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500년 그린 자화상.
출생 1471년 5월 21일
독일, 뉘른베르크
사망 1528년 4월 6일 (56세)
직업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년 5월 21일 - 1528년 4월 6일)는 독일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르네상스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화가이고 특히 목판화, 동판화, 수채화 에서 독창한 재질을 보였다.

생활과 창작 활동[편집]

자신의 상의를 입은 모습을 새긴 뒤러의 목판화
자화상 동판화 13세 때 뒤러가 그린 것이다, 1484.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1493) 유화, 파리루브르 박물관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려고 미하엘 볼게무트의 문하생이 되었다. 1490년 부할절[1]에서 1494년 오순절[2]까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오버라인 지역 도처를 편력했다. 생전에 했던 장기 여행 삼 번 중에서 첫 번째였던 이 여정[3]은 알려져 있지 않다. 처음에는 네덜란드나 중부 라인 지역에 머물렀다가 1492년에 엘사스 지역에 머물렀던 듯한 알브레히트 뒤러는 자신에게 커다란 인상을 준 작품을 만든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를 방문하려고 콜마르(Colmar)를 찾아갔지만, 숀가우어가 1419년 2월 2일에 이미 죽어서 부득의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나중에 활동한 바젤에서 세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의 책〈바보배Narrenschiff〉(1494년 초판 인쇄)에 실린 유명한 목판화를 제작했다. 여행에서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4년 아그네스 프라이[4]와 혼인하였다. 오래되고 명망이 있는 뉘른베르크 가문의 출신인 아그네스 프라이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출생하지 않았다. 알브레히트 뒤러와 그사람의 형제 이 명 모두 자식을 얻지 못해서 가문은 대가 끊겨 사라졌다.

혼인하 지 약 3개월이 지난 1494년 10월 초순에 알브레히트 뒤러는 신혼인 아내 아그네스 파리이를 혼자 남겨 두고 베네치아로 여행해, 익년인 1495년에 귀국했다. 이 제1차 이탈리아 여행에서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알브레히트 뒤러 자신에게나 후의 독일 회화 전체에도 커다란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그때의 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성과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여행 도중에 틈틈이 그린 수채화 몇 점에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자연에 접할 때에 화가가 느끼는 신선한 감동이 싱싱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자연 관조에 토대해 훌륭히 그려져 있으며, 소위 도나우파[5]의 작품과 더불어 그 후 유럽 풍경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동방박사의 경배(Anbetung der Könige) (1504년)

1497년부터 독립했고 1503년부터는 한스 쇼이펠라인[6], 한스 폰 쿨름바흐[7], 한스 발둥 그리엔[8]과 작업장을 운영한 알브레히트 뒤러는 뉘른베르크 알트슈타드에 있던 자신의 작업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했다. 주로 초상화와 자화상 몇 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아버지의 초상화〉[9], 〈자화상〉[10], 린다우의 상인〈오스볼트의 초상화〉[11], 〈자화상〉[12] 등이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당시에 이미 작가로서의 알브레히트 뒤러의 명성은 꽤 높았으나 그의 명성은 오히려 판화가 결정했다. 특히 뒤러의 생활에서 만이 아니라 유럽 목판화 역사에서 기념비다운 작품이 된 1498년에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1498년)을 이루는 작품 16점은 한 점마다 고도한 기술상 완성과 탁월한 화면 구성을 현로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네 사람의 기사>는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인문주의와 알브레히트 뒤러의 관계는 콘라트 첼티의 책 《지형학으로서의 사랑[13]》(1502년)을 이롭게 하려고 알브레히트 뒤러가 제작한 삽화에 잘 드러나 있다. 콘라트 첼티는 알브레히트 뒤러를 제2의 아펠레스라고 칭찬했다.

이탈리아 여행과 그 후 활동[편집]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Ritter, Tod und Teufel) (1513년)

1505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두 번째 여행지인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 조르조네, 팔마 일 베키오가 활동하고 있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조반니 벨리니가 알브레히트 뒤레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 편지에서 알브레히트 뒤러는 조반니 벨리니를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진지한 학구열, 근면, 통찰력을 이용해 알브레히트 뒤러는 고향 도시 뉘른베르크에서도 정확한 소묘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과 진실된 자연관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이용해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런 발견은 그 사람의 작품에 지속으로 영향을 끼쳤다.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독일의 상인들은 바르톨로메우스 교회를 이롭게 하려고 커다란 크기의 그림 〈묵주〉를 주문했다. 후에 신성로마제국[14] 황제 루돌프 2세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사서 프라하로 옮기게끔 해서 지금은 프라하의 국립 미술관에 보관된 그 회화에는 천사 두 명이 마리아에게 관을 씌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황제에게, 아기 예수가 교황에게, 성 도미니크와 여러 천사가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묵주를 건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회화에서 베네치아에서 받은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히 인정받았고 베네치아 시 위원회가 그 사람이 베네치아에 영주한다면 연금 200두카트을 지급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 사람은 1506년 만추에 귀향하는 여로에 올랐다.

1506년-1514년[편집]

1509년부터 알브레히트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 위원회에 의해 임명된 미술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도시의 예술 계획 입안에 알브레히트 뒤러가 상당부 관여했다고 가정한다. 이 시기 작은 크기의 동판화와 목판화 이외에 중요한 목판화 연작을 간행했다.

  • 작은 크기의 수난 연작(1509/1510년)
  • 커다란 크기의 수난 연작(1510년)
  • 마리아의 삶(1510/1511년)
  • 성 삼위일체(1511년)
  • 성 그레고르의 미사
  • 성 그리스토프
  • 안나와 함께 있는 성가족
  • 묵주를 들고 있는 요하임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당시 알브레히트 뒤러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 판화를 제작하려고 시도해서 〈성녀 베로니카〉(1510년), 〈고통을 껵는 구세주〉(1512년),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1512년)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에서는 목판화가 압도로 우세하게 되었고 그 사람의 회화는 점점 드물게 보게 되었다. 1512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유화가 있다. 작은 크기의 동판화 연작의 상당부가 이 해에 제작됐고 황제 막시밀리안에게서 자신의 목판화와 동판화 복제를 금지할 특별권을 얻은 알브레히트 뒤러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여러 번 주문받아 일했다. 늦어도 1510년에서 1511년 이후부터는 관계됐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친구인 빌리발트 피리크하이머[15]가 그 관계를 중재했다. 모든 작품은 간접으로나마 황제의 혼인과 명성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알브레히트 뒤러의 유명한 동판화 〈기사, 죽음과 악마〉,〈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멜랑콜리아I〉, 〈파움가르트너 제단화〉가 이 시기에 제작됐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달 전에 알브레히트 뒤러는 목판화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에서 죽을 정도로 병약해진 사람을 그린 최초 초상화였다.

1518년 1520년[편집]

이 시기에 뒤러는 비례학 같은 이론상 작업에 몰두한 알브레히트 뒤러는 1518년 뉘른베르크 시의 대표자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회의에 참석했으며, 그곳에서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네덜란드 여행(1520년-1521년)[편집]

1520년 6월 12일부터 뒤러는 아내와 밤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쾰른을 거쳐서 안트베르펜네덜란드의 여타 도시를 여행했다. 네덜란드로 여행은 진짜 개선행진과도 같았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도처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안트페르펜의 시 행정 당국은 정착하게끔 알브레히트 뒤러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연금 300굴덴, 아름다운 저택, 무료 숙식과 공공 작업을 보수하겠다[16]고 제안했지만, 시 행정 당국의 제안은 허사였다. 영주들, 각국의 대사들, 학자들, 예술가들이 알브레히트 뒤러를 열렬하게 찬양했고 그 사람을 자신들의 모음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도 이전의 여러 특권을 재확인해 주었다. 특권을 재확인받으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다. 네덜란드의 보물 같은 예술품을 보고 그곳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알브레히트 뒤러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다. 수많은 영주, 고위 성직자, 예술가의 그림도 이번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1521년 7월 2일 알브레히트 뒤러는 뉘른베르크로 돌아가는 여로에 올랐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 이후에 알브레히트 뒤러는 미술 작품 제작에 재몰두했다. 1520년에서 1521년에 알브레히트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 청사의 장식을 책임졌다. 그 장식은 오늘날 사라지고 없지만, 1530년에 제작된 모조품이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보관되어 전해진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에 소장된 알브레히트 뒤러의 최요한 작품에 속하는 거대한 목판화 이 점이 1526년에 제작됐다. 이 목판화는 바오로, 베드로, 마르코 복음 저자, 요한 복음 저자의 실물 크기의 인물상이었으며, 동시에 4가지 체액을 믿는 이론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원래 이 목판화를 뉘른베르크 시에 선사했고 시 청사에 세워져 전시되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회화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간주되는 뉘른베르크의 상인〈히에로니무스 홀츠슈우어〉라는 유화가 1526년에 그려졌다. 같은 해에 제작된 회화〈요한 클레베르거〉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여행 이후로 말라리아로 고통받던 알브레히트 뒤러는 1528년 4월 6일 돈사했다.

업적[편집]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학한, 르네상스 최성기 이탈리아에 영향받았으나 뒤에 독자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답고 독일다운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과 《원근법에 관한 고찰》등 저서도 남기고 이상미[17]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인문주의종교 개혁에도 밀접히 관계했다.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주 제재로 했고 동판·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18]

참고[편집]

  1. 復活節: 기독의 부활을 紀念하는 祝日로서 春分 뒤의 첫 滿月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다. [類義語] 復活日ㆍ復活主日. 부활주일에서 일주일 혹은 50일간.
  2. 五旬節: <가톨릭>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인들이 지내던 추수감사절로서 보릿단을 바치고서 50일째 되는 날에 지낸다.<기독교> 부활절 후 50일째 되는 날로서 성령이 세상에 내려와 聖徒에게 臨하는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3. 旅程: 여행하는 과정이나 日程. [유의어] 客程.
  4. Agnes Frey
  5. 도나우派;다뉴브派;Donauschule;(英)Danube school;16세기 초 南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도나우江 연안의 도시에서 형성된 畫派. 로맨틱한 情緖를 띤 풍경 묘사가 최대 特色. 초기의 크라나하[父]와 알트도르퍼, 후퍼, 힐슈포겔 등이 대표할 정도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다. 16세기 초 도나우江 유역에서 발전한 풍경화 양식을 좇은 많은 화가 중 가장 손꼽히는 화가인 레겐스부르크의 거장인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1480-1538)는 작중에 人을 자주 그려 넣고 어떤 회화에는 종교에 딸린 제목을 붙이기도 했지만, 진정한 주제로서 추구한 자연에 人을 넣어 하는 표현을 본질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는 생성하고 사멸하며 부활하는 자연의 부단한 순환과 아울러 하루에도 아침·점심·저녁에 햇빛이 일으키는 변화와 四季의 변화에 많이 관심한 점에서 정신상 바로크 시대나 19세기 낭만파 풍경화가들과 통한다. 루카스 크라나흐(1472~1553)의 초기 작품도 도나우派 풍경화 양식을 대표한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회화는 시의 정치가 있고 매혹스러운데 크라나흐의 작품은 극을 관람하듯이 감동스럽고 인상 깊으며 풍부한 표현이 특징이다. 크라나흐는 자연의 분위기가 주제에 부합게끔 표현했다.
  6. Hans Schäufelein
  7. Hans von Kulmbach
  8. Hans Baldung Grien
  9. 149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10. 149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11. 1499년 바이어른 국립 회화 수집소 소장
  12. 1500년 뮌헨 미술관 소장
  13. quatuor libri amorum
  14. 神聖Roma帝國;<역사> 독일 작센왕조의 제2대 왕(912-973)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창시하고 로마가톨릭교회 세력과 提携해 왕권 강화에 매진했으며 二回에 걸쳐 이탈리아 원정을 斷行하고 962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어 936년에서 973년까지 재위한 Otto一世가 962년에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에게 戴冠받은 때부터 1806년 프란츠 二世가 나폴레옹에 패해 退位할 때까지의 제국 독일의 정식 명칭.
  15. Willibald Pirckheimer
  16. 報酬하다;고마움에 보답하다.
  17. 理想美
  18.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바깥고리[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다음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