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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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힐다 대처
Margaret Hilda Thatcher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
영국 영국제52대 총리
임기 1979년 5월 4일~1990년 11월 28일
전임: 제임스 캘러헌(제51대)
후임: 존 메이저(제53대)

출생일 1925년 10월 13일(1925-10-13) (86세)
출생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링컨셔 주
정당 보수당
학력 서머빌 칼리지
종교 감리교
배우자 데니스 대처 경
자녀 카롤 대처
마크 대처

마거릿 힐다 대처 남작(Margaret Hilda Thatcher, Baroness Thatcher, LG, OM, 1925년 10월 13일~)은 영국정치인이다.

목차

[편집] 생애

런던 북부 지방에서 식료품집 둘째딸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 화학과를 졸업했다.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해, 29세 때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34세 때 의회에 처음 들어갔고, 1970년 당시의 히드 수상에 의해 교육상이 됐다. 1975년,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보수당 여당수가, 1979년 총선거에서는 노동당의 캘러헌 전수상을 누르고 첫 여수상이 됐다. 지속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1987년 총선거에 의해 3선 되었으며, 영국 역사상 최다임기를 역임한 총리이다 . 1992년 남작작위(비세습)를, 1995년 가터 훈장(LG)을 받았다. 저서로는 <권력에로의 길>이 있다. [1]

[편집] 정치가로서의 대처

1979년부터 11년간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재임했다. 그녀가 펼친 경제 정책은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두었으며, 흔히 대처리즘이라고 표현되는데 동시대의 정치 외교적 동지였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인 레이거노믹스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히 반공주의를 추구했다. 그래서 소련에 의해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앨런 무어는 《브이 포 벤데타》에서 대처리즘의 이런 극우적 면모를 통렬히 비꼬았다.

경제적으로는 과감한 시장주의 경제를 도입하여 영국을 영국병으로부터 구하고자 했다. 장기간 이어진 석탄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고 주요 국영 기업을 민영화했으며 사회 복지 혜택을 감축했다. 외교적으로는 영국의 유럽 공동체(EU, European Union) 가입에 적대적이었고,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정책은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의 영국의 경제 호황의 밑바탕이 됐다고 인정받고 있으나, 반대측에서는 빈부 및 지역 격차, 영국 제조업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대처의 경제 개혁 정책은 당시 영국의 경제 문제를 뿌리부터 해소하지 못했다는 비판 역시 받고 있다.

한편, 1982년 28세의 아들 마크가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실종된 뒤 구조됐는데,[2][3] 이로 인해 철의 여인으로 불리던 대처가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2][3]

[편집] 투병

대처는 2002년 경미한 뇌졸중을 겪었으며, 현재 치매증세로 투병중인 것으로 알려졌다.[4]

[편집] 주석

  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자식문제로 가슴앓이하는 유력인사들 한국일보 2000년 07월 07일자
  3. 유력인사들 '무자식이 상팔자?' 한국일보
  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1982541

[편집] 외부 링크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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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제임스 캘러헌
제52대 영국 총리
1979년 5월 4일~1990년 11월 27일
후 임
존 메이저
전 임
로널드 레이건
G8 의장
1984년
후 임
헬무트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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