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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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Carl Friedrich Gauss.jpg
출생 1777년 4월 30일(1777-04-30)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령 브라운슈바이크
사망 1855년 2월 23일 (77세)
하노버 왕국 괴팅겐
국적 독일
분야 수학, 물리학
소속 괴팅겐 대학교
출신 대학 헬름슈타트 대학교
지도 교수 요한 프리드리히 파프
지도 학생 리하르트 데데킨트
베른하르트 리만
요한 베네딕트 리슈팅(Johann Benedict Listing )
프리드리히 베셀
요한 프란츠 엥케(Johann Franz Friedrich Encke)
소피 제르맹
주요 업적 정수론
비유클리드 기하학
천문학
측지학
물리학
수상 코플리 메달 (1838)
서명 Gauss' signature.png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독일어: Johann Carl Friedrich Gauß, 1777 ~ 1855)는 독일수학자이자 과학자정수론, 통계학, 해석학, 미분기하학, 측지학, 정전기학, 천문학, 광학 등 많은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수학의 왕자’, ‘태고 이후 가장 위대한 수학자’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가우스는 수학과 과학의 많은 영역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고 역사상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수학자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가우스는 수학을 ‘과학 중의 여왕’으로 칭하였다. 가우스는 신동이었다. 걸음마를 하던 아이 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십대 시절에 최초의 수학적 발견을 이루었다. 1801년에서야 출판 그의 대표적 저서인 《산술연구》(라틴어: Disquisitiones Arithmeticae)를 21살이던 1798년에 완성하였다. 이 업적은 정수론이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 (1777–1798)[편집]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벽돌 굽는 일을 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가우스의 아버지는 가우스가 자신의 뒤를 이어 벽돌노동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가우스가 수학과 과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가우스는 처음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지원을 받아 공부했고 후에는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공작의 지원으로 1792에서 1795년 사이에 카롤링 학교(라틴어: Collegium Carolinum, 지금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Technische Universität Braunschweig))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후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의 도움을 받아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가 1795년에서 1798년까지 머물렀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가우스는 독립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이론들을 독립적으로 재발견 하였다. 1796년에 그는 변의 개수가 페르마 소수정다각형은 자와 컴파스만으로 작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수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온 작도 문제에서 주요한 발견이었고, 마침내 가우스가 언어학 대신 수학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1796년은 가우스와 정수론 모두에게 가장 생산적인 한 해였는데, 가우스의 가장 큰 기쁨이 3월 30일에 정17각형의 작도법을 발견한 것이다. 가우스는 이 결과에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아르키메데스가 묘비에 원기둥에 내접한 구를 새겼고, 야코프 베르누이가 묘비에 로그 나선을 새긴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묘비에 정17각형을 새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요청은 사람들이 원과 혼동할 것을 우려하여 받아들여지지 않고 17개의 점으로 된 별을 대신 조각하였다. 또 그밖에도 그는 정수론의 영역에서 나머지 연산(modular arithmetic)을 발견했고 4월 8일에 최초로 2차 상호관계의 법칙을 증명해 보였다. 이 놀라운 일반 법칙은 수학자들이 이차 방정식의 해결 가능성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5월 31일에 추측된 소수정리는 소수들이 정수들 사이에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가우스는 모든 자연수는 세 개의 삼각수들로 나타날 수 있음을 7월 10일에 보이면서 그의 일기에 "Heureka! num = Δ + Δ + 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0월 1일에는 다항식의 유한한 영역에서 계수에 따른 해의 개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출판했다.

생애 중기 (1799–1830)[편집]

1799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대수방정식의 근의 존재 증명"을 썼다. 1변수의 모든 유리정함수(integral rational algebraic function)는 1차 또는 2차의 소인수로 분해된다는 것을 보였다. 가우스는 복잡한 숫자들을 넘어 모든 일정하지 않은 하나의 변수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근을 가진다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했다.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를 비롯한 수학자들은 가우스에 앞서 잘못된 증명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가우스의 학술 논문은 달랑베르의 작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에 기준에 따르면, 음수에 기인하여 조단의 곡선 원리를 사용한 가우스의 시도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세 개의 다른 증명들을 내놓았다. 1849년의 마지막 증명은 일반적으로 정확하게 여겨졌다. 그의 시도들은 그 방법에 따라 복소수의 개념을 명백하게 했다.

가우스는 또한 그의 1801년 책인 《산술연구》로 정수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것은 나머지 연산(modular arithmetic)과 2차 방정식 상호관계의 법칙에 대한 첫 번째 증명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다.

가우스의 저서 《산술연구》 표지

같은 해 이탈리아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Giuseppe Piazz)가 세레스라는 작은 소행성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며칠 동안밖에 관찰 할 수 없었다. 가우스는 그것이 다시 발견될 수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타(Gotha)에서 1801년 12월 31일에 차크(Franz Xaver von Zach)에 의해 재발견되었고 하루 뒤엔 브레멘에서 하인리히 올베르스(Heinrich Olbers)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쟈크는 가우스의 지적인 작업과 계산이 없었다면 세레스를 다시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가우스가 공작으로부터의 장학금에 의존했었지만 그는 이 지원을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천문학에서의 연구를 해나갔고 1807년 괴팅겐의 천문학 관측소의 박사 겸 괴팅겐 대학교의 천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1801년 1월 1일 피아치의 세레스 발견은 가우스가 커다란 행성들에 의해 방해받은 미행성의 운동에 대한 이론에 대한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 작업은 천체 운동 이론(라틴어: Theoria motus corporum coelestium in sectionibus conicis solem ambientum, 태양 주위를 원뿔 모양으로 움직이는 하늘 전체의 운동에 대한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1809년에 출판되었다. 피아치는 세레스의 움직임을 단지 두 달 동안 밤하늘을 가로질러 3도 만큼만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 세레스는 태양 빛 뒤로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몇 달 뒤, 세레스가 다시 나타났을 때, 당시의 수학적인 방법들로는 3도(전체 궤도의 1%)의 부족한 데이터로부터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피아치는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23세였던 가우스는 그 문제에 관해 듣고 달려들었다. 석 달 동안 집중해서 작업을 한 뒤에, 그는 세레스의 최초 발견으로부터 약 1년 뒤인 1801년 12월의 위치를 예견했고, 이 예측은 0.5도 내에서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또한 18세기의 궤도 예측에 대한 그 성가신 수학을 합리화했다. 천체 운동 이론(Theory of Celestial Movement)으로 몇 년 뒤에 출판된 그의 업적은 천문학적인 계산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가우스 중력 상수(Gaussian gravitational constant)를 제시했고, 오늘날에 측정 오차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과학에 사용되는 최소제곱법(method of least squares)을 포함하고 있었다. 1809년에 가우스는 정규분포 오차 가정 하에 그 방법을 증명 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은 1805년에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에 의해 더 일찍 설명되었지만 가우스는 자신이 1795년부터 그 방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천문학 소식지(Astronomische Nachrichten)에 실린 가우스의 초상 (1828)

가우스는 놀라운 암산능력을 가졌었다. 그가 세레스의 궤도를 어떻게 예측했냐는 질문에 “나는 로그를 썼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시 그 질문자가 그가 표에 있는 수많은 숫자들을 어떻게 재빨리 보았느냐고 묻자 “그것을 보았다고? 그걸 왜 봐? 난 그냥 머릿속으로 계산했을 뿐이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1818년에 가우스는 그의 계산 능력을 실용적으로 사용하였는데 하노버 주의 측지선을 측량하여 이전의 덴마크 측량들과 연결 지었다. 그는 측량 작업을 위해서 거울로 태양광을 반사시켜 먼거리에서 위치를 측정하는 회광기(heliotrope)를 발명하기도 했다.

또한 가우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출판되지는 않았다. 이 발견은 수학에서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수학자들을 유클리드의 공리들이 기하학을 결함 없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기하학에 대한 이 연구는 우주를 비유클리드적으로 기술하는 아인슈타인일반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다른 많은 연구들을 이끌어내었다.

그의 친구 보여이 퍼르커시(헝가리어: Bolyai Farkas)와 학생들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대한 다른 공리들로부터 평행공리를 증명하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하지만 마침내 보여이의 아들 보여이 야노시가 1829년에 쌍곡기하학이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발견했고 그의 연구는 1832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을 본 뒤, 가우스는 보여이 퍼르커시에게 “이 발견을 축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 자신을 축하하는 것이다. 연구 내용 전반에 걸쳐 대부분이 내가 30세에서 35세 사이에 생각했던 것과 거의 일치한다”고 편지를 썼다.

그 증명되지 않은 진술로 인해 야노시와의 관계가 부담스럽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그 사실이 받아들여진다. 1829년 이전 가우스의 편지들은 그가 평행선의 문제를 어렴풋이 토론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우스의 오랜 제자인 발도(Waldo Dunnington)는 그 사실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가우스는 사실 야노시의 연구가 출판되기 한참 전부터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완전한 소유자였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의 아들과 발견의 선후에 대한 논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를 출판하는 것을 거절했다. 하노버에서의 측량은 미분기하학과 곡선과 면을 다루는 수학 분야에 대한 가우스의 관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1828년에는 곡률의 개념에 대한 중요한 성질을 제시하고 가우스의 빼어난 정리라고 불리는 중요한 원리를 이끌어 냈다. 그 원리는 면의 곡률이 측정 각들과 면의 거리에 따라 완전히 결정지어질 수 있고 곡률은 면이 3차원 공간 상에서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애 후기와 죽음 (1831–1855)[편집]

가우스의 묘

가우스는 1831년 괴팅겐 대학교에 물리학 교수로 취임한 때부터 물리학 교수인 빌헬름 베버와 공동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지구 자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이끌어 내고(부피, 길이, 시간으로 자기의 단위를 발견한 것을 포함해서) 전기 법칙들에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의 회로를 발견했다. 그들은 1833년에 처음으로 전자기식 전신기를 만들어 괴팅겐(Göttingen)에 있는 물리학 협회와 관측소를 연결했고 자기 관측을 위해 관측소에 자기기록계를 제작했다. 그리고 웨버와 함께 자기 학회(magnetischer Verein, magnetic club in German)를 설립했고 이 단체는 세계 곳곳에서 지구의 자기장을 측정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그는 자기장에서 수평밀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은 20세기의 후반에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내부(지각)와 외부(자기권)의 지구 자기장의 원천으로 분리하는 데 수학적인 이론으로 작용했다. 1940년 퍼텐셜에 관한 가우스의 정리를 발견하였다.

가우스는 1855년에 괴팅겐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곳의 알바니프리드호프(Albanifriedhof) 묘지에 묻혔고 가우스의 사위 하인리히(Heinrich Ewald)와 가우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볼프강 자르토리우스(Wolfgang Sartorius)가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다. 그의 뇌는 보존되어 루돌프 바그너(Rudolf Wagner)가 연구하였다. 뇌의 무게는 1492 그램, 대뇌의 부분이 219,588 제곱 밀리미터 (340.362 제곱 인치)이었고 뇌회가 많이 발달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20세기 초에 그의 천재성을 설명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가족[편집]

가우스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1809년에 그의 첫 번째 부인 요하나 오스토프(독일어: Johanna Osthoff)가 일찍 사망하여 우울한 상황에서 곧 그의 아들 루이스도 죽었다. 가우스는 그가 끝내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우울증에 빠져 지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요하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미나 발데크(독일어: Minna Waldeck)와 재혼하였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이 오랜 질병으로 1831년에 사망했을 때 그의 딸 중의 하나인 테레제(Therese)는 집안일을 대신했고 가우스가 죽을 때까지 그를 돌보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817년부터 그녀가 1839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집에서 살았다.

가우스는 일곱 명의 아이를 가졌다. 그와 첫 번째 부인 사이의 아이는 요제프(Joseph,1806–1873), 빌헬미나(Wilhelmina,1808–1846), 루트비히(Ludwig,1809–1810)였다.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는 오이게네(Eugene,1811–1896), 빌헬름(Wilhelm,1813–1879), 테레제(Therese,1816–1864) 3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중 오이게네는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진 후 약 1832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빌헬름 또한 농장을 시작하면서 미국 미주리 주에 정착했고 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구두 사업으로 부자가 되었다. 반면 테레제는 가우스가 죽을 때까지 집에 머물렀고 그가 죽은 후에 결혼했다.

가우스는 미국으로 이민 갔던 두 명의 아들들과 갈등했다. 그는 아들들이 가족의 이름을 더럽히기 때문에 수학이나 과학에 입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가우스는 오이게네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오이게네는 언어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오이게네가 열었던 파티에서 논쟁했고 결국 가우스는 파티 비용 지불을 거절했다. 아들은 화가 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꽤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오이게네는 가우스의 친구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하는 데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성격[편집]

완벽주의자에 대단히 열심히 일하는 학자였다. 아이작 아시모프에 따르면, 어떤 문제와 씨름하던 중, 그의 아내가 아파서 죽어간다는 말을 듣자, “그녀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 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왈도 더닝턴(Waldo Dunnington)의 《가우스, 과학의 타이탄》에도 짧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해설이 첨가되어 있다).

다작(多作)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었으며, 스스로 보기에 완벽하거나 비판을 견디리라고 생각되지 않는 원고는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적인 모토인 "드물지만 성숙하게"(라틴어: Pauca sed matura)에 철저하기 위함이었다. 동시대인들이 대단한 수학적 업적이라고 발표한 것들을 수 년 또는 수십 년전에 그가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이 일기를 검토한 후대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수학사가인 에릭 템플 벨(Eric Temple Bell)은 “만일 가우스가 그의 모든 발견들을 적시에 출판했더라면, 인류의 수학사는 50년은 당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를 따르는 젊은 수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드물게 소수의 수학자들과 협력 작업을 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엄격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학생도 적은 수만을 받았는데 그나마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회는 1828년 베를린에서 열린 모임에만 한 차례 참석하였다. 그런 중에도 그의 제자 가운데 리하르트 데데킨트 , 베른하르트 리만, 프리드리히 베셀 등은 당대 가장 뛰어난 수학자로 성장하였다. 가우스는 우편으로 교류하였던 프랑스의 여성 수학자 소피 제르맹의 능력을 인정하여 명예 학위를 주려 하였다.

업적[편집]

가우스는 정수론, 해석함수, 타원함수, 통계학, 미분기하학, 전자기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위상 수학, 측지학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정수론[편집]

그의 저서 《산술연구》(라틴어: Disquisitiones Arithmeticae)를 통해 일반적인 정수론의 용어에 있어서 혁명적 개선이며 정수의 나누어 떨어지는 개념의 처리를 매우 단순화 시킨 합동합동식 등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1보다 큰 모든 자연수는 소인수들의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한 방법으로 소인수 분해된다는 정수론의 기본 정리를 최초로 증명했고, 레온하르트 오일러장 르 롱 르장드르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엄격하게 증명되지 못했던 이차 상반법칙을 증명해냈다. 이러한 성과를 포함하고 있는 가우스의 《산술연구》는 정수론의 오늘날 체계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최소자승법[편집]

최소자승법은 측정값을 바탕으로 한 결과의 제곱합이 최소가 되는 값을 구하여 측정 결과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발견에 대한 선후 논쟁이 가우스와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 사이에서 일어났다. 최초의 발표는 르장드르가 1806년에 한 것이지만 가우스는 1795년에 그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가우스가 이러한 논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심각한 학문적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후에 가우스의 편지들과 사후에 발견된 논문들을 통해 가우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천문학[편집]

가우스가 과학계에 유명해진 것은 왜행성 세레스의 궤도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피아치에 의해서 발견되었지만 태양 광선 속으로 사라진 세레스의 궤도를 이전의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방법들로는 완전히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우스는 그의 위치 추산력(천체의 매일 매일의 위치가 미리 쓰여진 천문학적 달력)을 바탕으로 세레스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해내었다. 이후 가우스는 그의 방법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새로운 행성이 발견되는 대로 궤도를 계산했다. 그 방법은 천체운동이론으로 발표되었고 이후에 가우스의 제자인 요한 프란츠 엔케(Johann Franz Encke)에 의해서 개선되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가우스 인력상수를 정의했다.

측지학[편집]

측지학이란 용어는 땅을 분할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고 지구표면상에 있는 지점들 간의 상호 위치 관계를 구하는 측량을 위한 학문이다. 이 분야는 천문학과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가우스는 측지학의 문제에 빠져들었다. 18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사업의 학술고문으로 위촉받으면서 곡면론과 관련된 곡률 문제, 등각 사상 이론, 곡면의 전개가능성 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야외에서 측량을 수행하고 감독했으며 회광기와 각을 재는 가우스의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관측은 이전에 비해 한층 더 정확성을 갖게 되었다. 또한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지표면이란 단지 모든 점에서 중력의 방향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곡면이라는 준위곡면을 정의하였고 이는 오늘날 퍼텐셜 이론으로 불리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이론적 연구들은 현대 측지학의 기초가 되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편집]

그리스의 기하학자인 유클리드기하학원본에 있는 기하학적 공리에 따르면, '임의의 직선 위에 없는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오직 하나만 그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가우스는 이러한 평행선을 몇 개나 그을 수 있다는 수행평가에서 출발하여도, 모순이 없는 비유클리드 기하학(2차원의 기하학)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비유클리드 기하학 연구는 발표되지 않았고 후에 가우스의 친구 보여이 퍼르커시의 아들인 보여이 야노시에 의해서 연구되어 먼저 발표되었다.

물리학[편집]

전류나침반 바늘에 영향을 준다는 외르스테드(Örsted)의 발견과 패러데이(Faraday)의 유도 전류 발견을 토대로 가우스는 베버와 함께 전자석 전신기를 만들었다. 전신기의 선은 약 1km에 달했고 전신기를 통해 짧은 메모를 교환했기 때문에 이 장치는 실질적으로 이용된 최초의 전기적 전신기였다.

절대단위에서 '지자기 힘의 측정(라틴어: Intensitas uis magneticae terrestris ad mensuram absolutam revocata, 1832)'이라는 논문을 통해 절대단위계를 도입하여 물리학에서 정량적인 측정에 대한 새로운 원리를 제시했다. 가우스의 새로운 관찰 방법을 통해서 지구의 자기장을 이전에 비해 월등하게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우스와 베버의 단위체계는 1881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센티미터, 그램, 초를 기본 단위로 하는 CGS 단위계로 승인되었다. 그의 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자기력 선속의 밀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가우스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지자기에 관한 일반 이론(독일어: Allgemeine Theorie des Erdmagnetismus, 1838)'을 통해서 지구의 자기장의 원인이 지구 내부에 있다고 했고 나중에 북극의 오로라에 의한 자기 혼란과 같은 다른 요인들도 고려되었다.

천문학 분야에서의 활동을 하면서 망원경 개발과 관련하여 광학을 연구하였다. '빛의 굴절에 관한 연구'에서 가우스는 순전히 기하하적인 방법으로 렌즈들을 조합하여 두꺼운 렌즈에서도 두께를 무시할 수 있는 단일 렌즈에 대해 성립하는 간단한 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모세관 현상과 관련하여 ‘평형 상태에서 유체의 형태론에 대한 일반 법칙’에서 한 방울의 수은 액체를 이용하여 수은의 모세 상수를 구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역학의 새로운 일반 원칙에 관하여’에서 최소작용의 원리와 관련된 논의를 했다.

가우스의 일기[편집]

가우스의 일기는 1796년 3월 30일부터 1804년 7월 9일까지 쓰여 졌고 그가 죽은 후 1898년에서야 발견되었다. 가우스가 발표하지 않았거나 친구들과의 편지에서 간략히 언급했던 매우 많은 양의 수학적 결과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학적 업적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총 146가지의 발견에 대한 간단한 증명과, 계산 결과, 수학적 정리의 단순한 주장 등이 담겨 있다. 이 내용들로부터 대수학, 해석학, 정수론 등에 관한 그의 위대한 발견들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기에서는 가우스가 보여주었던 신중함과 어려움의 가면을 벗어 버렸다. 그는 수많은 발견들을 자신의 엄격함, 아름다움, 종합성에 대한 기준 때문에 발표하지 않았는데 일기를 통해서는 그와는 다른 모습도 보여주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듯이 그는 일기를 통해 '마침내 성공했다(Felicitas novis est facta)', '거인을 쓰러뜨렸다(Vicimus Gegan)' 등의 표현으로 발견에 대한 기쁨과 환희를 나타내었다.

같이 읽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