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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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WarGulf photobox.jpg
날짜 1990년 8월 2일~1991년 2월 28일
장소 이라크 전역
결과 다국적군의 승리
교전국
쿠웨이트 쿠웨이트

미국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영국
국제 연합 국제 연합
이집트 이집트
프랑스 프랑스
캐나다 캐나다
시리아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아랍에미리트
오만 오만
카타르 카타르
파키스탄 파키스탄

이라크 이라크
지원국

과테말라 과테말라
그리스 그리스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네덜란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노르웨이
뉴질랜드 뉴질랜드
니제르 니제르
대한민국 대한민국
덴마크 덴마크
독일 독일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멕시코 멕시코
모로코 모로코
몽골 몽골
바레인 바레인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베트남 베트남
벨기에 벨기에
세네갈 세네갈
소련 소련
스웨덴 스웨덴
스페인 스페인
시에라리온 시에라리온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온두라스 온두라스
이탈리아 이탈리아
인도 인도
일본 일본
중국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타이 타이
터키 터키
포르투갈 포르투갈
폴란드 폴란드
필리핀 필리핀
헝가리 헝가리
쿠르드 자치구 쿠르드 자치구

지원국

리비아 리비아
모리타니 모리타니
수단 수단
요르단 요르단
예멘 예멘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지휘관
쿠웨이트 자베르 3세

미국 조지 H. W. 부시
미국 노먼 슈워츠코프
미국 콜린 파월
미국 딕 체니
사우디아라비아 칼리드 빈 술탄[1][2]
사우디아라비아 술탄 이븐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영국 마거릿 대처
영국 존 메이저
영국 피터 드 라 빌레르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무함마드 후사인 탄타위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캐나다 케네드 J.서머스
시리아 하페즈 알아사드
파키스탄 베나지르 부토
필리핀 코라손 아키노
체코슬로바키아 바츨라프 하벨

이라크 사담 후세인

이라크 알리 하산 알마지드
이라크 살라흐 아부 마흐무드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병력
959,600명[3]
전투기 1,820대
폭격기 1,694대
미국 1,376대
사우디 175대
영국 69대
프랑스 42대
캐나다 24대
이탈리아 8대
탱크 3,318대
주로 M1 에이브람스(미국)
챌린저 1 탱크(영국)
M60 패튼(미국)
항공모함 8척
전함 2척
순양함 20척
구축함 20척
잠수함 5척[4]
1,000,000명 이상
전투기 649대
탱크 4,500여대
중국의 Type-59s,
Type-69s 기종
자체 생산한 T-55, T-62 기종
소비에트 연방
T-72탱크 500여대
피해 규모
교전
149명 사망
719명 부상
41명 포로 수감
(쿠웨이트 사상자는 알 수 없다)

오폭
44명 사망, 57명 부상
군수품 폭발: 11명 사망

사고: 145명 사망
교전
20,000명 - 35,000명 사망 65,000-80,000명 부상
80,000명 포로 수감[5]
실종자 75,000명

걸프 전쟁(1990년 8월 2일 ~ 1991년 2월 28일, Gulf War)은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쿠웨이트는 과거 이라크의 영토였다며 침략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소련 등 30여개 나라가 국제 연합의 결의와 미국의 주도 하에 다국적군을 결성해 쿠웨이트를 지원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걸프전쟁과 유사함을 바탕으로 ‘제2차 걸프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쟁의 배경[편집]

걸프 전쟁의 배경은 1980년대 발생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1961년 쿠웨이트영국 보호령에서 독립된 이래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 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 전쟁은 장기화되어 휴전하는 1988년까지 8년 동안 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이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쿠웨이트는 이라크와 국경분쟁지역에 유전을 설치하게 된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유전 설치에 항의하게 되고 쿠웨이트 영토에 대한 침략의 발판이 된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이 발발하였고 같은 해 12월 3일 몰타 회담에서 냉전 종식이 선언되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소련의 대리 전쟁"이라는 전쟁의 구실은 없어졌다.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날인 1990년 8월 2일은 몰타 회담(1989년 12월 3일) 8개월 후인 날이자 동서독 통일(1990년 10월 3일) 2개월 전이다. 즉 전쟁의 양상이 "공산주의와 반공주의 이념 대립"과 "미국과 소련의 대리 전쟁"을 상실한 것이다.

쿠웨이트 침공[편집]

1990년 8월 2일 이라크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쿠웨이트를 침공하였는데 당시 이라크가 내세운 침략의 이유는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석유를 몰래 채취하고 있고 19세기 제국주의 유럽 열강국가가 본래의 이라크 영토에서 떼어 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3만 명의 쿠웨이트군은 어이없게 무너졌고 3시간만에 쿠웨이트 수도인 쿠웨이트 시에 진입했다. 이 도시는 후에 사담 시로 개명되었다.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하였으며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에 철수를 요구하며 제재를 가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오히려 일방적인 합병을 선언하였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6척의 항공모함, 46만 명의 병력, 1,300대의 최신 전투기를 배치하였고 당시 미국은 이해 관계가 얽혀 있던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프랑스, 이집트 등 주요 국가들도 다국적군에 합류시켰다. 당시 미국, 프랑스, 소련 등은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갔고 유엔은 11월 29일 무력사용을 허용하였다. 당시 국제 유가가 1 배럴당 15달러 하던 것이 40 달러까지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1991년 1월 9일 제네바 외무 장관회의도 성과없이 돌아갔다.

사막의 폭풍 작전[편집]

사막의 폭풍 작전 전개도

1991년 1월 16일 ‘사막의 폭풍’ 작전 명령(Operation Desert Storm)이 개시되었다. 미국 공군의 EC-130H 전자자원기가 이라크군 통신을 방해하였고 17일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공습이 개시되었다.

당시 이라크 전투기는 거의 폭격으로 출격하지 못했으며 설사 출격하더라도 대부분 다국적군의 F-16F-18, F-15E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5,000대가 넘는 전차는 불능이 되었으며 이라크는 간간이 이스라엘을 항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나, 대부분 미국이 제공한 최신형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당시 40일에 가까운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있었다. 그리고 2월 24일, 다국적군은 대규모 지상군을 항공기 호위하에 진격시켰다. 이라크군 전차는 다국적군의 미국제 M1A1 전차나 영국제 챌린저 1 전차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이 전쟁 발발 42일만에 전투를 중지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프랑스[편집]

1990년 프랑스 툴롱항에 정박해 있는 만재배수량 33,000톤의 클레망소 항공모함이 승무원 1천여명, 40대의 헬기, 4대의 브레게 알리즈 프로펠러기를 탑재하고 걸프전을 위해 출항할 것이다. 6대의 퓨마 전투용 헬기와 60명의 기술진이 툴롱항으로 이동했다.[6]

결과[편집]

쿠웨이트는 해방이 되었으며 초현대전쟁이였다. 당시 최첨단 무기 앞에서는 100만 대군이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준 전쟁이였다. 당시 다국적군의 인명피해는 전쟁의 규모에 비해서 매우 경미하였다.

원인으로는 첨단무기, 방탄복, 항공기 발달이다. 이라크군은 후퇴하면서 쿠웨이트 정유시설을 파괴하였다. 그래서 세계적인 석유 오염이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무모한 군사 모험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1991년 2. 28, 10:00시를 기해 지상전 종결이 선언되었고 미국은 제재목적을 달성했다. 후세인은 UN의 12개 결의안 및 휴전조건 5개항을 수용했다.

  • 휴전조건 5개항
    1. 모든 안보리 결의안(12개) 수락
    2. 쿠웨이트 합병 무효화 및 피해보상 약속(1,500억불)
    3. 다국적군의 포로, 휴해 및 쿠웨이트인을 포함한 외국인 즉시 석방
    4. 기뢰 및 지뢰 등 모든 폭발물의 위치, 특성 등 통보
    5. 쌍방 군사령관의 48시간내 휴전논의

휴전회담(1991년 3. 3)에서 결의된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군사 분계선 설치(폭 2Km의 완충지대 설치)
  2. 분계선 20Km이내 비행금지

[7]

군사력 비교[편집]

미군 주도의 다국적군은, 미군 43만명과 미군을 포함한 68만명의 규모였고 이에 대항하는 이라크군은 정규군 50만과 예비군 50만을 동원한 100만의 규모였다.

걸프전쟁이 종결된 후 이라크군은 42개 사단 중 41개 사단이 무력화 되었고, 1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반해 다국적군은 300명의 전사자만이 발생하여 큰 대조를 보였다.

이러한 결과에는 첨단무기로 무장한 다국적군의 질적인 측면에서의 우세한 승리였고, 미래의 전쟁양상을 보여주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였다.

전투 또는 전투지원 병력을 파견한 다국적국가들과 그 구성[편집]

대한민국 대한민국 : 병력 314명(의료지원단 154명, 공군수송병력 160명), C-130 수송기 5대
그리스 그리스 : 홍해에 프리깃함 1척 파견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있는 이슬람교 사원 수호 병력 480명
네덜란드 네덜란드 : 프리깃함 2척, 터키에 F-16 1개 비행중대 제공
노르웨이 노르웨이 : 커터함 1척, 군사지원 선박 1척
뉴질랜드 뉴질랜드 : C-130 수송기 2대
덴마크 덴마크 : 코르벳함 1척
독일 독일 : 터키에 전투기 1개 중대 제공
모로코 모로코 : 병력 2,000명
바레인 바레인 : 병력 3,500명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 병력 2,000명
벨기에 벨기에 : 소해정 2척, 터키에 전투기 1개 중대 제공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 300명의 무자헤딘 병력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 프리깃함 2척, 병력 45명
오만 오만 : 병력 25,500명, 초계정 12척, 탱크 75대, 전투기 50대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 유도 미사일 장착 프리깃함 1척, 구축함 1척, 지원선 1척
온두라스 온두라스 : 병력 250명
이탈리아 이탈리아 : 선박 4척, 토네이도 전투기 8대, 터키에 전투기 1개 중대 제공
이집트 이집트 : 병력 40,000명, 탱크 358대, 제4기갑사단, 제3기계화 보병 사단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 화학전 방어부대 200명, 의료진 150명
카타르 카타르 : 병력 7,000명, 탱크 24대, 선박 9척, 전투기 19대
캐나다 캐나다 : 구축함 2척, 병력 1,700명, CF-18비행중대(30대의 전투기/수송기)
쿠웨이트 쿠웨이트 : 병력 7,000명 (쿠웨이트군의 잔류 병력), 전투기 35대
파키스탄 파키스탄 : 병력 10,000명
프랑스 프랑스 : 병력 20,000명, 선박 18척, 항공모함 1척, 60대 이상의 비행기, 탱크 350대, 제6기갑사단
포르투갈 포르투갈 : 영국군을 지원하는 선박 1척
폴란드 폴란드 : 선박 2척, 의료진
헝가리 헝가리 : 의료진 40명
[8]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Gulf War, the Sandhurst-trained Prince Khaled bin Sultan al-Saud was co commander with General Norman Schwarzkopf www.casi.org.uk/discuss
  2. General Khaled was Co-Commander, with U.S. General Norman Schwarzkopf, of the allied coalition that liberated Kuwait www.thefreelibrary.com
  3. 걸프 전쟁 연합군 www.nationmaster.com
  4. Geoffrey Regan, p.214
  5. Crocker III, H. W. (2006년). 《Don't Tread on Me》. New York: Crown Forum, 386쪽. ISBN 9781400053636
  6. 1990년 8월 13일 동아일보
  7. 도해세계전사 <노병천>
  8. 도해세계전사<노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