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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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권50>
(三國史記<卷50>)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25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제작시기 조선 시대
비고 1970년 12월 30일 지정
삼국사기<권44∼50>
(三國史記<卷四十四∼五十>)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722호
소재지 서울시 중구
제작시기 고려시대
비고 1981년 7월 15일 지정
삼국사기<권1∼50>
(三國史記<卷一∼五十>)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723호
소재지 서울시 중구
제작시기 고려시대
비고 1981년 7월 15일 지정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이다.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이다. 1970년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대한민국의 보물 525호로 지정되었다. 그밖에 1981년 조병순 소장 영본(零本)과 경주부간본(慶州府刊本)이 각각 보물 722호, 723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525호와 723호가 유일한 완본으로 현전하며, 722호는 1책 44~50권이 전해진다.

1174년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편찬 과정[편집]

편찬 시기[편집]

고려 왕조가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등 귀족 사회의 동요를 수습하고 난 뒤, 앞 시대의 역사를 공식으로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기전체로 편찬했다. 고기(古記)·유적(遺蹟) 혹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뽑아 편찬, 간행하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김부식이 정계에서 은퇴한 1142년에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1] 《삼국사기》가 완성된 시기는 1145년(인종 23년)이다.

편수관[편집]

《삼국사기》편찬에 참여한 편수관(編修官)은 총 11명으로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참고(參考) 8명(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과 관구(管句) 2명(김충효, 정습명)이다.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머리말, 논찬,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실질적인 편찬 작업은 10명의 편수관이 수행했다.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는 《삼국사기》가 비판적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토대로 여겨진다.[1]

구성 및 내용[편집]

구성[편집]

기전체로 작성되었다.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이 세 나라의 역사를 각각의 본기로 나누어 편년체로 서술하였으며, 총 28권이다. 신라본기 12권(1~12권), 고구려본기 10권(13~22권), 백제본기 6권(23~28권)으로 구성되었다. 〈연표〉는 중국 역대 왕조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국의 왕계를 표로 작성하였으며, 총 3권(29~31권)으로 구성되었다. 〈지(志)〉는 〈잡지〉로서 삼국의 제도, 문화, 지리 등을 분야별로 서술한 것으로 총 9권(32~40권)이다. 1권은 제사(祭祀), 악(樂), 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3~6권은 지리(地理), 7~9권은 직관(職官)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다. 〈열전〉은 인물의 전기로 총 69명이 수록되어 있다. 1~3권이 김유신 열전으로 가장 분량이 많으며, 나머지 7권에는 삼국의 충효·화랑·문인(文人)·반역인(叛逆人)과 관련 인물 등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내용[편집]

삼국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구성하였다. 기전체에서 〈본기〉는 정통성을 가진 중심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며, 이와 상반되는 부분으로 〈세가(世家)〉와 〈열전〉이 있다.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으로, 중국에 대해서 제후국으로 자처했던 조선 때 편찬된 《고려사》는 각 왕대의 역사를 〈세가〉로 구성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이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로 비판받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삼국은 모두 대등하게 다루어졌다. 삼국 모두 각각의 〈본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국의 〈본기〉에서는 해당 국가를 ‘我’(우리)라고 칭하며 나머지 2개 나라 및 기타 나라는 타국으로 다루었다. 삼국을 제외한 〈부여〉, 〈가야〉, 〈발해〉 등의 역사는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를 표방하고 있으며, 단대사(單代史)임을 명백하게 밝힌 점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2]

〈잡지〉는 삼국의 제도, 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이 신라의 기록이며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지리지와 직관지가 가장 분량이 많다. 특히 지리지는 총 4권으로, 앞의 3권은 신라의 지리로서 통일신라의 9주를 다루고 있다. 각권마다 3개 주씩 총 9주의 연혁을 다루고 있는데, 1권은 신라, 2권은 고구려, 3권은 백제의 영역에 해당하는 주로 구성하였다. 4권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였는데, 앞의 세 권의 연혁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지명도 다루고 있다.

〈열전〉에는 김유신을 비롯한 69명의 전기를 실었다. 특정한 편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각 권별로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3권은 김유신 열전, 4~5권은 무장 및 명신들의 열전, 6권은 학자 열전, 7권은 순국열사 열전, 8권은 효자 및 열녀 등 일반인 열전, 9권은 반신(叛臣) 열전, 10권은 역신(逆臣) 열전으로 볼 수 있다. 단, 중국의 정사에서 흔히 보이는 왕실 종친이나 후비 등의 열전은 수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사들과 별도로 총 31편의 사론(史論), 일부 항목의 서문(序文), 기타 주석이 실려 있다. 특히 사론은 김부식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 것으로서 이를 통해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본기〉에 23편, 〈열전〉에 8편의 사론이 실려 있으며 이 사론은 성격에 따라 포폄적(褒貶的) 사론과 역사학적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1] 포폄적 사론은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것으로 전체 분량의 2/3 가량을 차지한다. 포폄적 사론을 통해서 역사를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학적 사론은 사실의 규명이나 출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원칙, 서술한 이유, 역사적 사건의 원인 및 결과, 사료의 부족, 역사의 해석 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징[편집]

《삼국사기》는 《고기》, 《해동고기》, 《삼한고기》, 《본국고기》, 《신라고기》 등의 이름으로 한국의 고유 기록을 제1차 사료로 삼았으며, 중국 사료와 한국의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는 한국 사료를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고조선,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등의 역사는 빠져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가 먼저 출간된 《구삼국사》를 보다 간결하게 다듬은 형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의 관계는 《구당서》와 《신당서》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나 《구삼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삼국사기》를 약칭하여 《삼국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삼국사기》도 표지에는 《삼국사》라고 적혀 있다.

보존 및 번역[편집]

고려 시대의 간행본은 없어지고, 조선 시대에 와서 1393년부터 1394년 사이(태조 2~3년)에 진의귀·김거두가 고쳐 펴냈고, 1512년(중종 7)에 이계복이 다시 고쳤다. 이후 목판 또는 활자로 수차 간행되었다.

평가 및 비판[편집]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며, 이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사기》에 대해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 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고조선을 비롯한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 사대주의적이라는 점, 농민 및 피지배층에 대한 서술이 없다는 점, 불교 및 전통사상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다.

항목 비판 반론
신라 위주의 서술
  • 신라에 편중된 내용, 고구려·백제의 기록 부족 등을 근거로 비판한다.
  • 후삼국시대를 삼국의 재건이 아닌 신라에 대한 반란으로 기록하였다.
  •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사실과 관련지어 《삼국사기》가 신라계 문벌귀족의 신라계승의식 표출이라고 보기도 한다.[3]
  • 당시 사료의 한계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본다.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한 지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사료가 망실되었으나 신라는 고려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인계하였기 때문에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 통일신라를 제외하면 오히려 고구려 본기가 신라 본기보다 분량이 더 많고, 신라 계승 의식보다는 삼국 모두를 계승했다는 삼한일통 의식이 더 잘 나타나있다.
사대주의적 사서
  • 신채호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묘청의 난)에서 시작된 비판이다. 신채호는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을 자주와 사대의 대립으로 보아 개경파의 김부식이 승리함으로써 사대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에 대해서도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라고 혹평하였다.
  • 삼국의 역사가 중국 기전체에서 황제의 기록에 사용되는〈본기〉로 기록되었고 황제를 칭하는 '폐하(陛下)'나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뜻하는 '표(表)'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사대가 현실적인 수준이다.[4]
불교 및 전통사상의 삭제
  • 삼국유사》, 〈동명왕편〉 등과 비교를 통해 볼 때 삭제되거나 고쳐진 부분이 많다.[5]
  • 김부식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에 따라 삭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 모든 사실을 싣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받을 수는 없다.
  • 《삼국사기》는 초기 기록의 신뢰 여부 때문에 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 초기 기록을 신뢰하는 학자는 서강대를 중심으로 이종욱이 대표적이며, 풍납토성의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 결과가 《삼국사기》와 일치한다는 점과, 초기 기록을 거부하는 것은 식민사학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 이와는 반대로 신뢰하지 않는 학자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을 신뢰한다. 이는 무덤의 형태가 일치한다는 점과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후에야 중앙집권화의 흔적이 보이는 유물이 보인다는 점, 그리고 심지어 한반도 남부에 나타났던 편두 문화까지 상세히 기록된 점을 들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목록[편집]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연표
  • 권29 연표 상
  • 권30 연표 중
  • 권31 연표 하
잡지
  • 권32 잡지 제1: 제사 악
  • 권33 잡지 제2: 색복 거기 기용 옥사
  • 지리 잡지 제3,4,5,6: 지리1~3 신라, 지리4 고구려 백제
  • 직관 잡지 제7,8,9 직관
열전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정구복, 《한국중세사학사》, 집문당, 1999.
  2. 최영성, 〈삼국사기의 역사의식 : 한국유학사상 삼국사기의 의의와 관련하여〉,《한국사상과 문화》13, 2001년.
  3. 김당택, 〈고려 인종조의 서경천도·칭제건원·금국정벌론과 금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역사학보》170, 2001년.
  4. 하현강, 〈김부식(1075~1151년)의 역사의식〉, 《자유》61, 1977년.
  5. 김철준, 〈고려중기의 문화의식과 사학의 성격〉, 《한국사연구》9, 1973년.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