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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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남부여
百濟/南夫餘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Three Kingdoms Period-375 CE.gif
기원후 375년경, 초록색이 백제.
수도 위례성(기원전 18년~기원전 1년)
한성(기원전 1년 ~ 476년)
웅진(476년 ~ 538년)
사비성(538년 ~ 660년)
정치
공용어 백제어 (고대 한국어)
정부 형태 군주제
건길지
기원전 18년 ~ 28년
641년 ~ 660년

온조왕(초대)
의자왕(말대)
기타
국교 불교, 도교, 무속신앙


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는 한국의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한다.[주 1]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중부의 소국들 및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으며 4세기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근초고왕 때는 전라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북쪽으로의 진출,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직접 항복을 하기도 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섰으며,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으며,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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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국가 성립[편집]

백제건국 시기에 관해 일반적으로 《삼국사기》기록에 실린 온조설화에 따라 기원전 18년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백제의 이름은 십제였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온조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온조설화 외에 비류 혹은 구태, 도모가 건국 했다는 비류설화, 구태설화도 전해져 온다.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였을 때 이 지역은 직산-천안을 중심으로한 목지국 중심의 마한에 속하여 있어 마한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애받아 십제를 세우고 미추홀 지역의 비류집단과 연맹을 형성하여 초고왕때 지역연맹의 맹주가 되어 백제라고 이름을 고쳤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소금의 산지였던 인천까지 영향권에 넣었다.[1] 중국과의 무역로를 확보한 백제는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16관등과 공복제정함과 함께 6좌평과 상좌평까지 제정(260년)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고이왕 이후 낙랑과의 계속되는 대결에서 298년에는 책계왕이 살해되었으며, 304년에는 분서왕이 살해되었다.[2]

백제의 정치적 발전[편집]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백제의 흥망[편집]

백제의 왕관 장식(무령왕)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북진하여 오히려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371년)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일대 및 산둥 반도, 일본 큐슈에 세력을 뻗었다고 주장한다. 송서, 양서 등의 남조 계열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랴오둥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랴오시 지역을 획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어려운 상황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전사까지 하게 된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475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혼인을 통해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북제서에는 571년 위덕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 일부 재야사학자들과 대륙사관론자들은 이를 백제가 산둥 반도를 점유한 근거로 보기도 한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부여 지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한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551년) 복수를 위해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554년)하고 말았다.

멸망과 부흥운동[편집]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의자왕이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백제는 이 때 금성 부근까지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이던 연개소문과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적 목적이 신라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자, 대당 외교가 아니라 신라와 직접 군사 대결을 시도하여 659년 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돌궐-고구려-백제- 와, 당-신라의 십자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백제에 대한 당나라의 군사 개입을 불러왔다. 김춘추의 외교 담판으로 당나라는 660년 6월 구원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주 2] 백제는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으나, 사비성의 입지조건이 방어에 매우 취약하고, 저항세력이 국내와 일본 등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힘의 결집이 부족한 것이 패망의 큰 원인이었다. [3]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여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부터 936년 동안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이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를 다시 세웠다. 그러나, 견훤이 세운 백제는 역사가 짧고 본래의 백제와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이를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통치 기구[편집]

중앙 관제[편집]

백제의 관서는 현저히 분화·발전하여 크게 내관 12부와 외관 10로 나뉘어 도합 22부가 있었다.

내관에는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𢈴部)[주 3]·외경부(外𢈴部)[주 4]·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실·궁내에 속하는 관서였다.

외관에는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공부(司空部)·사관부(司冠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조부(綢部)·일관부(日官部)·시부(市部)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정무를 담당하였다. 종래의 족장 선거의 유풍이 남아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이것은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행정 구역[편집]

백제의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수도를 5부[주 5]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주 6]으로 나누었다.

방 밑에는 10군을 두었으며, 방에는 장관격인 방령과 차관격인 방좌를 두어 통솔케 하고, 군마다 3인의 장이 있어 700~1,200명의 군인을 거느리게 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밖에 전국 22개의 행정구역에는 왕자·왕족을 분거케 하였으며, 이를 ‘담로’라 하였다.

경제[편집]

백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와 수리시설이 발달하였고, 직조술 ·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 ·금관 ·금은 장식품 ·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를 썼으며 조세는 조를 쌀로, 세(인두세)로 포목, 비단 실과 삼, 쌀을 내었고,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2월에 한수 북부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의 대외무역을 보면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여 일본에 말 ·누에 ·직조법 ·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당항성이 크게 번성하였다.

사회[편집]

<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 사신의 모습[4]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상무적인 기풍을 간직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목을 베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장기는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5]

문화[편집]

한학[편집]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증거로 472년(개로왕 18) 북위 (북조)에 보낸 국서가 《위서》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성왕 19) 양나라 사신 육허가 와서 <예론>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근구수왕 때의 왕인이 일본에 한학을 전하였다.

또한 무령왕단양이·고안무 등이 일본에 유학을 전하였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해서체금석문인 지석(왕 523, 왕비 526)이나 사륙변려체로 된 사택지적비 등은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국사편찬[편집]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국사를 편찬하였다. 375년(근초고왕 30)에 고흥이 《서기》를 편찬하였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시가[편집]

그리고 백제의 시가로는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 <악지>에 전해지며 《지리산가》 《무등산가》 《방등산가》 《선운산가》 등이 있다.

종교와 사상[편집]

주서》(周書)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 [6]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7]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8]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9] 백제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10]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11]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 신선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건축[편집]

백제는 삼국 가운데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7세기,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때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12]이나 일본 초기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寺工)과 기와 만드는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 건축술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13]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 등을 비롯해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으며,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이 유명하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시·부여군 일대에 많이 있는데,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양과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국제적으로 세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소재의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백제의 분묘는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해 내어 그 뼈를 깨끗이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그들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이며, 웅진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굴식 돌방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석수 ·동자상 ·청동경 ·자기 ·지석 ·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은 물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또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 고분굴식 돌방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은 백제 말기에 화강암벽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관세음보살입상,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 ·석수 ·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문전 ·연화문전 등과 기와 등에도 백제미술의 우수성이 나타나 있는데, 고구려의 와당은 힘과 정열(와당의 귀신상)을 표현한 데 비하여 백제의 와당(기와의 막새나 내림새의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은 온화한 아름다움이 그 특색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조각가로서는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을 건축한 아비지가 있다.

미술[편집]

백제의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하고 섬세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태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문(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일본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고 ·각 ·공후 ·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7세기 초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국제적인 문화교류[편집]

백제는 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백제의 종교와 문화는 에 전파되어 아스카 문화를 발흥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성시대에는 아직기·왕인 등이 왜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는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오경박사가 교대로 국에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야공·양주인을 비롯해 와박사·조사공 등의 건축기술자도 파견되었다.

백제시대 주요 문화재[편집]

주요 국보[편집]

주요 보물[편집]

주요 사적[편집]

대외 관계[편집]

고구려와의 관계[편집]

초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하여 우호적이었지만, 고국원왕 39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한 이래로 사이가 나빠졌다.[14] 이 상황은 나제동맹 결렬 직전까지 계속된다. 당시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감정을 보여주는 일화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낮춰 부르기도 하였다. 잔(殘)은 잔인하다, 흉악하다는 뜻이다.

신라와의 관계[편집]

중국과의 관계[편집]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진서(晉書)》에 따르면, 백제는 372년(근초고왕 27년) 음력 1월과 음력 6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15]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려고 하는 백제의 기본 외교 자세는 침류왕 대에도 계속되었다. 침류왕 즉위년(384년) 7월에도 백제는 동진에 조공을 하였다. 또, 동년 음력 9월에 동진(東晋)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오자,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대접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16] 470년, 송 왕조 시기에도 사신을 보냈으며, 472년에는 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 개로왕은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제의 무령왕성왕에 여러 차례 사신들을 보냈고 귀족 칭호들을 받았다. 무령왕릉은 중국의 특징적인 무덤 양식인 벽돌 무덤이기도 하다.

요서 경략설[편집]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 지방에 진출했었다는 이른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17],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18]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90년 이후부터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경략을 인정하는 편이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장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의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요서 경략 시기는 (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요서에 진출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18]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근구수왕 때, 정인보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의 기병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가 이를 물리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영토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위나라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있으며, 또는 같은 기록에 백제 측의 전공으로 선박을 쳐부순 것[拔臺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가 실제로 함대를 보내 침공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19]

일본과의 관계[편집]

3세기 이전[편집]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20] 약 2000년 전에[출처 필요]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고인돌기타큐슈조몬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고인돌에 있는 특유한 간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반도와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고인돌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晩期)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21]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22]

4세기 이후[편집]

칠지도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주 7]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기차게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 당시 백제가 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서기 366년(진구 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주 8]에 이뤄졌다.[23]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 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 섬, 그리고 규슈마쓰우라 반도(松浦半島)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 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 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 [24]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25]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 [26][27][28]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29]516년 고안무(高安茂)[30]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문화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31]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 [32]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 [33][34]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35]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36]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37]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쇼토쿠 태자와 동생(왼쪽: 에구리 황자)과 장남(오른쪽: 야마시로 황손),8세기 목판 복제

위덕왕(재위 554년 ~ 598년) 때에도 교류가 이어졌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 [38]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39]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40]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41]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 [42][43]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44]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년?~626년)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우마코도 부친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 [45]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 [46] [47][48]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排佛派)이자 국신파(國神派)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49] 602년 관륵(觀勒)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 · 책력 · 지리 ·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50][51]

백제의 멸망과 왜의 백제부흥운동 원조[편집]

의자왕(재위 : 641년 ~ 660년) 13년(653년) 백제는 여전히 왜와 우호를 통하고 [52]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한 바 있다. 백제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660년 멸망하였다. 그 직후,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다(661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부여풍은 631년 외교사절로 왜국에 30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서기》는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53]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54]고 기록한다. [55] 부흥군과 부여풍은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이에 응하여, 병력과 물자를 원조하였다. 663년 8월,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부여풍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다시금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과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을 기회로 신라는 서둘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한반도에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 수적으로 우세였던 왜의 수군이 당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강 전투)

삼국 중 백제가 왜와 교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 많이 있었다. 백제를 일본어로는 "구다라"라고 하는데[56],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부여풍의 남동생·선광의 자손은 왜 왕실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백제왕')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간무 천황(재위 781년~806년)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가사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씨의 출신이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현재의 오사카 시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 くだらす)"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57] 또한 오늘날까지 당시 백제인이 만든 관계용 저수지인 백제지, 백제씨 일족이나 백제 마을 등도 남아 있다.

백제의 인물들[편집]

승려


예술가


학자
장군


외교가

같이 보기[편집]

부록[편집]

주해[편집]

  1. 538년백제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2. 2010년에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백제가 지나치게 신라를 깔본 탓에 작전을 잘못 세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1]
  3. 내름부 또는 내량부(內椋部)라고도 함
  4. 외름부 또는 외량부(外椋部) 라고도 함
  5.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
  6.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
  7.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8. 일본서기진구 황후(神功皇后)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

주석[편집]

  1. 한 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역사 52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 2008년 9월
  2. 삼국사기 24권 백제본기2 고이왕 13년 8월, 책계왕 13년 9월, 분서왕 7년
  3. 한영우 (2003).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전면개정판, 경세원, 118쪽. ISBN 89-8341-057-4 “백제는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으나, 사비성의 입지조건이 방어에 매우 취약하고, 저항세력이 국내와 일본 등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힘의 결집이 부족한 것이 패망의 큰 원인이었다.”
  4. <양직공도>는 양나라의 원제(元帝)인 소역(蕭繹, 505∼554)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인 형주자사(荊州刺史) 재임시(526∼539)에 편찬한 도서(圖書) 이다
  5.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27쪽
  6. 영호덕 등 (636). 〈주서 권49 백제〉, 《주서》 “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
  7. 조법종 (2007).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청아출판사, 200쪽. ISBN 978-89-368-0359-9 “중국사서 《주서》는 백제의 역사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8. 김부식 (1145). 〈본기 권24 침류왕〉, 《삼국사기》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9. 김부식 (1145). 〈본기 권24 침류왕〉, 《삼국사기》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
  10. 삼국사기》에는 600년(법왕 2년) 봄 정월에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김부식 (1145). 〈본기 권27 법왕〉, 《삼국사기》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11. 김부식 (1145). 〈본기 권27 법왕〉, 《삼국사기》 “法王 ...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法王)은 ...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
  12. 일연 (1281). 〈탑상 - 황룡사9층탑〉, 《삼국유사》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將 唐 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 議於群臣群臣曰請工匠於百濟然後方可乃以寳帛請於百濟匠名 阿非知 受命而来経營木石伊于 龍春 一云 龍樹 幹蠱率小匠二百人(정관 17년 계묘 16일에 당 황제가 하사한 경전·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탑을 건립하는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 (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용춘 (龍春) - 혹은 용수(龍樹)라고 쓰기도 한다- 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
  13. 조법종 (2007).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청아출판사, 200쪽. ISBN 978-89-368-0359-9 “백제는 삼국 가운데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때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이나 일본 초기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寺工)과 기와 만드는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 건축술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14.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년
  15. 晉書/卷009, 簡文皇帝...咸安...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16. 김부식 (1145). 〈본기 권24 침류왕〉, 《삼국사기》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17. 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
  18. 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
  19. 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237쪽
  20. 강성현 (2005).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가람기획, 156쪽. ISBN 89-8435-224-1 “김달수의 《일본 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이른바 야요이(彌生)시대부터였다고 한다.”
  21. 홍윤기 교수. "[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 《세계일보》, 2006년 8월 1일 작성. 2009년 7월 19일 확인. "약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은 ‘벼농사법’도 전수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島原)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原山)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晩期)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지석묘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체계일본역사’·1967)"
  22. 홍윤기 교수. "[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세계일보》, 2009년 1월 13일 작성. 2009년 7월 8일 확인.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 ”고 했다."
  23.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근초고왕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신공황후 46년(서기 366년)에 이뤄졌다.”
  24. 도민을 위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 200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5.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
  26.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27. 정윤미 (2011). 《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시루, 31쪽. ISBN 978-89-966493-2-8 “비상시국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주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린다.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바로 목협만치(木劦滿致)였다. ...말 그대로 문주왕은 목협만치를 남쪽으로 보냈고 그가 향한 남쪽은 바다 건너 섬나라, 즉 일본을 뜻했다.”
  28.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84쪽. ISBN 89-86361-55-8 “소가노의 증조부는 백제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서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라고도 함), 일본에서는 소가노 만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개로왕(蓋鹵王) 21년 (475)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목협만치가 개로왕의 아들 문주와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29. (720)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
  30. (720)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
  31.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
  32.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3). 《세계 종교사 입문》. 청년사, 229쪽. ISBN 89-7278-376-5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33.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4쪽. ISBN 89-349-1654-0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34.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92쪽. ISBN 89-86361-32-9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 〕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
  35. (720) 〈卷第十九 欽明天皇〉, 《일본서기》 “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36.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
  37.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38. (720)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39. 최범서 (2006). 《야사로 보는 삼국의 역사1》. 가람기획, 166쪽. ISBN 89-8435-241-1 “그 후 위덕왕 24년에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 · 주금사呪噤師 · 조불공造佛工 · 조사공造寺工 등 6명을 보내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40. 최용범 (2008년).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48쪽. ISBN 978-89-92920-16-2 “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년)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41.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이어서 577년에는 대대적인 학자와 승려 집단, 불상 및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건너갔고,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42. (720)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十二年... 今在百濟火葦北國造阿利斯登子達率日羅、賢而有勇。... 冬十月、紀國造押勝等、還自百濟。復命於朝曰、百濟國主、奉惜日羅、不肯聽上。”
  43. 이기영 (2000). 《한국인의 윤리사상사》. 학문사, 132쪽. ISBN 89-467-1092-6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본왕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으며, ...”
  44. (720)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十三年... 秋九月、從百濟來鹿深臣、闕名字。有彌勒石像一軀。佐伯連、闕名字。有佛像一軀。”
  45.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6쪽. ISBN 89-349-1654-0 “약 30년 후인 비다쓰(敏達)천황 13년(584)에 백제의 위덕왕(威德王)은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도 부친처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 소가노 우마코는 아버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라는 유언을 받은 터였다.”
  46. (720) 〈卷第廿一 用明天皇 崇峻天皇〉, 《일본서기》 “崇峻天皇 ... 元年春三月、...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福富味身等、進調幷獻佛舍利、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寺工太良未太・文賈古子・鑪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畫工白加。”
  47.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 · 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
  48.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85쪽. ISBN 89-87787-79-6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49.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87쪽. ISBN 89-86361-32-9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조정의 제2위의 장관이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이른바 국신파(國神派)였다. 그러므로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불교를 신봉하는 소가노 우마코에게 대립한 것이다.”
  50. (720) 〈卷第廿二 推古天皇〉, 《일본서기》 “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51. (2004) 〈관륵〉,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觀勒 백제의 고승. ...문무왕 3년(602) 불교 외에 역본(曆本)·천문(天文)·지리(地理) 및 둔갑방술(遁甲方術)의 책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
  52.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三年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653) ...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
  53. (720) 〈卷第廿三 舒明天皇〉, 《일본서기》 “三年...三月庚申朔、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
  54.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
  55.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76쪽. ISBN 89-86361-55-8 “『일본서기』는 “서명기(舒明紀) 3년(631),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고 적고 있다〔『일본서기』의 서명기(舒明紀) 3년은 백제 무왕(武王) 32년으로, 이때는 아직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지 않았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질(人質)’이라는 의미의 ‘질(質 )’이다. 「백제본기」도 661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고 기록한다. 왜에 있던 부여풍이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역시 ‘질(質)’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백제 왕자 부여풍은 631년에서 661년까지 30년간 왜에 인질로 있었다.”
  56. 홍윤기 교수. "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세계일보》, 2006년 7월 25일 작성. 2009년 7월 8일 확인.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57. 홍윤기 교수. "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세계일보》, 2006년 7월 25일 작성. 2009년 7월 8일 확인. "오사카(大阪)는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이곳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민현구, 《고려 중기 삼국 부흥운동의 역사적 의미》 《한국사 시민강좌》 제5집, 1989 [2]
  • 이기백, 《신라사상사 연구》, 일조각, 1986[3]
  • 하일식,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혜안, 2006[4]
  • 李成市,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도쿄 이와나미, 19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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