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 전쟁
| 미국 독립 전쟁 | |||
1797년 존 트럼블이 그린 요크타운 영국군 사령관(콘 월리스)이 항복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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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오네이다족 투스카로라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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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 병력 | |||
| 농민군 2만 명 워싱턴군 1만 1,000명 |
정규군 4만 2,000명 독일 용병 2만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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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 규모 | |||
| 2만 5,000명 전사 1만 7,000명 병사 총 5만 명 |
1,240명 전사 1만 8,500명 병사 4만 2,000명 탈영 1만 3,000명 포로 상선 1,500척 나포 독일인 1,200명 전사 독일인 6,354명 병사 영국군 1만 9,470명 사망 독일인 7,554명 사망 총 2만 7,024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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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년 ~ 1783년) 또는 미국 혁명 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1]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에서 동부 해안 13개주가 영국의 조세정책 등에 반발하여 식민지 독립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미국은 1776년에 13주가 있는 상태애서 건국했다고 보며, 이 전쟁은 프랑스 혁명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목차 |
[편집] 원인과 배경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국의 미국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조세 정책이다. 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 회담에서 영국은 식민지에 대해 조세 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설탕법, 당밀법 등으로 당밀, 설탕, 철, 소금 등의 수입품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하였으나 간접세인 탓에 큰 반발이 따르지는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인지세법인데, 이는 신문, 일간지, 트럼프 카드 등 미국 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간접세지만 관세가 아니라 내부세라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구호를 내걸고 영국의 과도한 조세 정책에 반발하였다. 즉, 미국 식민지에서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이러한 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인지세법이 간접세의 추구라는 조세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인지세법을 철폐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영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을 들 수 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은 인디언과 연합한 프랑스와 전쟁하는 영국을 적극 지원하였다. 영국 승리 후, 식민지 미국인들은 비옥한 중서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기대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인디언 보호구역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자꾸 중서부지역으로 넘어가려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인과 인디언들의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견해야 했고, 재정적 비용에부담을 느껴 병참법을 제정한다. 병참법은 영국 군대 비용의 일부를 미국 식민지인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또한 1770년 3월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미국 식민지인들이 보스턴에서 시가 행진을 하던 영국군과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보스턴 시민 5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어 마침내 1773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였다.
[편집] 결과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지하였고, 특히 프랑스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여 직접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전쟁을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써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되고, 결국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미국은 영국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편집] 제1차 대륙회의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의 폐회 연설에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워싱턴과 벚나무 일화와 마찬가지로 전기작가의 거짓말이다. 헨리는 무슨 말을 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곧바로 머뭇거리며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그 말이라는 것도 흔히 알려진 것처럼 날이 서고 도발적인 명연설은 절대 아니었다[2]. 하여튼, 이를 계기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3]
[편집] 제2차 대륙회의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 장군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각 주에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하였다. 제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 부터 미국의 사실상 연방의회의 역할을 하였으며,[4] 이 1775년 제2차 대륙회의 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편집] 결과
[편집] 요크타운과 전쟁의 끝
1778년에 사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와 독립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게 된다. 결국, 178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편집] 사상자
미국 독립 전쟁의 의한 사상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전쟁들처럼,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전사자보다 많았다. 천연두가 만연한 가운데 독립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염병은 대략 130,000 명 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약 25,000 명의 미국 독립군이 군 복무 중에 죽었다. 그 중 약 8,000 명은 전사했다. 17,000여 명은 질병으로 죽었는데, 그 중 8,000 명은 포로가 된 채로 죽었다. 독립군의 사상자는 약 8,500명에서 25,000 명 사이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국인 총 사상자는 50,000 명 정도까지 추정된다.
171,000 명의 해군이 전쟁 중 영국군으로 참전했고, 그 중 25-50%는 강제 징집되었다. 1,240 명이 전사했고, 18,500명이 질병으로 죽었다. 가장 큰 원인은 비타민 결핍이 원인인 괴혈병이었다. 레몬주스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독부가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전쟁 중 약 42,000명의 해군이 탈영했다.
대략 1,200명의 독일인이 전사했고 6,354명이 사고나 질병으로 죽었다. 16,000명의 남은 독일인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5,500명 정도는 여러가지 이유로 미합중국에 잔류했다. 대부분 미 합중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였다.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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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내에서는 이 호칭으로 불린다.
- ↑ 브라이슨, 빌. "제3장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혁명기의 미국", 정경옥: {{{title}}} (한국어). 살림출판사, 65쪽쪽. ISBN 9788952211064
- ↑ 윤용희, 윤이화, "미국의 건국정신과 헌법정신의 함의" 사회과학 Vol.17.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2005, 12면
- ↑ 윤용희, 윤이화, "미국의 건국정신과 헌법정신의 함의" 사회과학 Vol.17.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2005,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