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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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트로츠키

본명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출생 1879년 11월 7일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키로보그라드
(현재의 우크라이나 키로보흐라드)
사망 1940년 8월 21일 (60세)
멕시코 멕시코 코요아칸
사인 암살
국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소련 소련멕시코 멕시코
별칭 레닌의 곤봉
직업 혁명가, 정치인, 사상가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러시아어: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듣기 , 레프 뜨로쯔끼, 1879년 10월 26일(구력)/11월 7일(신력)~1940년 8월 21일)은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이다.

볼셰비키 혁명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그의 사상을 따로 일러 트로츠키주의라고 한다. 보통 레프의 영어식 이름을 따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뜨로쯔끼라고도 부른다. 트로츠키는 필명이며,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러시아어: Лев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éйн)이다.

초기에는 멘셰비키였다가 볼셰비키로 전환, 10월혁명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당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했다. 초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붉은 군대의 창립자이다.

레닌의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과 이론적인 차이가 생겨 권력투쟁을 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혁명이론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1]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나게 되어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말년에 멕시코에서 거주했으나, 스탈린이 사주했다고 여겨지는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살해당했으며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별명은 레닌의 곤봉이다.

생애[편집]

출생과 유년기[편집]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농가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98년 남부 노동자 동맹을 조직했다가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형당했다가 1902년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데사 감옥의 "트로츠키"라는 간수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한 것을 계기로 트로츠키는 평생 이름이 되었다. 그 뒤 런던에서 혁명가 레닌과 처음과 만났다. 초기에는 레닌의 훌륭한 조력자로 "레닌의 곤봉"이라는 별명까지 얻지만, 곧 레닌의 냉혹한 노선에 실망해 멘셰비키에 가담함으로써 레닌과 오랜 반목이 시작된다.

1905년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 된후 다시 체포되지만 곧 탈출한다. 이후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멘셰비키볼셰비키의 통합을 도모하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한다.

정치 활동[편집]

혁명 활동[편집]

(좌에서 우로)레프 트로츠키,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카메네프.

1917년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주도한 민중혁명인 2월 혁명 후 러시아로 귀국한 트로츠키는 레닌과 다시 손잡고 전쟁반대와 임시정부 타도 투쟁을 벌이다가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다.

이어 무장봉기를 조직해 10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뒤 소비에트 러시아의 외무장관이 된다. 1918년 붉은군대 즉, 적군(赤軍)을 창건, 황제파인 백군(白軍)과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1919년 코민테른 선언문을 기초한다.

폭력 노선에 대한 반대[편집]

1922년 트로츠키는 당의 제 2서열이자 후계자 직위인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맡으라는 레닌의 권유를 사양한다. 이 무렵 레닌은 스탈린을 축출하고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1923년 트로츠키는 적백내전 당시에 쌓아놓은 붉은 군대 내 인맥들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몇몇 군 고위 장성들로부터 스탈린을 몰아내고 당내 자본주의를 회복하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제안을 받지만, 인민의 지지를 받지못하는 비합법적 쿠데타 수단을 사용할 수는 없다며 이를 거절한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뒤,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당의 노선을 두고 본격적으로 대립한다. 트로츠키는 중공업 노선을 위주로 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동반한 영구혁명론을 주장했고,[2] 스탈린은 경공업을 위주로 한 정책과, 서구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라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했다.[3] 그러나 스탈린도 트로츠키의 중공업 노선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느껴, 경공업 노선을 폐지하고 중공업 노선을 확고히했다. 소련의 지식인들 대다수는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지지했으나,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소련 인민계층 대다수가 지지하게 되었다.[4][5] 때문에 권력 투쟁에서의 우위는 스탈린이 쥐게 되었고, 스탈린은 10월 혁명 당시 트로츠키의 역할을 축소 왜곡하고 트로츠키주의레닌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등 갖은 날조와 중상으로 트로츠키를 고립시킨다.

레닌은 생전 트로츠키에게 영구혁명론이 말은 그럴듯 하지만 현재 소련 현실에는 좀 맞진 않다고 누차 지적했다. 결국 1927년 트로츠키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1929년 국외로 추방된다.

망명과 죽음[편집]

트로츠키는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등지를 떠돌며, 끝까지 스탈린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반(反) 스탈린주의 투쟁을 벌인다. 이 시기 그는 <나의 생애>(1930년), <러시아 혁명사>(1931년), <스탈린주의 날조학>(1932년), <배반당한 혁명>(1936년)을 잇달아 발표한다.

특히 트로츠키 최후의 명저라 불리는 <배반당한 혁명>(1936년)은 소련 인민의 정치혁명을 선동하는 내용으로 이에 경악한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를 완전히 절멸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또한 강연과 칼럼을 통해 이오시프 스탈린의 우상화와 폭력성, 다른 사상이나 의견을 수용할줄 모르는 편협성을 지적하였고, 그의 사상이나 정치 활동이 마르크스주의의 인간본위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곳곳에 설치된 스탈린을 기념하는 상징물과 찬양 작품 등의 스탈린의 개인 우상화 역시 비판하였다.

193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대적인 대숙청으로 가족과 거의 대부분 측근을 차례로 잃은 트로츠키는 해외로 도피와 망명을 거듭했으나 로버트 하트란 미국인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을 겪고 1940년부터는 멕시코에서 생활하였으며,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와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에서 숨어지냈다. 그러나 그해 8월 21일에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멕시코스탈린주의공산주의자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등산용 피켈(암벽등산용 곡괭이)에 머리를 찔려 암살당했다.

그때 즈음, 이미 죽음을 예감한 트로츠키는 1940년 2월 27일에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억압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 1940년 2월 27일 ,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사후[편집]

그가 권력을 잃은 후부터 죽은 이후 공산국가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곧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수정주의자', '반동주의자'를 의미하는 가장 심한 욕이자 한번 얻으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국제적 냉전 구도의 폐해가 현지인들의 생사를 가늠할만큼 심각하였으며, 공산당 일당 체제가 대중주의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해질수록, 대중의 '견강부회' 정도도 역시 심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볼세비키 집권 이후, NKVD의 숙청에 의해서 처형된 종교인, 내국인, 이민족 구성원의 희생자수가 1200만명이라는 추정치가 존재하는만큼, 공산당의 관료주의 역시, 마땅한 '자아 비판' 능력을 상실하였음을 반증하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부하린 등 과거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복권되는 과정에서도 트로츠키는 결국 복권되지 못하였으며 소련과 별로 인연이 없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북한 등에서도 '뜨로쯔키주의자'라는 표현은 '종파주의자'라는 등 심한 욕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후 저서 출판[편집]

레온 트로츠키의 최후의 저서 《배반당한 혁명》은 미국 하퍼스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암살당할 당시 그의 책상에는 교정을 마친 교정쇄가 있었는데,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곧바로 하퍼스 출판사에 배달되었다.

당시 카스 캔필드 편집장은 미국독일과 전쟁을 벌일 것을 내다보고 출판을 미루었다.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소련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트로츠키의 원고를 금고에 보관하였으며, 이미 인쇄한 트로츠키의 들도 서점에 깔지 않고, 서고에 보관하였다.[6]

저서[편집]

  • <나의 생애>(1930)
  • <러시아 혁명사>(1931)
  • <스탈린주의 날조학>(1932)
  • <배반당한 혁명>(1936)

같이 보기[편집]

주 및 출처[편집]

  1.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2101&yy=2013
  2. 트로츠키의 산업론
  3. 제프 일리. 〈16. 스탈린주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일국 사회주의〉,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Forging Democracy)》. 뿌리와이파리, 457쪽. 2014년 1월 19일에 확인.
  4.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한 당시 소련 구성원들의 인식
  5. 당시 레닌주의 구조상 권력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상향식 선거로 인민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야 했음.(레닌 저, 《무엇을 할 것인가?》 참조)
  6. 《열정의 편집》-자주규제와 새로운 가능성/앙드레 쉬프랭 지음/류영훈 옮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p.183-184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