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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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요 성씨(KNSO, 2000)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그 외

(崔)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최(崔)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169,704명으로 조사되어, 한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기원[편집]

최(崔)씨의 기원은 신라 계통과 고구려 계통 등 다양한 계통이 존재한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최(崔)씨는 1세기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최씨 낙랑’이 거론된다. 고구려 기록에 낙랑최리(崔理)가 옥저에서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好童)을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 계통의 최씨의 기원은 신라 6부족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계통으로 고구려 계통의 최(崔)씨가 있다. 최치원의 금석문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임을 밝히며, 고향은 금마(金馬, 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로 적고 있다.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해선 수나라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구려에 눌러 살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금마로 내려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

본관별 시조[편집]

최(崔)씨의 본관은 경주, 전주, 해주, 강릉, 탐진, 수성, 삭녕, 화순, 초계, 영천, 강화, 낭주, 충주, 수원, 동주(철원), 흥해, 통천, 영흥 등 문헌에 387본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시조와 계대가 확인된 본관은 43본이다.

한반도 토착 최씨[편집]

  •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시조는 신라 후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이다. 그는 신라 돌산고허촌의 촌장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이라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경주 최씨의 세거지와 분파는 한국 최씨 성본 가운데 가장 많다. 경주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2명을 배출하였다.[2] 2000년 인구는 976,820명이다.
  • 낭주 최씨(朗州 崔氏)의 시조 최흔(崔昕)은 낭주(전라남도 영암군)에 대대로 살아온 토착인이라고 한다. 그는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 신덕왕 때 원보상(元輔相)을 지냈다. 최흔 이후의 세대가 확실치 않아 고려 말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최희소(崔希沼)를 중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3]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14,264명이다.
  • 동주 최씨(철원 최씨)의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4] 역사 인물로는 고려 후기 장군 최영이 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11,699명이다.
  • 강릉 최씨(江陵 崔氏)는 서로 다른 세 계통이 있다. 최흔봉(崔欣奉)은 고려 개국 때 태조 왕건과 함께 수 많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삼한통합익찬개국공신이 되었고 태조의 딸과 혼인하여 태조의 부마(사위)가 되어 완원위에 봉해졌고 대경의 벼슬에 올랐다. 대경공 최흔봉 공의 후손들이 완산 최씨에서 이적하여 강릉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때 영첨의좌정승을 역임한 후 경흥군에 된후 경주 최씨에서 분적하여 강릉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2000년 기준 인구는 140,854명이다.
  • 전주 최씨(全州 崔氏)는 시조가 다른 4계통이 있다. 문열공파 최순작(崔純爵)은 고려 정종 때 문하시중으로 완주(전주) 개국백에 봉해졌다. 문성공파 최아(崔阿)는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으로 완산군에 봉해졌다. 사도공파 최균(崔均)는 고려조 조위총의 거병 때 순절하고 완산군에 추봉되었다. 문충공파 최군옥(崔群玉)은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내고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392,548명이다.
  • 해주 최씨(海州 崔氏)의 시조 최온(崔溫)의 아들이 최충(崔沖, 984~1068))이 고려 목종(재위, 997~1009) 때 최씨 성을 사성받았다.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의 학자 최만리(崔萬理),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崔奎瑞)가 있다. 2000년 인구는 181,840명이다.
  • 통천 최씨의 시조 최경현(崔景賢)은 고려 정종 때 정의대부판밀직사사(正義大夫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5] 통천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조선 초기의 장군인 최운해, 세종 때 4군을 개척하고 세종묘에 배향된 최윤덕, 선조 때의 명문장가인 최립이 있다. 2000년 인구는 8,144명이다.
  • 우봉 최씨의 시조 최원호(崔元浩)는 고려 명종(재위, 1170~1197) 때 영열우성공신(英烈佑聖功臣)으로 삼중대광문하시중상장군(三重大匡門下侍中上將軍)에 오르고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추증되었으나 자세한 상계는 알 수 없다. 그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에 봉해진 그의 아들 최충헌(崔忠獻)과 최충헌의 손자 최우(崔瑀)가 강화천도의 공으로 진향후(晉陽侯)에 봉해졌다.[6] 최씨무신정권최충헌의 증손 최의가 숙청되면서 후손들이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에서 정착하여, 우봉(牛峰)을 관향으로 하였다.
  • 탐진 최씨(耽津 崔氏)의 원조는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이며, 시조는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이다. 그러나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에 실전되어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인 최사전은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7] 최철 선조는 탐진현(현 전라남도 강진군)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탐진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68,127명이다.
  • 화순 최씨(和順 崔氏)의 시조 최세기(崔世基)는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그가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이름인 오산(烏山)군에 봉해짐으로써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최세기와 같이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부(崔傅)를 함께 시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상계가 실전되어 서북면도감판관(西北面都監判官)을 지낸 최언(崔堰)를 기세조(起世祖)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를 기세조로 삼는 계통도 있다.[8] 화순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1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31,173명이다.

중국계 최씨[편집]

중국 최씨는 강태공(강씨)에서 분파하였다.

  • 청하 최씨는 중국의 최씨 본관 가운데 하나이다. 북위선비족에게 숙청 당했다가 당나라 때 다시 성장하였다. 중국 최씨는 청하 최씨 등을 비롯한 한족계 이외에도 후이족, 이족 등에서 소수 나타나는 성씨라고 한다.
  • 충주 최씨당나라 무종산동성 청하 출신 최승(崔陞)으로, 초명은 최우(崔偶)이다. 그는 846년, 신라 문성왕 8년에 신라에 도적이 창궐할 때 당나라 무종의 명을 받고 병마사로 들어와 도적들을 토평하였다. 889년, 진성여왕 3년에 원종(元宗), 경노(京奴)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 소종의 명을 받아 상장군으로 들어와 반란을 평정하여 은청광록대부에 올랐고 후손들은 충주에 정착하였다. 고려 충선왕 때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진 최공의(崔公義)를 1세로 하고 있다.

발음 / 표기[편집]

영문자로 표기할 때 'Choi'라고 잘못 표기하고 초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정확한 한국어 로마자 표기는 Choe이고 '최'로 발음한다.

참고자료[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