어.
831 대이진 건흥14년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857 대건황 함화27년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871 대현석 ?15년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894 대위해 ?24년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906 대인선 ?13년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906 ?7년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924 ?19년 발해의 거란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925 ?20년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926 ?21년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태자가 지배.

정치[편집]

발해는 황제국을 지향하였다.[6]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三省)[3]과 6부(六部)[4]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3성 6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등의 기구를 두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고구려의 전통을 살려서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교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 국도(國都)인 상경(上京)과 중경(中京)[7]·동경(東京)·남경(南京)[8]·서경(西京)을 가리킨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과 그 규모를 같이하여 외성(外城)[9]·내성(內城)[10]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11] 최근 러시아연해주에선 발해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발굴되면서 연해주가 발해에 속해있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12]

고구려 계승의식[편집]

발해의 영토는 대부분 고구려땅이었고,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만에 건국되었다. 발해의 귀족 및 지배계층은 대다수 고구려 유민 이었다. 그리고 발해는 스스로 일본에 보낸 국서 등에서도 ‘고구려국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2대 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를 통하여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라고 주장하며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3대 문왕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 자칭하였다.

사회 및 주민구성[편집]

발해는 구성원으로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있었으며, 이들 말갈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며, 발해 건국 후 이들은 피지배층이 되어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를 마치 말갈의 왕조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중국과 러시아학계의 견해라 하겠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왕조였다.

말갈이 발해 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였으나, 최근에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땅에 남아있던 대다수의 고구려인들이 모두 당나라로 끌려간 것은 아니며,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불과 30년만에 건국 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 그 주민 69만호(350만명)이 다 없어지고 하루아침에 주민 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며, 구당서, 신당서에 기록된 고구려와 수, 당 전쟁 기록에 고구려 인구 69만호(350만명) 중에서 수나라, 당나라와 70년 전쟁 동안 피살된 주민 12만명, 포로 8만5,000명, 강제이주 42만명(멸망 후 사민 된 2만8천호를 포함하여 전쟁 중 요동 등에서 사민된 인원 포함) 총 62만5,000명에 신라로 편입된 고구려 영토 및 신라로 귀순한 인구 또는 돌궐, 왜 등지로 흩어진 인구 약 10만명을 제외 하면 약 260만명이 고구려 본토에 남게 되며, 여기서 영토가 아닌 완충지대로 남은 요동지방과 평안도 서부 지방을 제외하고 대략 최소 150만에서 최대 200만의 인구가 남게 되는데, 이처럼 발해 주민 구성에서 대다수가 말갈인이 아니라 고구려인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정설 이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 사람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해는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하층 촌락민들은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사용 언어는 발해어로 총칭한다.

경제[편집]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콩·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명주·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철의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고, 구리의 제련술도 뛰어나 좋은 품질의 구리를 생산하였다. 세금으로는 조세, 공물, 부역 등이 있었다.

한편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품매매에는 현물 화폐를 주로 썼으나 다른 나라의 화폐도 함께 사용하였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당나라와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나라는 산둥 반도와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13]

교육[편집]

3대 문왕 때 학문 연구 기관인 주자감을 세웠으며, 관리들이 학습시킬 수 있게 서적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문화[편집]

발해 유적지에 나온 용머리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또한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14]

발해의 지상 건물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를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떠 설계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15]

발해에서 발견되는 절터나 불상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조각상도 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16]

또한 자기 공예가 발달하여 가볍고 광택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당나라 사람이 자주 구해갔다고 한다.[16]

군사[편집]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17]

외교[편집]

대신라 관계[편집]

처음에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소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적대적일 때도 있었다. 고왕 대조영은 초기에 신라에 사절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을 것을 희망하였고, 신라는 이에 고왕에게 대아찬직을 수여하여 화답하였다.

신라 성덕왕(聖德王)이 721년에 국경지대에 설치한 북경장성(北境長城)은 발해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다.

732년 등주를 공격당한 당나라는 발해에 대한 보복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전쟁에 신라를 개입시키고자 하였다. 신라는 이에 응했으나, 폭설을 이유로 군대를 철군시켰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신라는 당나라와 관계가 회복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발해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그러나 문왕대에 이르러, 발해는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 당나라 못지 않은 문화 선진국이었던 신라와의 교류가 절실했고, 신라도 사이가 안좋았던 일본과의 외교전에서 발해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양국은 신라도와 북해통이라는 두 국제도로를 이용해 사신을 교환하며 외교, 통상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18]

대당 관계[편집]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처음에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피할 수 없는 과제라 여긴 발해는 결국 713년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 때부터 당나라와 무역과 외교관계가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732년 당의 말갈 편입 시도에 대해 발해가 등주 공격으로 대응하여 서로 외교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문왕대에 이르러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양국간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발해에서는 문방구를 비롯한 여러가지 당나라의 물품들을 수입하고, 당에서는 모피와 가죽, 그리고 여러가지 산림자원을 수입했다. 이렇게 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19]

일본 관계[편집]

727년 발해가 맨 먼저 일본에 개국을 알리기 위한 사신이 도착하는 것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후일에는 문화적 교류와 상업적 목적이 더 강했다.

남북국 초기에 일본과 신라는 731년에 전쟁까지 벌어질 만큼 험악했다. 일본의 실권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는 신라 정토 계획이라는 침략 계획을 꾸미면시 배후에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를 위해 758년부터 연이어 발해에 견발해사를 파견했지만 발해는 이미 이시기에 신라와 우호관계를 맻기 시작한 터라 이에 미온적이 되어 결국 일본의 신라 침략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에 적대국인 신라와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발해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발해는 자신들의 배로 일본의 견당사를 호송하는 사신을 수차 파견했다.

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20]

역대 국왕과 연호[편집]

걸걸중상
乞乞仲象
1
고왕 대조영
高王 大祚榮
698-719
대야발
大野勃
2
무왕 대무예
武王 大武藝
719-737
?
대원기
大元璣
3
문왕 대흠무
文王 大欽茂
737-793
4
대원의
大元義
793
대광덕
大匡德
대굉림
大宏臨
6
강왕 대숭린
康王 大嵩璘
794-809
10
선왕 대인수
宣王 大仁秀
818-830
5
성왕 대화여
成王 大華璵
793-794
7
정왕 대원유
定王 大元瑜
809-812
8
희왕 대언의
僖王 大言義
812-817
9
간왕 대명충
簡王 大明忠
817-818
대신덕
大新德
11
대이진
大彝震
830-857
12
대건황
大虔晃
857-871
?
15?
대인선
大諲譔
906?-926
14?
대위해
大瑋瑎
894?-906?
13
대현석
大玄錫
871-894?
  • 대현석까지의 가계는 확실하나 그 이후 왕들의 가계는 불분명하다.
  • 대현석 사후 멸망까지 기록되지 않았거나, 혹은 기록의 분실로 인해 알려지지 않은 왕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수 시호 이름 연호 재위기간
- 걸걸중상(乞乞仲象) -
1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천통(天統) 698년 ~ 719년
2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인안(仁安) 719년 ~ 737년
3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대흥(大興) 737년 ~ 793년
4 대원의(大元義) 793년
5 성왕(成王) 대화여(大華璵) 중흥(中興) 793년 ~ 794년
6 강왕(康王) 대숭린(大崇隣) 정력(正歷) 794년 ~ 809년
7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 영덕(永德) 809년 ~ 812년
8 희왕(僖王) 대언의(大言義) 주작(朱雀) 812년 ~ 817년
9 간왕(簡王) 대명충(大明忠) 태시(太始) 817년 ~ 818년
10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건흥(建興) 818년 ~ 830년
11 대이진(大彝震) 함화(咸和) 831년 ~ 857년
12 대건황(大虔晃) 857년 ~ 871년
13 대현석(大玄錫) 872년 ~ 894년?
14? 대위해(大瑋瑎) 894년? ~ 906년?
15? 대인선(大諲譔) 906년? ~ 926년
  • 13대왕 대현석을 경왕, 마지막왕 대인선을 애왕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과거 일본인이 신라의 경애왕과 혼동하여 잘못 만들어낸 오류이다.[21]
  • 발해에는 현재까지 모두 15명의 국왕이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13대왕 대현석과 14대왕으로 추정되는 대위해 사이 그리고 대위해와 마지막왕 대인선 사이에 단명한 왕들이 더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22]

발해와 역사 인식[편집]

발해인이 남긴 역사적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의 사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발해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 일연의 《삼국유사》, 유득공의 《발해고》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발해와 역사서[편집]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에 의하면, 18세기의 규장각에서도 발해의 정식 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 중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으나 발해 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들이 있다.

  • 규원사화》의 토대가 된 《진역유기(震域遺記)》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할 때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대기》를 근거로 쓰였다고 한다.
  • 단기고사》는 그 서문에서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편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

발해와 역사 인식[편집]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 발해 말갈전과 《신당서》 발해전에 전하는데, 조선 전기에는 말갈의 무리로 인식하는 경향이 컸으나, 조선 후기부터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식했다.[출처 필요]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와 신라가 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하였다.

발해 이후의 국가[편집]

발해가 멸망한 후에 발해의 터에 유민이 여러 나라를 재건하였으나 곧 멸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괴뢰 국가도 존재했다. 이들 중 다음과 같은 나라가 알려져 있다.

발해 멸망에 관련된 사료는 매우 적다. 멸망 전 후의 발해인에 관련된 사료는 요사나 고려사가 있는데, 이들 사료에서 발해인들에 대한 기록은 대체적으로 멸망 전에 벌어졌던 정권 다툼에 패한 왕족이나 귀족들이 고려로 망명해 오거나, 거란에 의한 멸망으로 대광현 등의 왕족이나 귀족이 거란에 저항하였으나, 실패하여 몇 만호 단위의 발해인들이 고려에 망명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 1116년까지 발해의 터에 유민이 여러 나라를 재건하였으나 곧 멸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괴뢰 국가도 존재했다. 이들 중 다음과 같은 나라가 알려져 있다.

주석[편집]

  1. 육정산(六頂山)
  2. 산동성 봉래
  3. 정당성·중대성·선조성(正堂省·中臺省·宣詔省)
  4. 충·인·의·예·지·신부(忠·仁·義·禮·智·信部)
  5. 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
  6. ‘발해는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증거유물 나와
  7. 길림성 화전현성(樺甸縣城)
  8. 함경남도 북청
  9. 나성
  10. 황성
  11.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64쪽.
  12. 연해주 중북부지역 ‘발해의 땅’ 증거나와
  13.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44쪽
  14.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252~253쪽.
  15.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254~255쪽.
  16.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256~257쪽.
  17.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64쪽
  18. 허홍범 (2006). 《군함 이야기》. 좋은책만들기, 82쪽. ISBN 8989222931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19. 허홍범 (2006). 《군함 이야기》. 좋은책만들기, 82쪽. ISBN 8989222931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20. 허홍범 (2006). 《군함 이야기》. 좋은책만들기, 82쪽. ISBN 8989222931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21. 김육불, 《김육불의 동북통사, 하》,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09, 2007, 577~578쪽.
  22. 송기호, 《발해를 다시본다, 개정증보판》, 주류성출판사, 2008, 64~65쪽.

참고 자료[편집]

  1. 일연, 《삼국유사
  2. 유득공, 《발해고》, 1784.
  3. 진위푸, 《발해국지장편》
  4. 《발해사연구》, 연변대학출판사.
  5. 조이옥 영산대 교수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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