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1922년 ~ 1991년
Flag of the Soviet Union.svg Emblem USSR 1.svg
국기 국장
표어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러시아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가 인터내셔널 (1922년 ~ 1944년)
소련 찬가 (1944년 ~ 1991년)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 모스크바 55°45′N 37°37′E
정치
공용어 러시아어, 기타 다수
정부 형태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
일당제 공산주의 국가
서기장
1922년 ~ 1952년 (초대)
1985년 ~ 1991년 (마지막)
총리
1922년 ~ 1924년 (초대)
1991년 (마지막)

이오시프 스탈린
미하일 고르바초프

블라디미르 레닌
이반 실라예프
역사
 • 설립
 • 해체
1922년 12월 30일
1991년 12월 26일
지리
1990년 면적 22,402,200km² (1위)
인구
1990년 어림 291,000,000명 (3위)
인구 밀도 13명/km²
기타
통화 루블 (SUR) (руб)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
조지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러시아어: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소유스 소베츠키흐 소치알리스티체스키흐 레스푸블리크 / 에스에스에스에르[*], 문화어: 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련방), 약칭 소비에트 연방(러시아어: Сове́тский Сою́з 소베츠키 소유스[*]) 또는 소련(蘇聯, 문화어: 쏘련)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였다. 소련의 영토 면적은 무려 22,402,200 km² 였다. 지구의 전체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덮는 이 면적은 북아메리카 전체에 비견할 만하였다. 유럽 부분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였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동쪽의 영토는 태평양에,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달하였다. 아시아 부분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4개의 기후대(한대 기후, 냉대 기후, 온대 기후, 건조 기후)가 걸쳐 있었다.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하였는데, 이는 지구를 1바퀴 반 돌 수 있는 길이이다. 국경선의 길이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접하였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백군을 쳐부수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인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여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유럽 위성 국가들은 미국과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6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종합[편집]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러시아어: Совет)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노동자-농민 평의회'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군인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실제로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국기[편집]

소련의 국기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2:1이다. 바탕의 색은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였고, 그 위의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을 의미하였다. 1955년에는 낫과 망치의 모양이 기존의 크기보다 조금 작아졌으며, 1980년에는 국기 배경색이 진홍색에서 조금 연한 진홍색으로 변했다.

국장[편집]

소련의 국장1923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사용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으며 지구 아래쪽에는 떠오르는 금색 태양이, 지구 위쪽에는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고 있으며 빨간색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빨간색 리본에는 소련의 표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15개 공화국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역사[편집]

러시아의 역사
История России
Moscow St Basils Cathedral 08 (4103402230).jpg
고대
중세
근세
근현대
v  d  e  h

러시아 혁명[편집]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혁명 이후 성립한 임시 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특히 독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 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1월 7일레닌의 지도 하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외국 열강이 볼셰비키를 공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프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적군은 외국 열강과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12월 30일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1]

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스탈린은 세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하였고, 이후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대조국전쟁[편집]

소련군의 카츄샤 로켓, 1945년 4월 베를린.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독일어: Lebensraum 레벤스라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중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국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首都)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승리했고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한다.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고 서부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 영국, 미국과 독일을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고 결국 소련군 점령지대에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연합군 점령지역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이라는 자본주의 국가가 수립된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전쟁을 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 및 38도선 이북의 한국을 점령했고 일본의 영토를 빼앗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사상이라고 평가했던 애국주의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소련인을 하나로 단결시켰다.[2] 그리고 기존에 국교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켰고, 소련군의 명칭붉은 군대(赤軍)에서 소비에트 군으로, 국가를 국제공산당가인 인터내셔널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면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기존의 원칙에서 급격히 선회하였다.

냉전[편집]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49년 바르샤바 조약기구경제상호원조위원회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또,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창설하여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였다.

또한, 1956년에 소련은 부다페스트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

1964년에 실각한 흐루쇼프에 이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후, 식료품이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다. 1968년 8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무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편집]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1988년.

1979년 12월 27일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국가들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기 때문에 경제를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레스트로이카[편집]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1987년.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죽고 안드로포프를 승계한 콘스탄틴 체르넨코마저 1985년 3월에 죽자,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소련의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소련 공산당 1당 독재 대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 국가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한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대부분은 무혈 혁명이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유혈 혁명이 일어나 1989년 12월 25일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즉석 재판에서 총살당하였다.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89년 12월 3일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미국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해체[편집]

고르바초프는 유럽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였지만 소련 영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1991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던 부시조차도 그에게 다시 폭력이 발생하면 경제 관계가 동결될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경고하였다.[3]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소련 공산당을 해산하였지만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하였으나 막지 못하였다. 소련은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4]

지리[편집]

소련은 유럽 대륙의 동부와 아시아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영토의 대부분은 북위 50도 이북에 있었다. 또한 소련은 22,402,200 km² 의 면적을 차지하여 세계 제1의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그 면적은 지구의 육지 면적의 1/6에 달하였다. 소련의 거대한 영토는 한대, 아한대로부터 아열대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다. 면적의 11%는 경작지, 16%는 초원지대, 41%는 숲, 32%는 (툰드라를 포함한) "기타"로 분류되었다.

소련 서부의 그단스크 만칼리닌그라드로부터 동부의 베링 해협에 있는 라트마노바 섬 사이의 거리는 1만km가 넘었으며, 소련 서부와 동부 사이의 시차는 11시간에 이르렀다.

1991년 당시, 소련은 서쪽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몽골, 북한과 육상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공화국[편집]

소련은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헌법,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인구 100만이 되지 않는 민족은 그 규모에 따라 자치 공화국(ASSR), 자치주, 자치관구를 이루었다. 그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15개의 공화국은 소련의 붕괴 이후 모두 독립한 국가가 되었다.

소비에트 공화국 독립국가 수도 가맹연도
Flag of Russian SFSR.svg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 러시아 모스크바 1922년
Flag of Ukrainian SSR.svg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키예프 1922년
Flag of Byelorussian SSR.svg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벨라루스 민스크 1922년
Flag of Uzbek SSR.svg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1924년
Flag of Turkmen SSR.svg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르크메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슈하바트 1924년
Flag of Tajik SSR.svg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지키스탄 타지키스탄 두샨베 1929년
Flag of Armenian SSR.svg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예레반 1936년
Flag of Azerbaijan SSR.svg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바쿠 1936년
Flag of Kazakh SSR.svg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 알마티 1936년
Flag of Kyrgyz SSR.svg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르기스스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1936년
Flag of Georgian SSR.svg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조지아 (국가) 그루지야 (조지아) 트빌리시 1936년
Flag of Estonian SSR.svg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탈린 1940년
Flag of Latvian SSR.svg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라트비아 리가 1940년
Flag of Lithuanian SSR.svg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빌뉴스 1940년
Flag of Moldavian SSR.svg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몰도바 몰도바 키시뇨프 1940년

주요 도시[편집]

정치[편집]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계획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불리는 체제는, 노동자, 농민 및 대중 계층이 지지하는 정당에 의한 독재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 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탈린 시대 이래 소련의 국가 원수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의 의장이었으나, 실권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이후의 서기장들은 최고 간부 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는 1991년 8월의 쿠데타가 3일 천하에 그친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공산당을 해체하여 막을 내렸다.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정치국[편집]

정치국(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정식 명칭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은 소련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체의 기능을 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간부회라고 불렸다.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1987년까지 정치국원은 소련 공산당원만 출마할 수 있었으며, 각 지역에서 하향식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5] 마지막 정치국원이 선출되었던 1990년 7월 14일에는 부로케비시우스, 굼바리아제, 고르바초프, 구렌코, 자소호프, 이바시코, 카리모프, 루신쉬, 마살리예프, 모프시샨, 무탈리보프, 나자르바예프, 니야조프, 폴로즈코프, 프로코피예프, 루비크스, 세묘노바, 실라리, 소콜로프, 스트로예프, 프롤로프, 셰닌, 야나예프 등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최고 평의회[편집]

최고 평의회(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회의 간부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평의회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 원수였다.

연방 평의회(연방원)과 민족 평의회(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평의회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평의회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경제[편집]

1989년, 소련의 50코페이카 동전

소련은 세계 2위(1985년 GDP 2조 2천억 달러,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1990년 기준, 세계 31위)에 달했다.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여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6] 경제력에 관련해서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그 규모가 세계 1위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5년 이전까지는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으나, 1965년 이후부터는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

192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내전은 소련 경제를 피폐화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가 안정된 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용하였으며,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 부터 지속된 계획 경제는 소련의 중앙당국 재경 간부들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러한 중노동으로 인해 중앙경제계획당국 노동자들의 불만이 생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에는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사실상 자본주의적 지령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7]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소비재[편집]

대중차 라다(ЛАДА) 1200

군사에 투자되는 자금에 비해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개발과 생산, 물류의 정비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서방의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의류 등의 소비재의 수입,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GUM)등의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뿐이었다.

무역[편집]

소련의 서방 수출은, 농산물이나 어패류 등의 제1차 상품, 원유나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 자원이 대부분이었다. 통화인 루블 자체도 국외에서 통화로서의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수지는 대개 적자였거나 매우 적었다.

그에 비해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

공업[편집]

드네프르 강의 댐 건설, 1934년.

이오시프 스탈린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

소련은 중공업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공업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

소련은 천연가스와 석유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였다.

농업[편집]

소련의 농업은 대부분 소프호스(Sovkhoz)와 콜호스(Kholkoz)를 통해 이루어졌다. 소프호스는 Sovetskoe khozyaistvo(소비에트 농장)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소프호스의 농작물 생산은 정부의 계획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하는 농작물은 수매 가격까지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콜호스는 집단농장으로, 1928년 시작된 스탈린의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정부에 매각되었다. 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집단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국경일[편집]

국경일
날짜 한국어 이름 러시아어 이름 변경 사항
1월 1일 새해 Новый Год
2월 23일 소련군의 날 День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 Военно-Морского Флота 1918년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의 창설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Международный Женский День
5월 1일 국제 노동자의 날 Первое Мая - День Солидарности Трудящихся
5월 9일 승리의 날 День Победы 1945년 나치 독일의 항복
11월 7일 ~ 11월 8일 10월 혁명 Седьмое Ноября 1917년 10월 혁명; День Примирения이라고도 불림.

군사[편집]

1983년 혁명 축하 군사 퍼레이드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현재까지 폭발한 가장 큰 폭탄이었던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82년 소련군의 총원은 5,000,000명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는 소련군 병사, 1988년.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9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러왔다. 또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과 같은 민간기 격추 사건을 일으키는 등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는 서방 여러 나라의 반발을 샀다.

또한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자유 민주주의 진영과 대립하였으며, 동시에 회원국 내에서 일어난 반소, 반공 운동에 무력으로 개입하였다.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쿠바북베트남공산주의 국가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하여, 그들 나라의 군사 기술의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그 중에는 스파이테러리스트의 양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사 퍼레이드[편집]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과 소련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붉은 광장에서 미사일, 탱크장갑차까지 동원하여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과학[편집]

소련은 1950년대 이후 미국과 나라의 위신을 걸고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고, 또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 일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으며,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여 거대과학순수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소련은 항공기, 잠수함, 탱크 등의 병기공학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소련의 전투기로는 수호이, 미그를, 항공기로는 일류신, 투폴레프 등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불리며 독일군이 두려워한 카츄샤 로켓도 개발하였다. 또한 스텔스에도 중요한 이론적 영향을 주었으며, 테트리스 등의 컴퓨터 게임도 개발하였다.

소련의 미르호(號)

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산업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의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히게 되었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인하여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일도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 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였다.

소련은 아카뎀고로도크 같은 과학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외국으로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여 과학 시설이 밀집한 일부 도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도시가 되었으며, 이들 도시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노동운동[편집]

정부는 사회주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노동자 칭호를 수여하였다. 스타하노프 운동알렉세이 스타하노프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목표초과달성과 노동생산성향상 노동운동이다.

문화[편집]

소련의 헌법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는 유명한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후원했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명연주를 남겼다. 모스크바볼쇼이 극장에 소속된 볼쇼이 발레단과 레닌그라드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인정받는다.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에는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복지[편집]

소련 주거정책의 상징인 흐루쇼프카 아파트

소련의 연당 평균 실업률은 0.7 ~ 1.3% 였으며, 노동 복지는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일례로,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세계 최초로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등을 명문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되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명문화 했다. 또한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과는 별도로 각 산업지마다 약 연평균 25일의 휴일을 주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세계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일 10시간 내지는 일 14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1961년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주 41시간 근무제로 노동법이 수정되었으며,[8] 1968년에는 주 35시간 근로제로 바뀌었다. 또한 해고 과정이 매우 까다로워, 해고율이 매우 낮았다.[9]

교육, 의료, 주거 등 여러가지를 보장해주는 사회적 임금이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주거 복지의 경우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짓기 시작한 호당 평균 18평 짜리 5 ~ 7층(층당 평균 8호) 패널형 아파트인 흐루쇼프카로 해결했으며[10] 이 아파트들은 무상배당되었다. 식량의 경우는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인 1918년부터 각 소행정단위마다 존재하는 식량 배급소에서 일정 식량을 배급했다. 이러한 배급은 1921년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부터 다시 폐지되었고, 1929년에는 식량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1935년에는 식량 분배 수위를 국가가 조절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다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활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소련은 1947년부터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내걸지 않았지만, 의류, 옥수수, 비누와 같은 생필품의 경우는 배급으로 분배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러한 정책은 소련이 붕괴하는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11]

1988년까지는 이러한 복지 시스템이 어느정도 유지가 되었지만,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은 자본주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가지 사회적 복지 혜택이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국가가 되었다.[12][13]

교육[편집]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한 소련 학생들, 1985년.

러시아 제국의 교육은 무료가 아니었으며, 하층 계급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기 힘들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1910년대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75% 이상 85% 이하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소련의 교육 위원회 초대 위원장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문맹 퇴치를 위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글을 가르쳤다. 짧은 기간 동안 문맹률을 낮추어 1940년에는 문맹률이 1% 미만으로 낮아졌다.

소련의 의무교육은 11년제(초등학교 4년, 중학교 7년)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종합대학은 5년제, 단과대학은 4 ~ 6년제였다. 교육비는 무료였고 모든 학교는 정부가 관리하였다. 1960년에는 모든 소련 청소년들이 무상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대학 과정도 무료였다.

의료[편집]

모든 국민은 건강 보호를 요구할 자격이 있으며 소련의 모든 의료 기관에 무료로 입장할 권리가 있다.

1977년 소련 헌법 제42조

러시아 제국의 의료 서비스와 국민 건강 상태는 매우 뒤쳐진 상태였다. 혁명 이후 1918년에 정부는 "의료는 국가의 관리 하에 둘 것이고, 의료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제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명 이후 소련의 평균 수명은 증가하였다. 소련의 평균 수명 증가율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평균 수명 증가율보다 높았다.

스포츠[편집]

소련의 스포츠는 모두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운동선수가 프로모터가 기획하는 운동 경기에서 나감으로써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윤을 얻는 상업적 스포츠(프로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소련은 국위 선양을 위해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소련은 국가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으로 선수를 육성했고, 소련의 운동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소련은 축구, 농구, 배구, 하키, 아이스하키, 기계 체조 강국이었다. 소련이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소련은 스포츠 강국 동독미국을 크게 앞서며 55개의 금메달로 압도적인 1위를 하였다.

1980년 소련은 198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였다(표면상의 불참사유는 '선수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올림픽을 두고 "반쪽 대회"라고 한다.

소련은 월드컵에 7회 출전했으며, 1966년에는 4위를 차지했다. 또한 1956년1988년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언론[편집]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 청년 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고 특히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20,000,000부가 넘는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통신사는 1925년에 창설된 국영 타스 통신이 있었다. 대외 방송은 1922년 창설된 모스크바 라디오가 있었다.

소련인은 외국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보도기관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당이 완벽하게 보도 관제를 했다. 이것은 외국의 큰 뉴스나 체르노빌 사고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큰 사건으로부터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위해가 되는 보도는 일절 불가능했으며, 만약 보도되어도 정부와 당에 유리하도록 왜곡되었다.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 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외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소련을 방문한 보도진에게는 준비된 취재 스케줄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의 보도기관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 역시 당국이 선택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보도기관이나 그 특파원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만 하였다.

인구[편집]

소련의 인구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였다. 그 국경 내에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소련의 인구는 1990년 291,000,000명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당시 세계 제3위였다.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고, 다음은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의 순이었다. 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르바이잔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그루지야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기타(9.75%: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등의 민족이 있었다.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데 비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과 몰도바에서는 높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차 낮아져 갔다.

언어[편집]

공식적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외교[편집]

소련 외무부 청사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맹주였으며,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 이외에도 중남미(쿠바), 중동(남예멘), 아프리카(앙골라, 모잠비크 등), 동아시아 등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과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소련은 국제연합의 원년(元年) 회원국이었으며,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었다.

위성 국가[편집]

이들 위성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위성 국가가 된 몽골은 제외).

대한민국과의 관계[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대한민국(남한)과 소련의 관계는 북한의 수립을 소련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것과 특히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소련의 역할 때문에 출발부터 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한국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고 중국과 함께 정전 회담에 참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누그러져 갔으나, 1978년 4월 21일 대한항공보잉 707기가 무르만스크 인근에 강제 착륙당한 사건과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차츰 해빙되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였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90년 6월 대한민국-소련 정상 회담이 열렸으며, 1990년 10월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에로플로트대한민국에 취항하였다.

미국과의 관계[편집]

공산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미국과는 '냉전'이라고 하는 형태로 대립해, 1950년대한국 전쟁이나 1960년대베트남 전쟁 등, 대리 전쟁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군사적 대립을 하고 있었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쌍방의 억제력이 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쿠바 위기 등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의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의 격추 등 한정적인 군사적 대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립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교가 끊어진 적은 없고, 쌍방의 수도에 대한 민간기의 노선연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는, 「제재 조치」로서 민간기의 노선연장이 시한적으로 제한되거나 스파이 사건 등이 표면화되어, 한쪽의 외교관이 국외 추방되면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다른 한쪽 국가의 외교관을 맞받아 국외 추방하는 등의 외교적 술책을 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편집]

일본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종종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노몬한 사건 등). 1941년 4월에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945년 8월 8일에 소련은 이것을 일방적 파기,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또한 일본인 포로를 오랫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에 구류했다.

그 후, 1956년에 소-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했지만,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데다가 쿠릴 열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냉전이 종결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편집]

국공 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중국 공산당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당초에는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관계가 악화되어 1960년대에는 국경 분쟁이나 사상적인 대립의 문제로 말미암아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했다. 양국간의 이와 같은 대립관계는 그 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출국[편집]

출국은 망명과 외화 유출을 막는 것을 주된 이유로 당국의 허가가 없는 한 출국은 불가능했다. 또, 자본주의 진영 국민과의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위성국 국민과의 결혼조차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외국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악단 등에는,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저지하고 서방 언론 노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하고 있었다.

종교[편집]

소련 정부는 '신을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레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소련 국민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대다수는 기독교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가 다수이다. 로마 가톨릭개신교도 존재했으며, 개신교는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교파들이 있었다.

치안[편집]

소련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중범죄자에 대해 재판 과정없이 총살형을 시행하는 국가였으며, 범죄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강한 나라 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보장정책이 광범위하게 보장되는 소련 사회에서 자연인이 범죄인으로 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소련 사회는 범죄율이 매우 낮고, 치안이 강한 사회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고르바초프자유주의, 자본주의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정부 통제력에 상당한 손실이 왔고, 그 결과 치안력이 약해져 범죄 문제에 시시각각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소련 말기에 일어난 범죄율 급증의 이유로 고르바초프의 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범죄 통제력 약화와,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나타난 빈부격차, 사회 불안정을 든다.[14] 1989년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목적대'를 설립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 소련 내의 범죄는 중앙정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났다.[15]

프로파간다[편집]

프로파간다는 소련이 국민들의 사회주의적 애국심을 키우기 위하여서 만든 일종의 이벤트다. 프로파간다를 위하여 소련은 포스터, 라디오, 책, 미술 등을 이용했다.

소련의 프로파간다, 특히 레닌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선구적인 것으로, 몽타주 이론이나 전위파 등이 그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소련의 주요 인물[편집]

주석 및 참고자료[편집]

  1. Julian Towster. 《Political Power in the U.S.S.R., 1917–1947: The Theory and Structure of Government in the Soviet State》Oxford Univ. Press, 1948. p. 106
  2. 김학준(2006), 《러시아사》 개정 2판, 서울 : 대한교과서
  3. Goldgeier, p. 27
  4. Gaddis, 2005, p.256–257.
  5. JOHN N.HAROAD의 《소련법률제도》 참조
  6. 소련 관련 법
  7.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참조
  8. 《통합노동법》참조
  9. 《Hoeffding (1958–59)》, page 396
  10. http://web.archive.org/web/20070206132350/http://www.ukraine-observer.com/articles/228/993
  11. 《과학 좌파》참조
  12. 장하준의 《경제학강의》참조
  13. http://www.ajunews.com/view/20140117155241737
  14. 소련 치안 문제
  15.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2800289104006&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89-09-28&officeId=00028&pageNo=4&printNo=424&publishType=00010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