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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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월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
중국의 베트남 침공 경로
중국의 베트남 침공 경로
날짜 1979년 2월 17일~1988년 1월
장소 중국-베트남 국경 부근 일대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후퇴
교전국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타이 타이
Flag of Democratic Kampuchea.svg 민주 캄푸치아

베트남 베트남

소련 소련
라오스 라오스

지휘관
중국 등소평
중국 양득지(杨得志)
중국 허세우(许世友)
베트남 손덕승
베트남 여순
베트남 문진용
베트남 범문동
병력
총병력 20만 명, (이후 40만 명으로 증가) 광저우 군관구
63형 전차 400대
J-6형 전투기
정규 병력 7만 ~ 10만 명, 민병대 및 국경수비대 15만 명
A-37 공격기 수십기
피해 규모
중국측 추측
8531명 전사, 2만 1000명 부상
서구측 추측
2만 6000명 ~ 3만 7000명 전사, 탱크 420대 격파
J-6형 전투기 15대 격추
베트남측 추측
민간인 1만 명 사망, 군인은 추측 불능
서구측 추측
2만 명 ~ 3만 2000명 사상, 탱크 185대 격파
A-37 공격기 5~6대 격추

중월 전쟁 또는 중국-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biên giới Việt-Trung戰爭邊界越-中?, 영어: Sino-Vietnamese War, 중국어 간체: 中越战争, 정체: 中越戰爭)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중화인민공화국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배경[편집]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승리로 남북 베트남은 공산 통일되었고 그 여파로 인접국인 캄보디아라오스마저 공산화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전쟁 중에 중국의 물적, 인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으나, 역사적으로 베트남인들의 대중국 감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공산 정권이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여 양국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이에 동시에 친중국계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베트남의 이웃 나라 캄보디아는 1975년 4월 론놀의 친미 군사 정권이 전복되고, 1976년 1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탈취하여 민주 캄푸치아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거의 동시에 성립된 통일 베트남과의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면서, 1978년 1월에 국경 분쟁으로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른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망명해 온 크메르 루주군 사령관 헹 삼린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였으며, 1979년 1월에 프놈펜을 점령하여, 헹 삼린의 베트남 캄보디아 정권을 세웠다. 중국이 후원을 했던 폴 포트는 밀림 지대로 도망갔으며, 정권은 붕괴되었다.

친베트남 괴뢰정권이 들어서자, 중국은 캄보디아 전선에 머물던 베트남군의 주력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의 북부를 침공하였다. 이것은 베트남 공산당이 공산권 국가들을 양분한 소련-중국 분쟁에서 소련측을 지지하자 중국의 덩샤오핑화궈펑은 베트남을 소련의 앞잡이로 간주하여 전쟁을 결정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 정부가 원조받은 무기로 우방인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은혜를 잊어버린 배신 행위’였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정부로서는 캄보디아와의 미확정 국경 문제와 폴 포트 정권이 캄보디아 내의 베트남계 주민에 대한 박해와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고, 소규모지만 반복되는 국경 침범과 도발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 과정[편집]

1979년 2월 17일 국경 지대인 윈난 성에 집결했던 중국군은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하였다. [1]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 지형으로 대규모 병력 이동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당시 베트남군은 주력 부대가 캄보디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침공군에 맞선 병력은 민병대와 국경 수비대뿐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수십 년 간의 실전 경험이 있었고 현지 지형에 익숙했지만, 중국군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흔들었던 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통신이나 장비면에서 근대화가 지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중국군은 큰 희생자를 기록하면서도 계속 전진하여 3월 6일 국경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충지인 랑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란손을 철저히 파괴하고 국경 밖으로 철수하였다.

결과[편집]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했으나, 실제로는 처음에 의도했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군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내내 국경선의 확정을 둘러싸고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다가 1989년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협정이 체결되었고, 중국-베트남 간의 육지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 와중에서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로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 해상을 떠돌기도 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중공(中共), 베트남 침공(侵攻)", 《매일경제신문》, 1979년 2월 19일 작성, 1면. "중공(中共)은 「베트남」 지도층의 「캄보디아」 방문과 때맞춰 17일 상오 17만대군과 7백대의 항공기 및 다수의 탱크 · 중포(重砲) · 각종 화기(火器)를 동원 1천2백km 전 국경선(全國境線)을 넘어 일제히 「베트남을 전격침공, 4개 성(省) 12개 시 · 읍을 유린하고 「베트남 영내 50km까지 진격하여 19일 현재 아마도 수도 「하노이」 공략(攻略)을 목표로 남진을 계속중이며 「베트남」은 중공군(中共軍)이 보급을 기다리고 있는 틈을 타 총반격에 나섬으로써 양국군이 치열하게 접전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바깥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