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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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古文, 文言文
사용 지역 한자 문화권 지역
언어 계통 중국티베트어족
 한어파
  중국어
   한문
언어 부호
ISO 639-1 zh
ISO 639-2 chi (B)
zho (T)
ISO 639-3 lzh


한문(漢文)은 한자로 쓴 중국어의 고전 문어체이다.

중국[편집]

중국에서는 문언문(文言文)이라고도 한다. 황하 유역에서 비롯한 중국 문명은 한자를 낳아 한자로 문자를 기록하는 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한자는 다른 언어를 이용하는 복수의 문화 집단에 의해서 수용되었기 때문에, 한자 문화권[1] 안에서 공통의 문어가 형성되어 갔다. 이것을 한문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초의 장기적인 안정 통일 정권인 한나라에는 중앙과 지방과의 문서 교환을 위해 한문법을 확립하였고, 그 뒤 중국에서는 이 한나라의 전통적인 문법에 따라 문장이 쓰이게 되어, 시대나 지역에 따른 구어의 다양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문어인 한문의 문법상 변화는 적었다.

또, 한문으로 쓰인 중국의 서적은 한문 서적으로 불린다. 거기에는 현대 중국의 서적은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회화체 수준에서는 변화가 크고, 또 지역차도 있었지만, 이러한 변화가 문장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 구어를 이야기하는 동아시아 민족은 공통 문어인 한문에 의해서 이어질 수 있었다. 반대로 각 지역의 구어 발전은 한문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서 중국어(보통화, 광동어, 대만어 등)는 물론, 본래는 다른 계통의 언어인 베트남어, 일본어, 한국어 등도 포함하여 현저한 지역차를 가지면서도 일정한 공통성을 가진 언어군의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근세로 들어가면서, 중국에서도 민중 문화가 꽃 피게 되어, 민중의 회화체(백화문)를 도입한 소설 등이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관료의 정론이나 상류 계급의 문학 작품과 같은 것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20세기 초에는, 중국에서는 루쉰 등의 활약에 의해 백화문이라 불리는 회화체의 문체가 시도되었다. 이로써 현대 한어문(중국어문)이 확립했다. 현대 중국어문도 한자를 늘어 놓고 쓴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한문과 같지만, 일종의 변체 한문이며 문법적으로는 한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한어문을 전통적 한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견해가 있다.

번체자(繁體字)는 정체자(正體字)라고 불리며, 전통적으로 써 오던 방식 그대로의 한자를 부르는 말이다. 간체자(簡體字)는 1960년대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만들어진 간략화한 한자이다.

일본[편집]

일본 한문은 일본화한 한문이다. 중국의 한문이나, 읽을 때는 음으로 읽고 뜻은 새기는 한국의 한문과는 달리 여러 가지 구독점과 보조 부호를 사용하여 한문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읽는다.

한국의 한문 문학[편집]

기원전 2세기경 한자가 전래된 이후 2천여 년간 한문화가 파상적인 영향을 끼쳐 모든 면에서 그 이전의 한국 고유문화는 쇠잔·위축된 반면 또 새로운 외국 문화의 수용으로 고도의 세련된 문화를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문자를 가지지 못한 한민족이 한문화와 함께 전래된 한자의 사용으로 이제까지 구송된 역사·문학을 정착시켰다. 처음 한민족은 한자에 대하여 고대 동방에 새로운 광명을 가져온 한족의 찬란한 문화의 상징으로서 애써 배웠을 것이며, 유·불·선 삼교의 심오한 교리는 또한 인생의 진리와 대결하는 무기가 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솟구치는 시정을 서술하는 데 한문학은 한문자와 아울러 삼국의 귀족을 매료시키고 여기에서 이식의 문학으로서의 한문학이 싹트고 꽃피게 되었다.

고구려의 한문학[편집]

삼국 중 중국에 가장 가까운 고구려는 대략 3세기인 산상왕 때부터 ·와 교통했으므로 많은 문물과 함께 한적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일례로 광개토왕릉비문이 남아 있어 그 웅대한 판도와 아울러 찬란한 문물을 짐작케 한다.

또 기록에 따르면 애초에 《유기》(留記) 백 권의 사기(史記)가 있었는데 영양왕 때인 600년, 이문진이 〈신집〉(新集) 5권으로 요약하였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또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오언고시 〈여수장우중문시〉는 수나라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던 늠름한 무인다운 면목이 엿보인다.

광개토왕릉비문[편집]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2년(414년)에 그 아버지 광개토왕의 비를 세우고 비에 그의 사적을 새겼다. 이 비는 만포진 건너편 만주 지안 현(중국어: 輯安縣)에 있는데, 높이 24자(尺)에 고구려 임금 대대의 계통과 광개토왕이 나라를 크게 일으킨 역사를 예서로 새겼다. 이는 한민족에 한자가 전래된 연대와 한국 한자 글씨의 본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백제의 한문학[편집]

백제는 육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나중에는 해상으로 중국과 연락하여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중국의 동오, 일본과도 교역하여 그 문화적 수준이 높았다. 근구수왕 1년(375년)에는 박사 고흥이 《서기》가 펴내었고, 그 당시 박사 왕인(王仁)은 일본에 《천자문》, 《논어》를 전래시켜 일본 문화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신라의 한문학[편집]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시대에 한자가 전래되었으리라고 추측되나, 신라의 거칠부가 《국사》를 수찬한 것은 진흥왕 6년(545년)이므로 백제보다 2세기나 뒤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한문학 작품인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은 비록 굴욕적인 송시이나 외교 문학의 소산으로 현재까지 전한다. 또 한문학의 전래와 함께 당나라에 많은 유학생을 보내어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이름이 전하는 한문학자로서는 태종무열왕 때의 강수를 비롯하여 제문, 수진, 양도, 풍훈, 골번 등이 있고, 신라 《국사》를 수찬한 거칠부 등은 그 사적은 없어졌으나 영원히 이름을 기억할 만한 사람들이다.

참고 문헌[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다음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삼국시대 문학의 특성"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석[편집]

  1. 한자로 문장을 주고 받는 문화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