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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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階伯)
607년 ~ 660년 7월 9일 (양력 8월 20일)
시대 백제 말기 (7세기)
죽은 곳 논산 황산벌
관직 관등: 달솔(達率)
직책: 미상
주군 의자왕
사당 부여 의열사(義烈祠), 삼충사(三忠祠), 부산서원(浮山書院), 논산 충곡서원지(忠谷書院址), 충장사(忠壯祠)

계백(階伯, 607년 ~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의자왕 21년)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660년 나(羅)·당(唐) 연합군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논산 황산벌에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흥수, 성충과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660년 당의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육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계백의 관등은 달솔이었다. 계백은 대장군으로서 5천 명의 결사대를 뽑아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이때 계백은 "한 나라의 군사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손으로 식구들을 죽였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병사들 앞에서 월(越)나라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吳)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을 언급하며, 용기를 다해 싸워서 국은에 보답하자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때 세 곳에 나뉘어 진을 친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삼국사기》열전) 이에 신라군은 장수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내보냈으나 전사하고, 반굴 다음으로 선봉에 나선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官昌)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감안해 돌려보냈으나, 또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결국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 관창의 죽음에 고무된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백제군을 공격해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1]

사후의 평가[편집]

《삼국사기》에 열전이 실려있는 데에서 고려 시대에 이미 유교적 대의명분에 입각해 계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이르면 유학자들로부터 이미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조국을 끝까지 지키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던진 영웅이자 충신이라는 추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백제 말년의 재상이었던 성충이나 흥수와 함께 계백을 백제 말기의 3충신의 한 명으로 꼽았으며, 백제의 역사를 거론하면서는 백제 멸망의 부분에서 꼭 빠지지 않고 계백의 이름을 언급했다.

신라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는 유명한 《삼국사기》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무도했고 도의에 어긋난 지나치고 잔인한 처사였다는 평가[2]가 있는 반면, 자기 자신도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으로 끝났으니 중도에 어긋나기는 했어도 이것만 가지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3]는 계백옹호론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묘안도 없으면서 마음만 앞서서 처자를 죽인 것이 결국 병사들이 겁먹고 사기(士氣)가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고 싸우기도 전에 패하게 된 것이라는 지적[4]에 대해서도, 자신의 집과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이나 미련을 잊어버린 뒤에야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다는 병법의 가르침을 들어 계백을 변호한 주장[5]도 존재한다. 한편 백제의 옛 수도였던 공주부여 지방을 유람한 조선의 시인, 묵객들은 어김없이 계백의 죽음을 기리며 그의 행적을 추모하는 시를 남기고 있다.

근년의 연구[편집]

보통 계백을 성명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일반이지만, 김정호의 《大東地志(대동지지)》 기록[6]을 논거로 계백은 본래 백제의 명장인 黑齿常之(흑치상지)처럼 백제 왕족의 후예였다는 견해가 최근[언제?]제기되었다[출처 필요]. 열전에서 계백의 전체 성명이듯이 언급한 '계백'은 기실은 계백의 조상이 백제 왕실에서 분봉받은 지역으로서 그곳은 음운상 김부식事大主義(사대주의) 사관에 기초해 편찬한 《삼국사기》잡지에 기록된 당시 皆伯縣(개백현)으로[7] 比定(비정)되며, 계백의 조상이 분봉된 지역이자 階伯氏(계백씨)의 유래가 된 곳이라는 주장이다.[8]

사당과 유적, 그리고 묘소[편집]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과 더불어 각지에 위인을 모신 사립학교의 형태를 띤 서원이 건립되면서 계백을 제향하는 서원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중심으로 건립되었는데, 대부분 조선 말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일부가 20세기에 들어서 재건되었다. 알려진 것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 의열사(義烈祠)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4호. 선조 8년(1575년)에 당시의 부여현감이었던 홍가신(洪可臣)이 용정리 망월산에 처음 지었으며, 백제의 성충·흥수·계백과 고려 후기의 충신 이존오를 제사지낸 것을 시초로 한다. 인조 19년(1641년)에 새로 고쳐 지었으며, 선조 때의 선비 정택뢰(鄭澤雷)와 인조 때의 문신 황일호(黃一皓)를 추가로 더 모시고 제사지냈다.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3년(1866년)에 헐렸다가 다시 지었고, 1971년 지금의 자리인 남령공원으로 옮겨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부산서원(浮山書院)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여(李敬輿)를 중심으로 하고 계백은 곁가지로 배향되어 있으며, 송시열도 이곳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원철폐령 때에 철폐되었다가 근년에 복원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소재.
충청남도시도기념물 제12호. 계백과 함께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숙종 6년(1680)에 세운 서원이다. 고종 5년(1868년)에 폐쇄되었고 1933년 복원하였다. 지금은 문신 11명을 추가로 더 배향하고 있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13 소재.
  • 삼충사(三忠祠)
부소산성 내에 소재한 이곳은 1957년에 처음 지었고 해마다 10월의 백제문화제 때 삼충제를 지낸다. 현재의 모습은 198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안에는 성충·흥수·계백 세 사람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충장사(忠壯祠)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계백장군유적전승지 경내 소재. 해마다 양력 4월에 계백장군 제례를 거행한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었던 황산벌 서북쪽에 해당하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기슭에는 오래전부터 계백의 무덤이라 전해오는 고분이 존재했는데, 이 고분이 확실히 계백의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민간의 전승과 고고학적 추론 외에는 아직 확실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은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1989년 12월 29일에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傳承地)'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시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으며, 인근에 건립된 백제군사박물관을 중심으로 현재 성역화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등장 작품[편집]

소설
  • 유현종 『계백의 혼』(전2권) 1991, 도서출판 예하
  • 이원호 『계백』(전5권) 1998, 도서출판 산하
  • 이광복 『불멸의 혼』2004, 조이에듀넷
  • 정수인 『고구려』(전7권) 2005, 도서출판 새움
  • 황운성 『계백의 칼』(전2권) 2007, 경성라인
  • 최성준 『황산벌의 침묵』2009, 도서출판 심지
  • 김정산 『삼한지』(전10권) 2009, 서돌

주석[편집]

  1.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 《삼국사기》 “ 二十年 … 六月…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堦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堦伯死之 (20년(660) 6월…또 당과 신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에 장군 계백(堦伯)을 보내어 사사(死士)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병과 싸우게 하였다. 네 번을 크게 붙어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여서 끝내는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2. 《양촌선생문집》제34권, 동국사략론(東國史略論) 中
  3. 《동사강목》 제4상, 경신년(660년: 신라 태종 7년, 고구려왕 장 19년, 백제왕 의자 20년, 당 고종 현경 5년)조, 《동국통감》에 실린 최보의 논평을 인용.
  4. 《양촌선생문집》제34권, 동국사략론(東國史略論) 中
  5. 《동사강목》 제4상, 경신년(660년: 신라 태종 7년, 고구려왕 장 19년, 백제왕 의자 20년, 당 고종 현경 5년)조
  6. 《대동지지》권5 부여군 祠院조 "階伯【名升, 百濟同姓. 官達率, 義慈王二十年, 戰亡】
  7. 현재, 경기도 고양시 행주내동 ·외동
  8. 원래는 김주성, 〈백제사비시대 정치사연구〉, 전남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제127 쪽에서 《대동지지》의 이 기사를 최초로 언급하였다. 노중국, 제4 장 '성씨의 分支化와 귀족가문의 분화', 《백제사회사상사》제Ⅱ 편 '姓氏집단과 귀족가문', 지식산업사, 2010, 195~198.

참고 문헌[편집]

함께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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