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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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역사는 스페인 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 (1565년 -1898년), 미국 식민지 시대 (1898년 -1946년), 독립 이후의 시대(1946 년 - 현재)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선사 시대[편집]

필리핀 군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 유물은 팔라완 주의 타본 동굴에서 발견된 약 1만 65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타본만 인골과 석기, 박쥐나 작은 포유류 뼈 등이다. 인골은 옹관으로 매장되어 있었으며, 이것을 중국 풍습의 영향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리잘 주에서는 기원전 3000년 이전의 안고노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을 남긴 것은 네그리토오스트로네시아어족보다 먼저 필리핀에 살고 있었던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주민과의 관련성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주민을 제외하고 필리핀의 초기 주민을 네그리토로 간주하고 있다. 2만년 전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네그리토가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네그리토는 전통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으로 생각되었지만, 유전자 연구에 의해 오스트라로이도 요소를 포함하는 새로운 몽골로이드라는 설도 있다. 그 뒤를 이어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갈래인 말레이 폴리네시아 어족이 기원전 4000 년경에 도래한다. 처음에는 네그리토인이 해안에 살았지만, 말레이계 주민에 쫓겨 산악 지대에 살게 되었다. 말레이계 주민은 제철과 관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 300년부터 700년경에는 동남아시아의 섬에서 해양 민족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인도 문화권의 불교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마트라스리비자야 왕국과 자바섬의 마자파힛 왕국(모두 현 인도네시아)은 교역을 통해 문화의 원천이 되었고, 필리핀에도 소개되었다. 현대 필리핀 타갈로그어산스크리트어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가 많다.

고대[편집]

라구나 동판 비문: 톤도 왕조에서 사용된 가장 오래된 법률문서

고대 필리핀에 대한 정보는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 중에서도 매우 적다. 이것은 필리핀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볼 때 멀기 때문에 필리핀의 역사에서 접촉한 인종이 거의 없었다는 사정도 있다. 또한 필리핀은 열대 지방이기 때문에 고고학 유물이 썩어 남아있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다. 따라서 역사 연구가들 중에는 "필리핀은 스페인 시대 이전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다"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톤도 왕국[편집]

그러나 이 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90년, 루손 섬의 라구나 호수에서 사카 달력이 발견되었는데, 822년 (서기 900년)의 날짜가 들어있는 〈라구나 동판 비문〉이라는 금속판이 발견되었다.

900년에는 마닐라 만을 중심으로 한 톤도 왕국이 중국 해상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이후 중국이 해상 무역을 금하자, 밀수와 연관된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장관급 채무면제 증서를 앙카탄 부인과 남와란의 아들인 그녀의 오빠인 부카에게 증여를 했다. 이것이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고문서인 라구나 동판 비문의 내용이다.[1]

이것은 초기 ‘카위 문자’에 속하는 문자로 쓰여진 일종의 재판 기록이며, 이 기간에 필리핀에 어느 정도의 문명사회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출처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고,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부투안에서 발견된 불상으로 보이는 청동상

또한, 사용 시작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1603년 스페인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필리핀의 일부가 ‘바이바인’이라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청나라 때의 사서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982년 필리핀으로 예상되는 ‘마일국’(摩逸國) 상인들이 교역품을 실어 광저우를 방문했다고 한다. 또한 1225년에 지어진 《제번지》(諸蕃志)에서는 이 시대의 ‘마일’(麻逸) 사람은 무명천으로 몸 전체 또는 아래쪽을 숨기고 있으며, 청동신상을 초원에 두고 있어 중국과 아랍 국가와 물물교환 무역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필리핀의 언어는 중국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경제 용어도 많다. 14세기 《도이지략》(島夷誌略)에서도 마닐라를 의미하는 ‘마리’(麻里)라는 지명이 나오고 있다.

14 세기 후반에는 이슬람교가 필리핀의 일부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술루 제도수마트라에서 온 라자 바긴다 알리가 만들고, 1450년경에 팔렘방에서 온 아부 바쿠르가 술루 왕국을 건국했다. 또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에는 조호에서 대사 카푼스완이 와서 마긴다나오 왕국을 건국했다. 모두 수마트라에서 유력 이민자가 현지의 유력 인사들과 혼인을 통해 연결된 왕조이다.

15세기 무렵의 지도 《혼일강리》(混一疆理) 역대 도읍 지도 그림에는 필리핀 근처에 많은 섬이 그려져 있고, 그 중에는 ‘마리노’(麻里魯)라고 읽히는 부분이 있다. 1433년에는 네그로스 섬의 수장 카란찌아오가 형법을 제정했다고 하지만, 그 진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15세기 후반에는 말라카를 중심으로 한 무역이 활발해 졌다. 인도 말라바, 코로만델, 구자라트와 자바와 더불어 루손도 많은 상인이 말라카를 방문하여 무역을 했다.

16 세기 스페인이 도래하기 직전, 루손은 브루나이의 영향으로 많은 도시가 존재했다. 그 수장 몇몇은 브루나이 술탄의 딸을 아내로 했다. 대도시 마닐라에는 6000명 규모의 마을이 있고, 그 외에도 남서부 해안 도시가 있었다. 주요 교역 품목은 수출품으로 , 밀랍, , 소목이 있고, 수입품은 도자기, 직물, 금속 제품, 일용 잡화 등이었다. 수입된 철강 제품은 새로 주조하여 다시 만들어졌다. 도자기는 〈송호록〉(宋胡録) 등 중국과 동남아 각지의 제품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필리핀은 ‘바랑가이’이라는 수십 가구를 단위로 하는 마을이 많이 있었다. ‘바랑가이’라는 단어는 ‘배’를 의미하는 말레이어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동일한 표류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랑가이는 상호 교역도 있었지만, 특정 국가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 식민지[편집]

스페인 식민지[편집]

필리핀에 최초로 도달한 스페인 사람은 1521년에 온 마젤란이다. 이때는 지배의 시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착 그 자체이다. 스페인은 1529년 필리핀의 영유를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실제로 세부 섬에 식민지 기지를 건설한 것은 1565년이다. 스페인인이 귀국하는 길에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향하는 항로를 발견(당시 범선 때문에 왔더 항로를 그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하고,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에 갈레온 무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필리핀 원주민에게 최초의 거점인 세부에서 쫓겨나 본격적인 지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1571년 마닐라 시 설치였다. 정복된 필리핀 원주민은 식민지 시대 초기에는 엔코미엔다 제도 아래에서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부과받은 부과금 권한과 부역 징발권과 교환에 스페인인은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선교를 의무적으로 요구했지만, 엔코미엔다 제도는 원주민들에게 타격이 컸기 때문에, 17세기 전반에 폐지되었다.

광대한 스페인 제국 속에서 필리핀 총독령은 멕시코시티를 근거지로 하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일부가 되었고,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아래 총독을 우두머리로 하는 행정 조직이 체계화되고, 주(아루카루데), 도시(푸에블로), 마을(바리오, 바란)이 행정 구역으로 재편되고 총독의 권력을 감시하기 위하여 아우디엔시아가 있었다.

스페인은 당초 토르데실라스 협약에 저촉하지 않고 향신료가 생산되는 곳을 찾아 필리핀을 정복했지만, 필리핀에서 예상한 향료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역중계지로서 취급하게 되었다. 1573년 처음으로 중국 교역품이 멕시코까지 수출되는 갈레온 무역이 시작되었다. 갈레온 무역은 계절풍을 이용하여 1년에 1척의 갈레온이 마닐라에서 멕시코 아카풀코까지 태평양을 횡단했다. 아카풀코에서 산을 넘어 카리브해 연안의 베라크루즈까지 중계를 하여 아시아 물품을 유럽까지 보냈다. 또한 1581년1582년에 마닐라에서 남미 페루 부왕령의 칼라오까지 갈레온이 보내졌지만, 페루와 마닐라의 무역은 1631년에 금지되었다. 갈레온 무역에서 스페인의 결제는 멕시코 은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모로 전쟁의 전개[편집]

민족 운동의 전개[편집]

필리핀 독립 혁명[편집]

미국 식민지[편집]

독립 이후[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