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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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형왕(仇衡王, ? ~532년 562년) 재위:521년~ 532년 562년) 혹은 구해왕(仇亥王)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재위: 521년 4월 28일(음력 4월 7일) ~ 532년 혹은 562년)이다. 다른 이름은 양왕(讓王)이다.

생애[편집]

562년 음력 9월 신라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오니 왕이 친히 맞서 싸우려 했으나, 군사적 열세로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 동생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등은 신라로 들어가 항복을 하였다.

구형왕의 항복 연도는 532년[1].이라고도 하고 562년이라고도 하는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락국기〉편은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구형왕의 삼남이 김무력(金武力)으로서 신라의 장군으로 봉사(奉仕)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金庾信)은 신라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을 이룩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년)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 開皇曆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가계[편집]

  • 부왕: 겸지왕(鉗知王, ? ~521 재위:491~521/562
  • 모후: 숙부인(淑夫人, 생몰년 미상)
    • 동생: 김탈지(金脫知, 생몰년 미상) 벼슬은 이질금
    • 왕후: 계화부인(桂花夫人, 생몰년 미상)
      • 장자 : 세종 각간(世宗 角干)김세종(金世宗) 김무종(金武宗)
      • 차차 : 무득 각간(武得 角干) 김무득(金武得) 김무덕(金武德)
      • 삼자 : 무도 각간(武道 角干) 김무력(金武力, 518~579)
  • 장인: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 생몰년 미상)

기타[편집]

  • 일설에는 김무력은 그의 아들 세종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보통 김무종과 김세종은 구형왕의 아들이며 동일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 그가 신라에 항복할 때 동생 김탈지는 항복에 반대하고 금관경에 남아 있었다.
  • 그의 뒤로도 1년간 재위한 말왕(末王)이라는 임금이 있었다 하나 그가 누구인가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참고문헌[편집]

더 알아보기[편집]

주석[편집]

  1. 삼국사기》 〈권34
전 임
겸지왕
제10대 가락국의 국왕
521년 ~ 532년 혹은 562년
후 임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