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대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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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대공세
(베트남 전쟁의 일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동시에 공격한 지역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동시에 공격한 지역
날짜 1968년 1월 30일 ~ 1968년 9월 23일
장소 남베트남 전역
결과 남베트남 측 진영이 전술적으로 승리했으나, 전략적으로 패배함으로써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에 이기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교전국
반공 진영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미국 미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공산 진영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
FNL Flag.svg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지휘관
베트남 공화국 응우옌반티에우
베트남 공화국 응우옌까오끼
미국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베트남 민주 공화국 호치민
베트남 민주 공화국 보응우옌잡
FNL Flag.svg 호앙 반 타이
FNL Flag.svg 트란 반 트라
병력
약 130만명 이상 30만명 ~ 50만명
피해 규모
베트남 공화국
약 14,200 명 전사
15,917 명 부상

미국대한민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4,124 명 전사
19,295 명 부상

베트남 민주 공화국FNL Flag.svg
45,267 명 전사
61,267 명 부상


구정 대공세(舊正攻勢, 베트남어: Sự kiện Tết Mậu Thân, 영어: Tet Offensive) 또는 테트 공세1968년 1월 30일 밤부터 전개 된 베트남 인민군(NVA)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베트콩)의 대공세이다. 초반에는 베트콩이 미군과 남베트남의 주요 시설을 빠른 시간 내에 점령했지만, 곧장 미군과 남베트남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내 존속했던 베트콩이 궤멸 직전에 이르렀으나, 국제 여론이 반전 여론으로 쏠리면서, 북베트남에게 전술적 승리 대신 전략적 승리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승리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개요[편집]

웨스트모어랜드의 미군이 꽝찌 성에서 케산 전투를 벌이느라 베트남 중부 내륙으로 이동한 사이[1], 1968년 1월 30일 새벽 베트남 인민군이 베트남 국군이 구정이라는 이유로 방심한 사이를 틈 타 남베트남 전역에 공격을 퍼부었다. 베트남 인민군은 남베트남을 전면에서 공격하는 한편, 베트콩은 주요 도시들을 습격하여,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미국을 포함한 반공 지원국의 군사 기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중 한 곳인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자 미군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되었다.

미국 대사관을 습격한 베트콩 부대는 결사의 각오로 작전에 임하였고 그들의 군사적 사기는 매우 높았다. 또한, 베트남 인민군은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습격했지만, 남베트남 국군 측의 방어가 성공하면서 실패한다.

테트 공세에 대해 처음은 베트남 인민공화국(북베트남) 군사령부에서 반대를 했지만, 북베트남 공산당 수뇌부 측에서는 남베트남에 종속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역할을 강조할 것을 두고, 테트 공세와 같은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 작전에서 북베트남은 주요 습격 부대를 베트콩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의 임무는 그들을 보호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이 공세로 인해 수많은 남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할 것을 예고하여, 인구 밀집이 적은 곳을 주요 타격 지역으로 잡았지만, 작전 실행 도중 한계를 직면하면서, 주요 시설이 밀집한 대도시를 주요 공습지로 정하게 되었다.

전개[편집]

구정 대공세 초기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상당 수의 지역에서 퇴각하여야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막강한 화력으로 응전하여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 과정에서 특히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응우웬 왕조 시절의 수도였던 후에는 한 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베트남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미군은 도시 전체의 80%가 폐허로 변하는 포격을 퍼부으며 전투를 벌여 후에를 탈환하였다.[2] 후에 전투 중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 측이 후에에 살고 있던 비전투원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후에 학살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수 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전쟁 후 북베트남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의한 민간인 살해를 인정하였다.

북베트남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구정 대공세를 통해 잠시나마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들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구정 대공세는 그 동안 전쟁 승리를 낙관하였던 미국내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주베트남 미군을 총괄하던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의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표상이었다. 그는 《타임》지가 선정한 1965년 올해의 인물이었고[3], 《타임》은 그를 “미국 전사의 늠름한 화신 …… 역사에서 바로 뛰쳐나온 듯 전투 계획을 수립하고 …… 병사들에게 그가 지닌 미국의 목표와 책임을 이상적으로 제시하였다”라고 평했다.[3] 1967년 11월 웨스트모어랜드는 린든 B. 존슨 정부와 함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4] 그는 네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베트남 전쟁이 “끝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고 공언하였다.[5] 구정 대공세로 웨스트모어랜드의 단언이 허풍일 뿐이란 것이 드러나자 미국의 미디어들은 미군이 막대한 병력을 투입한 존슨 정부의 정책이 효과적인지 의문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존슨 정부는 군사적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존슨은 재선에 실패하게 되었다. 구정 대공세를 펼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구정 대공세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변환점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미국 정보 당국이 평가하고 있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전력이 과소 평가되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자[6] 언론인 피터 아네트벤쩨에서 근무 중인 익명의 장교가[7] “마을을 탈환하려면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폭로하였다.[8] 또 다른 정보원은 제9 보병 사단의 부리스 소령이 이러한 명령을 하였다고 지목하였다.[9]

영향[편집]

구정 대공세 일련의 모습은 언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되었다. 미군과 남베트남 국군은 최종적으로, 이 싸움에서 전술적으로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패배에 직면했다. 그 이유는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고, 남베트남 대통령군이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습격을 받으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 측의 승리를 확신했던 전 세계 국민 여론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반전 운동이 급격히 확산하면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선거 출마 중단을 선언하였고, 그에 더해 한 베트콩 장교가 남베트남의 경찰청장에 의해 즉결 총살되는 사진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더욱더 심각해졌다.

주석[편집]

  1. McNamara Argument Without End pp. 363–365.
  2. Anatomy of a War by Gabriel Kolko ISBN 1-56584-218-9 pp. 308–309.
  3. "The Guardians at the Gate", Time 7 January 1966, vol. 87, no.1.
  4. Witz The Tet Offensive: Intelligence Failure in War pp. 1–2.
  5. Larry Berman. Lyndon Johnson's War. New York, W.W. Norton, 1991, p. 116.
  6. Harold P. Ford. CIA and the Vietnam Policymakers pp. 104–123.
  7. Survivors Hunt Dead of Bentre, Turned to Rubble in Allied Raids nytimes.com.
  8. "Peter Arnett: Whose Man in Baghdad?", Mona Charen, Jewish World Review, 1 April 2003.
  9. Saving Ben 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