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 백제의 25대 국왕 | |
| 재위 | 501년~523년 |
|---|---|
| 왕후 | - |
| 부친 | 부여곤지 |
| 모친 | - |
| 이전 왕 | 동성왕 |
| 다음 왕 | 성왕 |
무령왕(武寧王, 461년 혹은 462년~523년, 재위: 501년~523년)은 백제의 제25대 국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다. [1]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고,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2]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무령왕릉의 지석에 따라 삼근왕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백제신찬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으로 동생 곤지와 부인을 공유했다고 하나 이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로 보인다.[3]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501년에 동성왕이 위사좌평인 백가의 계략으로 시해되자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재위 20년, 나이 62세에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였다.
목차 |
생애 [편집]
출생과 초기 삶 [편집]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 되어 있는데, 개로왕이 임신한 후궁을 동생(또는 아들)인 곤지와 짝지워주고 일본으로 가게 했다고 한다. 461년 그 후궁은 곤지와 함께 일본 본토로 향하던 중 규슈 축자(筑紫)의 각라도(各羅島, 일본에서는 각라도가 지금의 사가 현 가라쓰 시 가카라시마라고 주장하며 관광지로 만들려 하고 있으나, 발음만 같을 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산기가 돌아 사내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이가 무령왕이라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에 의하면 그가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곤지는 그의 이름을 사마라고 지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백제신찬에서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송서에도 무령왕이 개로왕을 친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사마왕이 동성왕(부여곤지의 둘째아들)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동성왕과 무령왕의 나이가 거의 비슷하여 부자관계가 아니라,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복 형 또는 이복 동생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4] [5]
즉위와 전쟁 [편집]
무령왕의 이복 형제간이자 전왕(前王)이었던 동성왕은 왕권전제화 시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위사좌병 백가를 위시한 반대파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왕은 오히려 한솔 해명과 함께 501년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6]하고,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쳤다. [7] 같은 해에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물리쳤고.[8],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9] 507년 고구려의 지시를 받은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에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 세력의 균형이 이룬 무령왕은 가야지역으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경남서해안으로 진출하였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였다.
즉위 이후 [편집]
왕권강화 [편집]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양서에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왕족을 지방통치에 이용하여 대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급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하였는데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귀족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외교 정책 [편집]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521년 양 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즉위 6년에 왜에 이미보내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과 교체를 하여 왕족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한편, 일본의 게이타이 천황에게 동경(銅鏡)[10]을 하사하였다.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11]와 516년 고안무(高安茂)[12]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523년에 사망하였다.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아들 순타태자는 요절하였으므로 다른 아들인 명농이 보위를 계승하였다.
붕어 [편집]
62세에 붕어하여 무령왕릉에 묻혔으며 1971년 음력 7월 충청남도 공주군의 송산리에서 이 능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108종류의 2,906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입구에서 발견된 왕과 왕후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의 아내임을 알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며 이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부장품은 오늘날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계 [편집]
읽어 보기 [편집]
주석 [편집]
- ↑ 김부식 (1145). 〈본기 권26 무녕왕〉, 《삼국사기》 “武寧王 諱斯摩 (무령왕(武寧王)은 이름이 사마(斯摩)<혹은 융(隆)이라고도 하였다.>이고)”
- ↑ 김부식 (1145). 〈본기 권26 무녕왕〉, 《삼국사기》 “武寧王 ... 牟大王之第二子也 (무령왕(武寧王)은 ... 모대왕(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
- ↑ 양기석, 충청남도 도지 4권 65쪽,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 ↑ 일본 다시보기-사가현 III 보스톤코리아
- ↑ 도민을 위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 200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 김부식 (1145). 〈본기 권26 무녕왕〉, 《삼국사기》 “武寧王 ... 春正月 佐平苩加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扞率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무령왕(武寧王)... 정월에 좌평 백가(苩加)가 가림성(加林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러 한솔(扞率) 해명(解明)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 항복하자 왕은 그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에 던져버렸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26 무녕왕〉, 《삼국사기》 “二年 ... 冬十一月 遣兵侵高句麗邊境(2년(502) ...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쳤다.)”
- ↑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삼국사기》권제26 (백제본기 제4)
- ↑ 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 ↑ 현재, 일본 국보 고고(考古) 2호로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 ↑ (720)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
- ↑ (720)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
참고 [편집]
| 전 대 동성왕 |
제25대 백제 국왕 501년 - 523년 |
후 대 성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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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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