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드라마에 대해서는 연개소문 (드라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연개소문 | |
![]() |
|
| 출생 | 603년 |
|---|---|
| 사망 | 665년 |
| 국적 | 고구려 |
| 직업 | 군인, 대막리지 |
연개소문(淵蓋蘇文, 603년[1] ~ 665년?~ 666년? [2])은 고구려 말기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일명 개금(蓋金)으로도 불린다.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열전에는 당 고조 이름(李淵)의 연(淵)을 피하기 위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쓰기도 하였다. 제1대 대막리지이기도 하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정변
아버지인 연태조는 동부(東部 : 혹은 서부라고도 함)의 대가 및 대대로(大對盧) 직을 지냈고, 그의 사후 연개소문이 그 자리에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하였다.
연개소문은 이에 반대파에게 한수 굽히며 대대로 자리에 간신히 올랐고, 취임 즉시 재차 대당(對唐) 강경책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류왕이 당나라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펼치며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크게 반발하게 되었다. 631년(영류왕 14)에 천리장성을 쌓자 이를 감독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642년, 당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진대덕이 병법과 지리에 능하다는 점을 들어 염탐하러 온 것이라 주장하며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이었고, 당나라는 고구려 태자에 입조한 것에 대한 것이라는 명분을 세웠다. 그러나 영류왕 등의 온건파는 연개소문의 주장을 무시하고 진대덕을 환대했다. 훗날 이 때문에 전쟁이 터지게 된다.
한편 영류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고 모의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사전에 눈치를 채어 성 남쪽에 대신 1백여 명을 자신이 통솔하는 군 사열식에 초대하여 모두 살해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시신을 토막내어 구덩이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3]
그해에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한 뒤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인척들을 모두 요직에 앉혀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연개소문의 고구려 내 권위는 엄청났는데, 《삼국사기》 열전은 그가 몸에 오도(五刀)를 차고 다니며, 말을 오르내릴 때는 귀족이나 무관을 엎드리게 하였다고 기술하면서 그의 독재자의 모습을 비판하여 묘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인이 주변 민족에 대해 쓴 《한원》(翰苑)을 보면 고구려인들은 누구나 오도를 차고 다닌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집] 당나라와의 전쟁
고구려-당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백제와 함께 신라를 쳐 당항성을 빼앗았다. 한편으로는 643년(보장왕 2) 당나라의 숙달(淑達) 등을 초청하여 도교를 퍼뜨리고, 평양에 용인성을 쌓았다. 자주 신라를 침공하니 신라의 요청으로 당 태종은 고구려·신라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려고 사신 장엄을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당나라 사신을 구금까지 하였다. 이 무렵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사마르칸트에 파견한 밀사로 추정되는 고구려 사신들의 모습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져 있다.
화가 난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년) 음력 12월에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을 걸고 군사를 내어 직접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당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음력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음력 6월에 함락당하고 당군은 안시성으로 향했다.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을 보내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출전시켰으나 안시성 동남쪽 주필산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당군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에 실패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보급로가 끊긴 당군은 고구려 군의 공격에 급하게 요택으로 퇴각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를 두고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660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1년 고구려를 침략해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아들 연남생을 막리지에 임명하여 압록강에 보냈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개소문은 사수 전투에서 접전을 벌여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죽이는 등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전멸시켰다. 이후 장남 연남생에게 대막리지를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직인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에 올랐으며, 몇 년 후 사망하였다. 사망연도는 여러가지 나뉘어져 있는데 657년, 662년, 665년 등이 있다 그중 그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665년사망설이 가장 유력하다.
[편집] 가족
아버지는 동부의 욕살이자 막리지인 연태조(淵太祚)이며, 할아버지는 연자유(淵子遊), 증조부는 연광(淵廣)으로 모두 막리지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우로는 연정토가 있고, 장남 남생(男生)과 차남 남건(男建), 삼남 남산(男産) 등 세아들을 남겼다. 남생은 본처가, 남건과 남산은 배가 다른 여인이 낳았다.그는 세 아들에게 “형제들이 화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사후(死後), 삼형제는 골육상쟁으로 서로를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편집] 평가
연개소문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의 서긍(徐兢)은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하고 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정벌하여 위엄이 요동에 떨쳤다고 평가하였다. 1879년 조선 고종은 연개소문이 임금을 살해한 역적으로 천자가 이를 징벌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임금을 죽인 역적이며, 고구려의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기록한 반면,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유교사상의 지배를 받던 조선시대까지 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민족의 자주정신이 요구되던 20세기 자주적인 혁명가로 평가받고있다.[4]
[편집] 대중 문화 연개소문
중국의 소설가 김용은 ‘<규염객전>이야말로 무협의 원형’이라고 평가했는데, 규염객은 연개소문라는 정황상 근거가 있다.[5][6]
- KBS의 드라마 <삼국기>에서 조경환이 연개소문 역을 맡았다.
- SBS의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유동근과 이태곤이 연개소문 역을 맡았다.
- KBS의 드라마 <대조영>에서 김진태가 연개소문 역을 맡았다.
- 영화 황산벌에서 이원종이 연개소문 역을 맡았다.
- 영화 평양성에서 황산벌에이어 이원종이 연개소문 역을 맡았다.
[편집] 주석
- ↑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에 집권할 때 그는 15세였다.
- ↑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 傳》, 바다출판사, 2003.
- ↑ 김부식,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 1145년
- ↑ 인물한국사 연개소문
- ↑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유일한 중심인물 국정브리핑 2005년 10월 10일
- ↑ 이사람“무협소설은 동양적 정서를 담아내는 그릇” 경향신문 2008년 2월 2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