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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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냉전의 일부)
UH-1D helicopters in Vietnam 1966.jpg
1966년 미군 휴이 UH-1D 헬리콥터
날짜 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30일
장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결과 북베트남 승리
공산주의자들의 남베트남 점령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장악
교전국
반공군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미국 미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필리핀
뉴질랜드 뉴질랜드
타이 타이
Flag of the Khmer Republic.svg 크메르 공화국
Flag of Laos (1952-1975).svg 라오스 왕국
비공식 지원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공산군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
FNL Flag.svg 베트콩
Flag of Democratic Kampuchea.svg 크메르루주
라오스 파테트라오
비공식 지원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Flag of the Soviet Union (1955-1980).svg 소비에트 연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베트남 공화국 응오딘지엠
베트남 공화국 응우옌반티에우
베트남 공화국 응우옌까오끼
베트남 공화국 응오꽝쯔엉
베트남 공화국 럼꽝티
미국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존 F. 케네디
미국 린든 B. 존슨
미국 리처드 닉슨
미국 제럴드 포드
미국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 웨스트모어랜드
미국 크라이턴 에이브럼스
미국 프레더릭 웨이언드
미국 엘모 줌월트
미국 존 폴 밴
미국 로빈 올즈
대한민국 박정희
대한민국 채명신
대한민국 이세호
오스트레일리아 해럴드 홀트
타이 타놈 끼띠카쫀
뉴질랜드 키스 홀리오크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Flag of the Khmer Republic.svg 론 놀
Flag of Laos (1952-1975).svg 수바나 푸마
베트남 민주 공화국 호찌민
베트남 민주 공화국 레주언
베트남 민주 공화국 쯔엉찐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응우옌찌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 보응우옌잡
베트남 민주 공화국 팜훙
베트남 민주 공화국 반띠엔중
FNL Flag.svg 베트남 민주 공화국 쩐반짜
베트남 민주 공화국 레득토
베트남 민주 공화국 동시응우옌
베트남 민주 공화국 레득아인
FNL Flag.svg 베트남 민주 공화국 쩐도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응우옌반또안
베트남 민주 공화국 호앙민타오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응우옌민쩌우
베트남 민주 공화국 쩐테몬
베트남 민주 공화국 쭈프엉도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 쯔엉묵
FNL Flag.svg 보민찌엣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저우언라이
소비에트 연방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Flag of Democratic Kampuchea.svg 폴 포트
라오스 수파누봉
병력
약 170만~200만명

남베트남: 약 1,087,916~1,355,000명
미국: 543000~548,383명
한국: 49,000~49,869명
타이: 11,586~22,000명
뉴질랜드: 400~534명
중화민국: 31명
스페인: 13명
오스트레일리아: 7,500~7,643명
(1962년-1973년)

약 52만명 (1968년)

북베트남: 약 34만명
중화인민공화국: 17만명 (1969년)
소비에트 연방: 3천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00명

피해 규모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사망: 22만357명
부상: 117만명

미국 미국
사망: 5만8천159명
실종: 2천여명
부상: 30만3천635명
대한민국 대한민국
사망: 3,806~4,960명
부상: 8,380~11,000명
실종: 3명
타이 타이
사망: 1천351명
필리핀 필리핀
사망: 1천명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사망: 520명
부상: 약 2천400명
뉴질랜드 뉴질랜드
사망: 37명
부상: 187명

사망 합계: 28만5천831명
부상 합계: 약 149만명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
FNL Flag.svg 베트콩
사망/실종: 약 117만6천명
부상: 60만명 이상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1천446명
부상: 4천200명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사망: 미상
(24명 이상 사망 인정)

사망 합계: 약 117만7천명
부상 합계: 60만4천명 이상

미군의 EB-66 디스트로이어 1대와 F-105 썬더치프 4대가 비엣민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
미군 병사가 베트콩을 찾아 가택을 수색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戰爭越南)은 1955년 11월 1일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됨으로서 종전되었다. 월남전쟁,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목차

[편집] 경과

195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어로 월남 전쟁 혹은 월남전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남베트남 민간인 사망자 수는 1,581,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캄보디아 민간인 사망자도 70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라오스 민간인 사망자 수도 5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미군 사망자는 대략 6만여 명이다.[1],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고엽제 같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자녀들이 장애를 얻은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다.

[편집] 배경

[편집] 1950년까지의 배경

베트남의 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집] 냉전과 독립 운동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연합군에 대하여 항복하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많은 식민지에서, 지배국이던 연합국의 피폐를 좋은 기회로 보고, 군사행동을 수반한 격렬한 독립운동이 발생하였다. 그 움직임으로 식민지의 유지를 목표로 하는 연합국과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꾀하려는 식민지 국민 간의 분쟁이 빈발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특히 아시아의 독립운동은 전승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정부와 미국정부의 어느 한쪽에 의한 지도·지원을 받는 예가 많았다.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의 소비에트 연방은, 트루먼 정권의 미국에 대항하고자, 전 세계의 공산화를 위해 공산주의의 노동자계급, 혁명 세력을 지원하였다. 그래서, 미-소 공히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냉전"이라고 불리는 구조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미-소 대립은 베를린 봉쇄한국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식으로 표면화되었다. 자본주의의 맹주를 자인하는 미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정권의 성립을 "도미노"로 보고, 일국의 공산화가 주변국에까지 파급한다는 "도미노 이론"을 제창하여, 아시아와 중남미 여러 나라의 반공주의 세력을 지원하여, 각지의 분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편집] 인도차이나 공산당,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한 총봉기

1940년 8월에 일본군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프랑스군과 일본군에 의한 영유권 전쟁으로 빠져들게 된다.(→비시 프랑스). 그 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그 4일 후인 8월 13일에는 베트남 8월 혁명이 발발하여, 코민테른의 구성원으로, 비엣민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던 호찌민은 일본군정하에서 독립한 베트남 제국 (국가원수: 응우옌 왕조의 황제였던 바오다이, 수반: 짠쫑낌(Trần Trọng Kim))을 무너뜨리고, 일본군이 손을 놓았던 보안대와 경찰서 등 정부기관의 접수에 성공하였다. 그 후, 호찌민이 인솔하는 혁명군은 포츠담 선언이 조인되었던 9월 2일,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을 수립하고, 국민으로부터의 지지가 높았던 바오다이 황제를 "최고고문"으로 맞이하면서, 공산주의를 기초로 한 국가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편집] 1951년 이후

[편집]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

비엣민 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거의 궤멸시켰고, 그해 제네바에서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맺은 휴전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프랑스군만 철수시킴으로써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1956년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총선거가 남베트남 지도자들이 협력하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편집] 미국의 남베트남 개입

이 때를 틈타 미국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베트남 고딘디엠 정부의 독재가 계속되고, 가톨릭 신자인 고딘디엠 대통령이 불교를 탄압[3]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해지면서, 베트남사회주의자들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고딘디엠의 독재에 분노한 베트남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불교 승려들도 분신항거로써 자신의 몸을 공양함으로써 고딘디엠 독재정권에 항의하였다.

[편집] 미국과 북베트남의 대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남베트남의 미군 주둔 병력도 계속 증가되었다.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전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것을 염려한 미국은 미군 주둔 병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비밀 군사작전을 통해 북베트남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편집] 통킹 만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통킹 만 사건입니다.
1964년 8월 2일에 미국에서 촬영된 통킹 만 사건

통킹만 사건은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하면서 발발한 사건이다. 이 교전의 결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정 3척이 손상을 입었고, 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미해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전상자는 없었다.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명분으로 베트남에 대해 공개적으로 군사 개입을 강화하게 된다. 8월 7일, 미 의회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통킹 만 결의'를 의결하였으며, 1965년 2월부터는 B-52 폭격기를 동원한 북폭에 나섰고, 지상군도 파견되었다.

[편집] 베트남 전쟁

베트남 지역에 미군이 상륙하기 시작하고 이에 맞춰 북베트남군이 남하하면서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제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참여했던 한국 전쟁과 달리 미군을 주축으로 대한민국, 중화민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타이, 뉴질랜드 등의 몇 개의 나라만이 전쟁에 참가했다.

베트콩의 평화통일 선전은 계속되었고 가족 간에도 생각이나 이념이 달라서 살상하는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인과는 별도로 원주민인 몽타나 족 등 소수 원주민들의 피해도 상당하였다. 베트콩 등 공산주의자들은 남베트남 군경과 미군 등 연합군의 단속을 피하여 게릴라전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밀림의 몽타나 족 등 원주민이 거주하는 동굴이나 초막 등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미군이나 연합군이 도착이 예상되면 자발적인 밀고자들로 베트콩들의 단속이 어려웠다. 미국군 사령부는 북베트남의 주요지역을 폭격하고 남·북베트남 각지의 삼림에 은거한 게릴라들을 찾아내기 위해 곳곳에 고엽제와 제초제를 살포했다. 이에 맞서 북베트남군은 계속된 게릴라전을 통해 미군에 대항했다.

[편집] 마닐라 정상 체제

베트남 전쟁에 적극 참여했던 나라인 한국·미국·타이·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7개국 원수들이 회동한 1966년 10월 24∼25일의 마닐라 정상회담에서는 베트남을 중심으로 점증하는 공산침략을 격퇴하려는 자유제국의 공동결의를 다짐하고 전쟁수행 과정에서나 분쟁해결 과정에서 참전국(參戰國) 간에 상호협의할 체제를 마련한 외에도 아시아·태평양 전역을 안전과 복지를 위한 하나의 협력체제로 발전시키려는 데 있어서 단합할 것을 다짐하였다. 아스팍 체제와 비슷하기는 하나 이 마닐라정상체제, 다시 말해서 베트남참전국 협력체제는 번영의 필수적 전제요건인 안전보장을 위해서 지역적인 집단방위(集團防衛) 노력에 보다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월남 참전국 외상회의는 1967년에 워싱턴에서 제1차 회의를 개최한 것을 기점으로하여 제2차 회의는 이듬해 워싱턴에서, 제3차는 1969년 방콕에서, 제4차는 1970년 사이공에서, 그리고 1971년의 제5차는 서울에서 각각 개최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반공 구축망을 다짐했다. 그러나 중국의 유엔 가입과 베트남 전쟁의 종결 기미가 나타나 참전국들은 자국의 독자적인 외교정책 추진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게 되어 후속적인 결속은 사라지고 말았다. [4]

[편집] 평화협정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의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미국의 키신저는 북베트남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피폐한 북베트남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해방전선(베트콩 또는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그리고 남베트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미군이 철수하지만 북베트남이나 해방전선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월남에 양도했다.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73년 1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이 철수했다. 외견상 남베트남의 경제와 군사력은 북베트남을 앞서 있었으나, 그것은 미국의 지원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북폭때문에 거의 원시경제 상태에 있었으나,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세력과 싸워온 역전의 노장들이 지휘하는 군대의 사기는 높았다. 이에 반해 남베트남군의 고급 지휘관들은 대체로 프랑스 식민군대 출신이어서 국민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정치 또한 군부의 잦은 개입과 부정부패로 계속 혼란상태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평화통일 선동은 계속된 반면 남베트남의 대통령 티에우는 전적으로 외국 군대에 안보를 의존하였고, 티에우의 영부인은 그 와중에서도 해외에서 사치품 관광으로 이런 사건들은 민심을 공산당 계열로 이반시키는데 한 몫했다.

[편집] 남베트남의 항복

휴전협상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군측은 남베트남군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남베트남 정치계의 혼란과 부패상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고 군부의 정치개입도 여전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군대출신의 남베트남 고급 장교들은 그 와중에서도 보급물자를 민간에 사사로히 불하하고 심지어 적에게까지 처분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정계가 소용돌이쳐서,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지 못할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무력통일을 결심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북베트남군이 중부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각지에 분산 고립돼 있던 남베트남군은 곳곳 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북베트남군의 사이공 진격이 가까워옴에 따라 남베트남군이 크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응우옌반티에우가 이끄는 남베트남정부는 사이공 주변에 방어선의 구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북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에서 북동쪽으로 241km 떨어진 다리아크 지방 중심지인 반 메 투오트를 공격한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저항없이 마을을 장악했으므로 남베트남의 북부 지역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수많은 탱크의 지원으로 북베트남군은 1973년 1월의 휴전선을 형성했던 타치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티에우 대통령의 "전선사수"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저항도 없이 무질서한 퇴각만을 계속해온 남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북부 절반을 북베트남군에게 포기했다.

3월말 현재 남베트남군은 사실상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졌다. 정보소식통에 의하면 군대의 절반이 도망 중이고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공격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사이공은 패배주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다. 하노이측은 이런 와중에서 심리전을 병행하여 남베트남 정부의 권위와 지도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외면하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던 티에우 대통령은 뒤늦게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남베트남을 지키자.”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민심은 떠난 지 오래였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북베트남군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계속된 반전운동과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미국이 다시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띠엔중이 이끄는 북베트남군이 중부남베트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남베트남군은 지리멸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1975년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북베트남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일사천리로 남하할 때 부패했던 남베트남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조국을 탈출하고 있었다.

1975년 4월 21일 티에우 대통령이 남베트남군의 최후 전투였던 《쑤안록 전투》 패배뒤 하야한후 해외로 도피했고, 이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재야 정치인 즈엉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5년 4월 29일 북베트남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중이던 남베트남군 제5사단장 레응우옌비 장군은 사이공 정부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공격했다.이 와중에 남베트남군 제5사단은 북베트남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항전을 벌이다 궤멸당했다. 사단장 레응우옌비 장군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정오가 지나서 북베트남 국기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게양되었다. 9일 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사이공이 함락된 직후 해방전선을 중심으로 남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항복한 사이공 정부의 공식명칭은 베트남 공화국이었다), 이는 사실상 북베트남의 괴뢰정권이었다. 1976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에 합의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편집] 결과

불타고 있는 베트콩 캠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접수한 후 월맹군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월맹은 제일 먼저 월남에서 반공인사와 남베트남의 고위층과 유산가들을 숙청하였다.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주변국인 캄보디아라오스 또한 비슷한 경로로 공산화되었다. 이를 두고 도미노 이론이라고 한다.

한편 통일 이후 정치적 변화와 경제난이 겹쳐 많은 수의 보트피플이 생겨났다. 이들중에는 통일 후 베트남 민족주의의 고양에 따라 재산을 몰수당한 중국계 화교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이들은 통일 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베트남을 탈출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많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 이유가 더 컸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통일 후에도 중화인민공화국캄보디아와 거듭된 전쟁으로 국방비부담이 증가한데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경제의 재건은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냉전이 완화되고 개혁개방으로 베트남의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보트를 이용한 해외 망명자는 없어졌다. 종전 후의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15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이 중에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이라고 여겨진다.

[편집] 세계의 반응[5]

  •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 베이징하노이의 거리는 환성과 환희와 흥분의 도가니로 휩싸였다. 거리에는 폭죽과 축가와 축무로 온통 축제 분위기에 들떴으며, 한 북베트남 관리는 “끝장이 가까워왔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30년간 오늘을 기다려 왔다”고 했다. 한편 응우옌티빈 외상은 “수천년간 한 민족이었던 베트남 인민들은 남북베트남을 통일하는 것이 우리들의 오랜 숙원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 정세 하에서 우리의 즉각적인 과업은 평화적이고도 독립적이며 중립적인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다. 현재 남북베트남은 경제 정치면에서 제도적인 차이 점이 있어서 이의 합치가 통일에 필요한 과정이다”라고 밝혔다.
  •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베트남 공화국 붕괴 직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
    • 즈엉반민 신임 대통령은 사이공 방송을 통해 “유혈을 방지하기 위해 베트콩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모든 남베트남군에게 전투를 중지하고 현위치를 벗어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 응우옌후탄 남베트남군 참모총장은 “모든 장성과 장교 및 사병은 민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또한 “모든 사령관들에 대해서 유혈없는 휴전을 수행하기 위해 베트콩 사령관들과 접촉할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 베트남 인민의 역사적 승리라고 찬양하며, 오랜 고통을 받아온 베트남에 평화의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 미국 미국
    • 워싱턴 D.C. - 베이징하노이와 달리 “이제 끝장났다”는 분위기였다. 미국의 일부 신문들은 "수천명의 베트남인들의 마지막 철수 작전에서 애써 위안을 찾아보려는듯이 철수노력은 한 인간집단을 구출하려는 찬양할만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 인도차이나에서 얻은 교훈으로서 공약에는 신중해야 하고 그 이행에 있어서 단호한 결의를 보여야 한다. 앞으로 과잉개입을 지양하겠다.”고 밝혔다.
    • 밀리센트 펜위크 하원의원 - “우리는 미국의 결정적 국가 이해가 무엇인가를 놓고 충분히 협의를 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국방과 안보 유지상 기본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 바티칸 시국 바티칸 시국 - 교황청은 대변인을 통해 베트남가톨릭 교도들의 운명에 우려를 표하면서 “교황베트남에서 민권과 신교의 권리가 엄격히 존중되는 가운데 진정한 평화가 성취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 대한민국 대한민국 - 사이공 함락 후 대한민국 국회는 안보 의회를 소집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황을 점검하는 등 안보 태세에 총력을 강화했다.
  • 일본 일본 -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실패에 비추어 아시아 외교, 특히 동남아시아 외교에 있어서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영국 영국Flag of Laos (1952-1975).svg 라오스 - 베트남에 신정부가 수립되면 승인하겠다고 밝혔다.
  • 인도 인도 - 비빈팔 다스 부외상은 베트남 공화국의 항복 후 의회에서 "인도는 남베트남 공화국(베트남 임시 혁명 정부)를 승인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여 의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인도 정부와 국민은 베트남 인민의 영웅적인 독립투쟁이 승리의 결말을 본 것을 기뻐한다”고 말했다.
  • 필리핀 필리핀 - 카를로스 로물로 외상은 “이 비극이 쌍방을 위해 영원히 끝나기를 바라며 이 이상의 유혈을 막기 위한 남베트남 정부의 항복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 타이 타이 - 차티차이 춘하반 외상은 베트남동남아시아의 국가이고 우리의 인방이므로 신정부를 승인할 것이라고 말하고 베트남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행정관리들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 싱가포르 싱가포르 - 고 렝쉐 수상서리 겸 국방상은 동남아시아 비공산국가들에 공산위협의 정체를 보다깊이 바르게 파악하여 대처하지 못하면 다른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운명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 반면 툰 압둘 라자크 수상은 새 베트남 정부가 수립되면 이를 승인하겠다고 발표해 싱가포르와 대조된 반응을 보였다.
  • 중화민국 중화민국 - 중화민국1949년 이미 국공 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패한 경험이 있다. 선창환(沈昌煥) 외교부장은 남베트남의 패망은 공산군 측의 1973년 파리 협정을 위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공산국가와 협상하려는 기타 국가들에게 경고했다.

[편집] 대한민국 국군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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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 국군 베트남전 참전입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 하에서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차관 마련 등의 군사, 경제적인 이유로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북한이 도발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움에 빠지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6] 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국군을 해외 파병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한국이 공산침략을 경험한 국가로서 아시아지역의 안보와 자유수호를 위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한편 야당인사인 윤보선 등은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다. 1964년 9월 11일 1개 의무중대(醫務中隊) 및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는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하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지원단(軍需支援團) 및 백구부대 등 1개군단 병력을 파견하여,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최대 5만 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로서 미국 다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였다. 파월 후 한국군은 월남평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월남문제에 대해서 큰 발언권을 행사했다. 1966년 10월 마닐라에서 열린 참전국 정상회담에서는 주도적 지원국가라는 점에서 박대통령이 기조연설 행하고, 월남평화방안으로서 협상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중지 등 구체적 성의를 보일 것, 월남의 의사를 존중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 파병기간 도중 미군의 미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민간인 학살사건인, 파월 한국(남한)군 해병대에 의한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월남전에의 참전은 한국으로서는 최초의 해외파병으로서, 이를 통해 국위(國威)를 선양할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있거니와 동시에 월남전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며, 한국안보 문제와 관련, 한국군 현대화를 골자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 3월)를 낳았고, 전투 경험을 얻었다. 반면, 파병된 대한민국군 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자(KIA)와 11,232명의 부상자(WIA)[7]를 기록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다. 또한 159,132명의 고엽제 피해자를 낳았으며[8]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유명인사로는 전두환이 이 전쟁에 연대장의 신분으로 참전하였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9]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미국의 월남전의 월남화계획에 발맞추어 한국도 점차 주월군 철수를 시작, 1973년까지는 완전히 철수했고, 그후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10]2005년 8월 26일 대한민국 정부가 베트남전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좀 더 정확한 역사적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과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의 증언 내용과 한국의 대응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11]

[편집] 관련 대중매체

[편집] 문학 작품

[편집] 영화

[편집] 드라마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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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참고 문헌

  • 에세이 세계사, 현대편/백산서당

[편집] 주석

  1. 김명곤. “미국이 '전쟁광' 된 건 베트남 때문 - [해외리포트 월남전 패전 30년, 미국에 무얼 남겼나]”, 《오마이뉴스》, 2005년 5월 18일 작성. 2008년 3월 26일 확인.
  2. 김명곤. “[베트남 리포트 한국군 주요 전투 - 8년간 1,100여회 전투 전사자만 5,000명 넘어]”, 《한국일보》, 2005년 4월 27일 작성. 2008년 3월 26일 확인.
  3. 《세계종교사입문》/청년사
  4.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마닐라 정상체제의 기능변모
  5. 1975년 5월 1일 동아일보 참고
  6. 군사편찬연구소 (2005년 10월 28일). 한국군 파병의 배경은?. 국방부.
  7. http://www.imhc.mil.kr/imhcroot/upload/resource/V14.pdf
  8.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2007년 11월 30일).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처리현황.
  9. 김수행,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10.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월남파병
  11. 정준영 기자. “<베트남전> 브라운각서와 사이밍턴 청문회(재송)”, 《연합뉴스》, 2005년 8월 2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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