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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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시초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Nikita Khruchchev Colour.jpg
소련 소비에트 연방의 3대 제1서기
임기 1953년 ~ 1964년
전임 게오르기 말렌코프
후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기본정보
정당 소련 공산당
배우자 예프로시냐 흐루쇼바(1916–1919, 사망)
마루샤라 흐루쇼바 (1922, 이혼)
니나 흐루쇼바(1923 ~)
종교 없음(무신론)
서명
니키타 흐루시초프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러시아어: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듣기 , 영어: 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년 4월 15일 ~ 1971년 9월 11일)는 러시아의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의 공존을 모색하였다. 그의 반 스탈린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집단지도 체제를 무시한 정책 결정, 농업 정책 실패,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에 대한 양보 등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었고, 1964년 10월 13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실각되었다.

생애[편집]

성장 과정[편집]

니키타 흐루쇼프는 러시아 제국쿠르스크 주칼리놉카의 마을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르게이 니카노로비치 흐루쇼프(1938년 폐결핵으로 사망)이고 어머니는 악시니아 이바노브나 흐루쇼바이다. 그는 두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그의 출신 배경은 레닌이나 스탈린에 비교하면 지나치게 한미하여, 그의 할아버지는 러시아 제국 시대에 차르 군대에서 복무한 농노였다.

동네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08년 그의 일가는 현재 우크라이나도네츠크로 이사하였다. 나중에 그가 어린 시절부터 우크라이나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가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통복을 종종 입어 이런 인상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나 자신은 러시아인"이라고 말했다.[1]

노동 활동[편집]

가족이 도네츠 분지의 광공업 중심지인 유조프카로 이사함에 따라 함께 이동했다가 15세부터 생업에 뛰어들었고, 연관공이 되면서 계속 연관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에 띌만한 지력을 가졌으나, 가난한 탓에 어린시절 2년의 초등 정규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가 글을 완전히 깨우친 것은 20대 후반과 30대 후반 정도의 일이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여러 공장과 광산을 전전하며 일했다. 공장에 근무 중 그는 제1차 세계대전징집령이 떨어졌으나 운좋게 차르 군대에 징집되지 않았다. 1917년러시아 혁명 이전에도 노동자조직 가입하여 활발하게 노동운동을 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 때 노동조합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우크라이나 지역의 점령을 놓고 적군백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간에 투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일원이 되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에서는 붉은 군대에 들어가서 반혁명군과 싸웠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한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활동[편집]

1918년에 당원이 되었고, 이후 돈바스키예프에서 여러 관직과 당직을 거쳤다. 1919년 1월 적군에 참가하여 하급 정치위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백군과 침입해오는 폴란드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1921년 동원해제되었다. 퇴역후 심한 기근으로 첫 부인 갈리나가 2명의 아이를 남겨놓고 병사했다. 1922년 유조프카에 있는 새로운 소비에트 노동자학교의 입학을 허가받고 소비에트 노동자 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흐루쇼프는 당교육과 이론 교육을 받는 동시에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곧 소비에트 노동자 학교 학생정치위원이 되었고 소련공산당 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4년 소비에트 노동자 학교 재직 중 교사인 2번째 아내 니나 페트로브나 흐루쇼바와 재혼했다.

1931년 그는 모스크바로 전근되었고, 1935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가 되었다. 이 자리는 후에 권력핵심으로 통하는 요직이었다. (후에 러시아 대통령이 되는 옐친도 이곳을 거쳤다.) 그는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주목할 만한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1938년 그는 우크라이나 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당직이었다.

1934년부터 그는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었고, 1939년부터는 정치국의 위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독소 전쟁 동안 그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중장 대우의 정치위원으로 종군했다.

권력을 장악하다[편집]

1953년 스탈린의 사후, 소련공산당 내에서는 여러 분파들의 권력투쟁이 있었다. 처음에는 정보기관과 공안기관을 장악한 베리야가 앞서 있었으나,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그에게 숙청될 것을 두려워 한 흐루쇼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몰로토프, 불가닌 등이 연합하여 베리야를 밀어내고, 구금후 처형하였다.

이후 말렌코프가 권력투쟁에서 앞서나가는 듯했으나, 흐루쇼프가 결국 당권을 장악하였다. 흐루쇼프는 이후 소련 정치체제의 변화와 개혁를 추구하였다. 1956년 2월 25일에 열린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행한 비밀연설은 그 시발점이었다. 그는 여기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대숙청 당시 행한 스탈린의 무자비한 처사와 범죄행위를 고발하고[1] :40 가혹한 중앙집권제를 비판하는데 이르렀다.[2] 이러한 행위때문에 몰로토프 등 당의 보수파들은 흐루쇼프에 반기를 들었으나 도리어 1957년 흐루쇼프에게 패배하여 "반당그룹"의 오명이 붙은 채 당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탈린과는 달리 정적을 당에서 축출했을 뿐, 처형이나 고문같은 물리적 탄압은 가하지 않았다.

1958년 3월에는 니콜라이 불가닌을 밀어내고, 소련 수상에 취임하여 당권뿐만 아니라 정부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개혁 정책은 본격화되었다.

국내 정책[편집]

공업정책[편집]

경제면에서는 그는 스탈린의 중공업 치중을 벗어나 경공업을 중시하여 특히 일상용품의 생산을 강조하였다.

주택정책[편집]

주택문제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 흐루쇼프카라고 명명된 5~9층짜리 패널형 아파트를 대량으로 건축하여서 국민들에게 배당해주었다. 당시 이는 주택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소련 국민에게 매우 획기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후화 및 관리 미흡으로 인해 점점 인기가 떨어졌다. 현재 이 아파트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 아직 남아있다.

농업정책[편집]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실시한 농업집단화 정책을 계속 견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농업생산력을 감소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농지의 개간과 새로운 농업기술, 특히 트로핌 리센코의 새로운 우생이론에 의해 개발된 종자로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트로핌 리센코의 이론은 사이비과학이었으며, 후에 농업에 재앙적인 결과를 야기하여 실각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국방 정책과 우주 개발[편집]

소련의 국방비는 냉전이후 계속 늘어나 경제에 짐이 되고 있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흐루쇼프는 전략무기인 핵무기로켓을 중점적으로 개발하여, 재래식 군비에 대한 부담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런 노력은 우주 개발에 비약적인 발전으로 나타나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와 세계 최초의 유인우주선인 유리 가가린보스토크호의 발사성공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대해진 군부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실각의 한 원인이 된다.

대외 정책[편집]

헝가리 반공 봉기 개입[편집]

1956년 소련에 반대하는 헝가리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초기에는 개입을 주저하였으나, 헝가리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여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나려고 하자, 소련군에게 개입을 명령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남겼다.

아이젠하워 부부와 함께한 흐루쇼프 부부

미국 방문[편집]

1959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소련을 방문하였고, 이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몇달 후 그는 미국을 2주간 방문하였다. 이는 소련 지도자로서 최초의 미국방문이었다. 이러한 방문에서 그는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언행으로 여러 화제를 남겼다.

베를린 장벽[편집]

1961년 동독의 지도자 울브리히트는 서방으로 망명하는 동독인들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의 건설을 추진했고, 흐루쇼프는 이를 승인하였다. 이 장벽은 후에 독일 통일 때까지 존재하여 동독의 영토로 둘러싸인 서베를린을 포위하고 있었다.

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흐루쇼프

쿠바 위기[편집]

1962년 미국의 대통령 존 케네디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를 세우고 있다며 이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핵기지의 건설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핵기지의 건설을 강행해야 한다며 대립했다.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쿠바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돌리도록 지시했고, 이로 인해 그는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고, 당내에서도 미국과 타협했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끼치게 되었다.

중소 분열[편집]

흐루쇼프가 서방과의 대결보다는 공존을 외치자 공산주의 진영의 다른 한축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은 이를 규탄하고,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이 때문에 양국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되었으며, 전 세계의 공산국가들이 친소련과 친중국 국가로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실각[편집]

흐루쇼프는 스탈린식의 유혈숙청은 실시하지 않았으나, 그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실시한 정책은 당내의 구조와 인력상 많은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당내 주류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병력감축, 핵무기중시의 군사정책도 군부의 반감을 얻게되었다.

게다가 쿠바 위기를 둘러싸고 보여준 흐루쇼프의 모험주의는 이러한 대외온건파들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그리하여 강경파와 온건파 모두의 지지를 잃고 그의 입지는 흔들렸다.

그의 정적들은 과거 흐루쇼프를 몰아내려던 "반당그룹"이 도리어 반격을 받아 추방된 것을 교훈삼아, 당의 핵심인물뿐만 아니라 당 상위계층 전반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브레즈네프, 셸레핀, 국가보안위원회세미차스트니 등은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기 위한 계획을 몰래 꾸몄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휴가중일 때, 행동을 개시하여 쿠바위기, 중소분열, 농업정책실패의 과오를 들어 공산당 최고간부회의 특별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이때 흐루쇼프가 도착하자 최고간부회의는 흐루쇼프에 대한 불신임투표를 하여 가결시켰다. 이에 대한 토론은 거의 없었고,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다. 10월 15일 흐루쇼프는 당과 정부에서 모두 사임했다.


은퇴 및 죽음[편집]

그는 실권자로서는 축출되었지만, 당에서는 추방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1966년까지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남아 있었고, 죽을때까지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풍족한 연금과 정부제공의 주택에서 살았으나, 항상 국가보안위원회의 감시를 받았다.

은퇴생활시 많은 인사들과 교류를 했으나 후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을 남겼고, 이것이 몰래 서방세계로 밀반출되어 출판되었다.

흐루쇼프는 1971년 9월 11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소련정부는 흐루쇼프에 대한 국장과 소련에 공헌이 큰 위인들이 안장된 크렘린 벽묘지에 매장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보다 한단계 격이 낮은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개인적 성품[편집]

언행[편집]

대부분의 소련 지도자들이 냉정하고 과묵한 이미지를 가졌던데 반하여 흐루쇼프는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졌다. 가끔씩 그의 언행에 그의 정적뿐만 아니라 추종자, 심지어는 전 세계의 언론들도 놀라곤 했다.

흐루쇼프는 예의없는 독설로 다른사람들을 모욕하거나 면박주기도 했는데,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마찬가지의 언행을 보였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과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특히 1960년 10월 영국의 수상이었던 해럴드 맥밀런이 국제 연합에서 연설할 때, 주먹으로 탁상을 치고 러시아어로 괴성을 지르는 행동을 하기도 했고, 마오쩌둥과 공개적으로 욕설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훗날 그가 실각할 때, 당정치국은 이러한 문제도 거론하여 그를 비판하였다.

교양의 결여[편집]

흐루쇼프는 대단히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나, 배움이 없었기에 중요한 문제에 지식보다는 개인적 경험이나 편견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로 그는 다른 과학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사과학이었던 트로핌 리센코의 이론을 옳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를 대규모로 농업에 도입하도록 강력히 추진했는데, 이는 파국적인 결과를 결과를 빚어 결국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유산[편집]

흐루쇼프는 비판자들을 탄압하는 공포정치소련에 광범위한 역사적 상처를 남겼던 스탈린의 유산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스탈린 시절 실시된 대숙청의 희생자들을 많이 복권시켰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에서 최고 반역자로 규정되었던 레프 트로츠키는 복권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는 중공업 대신 경공업을 중시하여 인민의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는 소련의 근본적 개혁을 추구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가족사[편집]

흐루쇼프는 1916년 예프로시냐 피사레바(1896-1919)과 결혼했다. 둘은 1남 1녀를 두었다. 예프로시냐는 혁명후 러시아를 덮친 기근으로 1919년 사망하였고, 1922년 흐루쇼프는 마루샤라는 17세의 소녀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이후 페트로브나 크하르추크(1900-1984)와 재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흐루쇼프의 맏아들은 독소전쟁 당시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 차남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국적을 취득했고, 브라운 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어록[편집]

주석[편집]

  1. 최종기 저, 《러시아 외교정책》서울대학교출판부(2005) ISBN 89-521-0578-8
  2.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국제공산주의의 사양기현상
전 임
니콜라이 불가닌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
1958년 ~ 1964년
후 임
알렉세이 코시긴
전 임
니콜라이 불가닌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평의회 의장
1958년 ~ 1964년
후 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