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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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蘇定方, 592년 ~ 667년)은 당나라의 장군이다. 소열(蘇烈)이 본명이며, 정방(定方)은 이다. 기주(冀州) 무읍(武邑) 사람이다. 보통 본명보다는 소정방으로 불린다.

생애[편집]

수말당초와 긴 무명기[편집]

어린 시절부터 날래고 사나우며 과감하고 담력이 절륜하여 10여 살부터 아버지 소옹(蘇邕)을 따라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마을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그 무리를 대신 이끌어서 도적 장금칭(張金稱)과 양공경(楊公卿)을 격파하니 마을 사람들은 소정방을 의지하였다. 후에 두건덕(竇建德)을 섬겼고 그의 부하 장수 고아현(高雅賢)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었다. 두건덕 사후 유흑달(劉黑闥) 밑에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유흑달과 고아현이 모두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630년 광도부 절충(匡道府折衝)이 되어 이정(李靖)의 지휘 하에 적구(磧口)에서 돌궐 힐리가한(頡利可汗)과 싸웠다. 소정방은 200명의 기병과 함께 선봉에 서서 안개 속에서 이동하였다. 돌궐군과 1리 정도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돌연 안개가 걷혀 본진이 보이길래 냅다 쳐서 약 100명을 죽였다. 힐리가한과 그 부인이자 수나라의 공주였던 의성(義成)공주와 병사들은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자들은 모두 항복했다. 이 공으로 좌무후중랑장(左武候中郎將)이 되었고, 655년 전까지는 좌위(左衞)중랑장이었다.

노년에 온 기회[편집]

655년 정명진(程名振)과 함께 적은 병사로 요수(遼水)를 넘어 고구려를 습격했다. 고구려군이 얕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와 역공하기에 분전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그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1] 그래서 우둔위장군(右屯衞將軍)에 오르고 임청현공(臨清縣公)에 봉해졌다.

656년[2] 총산도대총관(葱山道大總管) 좌위대장군(左衞大將軍) 정지절(程知節)의 서돌궐 정벌에도 선봉으로 종군했다. 서돌궐의 가한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사발라가한)는 20,000명의 기병을 응사천(鷹娑川)으로 보내 막으며 소해정(蘇海政)과 공방을 벌였다. 여기에 돌궐의 별부(別部)인 서니시(鼠尼施) 등의 2만여 기병이 추가로 더 도착했다. 소정방은 작은 고개를 사이에 두고 잠시 쉬다가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500명의 기병으로 돌격하니 서돌궐군이 크게 무너졌다. 20리를 추격하여 1,500여 명을 죽이고, 2,000필을 노획했으며, 죽은 말과 버려진 병장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부대총관(副大總管) 왕문도(王文度)가 그 공을 시기하여 정지절에게 건의하기를 “비록 이번에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관군 역시 사상자가 많으니, 지금부터 방진(方陣)을 짜서 치중대(輜重隊)는 중앙에 배치하고 갑옷을 갖춰 입은 채 수비하고 있어야 적이 와도 바로 응할 수 있어 스스로 만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황제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정지절이 자신의 용맹을 믿고 경솔하니 왕문도로 하여금 절제를 시켰다고 속였다. 정지절이 이에 넘어가서 더 깊이 행군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일토록 말을 타고 임전태세로 대기하니 말들은 말라 죽고 병사들은 피폐해졌다. 소정방은 오히려 패하게 생겼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당장 왕문도를 가두라고 항의하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한편 달독성(怛篤城)이 항복했다. 왕문도는 그들이 잠시 당군을 피하려는 것일 뿐 돌아가면 다시 적이 될 것이라며 모두 죽이고 재물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소정방은 스스로 적을 만드는 행위이니 어떻게 정벌에 성공할 수 있겠냐며 반대했다. 그러나 역시 무시되었다. 약탈한 재물을 분배할 때 소정방만이 유일하게 한푼도 취하지 않았다. 이후 수도로 귀환하자 왕문도는 죽을 죄가 당연했지만 제명으로 그쳤다.

서돌궐 정벌[편집]

657년 다시 서돌궐을 정벌하는데 이려도행군(伊麗道行軍)대총관으로 발탁되었다. 당나라회흘(迴紇)의 혼성부대를 조직하여 임아상(任雅相)과 회흘의 파윤(婆潤)을 부총관으로 삼았다. 당나라와 협력하던 돌궐 출신의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와 아사나보진(阿史那步眞)도 유사도안무대사(流沙道安撫大使)가 되어 남쪽에서 별도로 따라갔다.[3] 먼저 금산(金山) 북쪽의 처목곤(處木昆) 부락을 쳐부수니 그 사근(俟斤) 난독록(嬾獨祿)이 만여 장(帳)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소정방은 이들을 위무하고 그중 1,000명의 기병을 더한 후 돌기시부(突騎施部)로 나아갔다. 이에 아사나하로는 예질하(曳咥河)에서 10성 부락(十姓部落)의 병마를 동원하여 100,000명으로 맞섰는데, 소정방군이 10,000여 명밖에 없음을 보고는 가벼이 여기며 포위했다. 소정방은 장창보병으로 언덕에서[4] 밀집대형을 갖추게 하고 자신은 친히 기병을 이끌고 그 북쪽에 대기했다. 서돌궐군이 3번 들이닥쳤으나 대오를 흩트리지 못했고 승세를 탄 소정방이 기병으로 역습하니 크게 무너져 패퇴하고 말았다. 30리를 추격하여 죽인 사람과 이 수만이었다.

다음날 부대를 정비하고 다시 진격하자 호록옥(胡祿屋) 등과 5노실필(弩失畢)이 모두 항복했고, 나머지 5돌륙(咄陸)의 부락들마저 이 소식을 듣고는 남쪽의 아사나보진에게 투항하였다. 이로써 서쪽 번(蕃)이 모두 평정되고 오직 아사나하로와 그 아들 아사나질운(阿史那咥運)만이 본진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주했다. 소정방도 계속 따라가려 했는데 많은 이 내리는 바람에 장수들이 잠시 쉬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아사나하로도 눈을 믿고 당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 여길테니 지금 쉬면 잡지 못할 것이라 하고 오히려 행군을 더 재촉했다. 쌍하(雙河)에 이르러 아사나미사, 아사나보진과 합군하고 금아산(金牙山)으로 접근했다. 아사나하로가 방심하고 사냥하려 할 때에 병사를 한꺼번에 풀어 공격하니 크게 깨트리고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아나사하로 부자는 이려수(伊麗水)를 넘어 석국(石國)의 소돌성(蘇咄城)까지 내달렀지만 그 성주 이열달간(伊涅達干)의 협조로[5] 소정방의 부장(副將) 소사업(蕭嗣業)과 아사나미사의 아들 아사나원상(阿史那元爽)에게 마침내 사로잡혔다. 전후 소정방은 역과 초소를 설치하고 길을 닦고 주민들의 생업을 도와 어려움과 괴로움을 달래고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오니 이민족들이 안도하였다. 고종은 그곳에 주현(州縣)을 설치하여 안서도호부에 예속시키고, 매우 큰 공을 세운 소정방을 좌효위(左驍衞)대장군에 임명하고 형국공(邢國公)에 봉했으며, 그 아들 소경절(蘇慶節) 또한 무읍현공(武邑縣公)으로 봉했다.

사결(思結) 정벌[편집]

659년 사결(思結)의 궐사근(闕俟斤) 도만(都曼)이 여러 (胡)를 진정시키고 소륵(疏勒), 주구파(朱俱波, 朱俱般 등), 갈반타(喝槃陀, 喝盤陀 등)[6]의 세 나라와 함께 당에 반기를 들었다. 소정방이 안무대사가 되어 토벌을 명 받았다. 엽엽수(葉葉水)에 당도하자 사결은 마두천(馬頭川)을 지켰다. 이에 엄선한 보병 10,000명과 기병 3,000명으로 하루밤낮에 300리를 강행군하여 사결의 본거지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크게 놀란 도만이 급히 성문 밖에서 요격했으나 실패하고 마보성(馬保城)으로 퇴각했다. 이내 후속부대와 함께 성을 포위하자 도만이 가망이 없음을 알고 항복했다. 소정방은 도만을 살려줄 것을 청했고 고종은 이를 허락했다. 이로써 총령(葱嶺) 이서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 공으로 형주(邢州) 거록진읍(鉅鹿眞邑)의 500호[7]식읍으로 더하고 좌무위(左武衞)대장군에 올랐다.

백제 정벌[편집]

660년 3월(음력)에[8] 신구우이마한웅진(神丘嵎夷馬韓熊津) 등 14도대총관[9]을 제수받고 신라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토벌할 것을 명 받았다. 6월(음력) 13만 명의 병력으로 산둥 반도의 성산(成山)에서 황해를 건너 덕물도(德物島)에 닿았다. 신라의 태자 김법민(金法敏, 훗날 문무왕)과 작전을 수립하여 당나라는 해로를, 신라는 육로를 통해 양쪽에서 백제의 수도 사비로 곧장 들어가기로 하였다.[10] 웅진강구(熊津江口)에 이르자 백제군이 입구[11]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버드나무로 엮은 자리를 깔고[12] 동쪽 해안의 갯벌로 우회 상륙했다. 산에 진을 치고 서로 격렬하게 싸우니 돛이 바다를 뒤덮어 계속 이어졌다. 백제군이 패하여 수천 명이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 밀물이 차올라 배들은 노를 빠르게 저으며 잇따라 강으로 들어가고, 육군도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함께 진격하였다. 사비성이 20리 정도 남았을 때 그들이 나라를 기울여 전력으로 맞서 싸웠으나 물리치고 사로잡거나 죽인 이가 만여 명이었다. 곧바로 추격하여 외성까지 들어가니 의자왕(義慈王)과 태자 부여효(扶餘孝)[13]웅진으로 도주했고 소정방은 내성을 포위했다. 의자왕의 차남 부여태(扶餘泰)가 스스로 왕이 되자 부여문사(扶餘文思)는 아버지 부여융(扶餘隆)에게[14] 왕과 태자가 비록 성을 나갔어도 숙부가 멋대로 왕을 칭했으니 당군이 물러나면 우리 부자(父子)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그 측근과 함께 성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는데 부여태도 말릴 수 없었다. 소정방이 병사에게 명을 내려 성에 올라 당나라의 깃발을 꽂게 하니 마침내 부여태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예식(禰植)은 의자왕을 잡아왔고, 부여효와 다른 성주(城主)들도 모두 투항했다. 백제도 모두 평정하고 이들을 낙양으로 데려왔다.

최후[편집]

소정방이 멸망시킨 나라가 세 나라이고 그 왕을 모두 생포했으며 하사받은 진귀한 보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아들 소경절을 상련봉어(尚輦奉御)에 앉혔다. 661년에는 제2차 여당전쟁에 평양도(平壤道)행군대총관이 되어 6부대 중 1부대로 참전하였다.[15] 황해를 건너 곧장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나아갔다. 8월(음력) 패강(浿江) 하구의 위도(葦島)에서 고구려군을 파하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군영을 세우고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철륵(鐵勒)의 반란으로 2개 부대가 철수하면서 전황이 어려워지고 보급선도 끊겼다.[16] 이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패강이 얼은 덕분에 각종 공성병기로 사방에서 공격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7] 662년 2월(음력) 신라군의 협조로 4,000섬과 22,000섬을 보급받았으나[18] 다른 부대의 지휘관 임아상방효태(龐孝泰)가 사망하고[19] 많은 까지 내리면서 더이상 작전을 지속할 수 없어 철군했다. 663년 양주안집대사(涼州安集大使)를 받고 토욕혼(吐谷渾)을 도와 토번(吐蕃)과도 싸웠다. 667년에 죽으니 나이 76세였다. 고종이 슬퍼하면서 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추증하고 시호는 장(莊)이라 했다.

여담[편집]

  • 소정방이 신라 상주에서 독살됐다는 전설이 있다.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또 신라까지 치려고 했는데, 김유신(金庾信)이 그 음모를 간파하여 당나라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독주를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으며, 그 자리에 있는 다리가 당교(唐橋)라는 내용이다.[20]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등 중국한국의 어떤 사서에도 이 내용은 없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도 근거가 없다고 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이 전설은 나당동맹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소정방으로 대표되는 당나라에 대한 당시 신라인들의 적대감 표출과 김유신의 영웅화 차원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21]
  • 소정방은 한국에서 신격화되어 사당에 모셔지기도 했는데,[22] 이는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되고 백제에 대한 안정적 지배를 위한 정치적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23]
  • 부여군에는 소정방이 백제를 정복할 때 비바람을 멈추기 위하여 백마를 미끼로 을 낚았다는 조룡대(釣龍臺)가 있다. 그리고 그 강은 백마강이라 한다.[24]

가계[편집]

  •  : 소옹(蘇邕)
    • 본인 : 소정방(蘇定方)
      •  : 소경절(蘇慶節)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자치통감》199권 당기(唐紀) 제15 영휘6년
  2. 《구당서》와 《신당서》의 정지절 열전에서는 657년이라고 잘못 기록했다.
  3. 《신당서》215권下 열전 제140下 돌궐下
  4. 《구당서》소정방전, 《신당서》돌궐전은 步卒據原. 《신당서》소정방전은 步卒據高
  5. 《구당서》194권下 열전 제144下 돌궐下 아사나하로
  6. 《구당서》에는 갈반타가 아닌 총령(葱嶺)이라 되어있으나 《신당서》, 《자치통감》을 따른다.
  7. 《신당서》에는 300호
  8. 《신당서》3권 고종황제 이치 현경5년
  9. 〈대당평백제국비〉(大唐平百濟國碑) 《신당서》본기, 소정방전, 《자치통감》은 대표로 신구도라 하였고 《구당서》소정방전은 웅진도라 하였다.
  10. 《삼국사기》5권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
  11. 《삼국사기》에서는 정확히 기벌포(伎伐浦)
  12. 《삼국사기》42권 열전 제2 김유신中
  13.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대당평백제국비〉,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등 중국의 기록은 태자를 부여융이라 하지만 《삼국사기》를 따른다. 《삼국사기》28권 백제본기 제6 의자왕 20년, 44권 열전 제4 김인문
  14. 《삼국사기》28권 백제본기 제6 의자왕 20년
  15. 《신당서》3권 고종황제 이치 용삭원년
  16. 《자치통감》200권 당기 제16 고종 용삭원년
  17. 《일본서기》27권 제명천황 7년
  18. 《삼국사기》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
  19. 《자치통감》200권 당기 제16 고종 용삭2년
  20. 《삼국유사》1권 제1 기이 태종춘추공, 《신증동국여지승람》29권 경상도 함창현(咸昌縣)
  21. 이도학, 〈나당동맹의 성격과 소정방피살설〉, 《신라문화》vol.2,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5. 정재민, 〈소정방 이야기에 나타난 다층적 인식세계〉, 《한일군사문화연구》vol.10, 한일군사문화학회, 2010
  22. 《신증동국여지승람》20권 충청도 대흥현(大興縣), 《동국이상국집》38권 〈제소정방장군문〉
  23. 변동명, 〈성황신 소정방과 대흥〉, 《역사학연구》vol.30, 호남사학회, 2007
  24. 《삼국유사》2권 제2 기이 남부여, 《신증동국여지승람》18권 충청도 부여현(扶餘縣)

참고 문헌[편집]

  • 구당서》83권 열전 제33 소정방
  • 신당서》111권 열전 제36 소정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