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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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주은래

(중국어 간체: 周恩来, 정체: 周恩來)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제1대 총리
임기 1949년 10월 1일 ~ 1976년 1월 8일
후임: 화궈펑(2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의 제2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임기 1954년 9월 27일 ~ 1976년 1월 8일
전임: 마오쩌둥(1대)
후임: 덩샤오핑(3대)

출생일 1898년 3월 5일(1898-03-05)
출생지 청나라 청나라 장쑤 성 화이안(강소성 회안)
사망일 1976년 1월 8일 (77세)
사망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정당 중국공산당
학력 프랑스 파리 대학교 정치학과 중퇴
별명 자(字)는 상우(翔宇)
아호(雅號)는 비비(飛飛), 오호(伍豪), 소산(少山), 관생(冠生)
종교 없음(무신론)
배우자 덩잉차오
자녀
서명 Zhou Enlai Signature.svg

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어 간체: 周恩来, 정체: 周恩來, 병음: Zhōu Ēnlái, 1898년 3월 5일 ~ 1976년 1월 8일)는 중화인민공화국정치가, 혁명가, 정치 지도자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장쑤 성 화이안에서 태어났다. 톈진 난카이 중학교(지금의 난카이 대학교)와 난카이 대학교을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교, 메이지 대학교 등에서 유학하였다. 중국 난카이 대학교 재학 중 5.4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하고 귀국하여 1924년 황푸 군관학교 정치부 부주임이 되었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일으킨 상하이 쿠테타에 대항해 당시 민중 봉기를 조직하고 난창 봉기광저우 코뮌을 주동하였다.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고 시안 사건 때는 공산당 대표로 국공합작을 이루어냈다. 이후 국민당과의 관계를 담당하였고, 공산정권이 수립된 1949년부터 1976년 1월 8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냈는데 한때 부총리였던 린뱌오(林彪)가 총리 권한대행을 잠시 맡은 일도 있다. 1949년 10월 1일부터 1958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외교부장을 지냈으며 1954년 9월 27일부터는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중국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의장직을 넘겨받아 1976년 1월 8일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정치와 군사를 주관한 반면 그는 외교와 협상, 교육 문제를 분담하였다. 고위 권력자임에도 청렴하였으며 권력자로 행세하지 않았다.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인망을 얻었으며, 만년의 마오쩌둥(毛澤東)은 그를 경계하였으나 2인자임에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마오쩌둥을 성실하게 보좌하여 애국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자(字)는 상우(翔宇)이고 호(號)는 비비(飛飛), 오호(伍豪), 소산(少山), 관생(冠生)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898년 3월 5일 중국 장쑤 성 화이안에서 청나라의 가난한 하급 관료 출신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관리였으나, 봉급은 매우 적었고,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서기 같은 하찮은 직업에 종사하였다. 태어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후사가 없이 사망한 5촌 아저씨(친할아버지의 동생의 아들)의 양자로 입양되어, 어릴 적부터 양할머니[1]로부터 전통적인 고전교육을 받았고, 서당에 다녔다.

유년기에 민족주의적인 사상을 접하게 된 그는 청나라를 이민족의 식민체제로 간주하고 청나라만주족 출신 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워나갔다.

자라난 배경[편집]

10살 이전에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와 양할머니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그는 고향 화이안을 떠나 만주의 선양에 살고 있던 친숙부에게 갔다. 12살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자유와 평등과 같은 서양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해혁명이 터져 청조는 붕괴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1913년 15세 때 중국 톈진난카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1917년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도쿄 호세이 고등예비전문학교(호세이 대학교 부속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틈틈이 고학으로 학비를 조달하였으며 영어를 집중적으로 독학하였다. 메이지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침략적 압력이 중국에 가해지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1919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난카이 대학교 재학 중 5·4 운동에 참가하다 1920년에 체포되었다.

학생운동[편집]

청년 시절의 저우언라이(1919년)

5.4운동을 주도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저우는 이후 톈진난카이 대학교의 철학전공으로 적을 두었으나, 수업에는 자주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군벌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텐진학생연합"의 조직자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저우는 이 조직의 기관지인 《톈진학생연합회보》의 편집인이 되어 활동했다. 1919년 9월, 12명의 남학생과 8명의 여학생으로 "각오사"(觉悟社)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서 후에 부인이 되는 덩잉차오를 만났다. 저우는 남학생으로만 조직된 "톈진학생연합"과 여학생으로만 조직된 "애국연합"을 통합하는 조직책이었다.

1920년 경찰이 인쇄소를 덮치고 "각오사"의 회원을 체포하였다. 저우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끌었고, 이후 다른 28명과 함께 그도 체포되었다. 이후 경범죄로서 풀려났다. 코민테른은 그를 공산당에 가입시켜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당시에는 공산주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 그가 프랑스로 떠난 이후 덩잉차오가 "각오사"를 맡았다.

청년기[편집]

프랑스 유학시절[편집]

1920년 저우와 196명의 다른 중국인 학생들은 상하이를 떠나 마르세이유로 출발했다. 이것은 "근공검학"(勤工俭学) 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에 의한 것으로, "중불 교육위원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파리로 가서 프로그램에 의해 일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위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그들은 급료를 받지 못했고, 저우는 중국신문에 교육위원회와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파리 시절 덩샤오핑과 알게 되어 교유하게 되었다.

저우는 그 동안 영국을 여행하고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학기가 안 맞아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의 산하 학생조직에 가입했고, 1922년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이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을 여행하면서 중국 유학생들을 공산당 산하단체인 "공산주의청년단"에 모집하고 그들을 선발하여 모스크바에 유학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의 활동은 당에서 인정 받아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자 국민당과 함께 통일전선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1924년 홍콩을 통해 광저우로 돌아왔다.

제1차 국공합작 시절[편집]

1924년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부주임 시절의 저우언라이.

1924년 1월 쑨원은 공식적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연대를 선언했고, 중국 각지에 할거하던 군벌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장교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 열강에 의해 고립되었던 소련과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어 고립을 탈피할 기회로 보고 무기와 자금, 군사고문단을 지원했다. 10월에 저우는 이 학교의 정치부 부주임으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교장은 후에 저우와 대결하는 장제스였다.

저우는 곧 국민당 우파가 국공합작을 극렬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 국민당 자체가 군벌의 연합체라는 것을 깨닫고 이들의 배신에서 공산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체 병력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그는 황푸군관학교에서 부교장을 맡고 있던 다른 공산당원 네룽전과 함께 생도들을 포섭하여 중국공산당원에 가입시켰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직후, 천츙밍이라는 군벌이 광저우를 점령하였다. 저우는 생도들을 이끌고 천에 대한 토벌에 나서 승리했다. 그래서 황푸군관학교의 군법회의 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저우는 여세를 몰아 다시 승리하고 산터우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산터우와 인근지역에 대한 특별행정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를 이용하여 그는 비밀리에 공산당의 세포조직을 심었다. 이해 8월 덩잉차오와 5년간의 원거리 연애를 청산하고 결혼하였다.

국공 합작의 실패[편집]

쑨원의 사후, 국민당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의 삼두정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곧 좌파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었고, 장제스는 이를 기회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당의 우파를 통합하여 자신의 지휘 아래 두었다. 1926년 3월 18일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상하이에 있는 동안 장은 당에 있던 좌익을 추방하고 당권을 장악할 음모를 꾸몄다. 장은 국민당군의 군함 중산함의 함장과 선원이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는 구실을 들어 이들을 모두 체포했고, 더 나아가 네룽전을 포함한 황포군관학교의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다.

비상사태와 통행금지가 선포되었고, 산터우에서 돌아온 저우도 48시간 동안 체포구금되었다. 저우는 풀려나면서 장을 대면하였고, 장에게 저우는 "국공합작의 단결을 방해하는 일이다"라고 비난했으나, 장은 일부 공산당 과격세력의 음모를 분쇄한 것일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상해로부터 돌아온 보로딘은 장을 신뢰했고, 저우가 성급했다고 힐난했다. 장의 요구에 의해 보로딘은 국민당적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원의 명부를 장에게 넘겼다. 이 명부에 빠졌던 당원은 저우가 비밀리에 모집한 당원들이었다. 장은 모든 공산당원 장교들을 해임하였고, 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국민당 거두 왕징웨이도 유럽으로 보내버려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저우도 다른 공산당원 장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상하이에서 옌안으로[편집]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자 그는 상하이로 와서 선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926년 상하이에 대한 국민당의 공세가 시작되자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주도하여 국민당군이 상하이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 수 있도록 원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시의 주도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시를 점령하자 범죄조직인 청방삼합회를 동원하여 백색테러를 주도, 자신을 원조했던 노동자들을 체포처형하였다(4.12사건 참조). 이를 기화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각지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일어났다.

1940년의 저우언라이

저우는 1927년 8월 1일 허룽과 함께 난창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홍군이 있던 장시 소비에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우는 교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28인의 볼셰비키" 그룹 대신 농촌혁명을 우선시하는 마오쩌둥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권을 잡고 국민당군에 정규전으로 맞서 큰 피해를 낸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몰락하고 장정 기간중 마오가 당권을 장악하자 그는 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군벌 장쉐량이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연대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사건이 벌어지자, 저우는 교섭자로 나서 장제스를 석방하는 대신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다시 재건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후 저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국민당 정부가 있던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물렀다.

정치 활동[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편집]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저우는 총리 겸 외교부장을 맡아 국제 외교무대에서 활약하였다. 1955년 제네바 회의반둥 회의에 중국 대표로 활약하였다. 이때 중국본토에서 대만으로 쫓겨간 국민당에서 그를 암살할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무사히 벗어났다. 이후 인도, 인도네시아,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와 함께 비동맹회의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58년 천이에게 외교부장을 넘겨주지만, 총리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맡았다.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의 혼란의 와중에도 그는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은 처신으로 총리 자리를 유지했다.

통합 노력과 실패[편집]

1972년 베이징에서 헨리 키신저(왼쪽)와 환담을 나누고 있는 마오쩌둥, 가운데는 저우언라이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한 닉슨 대통령을 영접하는 저우언라이

1970년대에는 미중 국교정상화를 주도하였다. 미국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2] 저우언라이 자신도 미․중 정상회담에 마오쩌둥을 대신하여 주된 상대로 나서 상하이 코뮤니케에 공동서명하였다.

그는 말년에 자신에게 방광암이 발병한 것을 알고,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1974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갈 무렵에는 저우 자신이 마오와 사인방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총리직 사퇴를 만류하는 주변의 요청에 따라 정계에서 은퇴하지 못하고 계속 정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1월 마오에 8개월 앞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 정책을 추진하던 중국 정부의 뜻답게, 시민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중국에 뿌려졌다. 저우는 지위에 욕심내지 않고 2인자로서 마오쩌둥을 보필하였으나, 일설에는 마오가 저우가 자신보다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 텐진에는 이후 저우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세워졌다.

저우의 동상

텐안먼 사태[편집]

저우의 죽음은 마오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4인방에게 희소식이었고, 그를 존경하던 많은 중국의 인민들에겐 슬픈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저우를 기리기 위해 텐안먼 광장에 모인 추모인파가 4인방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자, 4인방은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4인방은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돌렸고, 덩샤오핑은 자리를 물러나 마오쩌둥 사후 4인방 체포 때까지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다.

평가와 비판[편집]

평가[편집]

노련한 외교관으로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헌신적인 혁명가로서, 그리고 실용적 정치가로서 중국 현대사에 남긴 그의 족적은 매우 크다. 그의 삶은 현대적인 공산주의 혁명가의 삶과 관리집안 출신으로 "최후의 만다린(궁정관료)"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삶이 교차하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그는 마오의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을 자신의 권한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도록 노력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홍위병들의 파괴으로부터 많은 문화유적지들을 보호하고, 숙청인사들을 보호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여성 편력은 깨끗하였다. 마오를 비롯한 많은 중국 지도자들의 비행이나 추문에 대한 사후 폭로나 비화가 잇다르고 있지만, 저우언라이는 이들과는 달리 청빈하고 성실한 삶과 근무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비판[편집]

그러나 자신이 구할 수 있는 동료들의 죽음을 방관한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비밀로 분류된 중국공산당의 서류들을 접할 수 있었던 전기작가 가오원첸이 홍콩(香港)에서 펴낸 저서에 의하면, 저우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의 행보를 완화시켰다는 통설과는 달리, 마오에 굴복하여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일관,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숙청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그와 아내 덩잉차오(鄧穎超)는 자식이 없어서, 혁명기간 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 중 유명한 이는 후에 총리를 지낸 리펑(李鵬)이 있다.

사후[편집]

가족 관계[편집]

저우언라이는 중국 장쑤 성 화이안에서 하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5촌 아저씨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유년기에는 양할머니(원래는 종조모)에게 전통적 고전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기에는 생부의 친동생인 친숙부에게 신식 교육을 받았으며 27세 때인 1925년 8월 8일 중국 광둥 성 광저우에서 덩잉차오(鄧穎超)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학력[편집]

한반도 문제와 관련[편집]

그는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려는 시도를 하던 중국 사회과학원에 경고를 표하였으며, 이는 훗날 동북공정으로 나타나게 되는 중국의 국수주의를 우려한 바 있다.[3] 1963년 6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을 42일 간 방문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공식 사과하기도 하였다.[4]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실제로는 종조모
  2.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7쪽. ISBN 978-89-91965-12-6 “1971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뤄진 이후에는 점차로 외교적 기반을 상실해갔다.”
  3. donga.com[뉴스]-[다시 보는 한국역사]<3>저우언라이가 털어놓은 진실
  4. 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참고서적[편집]

  • 황보종우 (2003년 9월 1일).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사전》. 청아출판사. ISBN 978-89-368-0097-0
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제1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총리 National Emblem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
전 임
저우언라이(정무원 총리)
1954년 9월 27일 ~ 1976년 1월 8일 후 임
화궈펑
저우언라이 · 화궈펑 · 자오쯔양 · 리펑 · 주룽지 · 원자바오 · 리커창
전 임
마오쩌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54년 - 1976년 1월 8일
후 임
덩샤오핑
전 임
없음
제1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1949년~1958년
후 임
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