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한국의 역사
韓國史
Geunjeongjeon.jpg
선사 시대
고조선 시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통일 왕조기
식민지 시대
분단 한국
v  d  e  h

한반도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소련의 군정기를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대한민국(남한)으로 나뉘게 되었다. 1948년 이전의 한반도의 역사에 관해서는 한국의 역사를 참조하도록 한다. 이 문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형성기[편집]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전까지,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이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남한) 정부수립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기간을 군정기라 부른다. 이 기간 동안 남한에서는 수많은 정치 단체들이 조직되어 이합집산하였고, 모스크바 3상회의로 신탁통치안을 놓고 찬반으로 나뉘어 좌우익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소련의 김일성 지지와 지원으로 평남건준위는 유명무실화되었고,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계 인사들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실상 정부의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서는 무상분배 토지개혁 단행, 국유화 등 개혁을 했고, 이 후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한 뒤에는 수상을 김일성으로 하고 부수상을 박헌영으로하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 초기에 대체로 정치 구성원은 갑산파의 김일성, 남로당파 박헌영, 연안파 김두봉, 소련파 등으로 이뤄져 연립내각체제에 있었다. 곧, 부수상 겸 외무상에 박헌영, 부수상에 홍명희, 부수상 겸 산업상에 박헌영, 국가기획위원장에 정준택, 민족보위상에 최용건, 국가검열상(국방상)에 김원봉, 내상(內相)에 박일우, 농림상에 박문규, 상상(商相)에 장지우, 교통상에 주영하, 재정상에 최창익, 교육상에 백남운, 체신상에 김정규, 사법상에 리승엽, 문화선전상에 허정숙, 노동상에 허성택, 보건상에 이병남, 도시경영상에 이영, 무임소상에 이극로를 각각 임명하였다. [2]

소련군 태평양 함대에 입대하여 웅진, 나진, 청진 등 상륙작전에 활약하여 적기훈장을 수여하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내기도 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 소련파 정상진은 "북한은 해방 후 20년 역사를 위조했다"며 "일본군을 내몬 뒤 소련 정부에서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해방 후 원산항(港)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맞으러 간 것도 접니다. 소련은 고려인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어요.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모든 연설문은 다 소련에서 작성됐어요."라고 폭로했다.[3]

한국 전쟁의 준비[편집]

김일성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조선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북조선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북조선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북조선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자, 소련은 이에 호응하여 북한에 있는 모든 군대를 그 이듬해(1949년) 1월까지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1948년 9월 20일) 북조선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후 그들은 미군도 남한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소련군이 먼저 철수한 점을 내세워 정치적인 선전공세를 펴기 시작하자 미국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4]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북한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6·25전쟁)[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고,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선전포고도 없이 남한을 공격하여 한국 전쟁(6·25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3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다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에는 적대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그러나 전쟁의 기원,원인과 책임소재와 관련하여 여러 학설이 충돌하고 있다.

  •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원수'의 호칭이 제정되었고,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이 공화국 최초의 원수가 되어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다. 1953년 5월부터는 《김일성선집》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1953년 7월 28일 김일성공화국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5]
  • 김일성은 1953년 7월 28일 라디오 방송 연설에서 전쟁이 "조선 인민의 승리"로 끝났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해석에 따르자면,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이승만 괴뢰 도당을 부추겨 일으킨 전쟁에서 조선 인민과 인민군은 영용하게 싸워 승리했다"는 것이다.[6]

김일성의 권력 장악[편집]

전쟁 직후 패전의 책임을 물어 1950년대 초반즈음에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가 숙청당했다. 그리고 1950년 중반 무렵에 최창익을 비롯한 연안파 세력들이 김일성 체제에 비판하였는데, 이를 8월 종파 사건이라 한다.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소련파 및 연안파가 숙청당하고, 이때 중·소 분쟁을 계기로 주체 사상이 등장하였다. 60년대에는 경제 건설을 우선시하는 갑산파 온건세력들이 숙청 당했고, 1967년 주체 사상이 지도 이념화되었다. 1972년에는 대한민국과 7.4 남북 공동성명을 맺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는데 이는 국가 원수가 수상제에서 주석제로 바뀌었고, 주석의 권한은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이 장악하여 김일성 유일 체제를 확립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 주체 사상을 헌법에 최초로 규범화하였다.[7]


주체 사상의 설립과 체제 경쟁[편집]

1960년대부터 대한민국(남한)·미국·일본의 안보 체제 구축과 국제 정세의 악화로 위기에 놓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방 건설을 위하여 이른바 4대 군사 노선을 채택하여 군수 공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울러 김일성조선로동당의 장기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주체 로선을 강조하였다. 대남 정책에서는 겉으로는 평화적인 남북 연방제 통일 방안을 제시하고, 내면으로는 남한에 통일혁명당을 조직하여 주체 사상에 입각한 내부 혁명을 부추겼으며, 무장 군인을 파견하여 무력 도발을 일으켰다.

김정일 후계 체제의 확립[편집]

1980년대에 김정일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0년대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가 강화되어갔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그리고 1998년 헌법 개정을 한번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완전히 확립되었다.[7]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편집]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하여 발표한 6·15 남북 공동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경제[편집]

194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공식수립이전인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설립했을때 무상분배,무상몰수 토지개혁 및 주요산업등 국유화를 단행했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국토와 전후 복구사업을 재건하기 위해 3개년 계획과 5개년 개발계획, 천리마운동등을 전개하여 나아갔다. 이무렵에는 모든 농지의 협동 농장화와 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동 강화운동, 사상,기술,문화의 혁명등을 추진해 나아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모순과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생산력 저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하여 교역 상대국이 상실되었고, 오늘날 에너지와 원자재,식량등 심각한 경제고를 겪고있다. 1990년대 이후 들어서는 매년 마이너스 경제 성장율을 보이고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 내에서는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고자 1984년에 합영법제정, 1994년에는 신합영법개정하여 1991년에는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설치, 2002년에는 신의주 경제 특구 설치, 개성공단 설치등 함으로써 일부지역에만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고 '제한적 개방'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달리, 북한의 경제는 침체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서울올림픽에 대응하여 주최한 행사로 인하여 북한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고난의 행군 까지 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로써, 북한의 경제정책은 실패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북한은 외자 유치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나진, 선봉지역에, 신의주 공업 자유지대, 개성공단등, 중국대한민국의 자본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화[편집]

연혁[편집]

소비에트 연방의 군정치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전쟁 중 오기섭, 박헌영, 김두봉, 허가이 등이 김일성의 독재를 위해 숙청되다.

김일성 사망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참고자료[편집]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49쪽.
  • 2000년 6월 15일 이후의 자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중앙통신과 대한민국의 연합뉴스의 보도를 분석하여 작성한 것임.

주석[편집]

  1. "북한인민공화국 수상에 김일성 씨", 《동아일보》, 1948년 9월 10일 작성, 1면.그러나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겸하었고, 당시 김두봉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가수반에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2.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작성, 1면.
  3.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06.20 조선일보
  4. "秘錄 韓國外交<29> : 政府樹立 직후 ⑫", 《경향신문》, 1975년 3월 21일 작성.
  5. 전쟁 중이던~제일급을 수여받았다.: 서동만,〈한국전쟁과 김일성〉《역사비평》제51호(2000년 여름) 41쪽.
  6. 김학준,《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동아출판사, 1995),175쪽.
  7. 강민성,《2010 명쾌한 한국 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