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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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UH-1D helicopters in Vietnam 1966.jpg
1966년 미군 휴이 UH-1D 헬리콥터
날짜 1959년1975년 4월 30일
장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결과 북베트남 승리
공산주의자들의 남베트남 점령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장악
교전국
반공군

남베트남의 국기 남베트남
미국의 국기 미국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의 국기 필리핀
뉴질랜드의 국기 뉴질랜드
Flag of the Khmer Republic.svg 크메르 공화국
타이의 국기 타이
Flag of Laos (1952-1975).svg 라오스 왕국

공산군

북베트남의 국기 북베트남
FNL Flag.svg베트콩
지원 국가
Flag of Democratic Kampuchea.svg 크메르루주
라오스의 국기 파테트라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
Flag of the Soviet Union 1955.svg 소비에트 연방

지휘관
남베트남의 국기 응우옌반티에우
남베트남의 국기 럼꽝티
남베트남의 국기 응우옌까오끼
남베트남의 국기 응오딘지엠
남베트남의 국기 응오꽝쯔엉
대한민국의 국기 박정희
대한민국의 국기 채명신
대한민국의 국기 이세호
미국의 국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의 국기 존 F. 케네디
미국의 국기 린든 B. 존슨
미국의 국기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의 국기 웨스트모어랜드
미국의 국기 리처드 닉슨
미국의 국기 제럴드 포드
미국의 국기 크라이턴 에이브럼스
미국의 국기 프레더릭 웨이언드
미국의 국기 엘모 줌월트
미국의 국기 존 폴 밴
미국의 국기 로빈 올즈
타이의 국기 타놈 끼띠카쫀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해럴드 홀트
뉴질랜드의 국기 키스 홀리오크
필리핀의 국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Flag of the Khmer Republic.svg 론 놀
Flag of Laos (1952-1975).svg 수바나 푸마
북베트남의 국기 호찌민
북베트남의 국기 레주언
북베트남의 국기 쯔엉찐
북베트남의 국기 응우옌찌타인
북베트남의 국기 보응우옌잡
북베트남의 국기 팜훙
북베트남의 국기 반띠엔중
FNL Flag.svg 북베트남의 국기 쩐반짜
북베트남의 국기 레득토
북베트남의 국기 동시응우옌
북베트남의 국기 레득아인
FNL Flag.svg 북베트남의 국기 쩐도
북베트남의 국기 응우옌반또안
북베트남의 국기 호앙민타오
북베트남의 국기 응우옌민쩌우
북베트남의 국기 쩐테몬
북베트남의 국기 쭈프엉도이
북베트남의 국기 쯔엉묵
FNL Flag.svg 보민찌엣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저우언라이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Flag of Democratic Kampuchea.svg 폴 포트
라오스의 국기 수파누봉
병력
~1,200,000 (1968년)

남베트남: ~650,000명
미국: 553,000명 (1968년)
대한민국, 뉴질랜드, 타이, 필리핀: ~61,800명
오스트레일리아: 49,968명 (1962년-1973년)

~520,000 (1968년)

북베트남: ~340,000명
중화인민공화국: 170,000명 (1969년)
소비에트 연방: 3,000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00명

피해 상황
남베트남의 국기 남베트남 사망: 220,357명, 부상: 1,170,000명

미국의 국기 미국 사망: 58,159명, 2,000여명 실종, 부상: 303,635명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사망: 4,407명, 부상: 11,000명
타이의 국기 타이 사망: 1,351명
필리핀의 국기 필리핀 사망: 1,000명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사망: 520명, 부상: 2,400명 추정
뉴질랜드의 국기 뉴질랜드 사망: 37명, 부상: 187명


사망 합계: 285,831명
부상 합계: ~1,490,000명

북베트남의 국기 북베트남&FNL Flag.svg 베트콩 사망/실종: 1,176,000명, 부상: 600,000명+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1,446명, 부상: 4,200명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 사망: 미상, 24명 이상 사망 인정함.


사망 합계: ~1,177,446명
부상 합계: ~604,000명+

베트남 전쟁(Chiến tranh Việt Nam 찌엔짜인 비엣남[*], 戰爭越南)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북 베트남에 폭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1975년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목차

[편집] 경과

학자에 따라서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9년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남베트남 민간인 사망자 수는 1,581,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캄보디아 민간인 사망자도 70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라오스 민간인 사망자 수도 5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미군 사망자는 대략 6만여 명이다.[1],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 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다.

[편집] 배경

[편집] 1949년까지의 배경

베트남의 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집] 1950년 이후

비엣민 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거의 궤멸시켰고, 그해 제네바에서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맺은 휴전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프랑스군만 철수시킴으로써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총선거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를 틈타 미국이 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베트남 고딘디엠 정부의 독재가 계속되고 불교를 탄압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해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세력들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분노한 베트남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남베트남의 미군 주둔 병력도 계속 증가되었다.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전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것을 염려한 미국은 미군 주둔 병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비밀 군사작전을 통해 북베트남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편집] 통킹 만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통킹 만 사건입니다.

미국은 북베트남 지역을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64년 8월 4일 '통킹만 사건'을 만들어낸다. 통킹만 사건은 북베트남 밖 공해를 순찰하던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건을 말한다. 2005년 10월 뉴욕 타임즈에는 통킹만 사건이 조작된 사건임을 시사하는 기사가 실린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의회의 인준을 받아 베트남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지만, 미국의 구축함 선장은 어뢰정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통킹 만 사건 전날 미군이 북베트남 영토를 폭격했던 사실이 미국 국방성의 기밀문서를 통해 밝혀져 미국의 도덕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편집] 베트남 전쟁

베트남 지역에 미군이 상륙하기 시작하고 이에 맞춰 북베트남군이 남하하면서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제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참여했던 한국 전쟁과 달리 미군을 주축으로 대한민국, 중화민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타이, 뉴질랜드 등의 몇 개의 나라만이 전쟁에 참가했다.

베트콩의 평화통일 선전은 계속되었고 가족 간에도 생각이나 이념이 달라서 살상하는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인과는 별도로 원주민인 몽타나 족 등 소수 원주민들의 피해도 상당하였다. 베트콩 등 공산주의자들은 남베트남 군경과 미군 등 연합군의 단속을 피하여 게릴라전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밀림의 몽타나 족 등 원주민이 거주하는 동굴이나 초막 등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미군이나 연합군이 도착이 예상되면 자발적인 밀고자들로 베트콩들의 단속이 어려웠다. 미국군 사령부는 북베트남의 주요지역을 폭격하고 남·북베트남 각지의 삼림에 은거한 게릴라들을 찾아내기 위해 곳곳에 고엽제와 제초제를 살포했다. 이에 맞서 북베트남군은 계속된 게릴라전을 통해 미군에 대항했다.

[편집] 평화협정

미군의 EB-66 디스트로이어 1대와 F-105 썬더치프 4대가 비엣민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의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미국의 키신저는 북베트남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피폐한 북베트남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해방전선(베트콩 또는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그리고 남베트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미군이 철수하지만 북베트남이나 해방전선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월남에 양도했다.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73년 1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이 철수했다. 외견상 남베트남의 경제와 군사력은 북베트남을 앞서 있었으나, 그것은 미국의 지원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북폭때문에 거의 원시경제 상태에 있었으나,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세력과 싸워온 역전의 노장들이 지휘하는 군대의 사기는 높았다. 이에 반해 남베트남군의 고급 지휘관들은 대체로 프랑스 식민군대 출신이어서 국민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정치 또한 군부의 잦은 개입과 부정부패로 계속 혼란상태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평화통일 선동은 계속된 반면 남베트남의 대통령 티에우 정권은 전적으로 외국 군대에 안보를 의존하였고, 티에우의 영부인은 그 와중에서도 해외에서 사치품 관광으로 이런 사건들은 민심을 공산당 계열로 이반시키는데 한 몫했다.

[편집] 사이공 정부의 항복

미군 병사가 베트콩을 찾아 가택을 수색하고 있다.
호치민 시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기록 사진들.

휴전협상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군측은 남베트남군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남베트남 정치계의 혼란과 부패상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고 군부의 정치개입도 여전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군대출신의 남베트남 고급 장교들은 그 와중에서도 보급물자를 민간에 사사로히 불하하고 심지어 적에게까지 처분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정계가 소용돌이쳐서,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지 못할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무력통일을 결심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북베트남군이 중부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각지에 분산 고립돼 있던 남베트남군은 곳곳 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북베트남군의 사이공 진격이 가까워옴에 따라 남베트남군이 크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응우옌반티에우가 이끄는 남베트남정부는 사이공 주변에 방어선의 구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북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에서 북동쪽으로 241km 떨어진 다리아크 지방 중심지인 반 메 투오트를 공격한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저항없이 마을을 장악했으므로 남베트남의 북부 지역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수많은 탱크의 지원으로 북베트남군은 1973년 1월의 휴전선을 형성했던 타치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티에우 대통령의 "전선사수"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저항도 없이 무질서한 퇴각만을 계속해온 남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북부 절반을 북베트남군에게 포기했다.

3월말 현재 남베트남군은 사실상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졌다. 정보소식통에 의하면 군대의 절반이 도망 중이고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공격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사이공은 패배주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다. 하노이측은 이런 와중에서 심리전을 병행하여 남베트남 정부의 권위와 지도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외면하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던 티에우 대통령은 뒤늦게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남베트남을 지키자.”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민심은 떠난 지 오래였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북베트남군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계속된 반전운동과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미국이 다시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띠엔중이 이끄는 북베트남군이 중부남베트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남베트남군은 지리멸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1975년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북베트남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일사천리로 남하할 때 부패했던 남베트남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조국을 탈출하고 있었다.

1975년 4월 21일 티에우 대통령이 남베트남군의 최후 전투였던 《쑤안록 전투》 패배뒤 하야한후 해외로 도피했고, 이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재야 정치인 즈엉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5년 4월 29일 북베트남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중이던 남베트남군 제5사단장 레응우옌비 장군은 사이공 정부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공격했다.이 와중에 남베트남군 제5사단은 북베트남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항전을 벌이다 궤멸당했다. 사단장 레응우옌비 장군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정오가 지나서 북베트남 국기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게양되었다. 9일 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사이공이 함락된 직후 해방전선을 중심으로 남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항복한 사이공 정부의 공식명칭은 베트남 공화국이었다), 이는 사실상 북베트남의 괴뢰정권이었다. 1976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에 합의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편집] 결과

불타고 있는 베트콩 캠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접수한 후 월맹군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월맹은 제일 먼저 월남에서 반공인사와 남베트남의 고위층과 유산가들을 학살하였다. 일부는 이 학살을 피해서 보트로 달아나다가 해상에서 질병과 기근으로 사망하거나 해상에서 중국·태국·일본계 해적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거나 풍토병, 익사 등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해상에서 사망한 사망자 수는 120~150만 명 정도로 추산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일부는 살아서 중국·일본·필리핀 등에 상륙하거나 미국까지 도착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을 보트 피플이라 부른다. 그뒤 남베트남 내에서 좌익활동 및 게릴라 활동을 하였던 친월맹 인사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였다. 호치민에 의하면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자는 공산주의도 배신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출처 필요] 사이공 함락 후 남베트남의 군인·경찰·공무원·교사·지도층 인사들은 수용소에서 사상개조학습이라는 명분으로 고문과 인권유린을 당하였으며 그 수는 지금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한 민간인 학살 피해도 심각했는데, 공식 집계만으로 8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하지만, 민간인 학살 피해자 수는 1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서 평화통일과 월맹을 옹호하고 티에우정권과 미국을 비난하던 틱낫한 스님은 혼자만 프랑스로 도망가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사이공 정부의 최후의 대통령인 즈엉반민은 한동안 연금상태에 있다가 뒤에 프랑스망명이 허용되었다. 1980년대에는 사이공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경제관료가 통일베트남의 부총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사이공 정부의 공군총사령관, 총리와 부통령을 지낸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는 사이공 함락 이후 미국에 망명생활을 하다 2005년 다시 고국에 돌아와 정착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주변국인 캄보디아라오스 또한 비슷한 경로로 공산화되었다. 이를 두고 도미노 이론이라고 한다.

한편 통일 이후 정치적 변화와 경제난이 겹쳐 많은 수의 보트피플이 생겨났다. 이들중에는 통일 후 베트남 민족주의의 고양에 따라 재산을 몰수당한 중국계 화교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이들은 통일 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베트남을 탈출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많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 이유가 더 컸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통일 후에도 중국캄보디아와 거듭된 전쟁으로 국방비부담이 증가한데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경제의 재건은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이들을 정치적인 박해자라기보다는 경제적 난민으로 보아 외면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냉전이 완화되고 개혁개방으로 베트남의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보트를 이용한 해외 망명자는 없어졌다. 종전 후의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15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이 중에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이라고 여겨진다.

[편집] 대한민국군 참전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북한이 도발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움에 빠지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3]

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국군을 해외 파병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고 1965년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어 베트남참전 8년 간 총 325,517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외화획득 등 많은 경제적 이익과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그 대가로 5,099명의 사망자(KIA)와 11,232명의 사상자(WIA)와[4] 159,132명의 고엽제 피해를 낳았다.[5]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6]

[편집] 문학 작품

[편집] 영화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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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참고 문헌

  • 에세이 세계사, 현대편/백산서당

[편집] 주석

  1. 김명곤. “미국이 '전쟁광' 된 건 베트남 때문 - [해외리포트 월남전 패전 30년, 미국에 무얼 남겼나]”, 《오마이뉴스》, 2005년 5월 18일 작성. 2008년 3월 26일 확인.
  2. 김명곤. “[베트남 리포트 한국군 주요 전투 - 8년간 1,100여회 전투 전사자만 5,000명 넘어]”, 《한국일보》, 2005년 4월 27일 작성. 2008년 3월 26일 확인.
  3. 군사편찬연구소 (2005년 10월 28일). 한국군 파병의 배경은?. 국방부.
  4. 군사편찬연구소 (2005년 10월 28일). 파병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국방부.
  5.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2007년 11월 30일).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처리현황.
  6. 김수행,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