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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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조선 전쟁
Korean War Montage.jpg
한국 전쟁 중의 사진들
날짜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장소 한반도
결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본격적인 냉전체제 돌입
북한의 중앙집권 강화
교전국
Flag of the United Nations.svg 국제 연합: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1]
미국의 국기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의 국기 영국
캐나다의 국기 캐나다
뉴질랜드의 국기 뉴질랜드
터키의 국기 터키
네덜란드의 국기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국기 룩셈부르크
콜롬비아의 국기 콜롬비아
벨기에의 국기 벨기에
에티오피아의 국기 에티오피아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
그리스의 국기 그리스
필리핀의 국기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기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이의 국기 타이


비공식 지원국
일본의 국기 일본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


의료지원국
인도의 국기 인도
이탈리아의 국기 이탈리아
덴마크의 국기 덴마크
스웨덴의 국기 스웨덴
노르웨이의 국기 노르웨이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비공식 지원군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소련)


의료지원국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기 체코슬로바키아

지휘관
대한민국의 국기 이승만
대한민국의 국기 정일권
대한민국의 국기 백선엽
터키의 국기 타흐신 야즈즈
미국의 국기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의 국기 매슈 리지웨이
미국의 국기 마크 웨인 클라크
미국의 국기 해리 S. 트루먼
미국의 국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필리핀의 국기엘피디오 퀴리니오
필리핀의 국기피델 V.라모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김책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마오 쩌둥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펑더화이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이오시프 스탈린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게오르기 말렌코프
병력
UN군 사령부: [2]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590,911명
미국의 국기 미국 178만 9000명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캐나다의 국기 캐나다 2만 5687명
뉴질랜드의 국기 뉴질랜드 3794명
영국의 국기 영국 5만 6000명
필리핀의 국기 필리핀 7420명
터키의 국기 터키 1만 4936명
네덜란드의 국기 네덜란드 3522명
룩셈부르크의 국기 룩셈부르크 44명
콜롬비아의 국기 콜롬비아 1,068명
벨기에의 국기 벨기에 900명
Flag of Ethiopia (1897).svg 에티오피아 1,271명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 1,119명
그리스의 국기 그리스 1,263명
Flag of South Africa 1928-1994.svg 남아프리카 공화국 826명
타이의 국기 타이 1,294명
총: 933,845명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260,000명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중국) 780,000명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소련) 26,000명
총: 1,066,000

피해 상황
대한민국의 국기
군인
14만 9005명 전사
71만 783명 부상
13만 2256명 실종
민간인
37만 3599명 사망
22만 9625명 부상
30만 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만 2604명 사망
94만 408명 부상
43만 5468명 실종
총계 189만 8480명 사상


미국의 국기
3만 6940명 전사
9만 2134명 부상
3737명 실종
4439명 포로
총계 13만 7250명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339명 전사
1216명 부상
3명 실종
26명 포로
총계 1584명
캐나다의 국기
312명 전사
1212명 부상
1명 실종
32명 포로
총계 1557명
영국의 국기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97명 포로
총계 4908명
뉴질랜드의 국기
23명 전사
79명 부상
1명 실종
총계 103명
필리핀의 국기
112명 전사
229명 부상
16명 실종
41명 포로
총계 398명
터키의 국기
741명 전사
2068명 부상
163명 실종
244명 포로
총계 3216명
네덜란드의 국기
120명 전사
645명 부상
3명 포로
총계 768명

총계: 474,000명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군인
29만 4000명 전사
22만 6000명 부상
12만 명 실종 및 포로
민간인
40만 6000명 사망
159만 4000명 부상
68만 명 행방불명
총계
70만 명 사망
182만 명 부상
80만 명 실종
총계 332만 명 사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13만 5600명 전사
20만 8400명 부상
2만 5600명 실종 및 포로
총계 36만 9600명 사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315명 전사
500명 부상
총계 715명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한국 전쟁(韓國戰爭) [3] 또는 6·25 전쟁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다. 서류상으로 협의가 되어있으나 연평해전등 크고 작은 국지도발2009년까지 계속되고 있다.

목차

[편집] 요약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편집] 다양한 호칭

대한민국(이하 남한)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六二五戰爭)[4], 주로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사변(六二五事變),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전쟁(일본어: 朝鮮戦争(ちょうせんせんそう)), 항미원조전쟁(중국어 정체: 抗美援朝戰爭), 한국 전쟁(Korean War[5], 미국 등 서구권)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편집] 배경

한반도제2차 세계 대전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련의 군정,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1948년 각각 남한북한을 건설함과 동시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쪽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남쪽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6]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국의 통치자인 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모택동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고, 김일성이 그후 수 차례 그를 설득하여, 결국 중공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일당 독재, 반대파(애국자, 종교인, 기업가를 포함한 상당수의 북한 인민)의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북한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미국에서 입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남한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지식인 독립운동가들은 서로 간 불신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의 온건노선을 비판하자, 일본공산당 도구사 서기장은 노동절을 기하여 일본공산당은 1950년 테제인 다가오는 혁명에 있어서 일본공산당의 기본임무를 채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전투적 공산당으로 변모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월 30일 궁성앞 인민광장에서 2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공산당 방위, 평화옹호, 요구관철, 조선통일전선 인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조총련의 행동대, 학생, 조직노조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집회 후 도심지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여 미군 헌병과 충돌하였다.

[편집] 본 전쟁 전에 있던 전투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그 예로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군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북쪽으로 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하기도 하였고, 같은해 6월 17일에는 38선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태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하였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까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이 전투남한이 더 적극적이 였으나, 이후에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북측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7]

[편집] 원인

[편집] 김일성의 남침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 한국 전쟁의 기록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8]

결국 구 소련문서의 공개에 따라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9]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덜레스 장관이 남한을 방문하는 사건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8]

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비교적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한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사회학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한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편집]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이 엇갈리고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다. 구 소련 붕괴 이전,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 구 공산권의 폐쇄성과, 중국과 북한등 공산 국가들의 일방적 선전, 또 그에 따른 객관적인 자료 부족으로 한국전쟁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제기되었으나, 구소련의 붕괴이후 비밀문서 공개, 중국의 한국전쟁관 수정,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얻어지게된 여러 객관적인 자료들의 연구로 인해 이들 가설들은 대부분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출처 필요]

[편집] 스탈린 주도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아래 있던 부리야드공화국(현 몽골)의 기갑부대 요원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북한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10]

[편집] 한미 공모설

이승만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한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출처 필요]

[편집] 내란 확전설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2.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제한적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을 긴급 점령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3.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함)
  4.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국군 독단으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중국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듬)
  5. 고착/제한 전쟁(1951년 6월 ~ 휴전, 휴전협상과 함께 38도 선 근방에서 점령지 확보를 위한 국지전이 계속됨)

북한 위주이거나 북한을 중심으로 평가하거는 시각에 의하면 북한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시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북침/남침설, 우발/의도설, 주도/응전설 등의 기존 시각이 모두 요점을 놓친 단편적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브루스 커밍스 주도로 이루어진 내란 확전설은 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 이루어진 이론으로, 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가 공개되어 김일성의 북한 주도로 남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남에 따라 내란 확전설도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출처 필요]

[편집] 전쟁준비

[편집] 조·소 비밀회담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회의에는 북한과 중공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로 북한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북한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코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북한의 수뇌부는 방분기간인 3월 17일에 동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11]

[편집] 조선인 의용군 입북

1949년 초여름 만주 길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의 병력이 북한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새로 입북한 중공군 제4야전군 휘하의 제55군단 164사단은 라남에서 인민군 제5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중공군 제55군단 166사단은 신위주에서 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편집] 경과

[편집] 경위

남북한 군사력 비교(1950년 기준)
항목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장갑차 24대 54대
전차 0대 242대 (T-34)
곡사포 105mm-m3 88문
사정거리 6500m
122mm 172문
76.2mm곡사포 176문
76.2mm자주포 242문
사정거리 평균 10,000m
대전차포 57mm 140문 45mm 540문
박격포 60mm 576문
81mm 384문
61mm 1142문
82mm 950문
120mm 226문
군용기 연습기 20대 전투기등 170대
육군병력 9만 4000명 19만 1680명
해군병력 8866명 4700명
공군병력 1800명 2000명
총병력 10만 4666명 19만 8380명
전투경험 대부분 없음
(신병대다수)
인민해방군 한국인출신
현역병력 상당수 유입됨
5,6사단은 사단단위 편입됨

1950년 6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12] 북한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건국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T-34를 격파할 수 없는 무기였다(미국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한국군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나마도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개성 - 문산 -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13]. 전체적으로 남한군은 단지 15일 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14] [15] [16] [17]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18]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19]

[편집] 발발

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공산국가의 맹주격인 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하여 여러 공산국가에 뿌린 관계로 당시 북한 뿐만 아니라 공산계의 주력전차였다
개전 초기 북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남한의 의견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남한)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남한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20]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21]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22]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23]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24]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25]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26] 한강 철교의 폭파는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27]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28]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29]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29]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29]

[편집]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1950년 6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다.

2사단[30]의정부에서 북한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31]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32][33]

[편집] 유엔군의 참전

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한편 대한민국 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34] 이러한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35]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36]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37]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38]

7월 1일 영국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태국·터키·영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39]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윌리엄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편집]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수복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이 부분의 본문은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UN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관찰하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편집] 중국의 참전과 1.4 후퇴

이 부분의 본문은 1·4 후퇴입니다.
중국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국의 포스터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국의 모택동을 만났다. 그리고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대만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국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0만 이상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중국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국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소련인들도 중국 마크를 달고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38도선 이북에서의 전술적 패배와 이어진 1.4 후퇴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중공군의 상당수는 내전에서 다져진 베테랑 병사들로, 중국공산당의 의용군은 인민의 지원과 게릴라전을 교리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군대였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인민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편집] 휴전 협정

이 부분의 본문은 포로 교환 문제입니다.

유엔군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나중에 중국군의 반격으로 현재의 휴전선 부근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40] [41]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42]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편집] 휴전 협정 이후의 충돌

해당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21 사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 서해교전 (2009년) 문서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휴전협정 이후 크고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이 여러번 있었다. 196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1990년 이후에는 서해 NLL부근에서 수차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제일 최근의 사건은 2009년 발발한 서해교전이다.

[편집] 피해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 상잔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 하지만 1차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43]

[편집] 대한민국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44]

[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공산주의적인 공업화 즉, 계획경제에 따른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60년대가 지난이후 대한민국(남한)과의 비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45]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하여 소련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중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아야 했다. [46]


[편집] 사용되었던 무기

[편집] 대한민국군

[편집] 장갑차

[편집] 항공기

[편집] UN군

[편집] 장갑차

[편집] 전차

[편집] 구축전차,자주포

[편집] 전투기

[편집] 폭격기

[편집] 조선인민군

[편집] 장갑차

[편집] 중전차

[편집] 구축전차,자주포

[편집] 전투기

[편집] 중공군(소련군)

[편집] 장갑차

[편집] 중전차

[편집] 구축전차,자주포

[편집] 전투기

[편집] 폭격기

[편집] 사진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1.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1950년 7월 14일 미군에 이양됨에 따라, 한국군 역시 국제연합군 산하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하였음. 따라서 대한민국(남한)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국제연합군 소속으로 분류함.
  2. 주의: 출처에 따라 수치는 다를 수 있음.
  3. 공식적인 명칭은 6·25 전쟁(六二五戰爭)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표기법에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사전들이 한국 전쟁이라는 말 대신 대신 6·25 전쟁 이라고 규정한다.
  4.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한국전쟁'으로 검색
  5. Korea의 역번역은 ‘한국’과 ‘조선’ 둘 모두 가능하나, 여기서는 한국으로 통일했다. 한국 문서를 참조하라.
  6. 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한국학술정보, 2008년
  7. 임영태, 《인류 이야기 현대편 2권》(아이필드 출판사 2004년) 124~128쪽
  8. “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 동아일보
  9. Stalin, Kim Il Sung, and the 38th Parallel
  10. 소진철교수 - 6.25 전쟁사 다시 써야한다. 파이낸스 투데이
  11. Max Beloff, Soviet Foreign Policy In the Far East, Lond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52, pp.177
  1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6쪽쪽 “1950년 현재~ 경찰 4만5천여 명이었다.”
  13. 백선엽의 회고록 참조. 한국군 사단 포병이 미군 수준으로 4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연대급으로 증강된 것은 전쟁 후반기였다
  14. 김학준 (1995년). 《북한 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 동아출판사, 146쪽쪽 “북한군은 소련제~가지고 있었다.”
  15. 로버트 T. 올리버 (1982년). 박일영 옮김: 《이승만 비록》. 한국문화출판사, 322쪽쪽
  16. 윌리엄 스톡 (2001년). 김형인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65쪽쪽
  17. 채명신 (1994년).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매일경제신문사, 98쪽쪽
  18. 강준만, 앞의 책, 26쪽.
  19. 채명신,. 앞의 책, 97~98쪽쪽 “1950년 6월 24일~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20. 노정팔 (1995년). 《한국방송과 50년》. 나남, 159~160쪽쪽 “이전부터 38선~반복하고 있었다.”
  21. 이한우 (1996년).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 조선일보사, 78~79쪽쪽 “1950년 6월 26일~도움을 요청하였다.”
  22. 강준만. 앞의 책, 51쪽쪽 “1950년 6월 27일~대전으로 내려갔다.”
  23. 전쟁기념사업회 (1992년). 《한국전쟁》 제3권. 행림출판, 39쪽쪽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정식으로 의결되었다.”
  24. 노정팔. 앞의 책, 161~162쪽쪽 “6월 27일 아침 6시에~”
  25. 김동춘 (2000). 《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91쪽쪽
  26. 이한우. 앞의 책, 84쪽쪽 “당시의 전황으로~”
  27. 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
  28. 김동춘 (2000년). 〈서울시민과 한국전쟁:'잔류'·'도강'·'피난'〉. 《역사비평》 (제51호): 45쪽.
  29. 일 산케이신문, "50년 일본 야마구치에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조선일보 1996.04.14
  30. 당시 사단장은 박춘하(朴春河)였다.
  31. 김동선 (1991년 6월 27일). 〈돌아온 老兵 “50년6월29일 수원서 맥아더 만났다”〉. 시사저널 (제87호).
  32. 고은 (2004). 《만인보 17》. 창비, 21~23쪽쪽 “대전에서 사흘을~”
  33. 강준만, 앞의 책, 66쪽.
  34. 이기택 (2000년). 《국제정치사》. 일신사, 471~472쪽쪽 “이에 따라~(유고슬라비아는 기권)”
  35. 김창훈 (2002). 《한국외교 어제와 오늘》. 다락원, 50쪽쪽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36. 강준만, 앞의 책, 68쪽.
  37. 전쟁기념사업회 (1992). 《한국전쟁사》 1권. 행림출판, 196~197쪽쪽
  38. 정일화. “40년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4”, 《한국일보》, 1990년 6월 20일 작성, pp. 5쪽. 2008년 4월 9일 확인.
  39. 김창훈, 앞의 책, 51쪽.
  40. 온창일. 〈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군사분계선 문제는~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41. (2000) 한국전쟁연구회: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백산서당, 389쪽쪽
  42. 홍용표. "〈전쟁 전개과정에서의 한·미간의 갈등: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미국의 대응을 중심으로〉", 앞의 책, 392~393쪽쪽
  43. 한국의 역사 19, 234 ~ 246쪽
  44. 김동춘. 앞의 책, 292쪽쪽 “한국전쟁은 이승만이~수 있었다.”
  45. 같은 책, 292쪽쪽 “전쟁 과정에서~계기를 얻었다.”
  46. 소진철, 한 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270쪽, 한국학술정보 2008년, ISBN 978-89-534-68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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