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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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魯迅

출생 1881년 9월 25일
청나라 청나라 저장 성 사오싱
사망 1936년 10월 19일 (55세)
중화민국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사인 병사
거주지 중화민국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국적 중화민국 중화민국
학력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중퇴
직업 소설가, 문학가
활동 기간 1905년 ~ 1936년
소속 중화민국 광저우 중산 대학교 교수
배우자 주안(1번째 부인)
쉬광핑(2번째 부인)
자녀 저우하이잉(아들)
친척 저우쭤런(아우)
저우젠런(아우)
쉬충즈(처숙부)
쉬충하오(차종숙)

루쉰(노신, 중국어 정체: 魯迅, 간체: 鲁迅, 병음: Lǔ Xùn, 1881년 9월 25일~1936년 10월 19일)은 중국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저우수런(중국어 정체: 周樹人, 간체: 周树人, 병음: Zhōu Shùrén)으로, 자는 예재(豫才)이고 루쉰은 어머니쪽 성을 따서 지은 필명이다. 이외에 당사(唐俟), 파인(巴人) 등 수십 가지의 필명을 사용했다.

문학가이자 일본문화연구가로 알려진 저우쭤런(周作人)과, 생물학자 저우껀런(周建人, 1888년~1984년)은 그의 남동생이다.

대표작으로 『아큐정전(阿Q正伝)』,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이 있는데, 특히 단편 『광인일기』는 신문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그때까지 문어(文語)가 중심이 되던 중국 문학에서 백화(白話)를 중심으로 했다는 점, 제국주의 침략에도 국민의 생활을 개선해주지 못하는 구식 예법제도의 무능과 그 숨막힘의 질식에 치여 서로가 서로를 은폐하며 잡아먹을 수 밖에 없던 구도덕 사회의 병태 혹은 그늘을 광인의 시각을 가져다 깨우쳐보고자 했으며 큰 반향을 얻었다.

생애[편집]

저장 성(浙江省) 사오싱 시(紹興市)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중앙정부의 내각중서(內閣中書)였기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유년기 이름은 아장(阿長)이었고, 학명은 장수(樟壽), 자는 예산(豫山)이었는데, 학당에 들어가면서 자를 가지고 '우산'(雨傘)이라고 놀림받자[1] 예재(豫才)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소년 시절 할아버지가 지역 과거시험의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마저 동네 의원의 잘못된 처방으로 병사하면서 집이 몰락했고 생활고를 겪었다. 17세 때는 난징 시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이라는 군사학교에 들어갔는데, 군사학교를 경시하던 당시의 사회풍조 때문에 이름을 장수에서 수런(樹人)으로 바꾸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서양식 설비와 교과목을 갖춘 광로철로학당(磺務鐵路學堂)에서도 국비지원을 받아 그곳에서 공부를 했고, 엄복(嚴復)이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중 일부를 번역한〈천연론〉(天演論)을 우연히 접하고 사회진화론과 같은 서양 근대사상의 영향도 받았지만, 그는 엄복과 대치되며 민중에 관심을 돌리고 현실 문학과 투쟁가의 길을 택하였다.

광로철로학당 졸업 후 22세 때 관비유학 자격을 얻어 일본으로 유학, 고분학원(弘文學院)에 입학해 일본어와 과학 기초지식을 배운 뒤 1904년 9월부터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2]에서 수학한다. 이 무렵부터 사상적으로는 혁명파에 속하여 반청(反淸)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에도 가입했다. 그러다 2학년 때 환등기를 이용해 수업하던 세균학 수업에서 수업중 보여주던 시사 관련 자료 가운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 일본군에게 간첩 혐의로 잡힌 중국인이 사형당하는 장면과 그것에 분개하기보다 자기일로 여지지않던 동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라가 어려운데 분개하지 않고, 사형장면마저 구경거리로 여기는 민중 정신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을 선택, 도쿄로 옮겨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3](《납함》 자서)

당시 일본의 관립학교에서 중국인 유학생의 입학은 청나라 공사(公使)의 추천서를 통해 이루어졌고(중학 이상의 학력 조건이 붙었다), 시험 없이 입학한 루쉰이었지만 당시 의학전문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조차 졸업시험까지 가는 경우는 입학자 100명에 졸업 응시자 50명꼴로 드물었으며 루쉰처럼 1년 7개월 만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입학한 첫 해 시험에서 루쉰은 백 명 가운데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낙제 없이 받은 성적이 60점 정도였으며, 그는 400엔이라는, 당시 중학교 교사의 수입을 넘는 거액의 장학금을 받았다. 이러한 와중에 학과 공부 대신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소설 읽기에 열중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유흥에 빠지기도 했던 루쉰은 "나는 당시 뜻만큼 공부하진 못했다"고 그 자신 역시 술회하였다. 그는 2학년에 올라간 뒤는 기말 시험 성적에 대해 일본인 동기생들이 억울하게도 '시험 문제 유출이 있었다'고 의심받는 일도 있었는데, 입학 첫 해부터 담임을 맡아줬던 해부학 후지노 겐쿠로(藤野嚴九郎) 교수가 호의로 루쉰의 노트에 첨삭을 해주었다는 점도 그런 의심을 받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중국 유학생인 루쉰 자신이 일본에서 어학 능력에 대한 차별 감정을 느끼던 차에도 중국 동포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보게 된 것도 루쉰이 진로를 다시 생각하게된 계기의 하나가 되었을지 모른다.

1906년 3월에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을 퇴학하고 도쿄 생활을 시작하지만, 문필 활동은 미뤄둔 상태였다. 이때 친구 진셴동(錢玄同), 즉 진신이(金心異)에게 루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령 철로 밀폐된 방이 있다고 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방일세.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곤히 잠들고 있어. 그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가 다 질식해 죽어버릴 것일세. 그러나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옮겨가는 거니까 죽음의 슬픔은 느끼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자네가 지금 큰 소리를 쳐서,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들을 깨웠다고 하면, 그들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의 길이 없는 임종의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꼴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는 당시 자신이 마주했던 중국을 결코 단번에 부술 수 없는 철로 밀폐된 방과, 그 안에서 깊은 잠에 빠진 채 질식해 죽어갈 사람들에 비유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품은 소설 따위는 안 쓰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는 의문이었다. 진신이는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눈뜬 사람이 몇이라도 있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때려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루쉰은 이러한 말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첫 번째 소설 『광인일기』를 쓰게 되었다고 글에서 썼다(『납함』 자서). 잠시 귀국한 루쉰은 어머니가 소개해 준 세 살 연상의 주안(朱安)이라는 여성 혼례를 올렸으나 2주 후 아우인 저우쭤런과 함께 다시 도쿄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발간을 계획했던 잡지 「신생(新生)」은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었으나, 「하남(河南)」이라는 잡지에 2년 간 '파악성론(破惡聲論)',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마라시역설(魔羅詩力說)' 등 강렬한 개성과 반항으로 민중을 일어서도록 하는 '정신계의 전사(戰士)'의 출현을 호소하는 문장을 썼고, 또한 동부 유럽 여러 나라의 단편 번역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을 저우쭤런과 공역으로 출판했다.

1909년 귀국하여 향리에서 교원으로 있으면서 외국 소설 번역과 중국 고전을 연구하였다. 항저우와 샤오싱 등을 거쳐, 1912년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중화민국 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의 교육부원(敎育部員)으로서 참가했다. 이 때 쑨원위안스카이에 의해서 권력을 빼앗김과 동시에 정부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갔다. 그러나 혁명 후 중국에서 맞는 현실에 실망하는 한편, 위안스카이 정부에 대한 반동도 있어 잠시 침묵의 생활을 보냈다. 문학혁명이 개시되자 잡감(雜感)이라고 불리는 사회 비판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구도덕의 통절한 부정, 민중 해방을 제창하게 된 '광인일기'를 1918년에 잡지 「새청년」에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의 출발점을 마련했다(이것은 1911년 시작된 문학혁명 운동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루쉰' 및 아주 많은 필명을 갖고서 문필활동을 본격화하는데 이는 그가 모든 봉건적 전통에 대하여 반항하는 발화점이었다. '미명사'(未名社), '어사사'(語絲社) 등의 문학단체에 의한 문학운동을 일으킴과 동시에 혁명 청년 인력들도 지도하였다. 그는 베이징 대학 등에서 강의한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은 고대 중국의 신화, 전설에서 청말까지의 중국 소설사를 논한 것으로 중국의 첫 소설사로 꼽히기도 하며, 오늘날까지 고전적 가치를 지닌다(그때까지의 중국의 전통적인 문학관에서 근대 소설은 역사나 시문에 비해 그 위치를 아직 확실히 갖지 못하였고 연구가 폭넓게 이뤄지지 않았지만, 루쉰은 이러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며 일찍부터 흩어져있던 소설 단편을 모으는 실증적인 기초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루쉰

이후로 그의 대표작이며 중국 근대문학의 걸작인 「아큐정전」이라는 중국 사회의 현실과 민중 정신의 우매를 담아낸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6년북양 정부와 공산당과 가까운 학생 시민 데모 충돌 뒤 잇따른 충돌 사건을 계기로 베이징을 탈출, 남하하여 샤먼(廈門)을 거쳐 광저우(廣州)로 옮기었으며, 다시 장제스국민당 혁명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 수립 후는 상하이로 옮겼다. 루쉰은 나름대로 장제스 정부와 진보인사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데 노력했다. 상하이에서는 1930년대 초반부터 국민정부와 투쟁을 가속시킨 좌익작가 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는 자유파 작가들과 뿐 아니라 혁명문학파 동료들과도 자주 전투적 설전을 벌였으며 루쉰의 정치적 성격도 전보다 짙어졌다. 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소부르주아'라고 여겼고 투쟁을 통해 민주사회를 달성해야한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사상 • 문학은 중국 민중의 현실에 대한 관심에 찼었지만, 그의 투쟁이 소련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공산당의 반봉건•반제국과 거리를 두고 구미의 선진 문명과 제도에 관심을 돌렸던 근대주의와는 대치되는 입장에 서지만, 그는 외국 사상과 문화를 소개하는 노력도 소홀히하지 않았고 일생 많은 양의 번역, 잡문을 남겼으며 산문에도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위치를 갖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루쉰문학상[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문화 외교의 일환으로 루쉰의 이름을 건 루쉰문학상을 만들어 외국 작가들을 대상으로 수상하였는데, 한국에서는 1988년 「태백산맥」, 「아리랑」을 쓴 소설가 조정래가 처음으로 이 상을 수상하였다. 조정래는 수상 소감에서 루쉰을 자신의 문학적 본보기로 밝히며, "인간다움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문학이 제몫을 해야 한다는 투철한 사회의식, 지식인으로서 문인이 사회 불의를 헤쳐나가는데 얼마나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 등 루쉰의 작가 정신은 제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라며 루쉰을 높이 평가했다.

가족[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雨傘이 豫山의 중국식 발음인 위산과 발음이 같음
  2. 지금의 일본 도호쿠 대학 의학부이다.
  3. 한편 학교에서 하던 세균학 수업의 쉬는 시간마다 환등기를 이용해 상영되던 슬라이드 사진 가운데서 처형 장면을 보게 되었다는 기술도 있다.(《후지노 선생님》)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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