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Dharma Wheel.svg

한국불교

역사
삼국 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고려 조선 현대
사상
이제합명 불국토 호국
일심 화쟁 무애 화엄
유식 정토 교관 정혜 무심
돈오점수 돈오돈수
인물
승랑 원광 자장 원효 의상
원측 제관 의천 지눌 나옹
휴정 경허 성철 숭산
종파 · 목록
5교9산 5교양종 선교양종
조계종 조동종 진각종
진언종 천태종 태고종
대장경 · 소의경전
고려대장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논서 · 주석서
간화결의 금강삼매
기신론소 직지심체
정혜결사 천태사교
해심밀경소 법계도
사찰
삼보사찰 오대총림
분황사 황룡사
v  d  e  h

이차돈(異次頓, 지증왕 2년(501년)[1]? 지증왕 6년(505년)[2]?~법흥왕 14년(527년) 9월 15일(음력 8월 5일)[3])은, 신라 법흥왕(法興王)의 근신이다.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염촉(厭觸) · 염촉(猒觸) · 이처(伊處) · 처도(處道)라는 다른 이름 표기도 소개되어 있다.

신라의 불교 전래 과정에서 있었던 재래 종교와의 갈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꼽힌다.

《삼국사기》의 이차돈[편집]

《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4년(527년)조는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계림잡전(鷄林雜傳)》을 인용하여,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당시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4] 이때 이차돈이 나서서 불교를 공인할 것을 적극 주장하며[4] 자신을 죽임으로서 왕의 위엄을 세우고 신하들의 반대를 가라앉힐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불교를 공인할지의 여부를 의논하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차돈이 나서서 찬성하였다. 왕은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이차돈 혼자서 찬성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를 처형할 것을 명했다. 이차돈은 죽기 직전에 "부처께서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목이 베여 떨어지는 순간 붉은색이 아닌 흰색의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 대신들은 이후 불교를 받들려는 것에 어떠한 반대를 하지 못했고,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이차돈[편집]

《삼국유사》권제3 흥법(興法)제3 '원종흥법염촉멸신'조는 헌덕왕(憲德王) 9년(817년)에 작성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과 《향전》의 두 가지 자료를 인용하였다. 불교를 공인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친 법흥왕에게 사인(舍人) 염촉이 나아가 "거짓 명령을 전한 죄를 물어 신을 형벌에 처하여 목을 베시면 만백성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하교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청했다. 왕은 염촉의 말대로 온갖 형틀을 갖추어 놓고 신하들을 불러 "과인이 절을 짓겠다는데 왜 일부러 늦추느냐?" 라며 꾸짖었고, 신하들은 겁에 질려 그런 일이 없다고 변명했다는 기록과 함께, 주석으로 처리된 《향전》에는 거꾸로 염촉이 왕명을 내세워 절을 지으라는 뜻을 신하들에게 전하자 신하들이 달려와 왕에게 반대하고 나섰고 왕은 염촉이 왕명을 거짓으로 전달했다며 염촉에게 책임을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5]

왕은 염촉을 불러 꾸짖은 뒤 처형했고, 염촉은 죽음을 앞두고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시므로 나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인연을 버리오니, 하늘은 상서로움을 내리시어 사람들에게 두루 보이소서"라고 맹세하였다. 그의 베어진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치고 하늘은 어두워지면서 석양이 그 빛을 감추었고 땅이 흔들렸으며 비가 떨어지는 등 온갖 자연현상들이 일어났으며, 베어진 염촉의 시신은 북망산 서쪽 고개에 묻히고 아내가 그의 명복을 위해 자추사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자추사가 세워진 땅은 《향전》에 따르면 염촉의 목이 베여 날아가 떨어진 자리였고, 자추사는 훗날 백률사(栢栗寺)라 불리게 되었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에는 흥륜사(興輪寺)의 금당에 신라 불교의 성인 10인의 소상이 동서 벽에 안치되었는데, 동쪽 벽에 서쪽으로 보도록 안치된 다섯 상 가운데 하나가 염촉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차돈의 가계[편집]

이차돈(506~527)의 가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왕족인 것으로 추정되며, 성씨는 김씨라는 설과 박씨라는 설이 존재한다. 김씨 설에 의하면 내물왕(재위 356~402)의 아들 습보 갈문왕(?~?)의 후손이고, 박씨 설에 의하면 흘해왕(재위 310~356)의 후손이 된다. 그러나 흘해왕과는 무려 200년의 차이가 나므로 4대손이 되기에는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 증조부 : 종(宗), 아진찬을 역임
  • 조부 : 공한(功漢)
  • 아버지 : 길승(吉升)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삼국유사》는 이차돈의 가계를 설명하면서 대나마 김용행이 지은 《아도본비》의 비문을 인용하였는데, 비문에는 이차돈이 사망하던 법흥왕 14년(527년) 당시 26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자료인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과 비교하면 4년 정도 차이가 난다.
  2. 《삼국유사》에는 그가 사망하던 법흥왕 14년(527년) 당시 22세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기록에서 이차돈의 생년을 역산해볼 수 있다.
  3. 《삼국유사》는 신라에서 고을의 장로들이 매달 이차돈의 기일 아침이 되면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날이 8월 5일로 사인(이차돈)이 불법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날 새벽이었다고 설명한다. 헌덕왕 9년에 해당하는 당 원화 12년 정유(817년)에 신라의 불교계 인사와 고위 대신들이 이차돈의 무덤을 수리한 날도 8월 5일이며, 흥륜사의 영수(永秀)라는 선사가 매달 5일에 이차돈의 무덤을 예불하고 분향할 향도들을 모아 계를 맺고 지은 것이 《촉향분예불결사문》으로, 《삼국유사》가 이차돈의 행적을 기록하는 주요 텍스트가 되었다.
  4.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이차돈의 순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삼국유사》는 법흥왕이 이차돈에게 명하여 지은 절인 흥륜사(興輪寺)는 천경림(天鏡林)이라는 숲이 있던 자리였고, 법흥왕 14년 정미(527년)에 처음 터를 닦은 뒤 22년 을묘(535년)부터는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하는데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 공사에 충당했으며 주춧돌과 돌함까지도 천경림에서 가져다 썼다고 설명한다. 천경림은 이름에서도 보이듯 재래의 천신 숭배와 관련이 깊은 곳이었으며, 불교를 받드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 대부분은 이러한 재래의 토속신앙을 숭배하고 있었기에 이를 왕에게 항의한 것이다.

참고 문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