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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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출생 1910년 2월 12일(1910-02-12)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사망 1987년 11월 19일 (77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 폐암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호는 호암(湖巖)
학력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치경제학과 중퇴
직업 기업인
소속 삼성그룹 회장
종교 유교
배우자 박두을, 구라다
자녀 슬하 4남 6녀
부모 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
친척 할아버지 이홍석, 사위 정재은, 외손자 정용진, 형 이병각, 사돈 홍진기, 홍석현
웹사이트 삼성재단

이병철(李秉喆, 1910년 2월 12일 ~ 1987년 11월 19일)은 대한민국기업인으로 제일제당삼성그룹의 창립자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1938년,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부터는 삼성물산, 1953년 CJ그룹의 모태가 된 제일제당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1964년 5월 동양라디오와 텔레비전 동양방송,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순수 기업 활동에 전념, 1969년 삼성전자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어 삼성그룹 육성의 기반의 마련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 정곡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찬우는 할아버지 이홍석(李洪錫)에 이어 진주의 대지주였다.

그의 조상 중 한 사람이 1600년대에 벼슬을 버리고 진주로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으면서 진주에 그 뿌리를 내렸다. 시골로 낙향하여 향반으로 몰락했지만 할아버지의 때에 1천석의 벼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했고, 아버지 역시 1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하였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아버지는 지역의 지주로 만족하지 않고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성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도 참여하였으며 한성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이승만을 만나 서로 교류하기도 했다.

유년기[편집]

어려서 할아버지 문산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20년 지수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부 종로방 가회동수송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1926년 17세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에서는 20세인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한 것이 맞다.[1]

청소년기[편집]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하여 다시 중동중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님이 자신의 일본 유학을 반대하자 옆 동네에 살던 조홍제(훗날의 효성그룹의 창업주)를 찾아가 사정,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조홍제가 흔쾌히 수락,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하였다.

청년기[편집]

일본 유학[편집]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1930년 4월 21세에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했다. 유학 초기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고 유학 시절 고향집에서 매달 학비로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풍족한 편이었다.

유학 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의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2학년 1학기에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1934년 돌연 학교를 자퇴한 후 가방 하나만 들고 귀국했다.

귀국 이후[편집]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면서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대학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골패노름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술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세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 이찬우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 이찬우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와 상의, 이병철은 아버지 이찬우를 설득하여 그 때까지 이병철의 집에 살고 있던 다섯 가구의 종 문서와 집안의 역대 노비문서를 모두 불사르고, 노비들에게 돈을 주어 석방시켜 떠나게 했다. 그러나 일부 노비들은 떠나지 않고 일을 돌보았다. 그의 노비 석방은 조선시대의 잔재가 남은 사회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행동이었고, 이를 두고 친척들과 인근 사람들 중에는 비난과 찬사가 엇갈리기도 했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경성부부터 평양,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을 생각한 그는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도정공장은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친구 둘과 힘을 합해 동업(同業)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기업 활동[편집]

첫 사업 실패[편집]

1930년대, 대구 삼성상회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鄭鉉庸), 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동차 회사도 하나 인수했다. 그 간에 그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헌 자동차 열 대에 새 자동차 열 대를 더 구입했다. 당시 자동차 한 대 값은 지금의 비행기 한 대 값과 같았다.

자동차 회사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미소의 장사가 되지 않으면서 돈은 벌기는 커녕 본전을 까먹고 있었다. 같이 동업을 시작한 두 친구 중에 한 친구가 그만 두자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쌀 값이 내릴 때는 사고, 올라갈 때는 파는' 방법에 착상한 후 다음 해부터 정미소에서도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와 정미소의 일이 풀리면서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고, 그 때의 이병철의 머리에 대농(大農)가 출신답게 땅을 생각했다. 이어 김해 평야에 나온 땅을 전부 사기로 작심, 돈은 번 돈과 은행 돈을 쓰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2]

땅을 사놓고 은행과 정산을 하려할 때의 일이다. 은행에서 모자라는 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이 남았다고 내주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당시 땅을 사서 등기하고 정산하는 사이에 땅의 은행 감정가가 올라 융자 돈이 많아져 땅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이로써 청년 이병철은 갑자기 일약 200만평의 대지주의 일류 갑부가 되었다. 대구, 부산에 주택 부지도 사놓았다.

그는 정미소와 자동차 회사와 땅을 각각 맡길만한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밤 마다 놀러 다녔다. 마산에 몇 안되는 요정들이 모두 그의 단골들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사업체에서 돈 버는 것을 구경 감독 지휘하고, 밤에는 춤 추고 노래하고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터져 조선과 일본의 각 은행은 융자를 중지하고, 이미 융자해 준 대금을 회수하고 있었다. 개인이 아무리 사업 수완이 좋고 운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歲月)이 돕지 않으면 재물(財物)은 지킬 수도 없고 늘릴 수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 회사 김해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가 됐다.

무역업에 종사[편집]

그 뒤 1938년 3월 3만 원의 자본금으로 대구로 올라가 대구 수동(현 인교동)에 '三星商會(삼성상회)' 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부로 상경하여 1948년 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창설,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중공업, 경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서울에서 6.25 전쟁을 맞았다. 6·25 직후 피난갔다가 1951년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三星物産)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였다.

제조업과 기업 활동[편집]

1953년제일제당, 1954년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였으며, 1964년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고, 그 해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동양방송1980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사카린 밀수 사건 전후[편집]

1964년 8월 13일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에 위촉되고, 1964년 동양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6년 5월 24일 삼성에서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이 것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1993년 발간한《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3]

후일 이병철은 자신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정부가 삼성을 죽이려고 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병철 등이 직접 개입되어 있는가, 정부의 재벌 죽이기식 표적수사였는가의 사실관계 여부 확인은 오리무중이다.

생애 후반[편집]

복귀와 기업 활동[편집]

그러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적발되면서 물의를 빚게 된다. 1966년 11월 한비의 상무로 있던 둘째 아들 이창희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 단체에서는 진상 조사를 요구했고 그는 결국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히고 사업에서 물러났다가 18개월 만인 1968년 2월에 다시 복귀하였다.[4] 이때 장준하 등 야당인사는 박정희 등이 특정 재벌을 비호한다며 비난하기도 했고,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주변의 반대와 비난을 극적으로 극복하고 다시 경영에 복귀하게 된다.

그 뒤 모직회사가 성장하면서 1972년 7월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고, 1969년 삼성전자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였고, 제3공화국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5] 등을 설립하였다.

1975년 5월 특별히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년부터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이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다. 1977년 5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하고, 1984년 8월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삼성전자는 그의 사후에도 삼성그룹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말년[편집]

이후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고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 장학회 등을 설립하였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해, 사업의 다각화를 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81년 2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고, 1982년 다시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재위촉되었다.

고미술품에 심취해 많은 소장품을 수집·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였고, 국악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정주영 등과 함께 경상남도 울산군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투자, 기부하여 울산공단 설립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일 울산공단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1982년보스턴 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저서로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 등이 있다. 1987년 11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고, 병석에 누웠다가 11월 19일 서울 자택에서 노환과 폐암[6][7] 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향년 78세였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묘소는 현재 용인에버랜드 내에 위치하고 있다.[8]

사후[편집]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되었다. 삼성전자는 3남 건희에게 상속되었고 장녀 인희한솔그룹을 창업하였으며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계열에게 상속되었고, 제일제당제일모직 등 제일그룹은 장남 맹희에게 상속되었다. 차남 창희새한그룹을 창립하여 분가하였다.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이 추서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일훈일등서보장이 추서되었고,[9]1999년 12월에는 매일경제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도 선정되었다.

저서[편집]

  • 《우리가 잘사는 길》
  • 《호암자전》

약력[편집]

상훈[편집]

학력[편집]

명예 박사 학위[편집]

기타[편집]

일화[편집]

1985년 만년에 그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을 받은 직후 어느 일본인 저널리스트를 만나 이병철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다.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차분히 떠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10]' 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담담하게 답하였다.

그는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부조리, 종교들의 배타성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죽기 한달 전인 1987년 10월에 종교인들에게 던진 질문에서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인간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는 것과 종교의 배타적인 행동들에 대해 묻는다.

“신(神)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나?” 그렇게 첫 질문부터 종교의 '급소'를 찔렀다. 물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나?” “종교가 없어도, 종교가 달라도 착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라며 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기도 했다.[10] 또한 부자를 악인으로만 취급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드러냈다.[10]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다.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10]”라며 항의했던 것이다.

마지막 질문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것을 질문하기도 했다.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10]”라며 당시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종말론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첫 질문은 '시작', 마지막 질문은 ‘끝’에 관한 것이었다.[10]

죽기 직전에 남긴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20가지 질문 중 18번째 질문에도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2011년 12월 차동엽 신부[10]이만희 총회장[11] 등이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앙인들의 맹목적성을 광기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해 질문했지만 살아생전 아무도 그에게 명확한 답변을 내리지 못했다.

평가와 비판[편집]

일화[편집]

  • 이병철은 사업체를 벌려 놓으면 '일은 맡겨놓는 성질'이 있었다.
  • 그는 식사 때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고 자신의 식사 시중, 밑반찬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12]
  • 정치인 허경영이 스스로 이병철의 양자라고 주장한 적 있으나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으로 드러났다.[13]
  • 그는 타계 한 달 전 24개 문항의 영적 질문을 천주교계에 남겼다.[10][14]

가족 관계[편집]

관계 이름 출생 사망 활동사항 비고
아버지 이찬우 1884년 1957년
어머니 권재림 1885년 1959년
배우자 박두을 1907년 2000년
장녀 이인희 1928년 한솔그룹 고문
사위 조운해 1925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
-외손자 조동혁 1950년 한솔그룹 명예회장
-외손자 조동만 1953년 한솔아이글로브 회장
-외손자 조동길 1955년 한솔그룹 회장
장남 이맹희 1931년 제일비료 회장
-손녀 이미경 1958년 CJ그룹 부회장
-손자 이재현 1960년 CJ그룹 회장, CJ제일제당 대표이사
-손자 이재환 1962년 CJ제일제당 상무
차남 이창희 1933년 1991년 새한그룹 회장
-손자 이재관 1963년 새한그룹 부회장
-손자 이재찬 1964년 2010년 새한미디어 사장
-손자 이재원 1966년 前 새한정보시스템 상무
-손녀 이혜진 1967년 라이프그룹 회장과 결혼
차녀 이숙희 1935년 LG그룹 회장과 결혼
사위 구자학 1930년 아워홈 회장
-외손녀 구명진 1964년 한진그룹 회장과 결혼
3녀 이순희 1939년 제일기획 상임고문
前 사위 김규 1934년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이혼
4녀 이덕희 1940년 삼성화재해상보험 회장과 결혼
사위 이종기 1936년 2006년 삼성화재해상보험 회장
3남 이건희 1942년 삼성전자 회장
자부 홍라희 1945년 리움 관장
-손자 이재용 1968년 삼성전자 부회장
-손녀 이부진 1970년 호텔신라 사장, 삼성물산 상사부분 고문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사장
-손서 임우재 1968년 삼성전기 부사장
-손녀 이서현 1973년 제일모직 부사장, 제일기획 부사장
-손녀 이윤형 1979년 2005년
5녀 이명희 1943년 신세계그룹 회장
사위 정재은 1939년 웨스틴 조선호텔 명예회장
-외손자 정용진 1968년 신세계그룹 부회장
-외손녀 정유경 1972년 조선호텔 상무
배우자 구라다 일본인
4남 이태휘 1947년 CJ제일제당 상무 일본 거주
6녀 이혜자 1962년 일본 거주

이병철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관련 서적[편집]

  • 이병철, 《호암자전》(중앙일보사, 1986)
  • 삼성그룹 비서실, 《삼성 50년사》(삼성그룹 비서실, 1989)
  • 김병하, 《재벌의 형성과 기업가활동》 (한국능률협회, 1991)
  • 김병하, 〈호암 이병철의 생애와 경영이념〉, 한국경영사학회, 《경영사학 3》 (한국경영사학회, 1988)
  • 황명수,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 호암 이병철 연구》 (한국경상학회, 1988)
  • 황명수, 〈한국기업경영의 역사적 성격〉, 호암이병철의 기업활동(한국경영사학회, 1993)
  • 황명수, 《삼성의 기업문화 연구》 (황명수 편저, 신양사, 1993)
  • 홍하상, 《카리스마 VS 카리스마 이병철 VS 정주영》 (한국경제신문, 2001)
  •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사회평론, 2010)
  • 야지마 긴지, 《이병철의 기업가 정신》 (이정환 역, W미디어, 2010)
  • 선데이 저널, 1987년 9월 13일자, 196호
  • 이맹희, 《하고싶은 이야기》 (청산, 1993)
  • 이명희, 《묻어둔 이여기》 (청산, 1993)

참조[편집]

  1.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신동아(2010.04.26) 기사 참조
  2. 당시는 농토를 담보로 제공하면 80 퍼센트까지 은행 융자가 가능했다.
  3. "(언론권력) 중앙일보 '삼성' 감싸기", 《한겨레》, 2001년 4월 2일 작성.
  4. 김영욱 경제전문기자. "지휘봉 다시 잡은 이병철, 삼성전자 설립해 돌파구", 《중앙SUNDAY》, 2010년 3년 28일 작성. 2011년 11월 10일 확인.
  5. 삼성에버랜드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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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재벌 ‘조상묘 지키기’ 비상 스포츠경향(2010.01.31) 기사 참조
  9. 격동 50년 MBC
  10. "이병철 회장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 공산당원과…"", 《중앙일보》, 2011년 12월 17일 작성. 2012년 1월 3일 확인.
  11. "故 이병철 회장이 듣고 싶어했던 '종교와 신' 에 답하다", 《천지일보》, 2011년 12월 28일 작성. 2012년 1월 3일 확인.
  12. "[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19. 이병철 회장 <2>", 《중앙일보》, 2007년 5월 15일 작성. 2011년 11월 10일 확인.
  13. "대선후보 허경영씨 만기출소", 《동아일보》, 2009년 7월 23일 작성. 2012년 1월 3일 확인.
  14. 백성호, 박종근 인간 이병철 “신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 왜 드러내지 않나”, 중앙일보
  15. 이병철을 모델로한 젊은 시절의 국대호 역을 연기하였다.
  16. 이병철을 모델로한 국대호 역을 연기하였다.

바깥 고리[편집]

전 임
초대
초대 삼성그룹 회장
1938년 3월 ~ 1966년 8월
후 임
이맹희
전 임
이맹희
제3대 삼성그룹 회장
1968년 2월 ~ 1987년 11월
후 임
이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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