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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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 출신의 혁명가, 역사가, 경제학자,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과학적 공산주의의 창시자이다. 칼 맑스, 칼 마르크스란 표기도 많이 쓰이지만 표준 표기법에 따른 철자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건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학창 시절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라인란트 지방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그러나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했다. 아버지가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종교, 문학, 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Bonn)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1]
트리어의 김나지움(고등학교)를 나온 뒤 마르크스는 처음에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베를린으로 옮겨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18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에 대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좌파헤겔학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좌익헤겔학파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주의적 철학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후에 헤겔의 변증법과 유물론적인 요소를 모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역사철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당시 독일의 대학교에서는 헤겔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사상을 좌파적으로 해석했다. 이로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편집] 졸업 후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언론에 투신하였는데, 반체제 신문 라인 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에 사고의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헤겔학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편집] 프랑스 생활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독일어: Bund der Gerechten)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경제학 철학 수고)》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이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편집] 영국 망명 생활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에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을 발표한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League of the Just'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얘기한 것--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확언했다.--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 준다고까지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수구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금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교통수단의 속도가 사람이나 말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빠른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 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 에 그러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편집] 인간관계
마르크스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고집이 너무 세고 독단적이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있어도 친구는 별로 없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제외한 모든 친구를 잃었고 떠나간 친구들은 대부분 적이 되어 돌아왔다. 또한 마르크스는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냉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었다.
[편집] 종교관
흔히 마르크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때문에 종교에 반대한 반(反)종교적 인물로 인식되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인민들에게 현실도피적 경향을 나타내도록 기능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집] 사상
[편집] 철학
[편집] 정치경제학
[편집] 사적 유물론
[편집] 각주
- ↑ 살림지식총서117《칼 마르크스》/박영균 지음/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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