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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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新羅-三國統一)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최초의 민족 통일로 간주되는 사건으로, 676년 신라가 한반도의 제국가(諸國家)를 통일한 것을 말한다.

신라가야, 백제, 고구려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멸망시켜 병합하였고, 676년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통일을 달성하였다. 나당 전쟁으로 외세를 축출하고 한국사에서 삼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민족단일국가를 성립시켰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외세를 개입시켜 고구려 영토의 상당부분을 상실하여 통일로 간주하기에 불완전하다는 부정적 평가가 병존한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발해(698년 ~ 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신라의 통일은 고구려의 영토를 상당부분 상실했다는 점에서 영토적인 면에서 분명 한계가 있었으나, 한반도 내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단일국가 수립의 기반이 되어 한국사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통일 이전[편집]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과 관제를 반포하고,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불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내부의 결속을 다지며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 신라는 금관가야를 흡수하였고, 국호를 사로국, 서라벌에서 덕업을 일신에 망라한다는 뜻의 '신라(新羅)'로 개칭하여 삼국 통일의 의지를 드러냈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진흥왕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킴으로써 한강 유역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동북쪽으로는 함경남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진흥왕 집권 이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의 삼국 간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던 기간에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야계 세력의 필두인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에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전개 과정[편집]

가야의 멸망[편집]

신라는 532년가야 연맹의 중심국인 경상남도 김해진해 지역에 있던 금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구의 영역을 복속시켰고, 562년에는 최종적으로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낙동강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한편, 이후에도 가야 연맹이 있던 지역에서 반발의 기운이 일자, 신라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김유신의 증조부)의 후손 등을 진골 귀족으로 편입시켜 가야계의 반발을 희석시키기도 했다.

백제의 멸망[편집]

고구려가 ·과 혈투를 전개하는 동안,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대백제 전선(對百濟戰線)의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현재의 합천)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는 모험 외교를 감행하였으나, 고구려가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당 고종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진공케 하니, 당군은 백강(白江) 좌안(左岸)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 대전의 동쪽)을 넘어서게 되었다.

당시 의자왕은 거듭되는 승전에 교만해져 향락에 젖어 있었고, 조정은 간신들이 사리(私利)를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성충(成忠) · 흥수(興水) 등 충신은 축출되었다. 백성은 거듭되는 전쟁에 지쳐 정부로부터 이반(離叛)되어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이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분패하고, 사비성은 당나라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결국 의자왕은 당나라에 항복하고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다.

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유신(遺臣)의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고 흑치상지 등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군사를 일으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고 사비성 · 웅진성 등을 포위 · 공격하여 당군(唐軍)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의 재침과 부흥군의 내부 분열로 주류성이 함락되고, 부흥군은 계속 패배하여 4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도 종말을 고하였다.

당나라는 옛 백제의 영토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편집]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항전으로 이를 분쇄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전쟁에 의한 전력 소모와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로 민심이 이반되었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 및 아들들 간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세가 급격히 쇠락하였다.

이를 틈타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나서고 신라군도 이에 호응하여 남쪽에서 공격하니 고구려는 1년간 항쟁을 계속하다가 668년(보장왕 2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검모잠(劒牟岑) 등이 왕족 안승(安勝)을 받들어 약 4년 동안 부흥운동을 계속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옛 고구려의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통일의 완성[편집]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그 지역에 5도독부(五都督部)를 두는 한편, 663년(문무왕 3년)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그 지역에 9도독부(九都督府)를 둠과 동시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총괄케 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나라의 축출을 꾀하고, 백제의 옛 땅에 군대를 출동시켜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하였다. 신라는 671년(문무왕 11년)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674년, 당나라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에 대한 전면적 무력침공에 나섰다.

신라는 67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元山灣)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 때 백제의 사비성이나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킨 것은 당나라 군대였다. 신라군이 역할을 한 것이 없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 영역을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으로 간주해서 도독부를 각각 5개, 9개 설치했다. 심지어 3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마저 자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해서 '계림 대도독부'로 만들었다. 이에 신라는 백제 영역을 편입시키기 위해서 당나라와 싸웠다. 나당 전쟁이 전부 백제 영역에서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는 처음부터 고구려 땅을 접수할 의사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라의 통일은 삼국 통일이 아니라 이국 통일이다. 고구려가 제외되기 때문이다.

비판[편집]

'통일신라설'은 그동안 정설처럼 여겨져 왔으나, 발해에 대한 관심이 확산됨에 따라 대한민국에서는 '통일신라설'보다 '남북국설'이 새로운 정설로 자리잡는 중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추진중인 동북공정에 따르면 여전히 '통일신라설'을 옹호하며, 발해는 연해주와 만주 등지에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수립된 흑수말갈(여진족)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 삼국 시대를 이루던 고구려백제, 그리고 신라는 한국사에서 함께 다루어지고는 있으나, 처음부터 하나의 공동체였다가 분열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신라는 삼국 간의 주도권 경쟁에서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공동의 목표를 달성했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서기 900년견훤이 신라 서남부에서 봉기하여 후백제로 분열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삼국 시대를 수습하고 통일한 왕건고려가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이루어낸 국가라는 인식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주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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