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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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밀허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미국 미국제46·47대 대통령
(37번째 대통령)
임기 1969년 1월 20일 ~ 1974년 8월 9일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전임: 린든 B. 존슨(제45대)
후임: 제럴드 포드(제47대)

미국 미국의의 제42·43대 부통령
임기 미국의 36번째 부통령
1953년 1월 20일 ~ 1961년 1월 20일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임: 앨번 W. 바클리(제41대)
후임: 린든 B. 존슨(제44대)

출생일 1913년 1월 9일
출생지 미국 미국 캘리포니아 주 요바린다
사망일 1994년 4월 22일 (81세)
사망지 미국 미국 뉴욕 주 뉴욕
정당 공화당
학력 휘티어 대학교 B.A.
듀크 대학교 로스쿨 LL.B.
종교 퀘이커(Quaker)
배우자 패트리샤 라이언 닉슨
서명 Richard M. Nixon signature.png

리처드 밀허스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년 1월 9일 ~ 1994년 4월 22일)은 미국의 37번째(제46·47대) 대통령이다.

생애[편집]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넉넉하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동부로 진학하는 것을 단념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휘티어 대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동부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듀크 대학교 로스쿨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얻고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돌아왔다.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선거 포스터

정계 활동[편집]

고향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고, 1950년에는 연방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불과 39세의 나이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닉슨은 유권자들로부터 1만 8천 달러를 받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정치 스캔들에 휘말렸다. 선거 기간에만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다는 규정을 어겼으며, 돈이 정치 활동에만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수용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여론은 사퇴를 요구했다. 닉슨은 TV 연설을 통해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전혀 사용한 적이 없다며 유권자에게 개인 선물로 받은 것은 자신의 애완용 개뿐이라고 연설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선거 결과는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과반수 이상 차지하게 되었고, 닉슨은 미국의 36번째 부통령이 되었다. 1953년 1월 20일 4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고, 1956년 재선되어 43대 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196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존 F. 케네디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하였다.

1962년 캘리포니아 주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 후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1968년 다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년 미국 제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매사추세츠 주를 제외한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재선되었다. 이 빛나는 승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발목이 잡혀 임기 중 사퇴라는 치욕적인 결말을 맺고 만다.

중공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건배하는 닉슨 (1972)

외교 정책[편집]

1969년 "아시아 각국은 내란이 발생하거나 침략을 받는 경우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1969년 1월 닉슨 행정부가 수립된 후 미소관계는 상호협조의 시대로 돌입했다. 선거기간 중 "자신이 당선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고 강조한 닉슨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협상시대의 도래를 희망한 후 곧이어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서구 우방을 순방했다.(1969년 2월) 이 방문에서 닉슨 대통령은 대소협상에 관한 사전 의견교환을 하고 방소 준비를 착실히 진척시켰다.[1] 외교 정책의 대담한 변화로 1971년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1972년에는 그 자신이 미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공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과의 미․중 정상회담(2월 21일),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져 훗날의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국교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2] 또한 같은 해에 소련을 방문하여 냉전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옮기는 기수가 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맺고자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였다.[3]

1974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닉슨 부부를 헬리콥터에 태워 보내려고 하는 장면 사진

워터게이트 사건[편집]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이를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1973년 여름까지 공모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1973년 6월 23일,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연방수사국은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한 그의 녹음된 말이 공개되었다. 결국 그는 워터게이트 침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에 공개된 이 녹음은, 이른바 연기뿜는 총(스모킹 건)으로 비유되었다. 그리고 미국 국민들은 도덕성이 높아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 뒤, 의회는 탄핵을 준비하였다.

탄핵이 확실시되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제럴드 포드가 취임한 지 한 달 뒤, 그를 특별 사면시키는데, 그 당시 닉슨에 대한 험악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선 커다란 정치적 모험이었고, 대통령직을 이은 포드는 재선에 실패한다.

퇴임 이후[편집]

사임 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그는 뉴욕과 그 근교의 뉴저지 주에서 조용히 생활하였으나, 후임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종종 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후 1994년 4월 18일 뇌졸중이 발작하여 나흘 후인 4월 22일 81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옮겨져서 그곳에 안장되었다.

기타[편집]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전 미국이 뒤숭숭할 때 실업자 새뮤얼 비크가 경찰을 죽이고 비행기를 납치해 닉슨을 암살하려 했으나 곧 진압되어 자살했다.

닉슨의 가족. 좌로부터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줄리 닉슨 아이젠하워, 리처드, 팻, 트리샤 닉슨 콕스, 에드워드 콕스

가족관계[편집]

닉슨은 아내 패트리샤 라이언 닉슨과 두 명의 딸이 있다 - 트리샤(1946년생)와 줄리(1948년생). 첫딸 트리샤는 변호사인 에드워드 콕스(현재 뉴욕주 공화당 위원회 의장)와, 둘째딸 줄리는 아이젠하워의 손자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와 결혼하였다.

읽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이것이 미국이다<46> 외교 - 對蘇관계(하)", 《매일경제신문》, 1972년 12월 29일 작성. "1969년1월 「닉슨」行政府가 수립된 후 美蘇관계는 相互協調의 시대로 돌입했다. 선거기간 중 『자신이 당선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고 강조한 「닉슨」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協商時代의 到來를 희망한 후 곧이어 西独, 英, 伊 등 西歐友邦을 순방했다. (1969년 2월) 이 방문에서 「닉슨」대통령은 對蘇協商에 관한 事前意見交換을 하고 訪蘇준비를 착실히 진척시켰다."
  2.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7쪽. ISBN 978-89-91965-12-6 “1971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21일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뤄진 이후에는 점차로 외교적 기반을 상실해갔다.”
  3.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