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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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종
Gaozong of Tang.jpg
당나라의 제3대 황제
재위 649년 ~ 683년
황후 폐황후 왕씨
측천황후
부황 태종
모후 문덕황후
이전 황제 태종
다음 황제 중종

당 고종(唐高宗 李治, 628년: 정관(貞觀) 2년 7월 21일 ~ 683년: 홍도(弘道) 원년 12월 27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로 당 태종 이세민의 9남이며 이름은 이치다.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이며, 자는 위선(爲善)으로 백제고구려를 신라와 함께 멸망시킨 황제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생애[편집]

즉위[편집]

4세 때 당 태종에 의해 진왕에 봉해졌다. 태종 사후 큰형 이승건, 넷째 형 이태가 황태자에 올랐으나 649년 7월 10일 폐위되어 아버지 태종이 죽은 지 5일 뒤인 649년 7월 15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 아무도 이치가 황제 자리에 오를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인 태종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는데 막내 아들인 데다가 성격이 소심한 탓에 제대로된 정치를 하지 못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후궁이자 훗날 이치의 황후이자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되는 무주(측천무후)가 권력을 가지기위한 자신의 야망을 위해 이치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라는 간곡한 부탁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에 이치는 황제자리를 오르겠다는 야망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태자 이태를 몰아내어 제위에 앉는다. 결과적으로 이치가 평소에 끔찍히 사랑하는 무주의 부탁이 없었다면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치가 무주의 꼭두각시 황제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대외 정책[편집]

백제 공격[편집]

처음에는 부황의 정관의 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가신들을 옆에 두고 대외적으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조공하는 신라를 계속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신을 백제에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강압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제동맹 당시 신라가 백제를 먼저 배신했으며 또한 자신의 왕인 성왕을 죽였다는 이유를 말하며 당은 이에 간섭하지 말라는 엄포를 내린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당나라에 조공을 하는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의 무역 중심지인 당항성을 함락시켜 조공길을 막았다.(643년). 651년,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백제를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오히려 신라의 김춘추(태종 무열왕)가 654년 신라의 왕위에 오르자 신라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백제와 고구려는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협공하여 33개의 성을 함락시켜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한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 부터 자신을 방어해 줄 구원군을 당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한다. 그러나 당 고종을 백제를 공격하기에 아직 시기가 이르다 판단하고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백제의 의자왕이 계속된 전쟁의 승리로 도취한 나머지 군사방비를 소홀히 하자, 고종은 백제의 세력이 미약해졌다 판단하고 660년 3월소정방에게 13만 군사를 주어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한 뒤,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려에서 구원병 보내는 것을 막기위해 이적에게 고구려 국경지역인 요하에 군사를 배치시켜 고구려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신라 또한 김유신 5만 군사를 보내 협공하도록 했다. [2]

한편 백제의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방비를 소홀히 하여 전쟁에 젼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신라-당 연합군 18만 명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귀향 생활중인 흥수에게 막는 방법을 모색하게 했고 흥수는 백제의 천혜의 요새인 백마강과 탄현지방에 군사를 배치하여 당나라와 신라군을 막으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간신 중 한 명인 달솔이 흥수를 시기하여 "당나라 군과 신라군을 백마강과 탄현을 넘어오게 한 뒤 협공"하자고 제안을 해 의자왕이 달솔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하고 만다. 이러한 실수는 곧 패배로 이어져 백제는 군사 3만여 명을 잃고만다. 이 참담한 결과로 좌절에 빠진 의자왕은 계백 등 출정장수에게 남은 군사 1만 명 중 5천의 군사를 주어 결사항전하도록 했지만 수적 열세에 패배해 모두 전멸했고 자신은 웅진성으로 달아나 남은 5천 명의 군사로 대항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660년 7월 18일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의자왕을 포함해 왕족, 귀족, 일반 백성 등 13만 명의 포로는 당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는 건국 678년만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고구려 공격[편집]

고구려는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해 이제는 신라, 당나라,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고립상태가 되었다. 당 태종이 절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지만 애초에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당 태종이 고구려군에 패퇴되고 그 전쟁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때 마침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빼앗아 신라의 김춘추가 구원병을 요청하자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기위해 국경지역인 요하에 도착해 선제공격을 했지만 패퇴하였고 659년에 재차 공격했지만 성과없이 퇴각한다. 그러다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자 고구려를 고립시켰다 판단하고 이는 곧 정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661년 정월에 4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하지역에 도착해 공격하고자 했지만 이때 백제부흥군이 나,당 연합군 진영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 공격 시기를 늦추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8월 고종은 이적을 패광도대행대총관, 정명진을 누방도행군,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 소정방을 평양도행군, 임아상을 패강도행군, 방효태를 옥저도행군으로 임명하고 당나라 67개 지방에서 집결된 대규모 병력을 고구려의 신성과 부여성으로 각각 진격시킨다. 군사 수치에 대해서는 기록이 안되어 있지만 출전한 장수들의 기록을 고려할 때 약 35만 명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고구려의 부수도인 평양성 이었다. 그곳에는 고구려왕인 보장왕이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소정방은 이적, 정명진, 임아상, 설인귀 등 다른 장수들이 각각 부여성과 신성을 공격해 고구려군을 눈돌리게 한 사이 샛길로 빠져나가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단숨에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평양성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있어 워낙견고하여 함락이 쉽지않았다. 이로인해 장기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고구려군에 의해 보급로가 끊기고 군량미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겨울이 다가오자 싸울 힘이 없게된 소정방과 그의 군사는 때마침 도착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미로 밥을 먹고 황급히 퇴각한다.

다른 진영에서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계필하력은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했지만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 휘하의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건너가지도 못하여 퇴각했고 이적과 정명진은 고구려의 최북방의 요새인 부여성을, 임아상과 설인귀는 신성을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특히 662년 방효태가 이끄는 4만 군사가 사수전투에서 그의 아들 12명과 함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몰살이 되었다. 결국 계속된 패배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당나라군은 퇴각하고 만다.

동맹국인 신라군 또한 김유신을 앞세워 평양성 인근까지 도달했지만 남산과 남건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소정방에게 군량비만 넘긴채 별다른 성과없이 퇴각한다.

고종은 이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했지만 연개소문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고구려군에게 참패를 당하고만 것이다.

고구려 멸망[편집]

고구려군과 계속된 전쟁에서 연패를 당하자 고종은 고구려를 공격할 의사를 완전히 잃게된다. 또한 당나라 신료들도 반대하긴 마찬가지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맏아들 남생이 지위를 얻게 된다 그의 동생 남산과 남건도 맏형을 도우며 고구려 안정을 꾀한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최고지위인 막리지를 자신이 아닌 맏아들 남생에게 넘겨준 것에 불만을 품어 남생, 남산, 남건을 서로 이간질 시킨다. 이러한 이간질은 곧 정권 다툼이 이어져 나라에 혼란에 빠지고 급기야 666년에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을 한 결과가 된다. 이를 기회로 잡은 고종은 그해 6월 남생과 이적, 설인귀, 소정방에게 50만 군사를 주어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을 하게 된다. 그때 고구려 에서는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가 당나라의 대규모 출정 소식을 듣고 고구려 한반도 남쪽 20개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버리자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신라에서도 이러한 연정토의 항복에 힘입어 김유신에게 20만 군사를 주어 고구려 한반도 남쪽을 공격하였다. 당나라와 신라, 이 두나라가 양쪽에서의 공격을 개시한다. 한편 고구려는 계속된 당나라와의 전쟁에 경제가 피폐해지고 인구가 줄어 전의를 가다듬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연개소문의 세 아들의 권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이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군은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를 상세히 알고있는 남생을 앞세운 공격으로 667년 1월 고구려의 북쪽 최북 방어성인 신성을 비롯, 그 휘하의 16개성을 함락시켰고, 668년 2월에는 부여성과 휘하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그해 8월 평양성을 포위하였고 신라와의 협공으로 9월 21일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하여 보장왕의 항복을 받는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705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나당전쟁[편집]

고종은 애초부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까지 집어 삼킬 계획이 었다 그러나 신라군을 비롯한 백제, 고구려유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장기전으로 바뀌어 계획에 차질을 빚는다 특히 675년에 있었던 매소성 전투676년에 있었던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완패되어 퇴각을 결정한다. 나당전쟁 후 신라와 관계가 단절된 이후 두 나라는 전쟁으로서의 사과와 친서를 보내 다시 화친을 맺었으며 무역, 경제적으로 밀월 관계가 된다.

숙청[편집]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씨를 총애하여 자신의 소의, 나아가 황후로까지 봉했다. 무씨는 황후가 되자 폐황후 왕씨를 지지했던 장손씨 등 개국공신집단(관롱집단)을 가차없이 처형했으며 이후로도 자신에게 의견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모두 죽여버렸다. 이를 계기로 이 시기 관료집단의 구성이 개국공신에서 과거 북제영역이던 산둥 출신의 새로운 관료로 변화되었다.

그 후 이치가 병이 나자 측천황후가 정치를 대행하였으며 674년에는 황제의 칭호를 고쳐 천황(天皇)으로, 황후를 천후(天后)로 칭하였다.[3]

죽음[편집]

재위 34년째인 683년 12월 27일, 고종은 56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건릉(乾陵)에 묻혔다. 시호는 고종 천황대성대홍효황제(高宗 天皇大聖大弘孝皇帝)이다.

가족 관계[편집]

  • 황후 : 폐황후 왕씨 (廢皇后 王氏)
  • 황후 : 측천순성황후 무씨
  • 후궁 : 폐숙비 소씨(廢淑妃 蘇氏)
    • 4남 : 허왕 이소절(許王 李素節)
    • 장녀 : 의양공주 이하옥(義陽公主 李下玉) - 권의(權毅)에게 하가(下嫁)
    • 차녀 : 고안공주(高安公主) - 왕욱(王勖)에게 하가(下嫁)
  • 후궁 : 첩여 서씨(婕妤 徐氏) - 당 태종의 현비 서씨의 여동생
  • 후궁 : 한국부인 무씨(韓國夫人 武氏) - 측천무후의 언니, 후에 측천무후에 의해 독살됨.
  • 후궁 : 위국부인 하란씨(魏國夫人 賀蘭氏) - 한국부인 무씨의 딸, 측천무후의 조카
  • 후궁 : 궁인 유씨(宮人 柳氏)
    • 장남 : 연왕 폐황태자 이충(燕王 廢皇太子 李忠)
  • 후궁 : 궁인 양씨(宮人 梁氏)
    • 3남 : 택왕 이상금(澤王 李上金) - 이상금은 목을 매서 죽었는데, 7남 이의순을 제외한 모든 아들이 유배가서 죽음.
  • 후궁 : 궁인 정씨(宮人 鄭氏)
    • 차남 : 원도왕 이효(原悼王 李孝)

연호[편집]

  1. 영휘(永徽) 650년 ~ 655년
  2. 현경(顯慶) 656년 ~ 661년
  3. 용삭(龍朔) 661년 ~ 663년
  4. 인덕(麟德) 664년 ~ 665년
  5. 건봉(乾封) 666년 ~ 668년
  6. 총장(總章) 668년 ~ 670년
  7. 함형(咸亨) 670년 ~ 674년
  8. 상원(上元) 674년 ~ 676년
  9. 의봉(儀鳳) 676년 ~ 679년
  10. 조로(調露) 679년 ~ 680년
  11. 영륭(永隆) 680년 ~ 681년
  12. 개요(開耀) 681년 ~ 682년
  13. 영순(永淳) 682년 ~ 683년
  14. 홍도(弘道) 683년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참고 문헌[편집]

  1.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並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俎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高句麗·新羅等使並來入朝 朕命釋玆讎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並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並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古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齊桓列土諸侯 尙存亡國 況朕萬國之主 豈可不恤危藩 王所兼新羅之城 並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俘虜 亦遣還王 然後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埸 耕織並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哉 王若不從進止 朕已依 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句麗 不許遠相救恤 高句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藩度遼 深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11년(651년)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나라 고종이 조서[璽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였다. 『해동(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나 땅은 실로 들쭉날쭉하다[犬牙]. 근대 이래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刀俎]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갖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긍휼히 여기고 민망해 하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하자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을 돈독히 하도록 명령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脣齒]과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니 큰 성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이되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서로 화호를 청할 것입니다.’ 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으로 어찌 위기에 처한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의 포로들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고,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는 소원[息肩之願]을 이루게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저 변경의 부대에서 피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廢)하게 되어 사녀(士女)가 의지할 것이 없게 된 것과 어찌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머무는 것[進止]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한 바대로 왕과 승부를 결정하도록[決戰] 내맡길 것이고,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거란(契丹)과 여러 번국(蕃國)들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할 것이며, 좋은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
  2.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六月… 高宗詔 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驍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 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
  3. 구양수 외. 《新唐書(신당서)》 〈本紀第三 高宗(본기 제3 고종)〉. “上元元年 ~(중략)~ 八月壬辰,皇帝稱天皇,皇后稱天后。” 상원 원년 팔월 임진일(역주:율리우스력 674년 9월 20일), 황제가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를 천후라 칭했다.
  4. 당 태종과 문덕황후 장손씨사이의 출생한 16녀 성양공주의 차남
  5. 측천무후의 백부인 무사양의 손자
전 임
아버지 당 태종 이세민
제3대 중국 당나라 황제
649년 - 683년
후 임
7남 당 중종 이현
전 임
아버지 당 태종 이세민
중국 황제
649년 - 683년
후 임
7남 당 중종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