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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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미하일 고르바초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소련의 제7대 서기장
임기 1985년 3월 11일-1990년 3월

1990년 3월 - 1991년 3월
1991년 9월 - 1991년 12월 26일

전임 콘스탄틴 체르넨코
후임 보리스 옐친(러시아)

기본정보
출생지 소련 소련 스타브로폴
정당 소련 공산당(1950년-1990년)
사회민주주의당(2001년-2004년)
사회민주주의 연합(2007년-현재)
배우자 라이사 고르바초바
학력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과 졸업
종교 없음
서명
미하일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러시아어: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듣기 , 1931년 3월 2일 ~ )는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이다. 그는 제8대·9대·11대 소련의 국가 수반 겸 당 서기장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 소련의 총리로 있었다. 역대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 혁명 이후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였으며 1985년 54세로 최연소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재임 중 소련의 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였고, 이는 소련을 비롯한 중앙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 그리고 사상 해방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련 붕괴 이후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생애[편집]

고르바초프는 1931년 소비에트 연방 스타브로폴 주의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소년 시절 콤바인 운전기사로 콜호스에서 지냈으며, 1955년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 있던 시절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1970년에서 1978년 스타브로폴 주의 제1서기로 있으면서 1971년부터 당중앙위원을 겸하였다. 그는 계속 승진해 1978년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이듬해 정치국원 후보에 임명되었다.[1] 그는 공산당원으로서 매우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고, 곧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 하나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유리 안드로포프에 이어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노환으로 사망하자, 그는 1985년 3월 11일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집권 시절[편집]

그는 서기장에 당선되자 공산주의 계획 경제의 문제점과 소련 정치에 닥친 문제점들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정치 개혁 정책과 경제 개방 정책인 글라스노스트를 펼쳤다. 또한 그는 서방 측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로널드 레이건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와 만나기도 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던 초기, 소련에서는 공산주의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었으며, 사유재산 제도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 공산당 지도자들과는 달리, 기독교(특히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 활동을 허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서방권 대기업들과의 경제 협력이 활성화되었다.

여기에 힘입은 고르바초프는 더 큰 형태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기존 공산당 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관료들을 몰아내고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보리스 옐친 등의 신진 관료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외교적으로는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였던 미국과의 관계가 완화되었으며, 또다른 공산주의 국가였던 중국과의 관계를 마무리지었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소련에 엄청난 부담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군을 완전 철수시켰으며, 서방 국가들과의 핵 감축(START)을 추진하기도 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는 고르바초프 (1988)

그러나 그의 개혁은 아울러 소련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기존 문제를 표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소련에 눌려 있던 러시아 연방 내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였다. 1940년 소련에 강제 병합당한 발트 3국에서 제일 먼저 분리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뒤를 이어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대규모 민족주의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 사고로 인해 소련의 관료주의 체제의 무능이 드러나면서 소련 국민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보다 더욱 진보적인 개혁을 원하게 되었다. 이는 기존 고르바초프의 노선보다도 급진적이었던 보리스 옐친 등 공산당 내 급진 개혁파가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그동안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공산당 내 보수파들은 고르바초프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고, 공산당의 권위와 국내경제의 악화를 이유로 겐나디 야나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들이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보수파의 쿠데타 기도는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와 민중들의 반대로 3일 만에 실패하였다. 고르바초프는 4일 뒤 다시 권좌로 복귀할 수 있었으나 사실상 급진 개혁파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옐친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들은 기존 연방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연합을 만들기로 하였다. 1991년 12월, 벨라베자 조약에 의해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고르바초프는 12월 2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그는 1990년 중앙 유럽의 개혁과 냉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 문선명 총재 등과 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퇴임 이후[편집]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소련 붕괴로 인해 사회적으로 혼란해지고 세계적 위상이 추락하면서 그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조국을 팔아버린 지도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보리스 옐친 행정부의 급속한 개혁을 반대해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낮은 지지율로 낙선하였다. 이후 한동안 러시아의 진보 성향 정치인 또는 언론인들을 지원하다가 2008년 9월 30일에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에는 러시아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고르바초프 재단의 자금 마련을 위해 직접 고르바초프가 피자헛에 출연했다.[2] 그리고 푸틴을 견제하기 위해 2007년에 해체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겠다고 밝혔다. [3]

주석[편집]

  1.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4&sid2=233&oid=001&aid=0002290562 "고르바초프, 17년 만에 정계 복귀 선언")
  3. 反푸틴 고르바초프 "사회민주당 창당 추진"

바깥 고리[편집]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
1985년 - 1990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