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톈안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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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의 톈안먼 광장

톈안먼 사건(중국어 간체: 天安门事件, 정체: 天安門事件)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발생한 톈안먼 광장 등지에서 시위대와 인민이 벌인 반정부 시위를 중국 정부가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중국의 1978년 이래의 시장 개혁 흐름이 한동안 끊기는 사태가 되었다.

"텐안먼 민주화 운동", 6·4 톈안먼 사건, 6·4 사건, 톈안먼 사태 등으로도 불린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국제적십자협회는 2,000 여명으로 사망자를 발표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군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배경[편집]

시위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40주년, 5·4운동 70주년, 프랑스대혁명 200주년, 후야오방 전 중공 총서기 사망, 대륙 경제 통화팽창, 대륙 당내 관리들의 부패, 대륙의 대량 인민 실업 직면, 소련의 정치와 경제 개혁이 주요한 배경이다. 4월 15일에 개시된 학생 시위대의 항의 운동 이후,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대륙 군대, 군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항의 충돌은 사태 전에도 있었고, 뒤로도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지지세력인 후야오방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보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1987년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고 자오즈양이 서기직에 올랐다. 반특권, 반부패 시위 확대가 후의 사망이 발단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 급변이 진행되고 민족 분규가 잦아지는 등의 난국에서 과감한 경제 개혁으로 개방의 폭을 넓혀온 중국 실용주의파는 계획가격에 시장가격제를 도입하고 국영근로자의 양로복지를 감축하는 쌍궤제(雙軌制)라는 정책을 실시했으나 하위 간부들의 부패가 벌어지고 인민의 항의 시위가 확대했으며, 인민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개혁개방 실시 뒤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격화하자 인민들이 사회적으로 동요했으며, 경제 개방을 위해 설치했던 특구가 조계지로 비판받기도 했다. 물가 상승과 분배의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많은 하강 노동자와 학생들이 단위 체제와 산업 수요가 변화해 실업 상태에 직면하였다. 항의 시위가 학생, 실업 근로자들 뿐 아니라, 문화 대혁명 관련자들, 석방된 정치범들, 사회 불만세력들이 섞이며 후반에 들수록 격해지기도 했으며, 시위 사태의 수위가 높아지자 진압 결정이 내려졌다.

경과[편집]

  • 4월 15일 - 후야오방(胡耀邦) 사망. 학생과 인민들, 인민영웅기념비 행렬.
  • 4월 17일 – 대학생 수백 명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
  • 4월 17일4월 20일, 북경시 학생 자치연합회 등 시위대로부터 시위 확대.
  • 4월 22일 - 후야오방 장례식. 시안(西安)에서는 군중 300여명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 ‘공농(工農)과 연합해 폭정을 타도하자' 시위 내륙 중심으로 확대.
  • 4월 26일 - 덩샤오핑(鄧小平), 시위 커지자 북경 시위 통제 지시. 인민일보는 이 날짜 사설을 통해 시위대와 근로자, 농민공 시위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
  • 4월 27일 – 북경시 대학 임시 학생연합 주최로 각지 대학생 5만~10만명 가두 시위. ‘반관료' , ‘반부패' , ‘청렴한 공산당 만세' 구호 등 시위.
  • 5월 4일 - 자오쯔양, 오사 발언 방송으로 시위 확대
  • 5월 13일 - 고르바초프 덩샤오핑과 회담 소식. 학생, 근로자들 3천 명 천안문 광장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 개시.
  • 5월 16일 - 중앙 판공청, 국무원 판공청, 고르바초프와 회담 개시에 시위대 자제 촉구.
  • 5월 20일 - 자오쯔양, 원자바오와 단식 농성장 방문해 시위 자제 전달. 공식 계엄령 내려지고 북경 시내의 대중 교통 수단 통제.
  • 5월 20일 - 6월 3일, 베이징 시 여러 지역과 천안문 일대에 계엄령 선포. 충돌.
  • 6월 4일 - 상황 악화에 01시 30분 ‘긴급통고'. 시위자들, 대부분 광장을 빠져 나감. 03시 시위대 수 천명 천안문 광장에서 ‘인터내셔설가' 부르며 해산 거부, 새벽 4시. 중국 정부, 충돌 중 계엄군에 진압 명령, 본격적인 진압작전 개시.
  • 1992 사회주의 시장경제 채택
  • 1999 사유경제 보장하는 헌법 수정

사망자수[편집]

여러 출처에서 사망자수를 각기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 10,000명 사망 (민간인과 군인 모두 포함) - 소련
  • 7,000명 사망 - 나토
  • 4,000 ~ 6,000명 사망. 그러나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 - 에드워드 팀펄레이크
  • 3,700명 이상 사망 (실종자, 비밀처형, 의료행위 거부를 제외) - 인민해방군 탈영자가 관리들 사이에 기록된 문서가 떠돌았다고 증언
  • 공식적으로 6월 4일 새벽 2,600명이 사망 (후에 부인) - 중국 적십자사. 익명의 한 적십자사 관리는 약 5,000명이 사망하고 30,000명이 부상당했다고 추정
  • 국제 앰네스티와 몇몇 시위 참가자들의 주장에 따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타임지에 개제. 국제 앰네스티의 다른 증언에 의하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추정.
  • 300 ~ 1,000명 사망 - 서방 외교관
  • 뉴욕 타임스의 니콜라스 D.크리스토프에 의하면 400 ~ 800명이 사망. 그는 병원 직원들과 의사, 관리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기초로 수치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 기밀이 해제된 NSA 문서에 따르면 180 ~ 500명이 사망. (사태 초기의 피해자 수치들을 참조)
  • 241명 사망 (군인 포함), 7,000명 부상 - 중국 정부
  • 2006년 말까지 186명의 사망자가 신원이 확인됐으나 전체 피해자수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주장 - 천안문 어머니회. 천안문 어머니회는 이 명단에 사태 이후에 자살한 사람들까지 포함시켰다.

영향[편집]

사건 이후 서양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중국 내 덩샤오핑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다. 보수파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은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개혁, 개방 정책들이 하나 둘씩 뒤집혔다. 시위를 방조했다고 하여 자오쯔양 총서기가 중국 정치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며 연금에 처해지고, 대륙의 시장경제 체제의 개혁이 지체되었다. 1991년, 장칭(江靑)이 사망하면서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떠나 군과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한 뒤, 이듬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 개방의 확대에 나서자고 했다. 자오쯔양 후임에 장쩌민이 승계하였으며, 2~3년 간 보수의 길을 걸었다. 리펑은 사태 뒤 총리를 계속 맡았다.

현재[편집]

2005년 11월 18일 ‘후야오방 기념대회’를 시점으로, 후진타오 주석이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복권을 조심스레 추진했으나, 여전히 중국에서 톈안먼 사태를 언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되어 있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는 대륙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검색엔진 중국어 구글에서도 중국 국무원의 요청으로 천안문사태에 대해 정보검색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