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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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Willy Brandt
Bundesarchiv B 145 Bild-F057884-0009, Willy Brandt.jpg
독일 독일제4대 총리
임기 1969년 10월 21일~1974년 5월 7일
대통령 구스타프 하이네만

독일 독일의 제5대 부총리
임기 1966년 12월 1일~1969년 10월 21일
전임: 한스 시봄(제4대)
후임: 발터 셸(제6대)

독일 독일의 제4대 외무장관
임기 1966년 12월 1일~1969년 10월 20일
전임: 게르하르트 슈뢰더(제3대)
후임: 발터 셸(제5대)

출생일 1913년 12월 18일
출생지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뤼베크
사망일 1992년 10월 8일 (78세)
사망지 독일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운켈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
종교 독일 개신교회
서명 Willy Brandt signature.svg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국적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시민권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 시민권
노르웨이 노르웨이 시민권
서독 서독 시민권
독일 독일 시민권(최종 국적)
시민권 독일 독일
종교 독일 개신교회

빌리 브란트(독일어: Willy Brandt, 1913년 12월 18일 ~ 1992년 10월 8일)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 (당시 서독) 의 제4대 총리를 맡았으며 1961년부터 1988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끈 정치인이다. 그는 1971년, 동독공산주의 국가들과의 동방 정책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동방 정책으로 동독과 폴란드,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이끌어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기욤 사건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한 이후에도 왕성한 정치 활동을 하였다.

본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독일어: Herbert Ernst Karl Frahm)이었으며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망명 중에 생긴 것이다.

초기 생애[편집]

빌리 브란트는 1913년 12월 8일, 독일 제국뤼벡에서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칼 프람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마사 프람으로, 백화점에서 점원 일을 하던 홀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존 뮐러라는 이름을 가진 함부르크의 한 회계사였는데, 브란트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일주일 중 6일을 근무하는 동안, 그는 어머니의 계부인 루드비히 프람과 그의 두번째 부인인 도라에게서 자라났다.

1932년에 뤼벡의 김나지움을 졸업한 그는 선박 중개업자이던 F. H. 버틀링 밑에서 견습생으로 일하였다. 그는 1929년에 '사회주의 청년단'에 입단하고, 1930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보다 좌익 성향의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입당하기 위해 곧 사민당을 탈당하였다. 1933년에 그는 나치당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선박업에 종사하는 지인들을 이용, 노르웨이로 망명하였다. 1934년에는 국제혁명청년조직사무국 창설에 참여, 서기로 선출되었다.

브란트는 1936년 9월부터 12월까지 군나 가르란트라는 노르웨이 유학생으로 위조해 독일에 거주하였다. 그는 게트루드 마이어의 국외 추방을 막기 위해 뤼벡에서 그녀와 결혼하였다. 1937년 스페인 내전에서 그는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나치 독일은 그의 국적을 박탈하였고, 그는 노르웨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940년 독일의 압력 하의 노르웨이는 그를 체포하였으나 이미 시민권을 획득하였기에 그는 곧 풀려난다. 풀려난 후 그는 바로 스웨덴으로 도피하였다. 8월에 그는 스톡홀름의 노르웨이 대사관으로부터 여권을 받아 정식으로 노르웨이 국적자가 되었다. 12월에는 스웨덴의 부머스파크 대학에서 나치 하의 사민당의 실태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에 점령당한 국가들에 대해 강의하였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망명 동안, 그는 노르웨이어스웨덴어를 터득하였다. 그는 노르웨이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고, 이후 노르웨이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1946년 말에 브란트는 노르웨이 소속으로 베를린에 돌아왔다. 1948년에는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을 정식 이름으로 신청한 후 독일 국적을 재취득하였으며, 사민당에 재입당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독일 통일 이전 빌리 슈토프 당시 동독 총리를 만난 빌리 브란트의 서독 총리 시절 모습(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빌리 브란트)

나치 정권시절 노르웨이스웨덴에서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 1949년 9월에 귀환하였으며, 1961년부터 1969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 서베를린의 시장을 역임했다. 제4대 연방총리로 재임하는 기간(1969~1974)동안, 과거 중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동방 정책을 실시하는 업적을 남겼다.

빌리 브란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1971년에 1970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 사건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그가 당시 진보-개혁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의장이자 그 자신이 나치 정권 독재의 피해를 입은 망명자로서(그의 표현을 빌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책임, 즉 독일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전범 국가의 오명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복권시켜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폴란드 국민들은 서독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고, 일각에서는 브란트 총리의 폴란드 방문 소식에 대해 나치 시절 점령했던 곳을 되돌려받으러 오는게 아니냐며 맹비난을 했었다. 그러나 브란트 총리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은채 고개를 숙이며 운 것을 TV 생중계로 지켜본 폴란드 국민들은 서독에 대해 나쁜 감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1974년,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인 것으로 드러나 수상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사퇴 후[편집]

베를린에 있는 브란트의 묘비

사퇴 후에도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행위원장으로 꾸준히 활약하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 등을 본 브란트는 1992년 10월 8일 운켈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연보[편집]

주석[편집]

  1. 이전까지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이었다.
  2. 당시 그가 포로로 잡혔을 당시 독일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3. 게오르크 키징거와 연립내각 체제 시기를 말한다.

같이보기[편집]

바깥 링크[편집]

전 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제4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
후 임
헬무트 슈미트
전 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제4대 독일연방공화국 외무장관
1966년 12월 1일 - 1969년 10월 20일
후 임
발터 셸
전 임
한스크리스토프 제봄
제5대 독일연방공화국 부총리
1966년 12월 1일 - 1969년 10월 21일
후 임
발터 셸
전 임
오토 주어
서베를린 시장
1957년 - 1966년
후 임
하인리히 알베르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