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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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馬韓)은 삼국시대 초기 한반도 서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의 하나이다.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나중에 백제(百濟)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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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이 중심이다. 각각의 부족에게는 족장이 있고 큰 부족의 통솔자를 신지(臣智), 그보다 작은 부족의 통솔자를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취락에는 성이 없고, 54개국이 존재했다. 그 중의 백제국(伯濟國)이 백제로 성장한다.

역사[편집]

기록에 따르면 마한의 건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1]에 세운 나라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마한의 9대 왕의 연표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에,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의 형태를 유지했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20년 신라호공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책망하는 마한왕에게 맞섰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할 뻔 했으나 측근들의 만류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2] 기원전 19년 마한왕이 죽자 신라는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3]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마한은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9년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지》를 비롯한 많은 중국 사서에서 마한의 존재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온조왕 때 멸망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 마한 정복 기사는 후대의 기록을 온조왕 대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를 신뢰하는 학자들은 이 시기에 마한의 중심 세력이 멸망하였으며, 이후에 등장하는 마한은 마한의 잔존 세력이라 주장한다.[4]일부에서는 백제가 마한을 자칭한 것이 사료에 기록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5]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잔존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군과 연합하여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 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을 정복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6]

문화적 특징[편집]

마한의 문화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성곽은 없으며, 활, 방패, 창 등을 잘 다루었다.
  • 집은 초가지붕에 흙으로 벽을 세웠으며, 문을 윗쪽으로 내었다.
  • 옥을 좋아하고, 금, 은, 비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 농업과 잠업에 힘썼다.
3세기 초 마한

마한 54개국[편집]

마한의 인구는 큰 나라는 1만여 호 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라고 하며, 총 10여만 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추산한 총인구수는 약 50만 명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마한 왕계[편집]

청주 한씨 족보에 의하면, 마한왕의 역대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한 건국~멸망까지 9대)후조선 마지막 哀王(애왕)의 망명 후 馬韓(마한) 건국에서 멸망까지 9代 王位 世系"가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족보 속의 왕계보는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7]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무강왕(武康王), 애왕(哀王) 한준(韓準) B.C ?년~B.C 193년 기자조선의 말대 국왕, 월지국의 초대 국왕
2 강왕(康王) 한탁(韓卓) B.C 193년~B.C 189년
3 안왕(安王) 한감(韓龕) B.C 189년~B.C 157년
4 혜왕(惠王) 한식(韓寔) B.C 157년~B.C 144년
5 명왕(明王) 한무(韓武) B.C 144년~B.C 113년
6 효왕(孝王) 한형(韓亨) B.C 113년~B.C 73년
7 양왕(襄王) 한섭(韓燮) B.C 73년~B.C 58년
8 원왕(元王) 한훈(韓勳) B.C 58년~B.C 33년
9 계왕(稽王) 한정(韓貞) B.C 33년~B.C 17년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또는 목지국(目支國)
  2.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條 “三十八年春二月遣瓠公聘 於馬韓馬韓王讓瓠公曰辰卞二韓爲我屬國比年不輸職貢事大之禮其若是乎對曰我國自二聖肇興人事修天時和倉庾充實人民敬讓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 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王憤欲殺之左右諫止乃許歸” (38년(기원전 20년)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3.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條 “三十九年馬韓王薨[...]乃遣使弔慰 ” (39년(기원전 19년) 마한 왕이 죽자 [...]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4. 이종욱, 〈백제의 국가형성〉, 《대구사학》, 1976
  5. 박영규, 《한권으로 보는 백제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0년
  6. 김병남, 〈백제 근초고왕대의 남방 정벌〉, 《한일관계사연구》15집, 2001
  7. 마한구세왕위세계(馬韓九世王位世系), 《청주한씨중앙종친회》, 2011년 2월 20일 확인

참고문헌 및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