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부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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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부근 전투는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국제 연합군조선 인민군 간의 크고 작은 전투를 말한다. 그 중에서도 여기에서 다룬 것은 유엔군과 국군의 경상도 탈환 작전이다. 부산 상륙전을 이후로 국군은 전세를 역전시켰고, 이 전투는 대전, 대구, 강릉, 춘천, 인천 등을 수복하는데 기여했으며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부산시 부근 전투에서는 유엔군(의료지원국은 제외함)이 함대를 직접 이끌고 부산항에 상륙한 것도 포함시킨다.

목차

발단 [편집]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되자 미국은 자신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이 공산 세력에 넘어가서, 아시아에서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수원을 방문하여 한국의 문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군을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올렸고,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미국, 필리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의 16개국이 직접 군대를 파병할 것을 결의했고,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의 6개국이 의료지원국으로 참전할 것을 결정했다. 유엔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승인하였다.

부산시 부근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Busan port.jpg
날짜 1950년 8월
장소 대한민국 대한민국 부산
결과 UN군의 부산 상륙 성공과 한국 전쟁에서 국군의 역전

중공군소련에서 북한에게 군수품 지급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캐나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영국
네덜란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벨기에 벨기에
뉴질랜드 뉴질랜드
프랑스 프랑스
그리스 왕국 그리스 왕국


의료 지원국
이스라엘 이스라엘


무기 지원국
일본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기 지원국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유엔군과 국군의 출병 [편집]

유엔군은 1950년 7월 8일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한국의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이미 영국과 미국이 6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의 주문진항 해전7월 10일포항 상륙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바 있으나, 미군이 대전, 오산에서 북한군의 막강한 화력에 의해 모두 패배하였다. 하지만 국군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는 공산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었으며, 국군이 신속히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부산에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유엔군은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공격을 예상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8월 말, 북한군이 대구영천, 포항 일대를 공격하자 유엔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 하에 8월 부산에 상륙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참전부대와 일본의 무기가 들어왔다.

유엔군의 전쟁 투입 [편집]

유엔군은 부산 상륙 이후 각종 전투에 투입되었다. 가장 많이 투입된 군대는 미군으로,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 장사동 상륙 작전, 282 고지 전투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프랑스군도 바로 실전에 투입되어 미국의 전투에 도움을 주었다. 그 외에 군대도 후속부대나 물자 보급 부대로 쓰여 전투를 수월하게 마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김일성은 몹시 초조해졌다. 북한군은 국군이 열세였던 것을 믿고 남침했던 것인데, 유엔군이 참전한 것이다.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을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소련은 북한의 부산 함락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엔군과 국군의 평양 공격에 대비해 북한군에게 군수 물자식료품, 전투기 등을 보급했고, 중공도 소련과 힘을 합쳐 북한을 도왔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을 돕기 위한 다국적 의료 지원 부대를 파병했다.

경상도 탈환 작전 [편집]

부산을 기점으로 하여 아직은 우세한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국군은 유엔군의 지원에 힘입어 인민군을 경상도 탈환 작전을 개시하였다. 국군은 미국, 영국, 프랑스 군과 연합하여 영천, 대구, 경주를 탈환하는 한편, 공군을 활용하여 경상도의 주요 도시를 폭격하였다. 9월 초 국군은 통영, 구미, 창녕, 마산, 포항 등을 탈환하기 위해 접전을 벌였으며, 왜관은 9월 한 달 동안 적과 아군이 수시로 교체될 정도의 치열한 전장터가 되었다. 한편 국군은 안강-38선 진격 전투, 청송-논산 진격 전투, 왜관-대전 진격 전투, 경주-서울 진격 전투, 울진-38선 진격 전투와 같이 북한군을 청송, 울진 등으로 몰아내면서 충청도경기도 일대를 탈환하고자 했다.

의의 [편집]

유엔군이 파병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약 120만의 대군이 곧 병력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수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엔군은 육해공군을 모두 부산에 보내어 바로 전선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였다. 유엔군은 다부동과 영천을 탈환하고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함께 서울을 탈환했다. 이후 부산을 기점으로 하여 국군은 평양, 원산, 함흥 등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기타 [편집]

터키는 1950년 11월에 참전하여 부산 상륙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타이 역시 1950년 11월에 참전하여 부산 상륙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국제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였던 이탈리아를 비롯한 의료지원국들은 1950년 11월 이후에 참전했다. 일본은 패망한 국토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경제적인 목적으로 유엔군에 군수품을 지급했다. 또한 여기에 수록된 국가들 외에 다양한 국가들이 인도적, 물자적 지원을 해 주었다. 룩셈부르크는 유엔군 중 가장 적은 병력인 44명을 부산에 상륙시켜 한국 전쟁 상 가장 적은 병력을 투입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롬비아는 게릴라 부대를, 뉴질랜드에서 마오리 족을, 에티오피아에서 황제 친위대를 파병했다. 유엔군은 당시 군대뿐만 아니라 탱크, 군수용 자동차, 전투기, 함선을 보냈으며 이는 인천 상륙 작전, 장사동 상륙 작전, 다부동 전투, 평양 폭격 등에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이는 미국에게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이 경고한 '미국이 참전하면 중공군을 만주에 배치하겠다'는 것을 실제로 옮긴 것이기에 중공군의 참전을 이끈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보급된 전투기는 미국의 P-51 무스탕,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F-86 세이버, 영국의 스피트파이어 등이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전차와 포탄도 있었다. 특히 무스탕 전투기와 스피트파이어는 폭격기로써의 역할을 훌륭히 성사시켜 초기 한국 전쟁에서 불리한 국군의 화력을 보충하였다.

같이 보기 [편집]

출처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