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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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글러스 맥아더 | |
|---|---|
| 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 | |
제2차 세계 대전중의 맥아더 |
|
| 태어난 곳 | 아칸소 주 리틀록 |
| 죽은 곳 | 워싱턴 D.C. |
| 복무 | |
| 복무 기간 | 1903년 ~ 1937년 1941년 ~ 1951년 |
| 최종 계급 | 원수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 서훈 내역 | 명예 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해군 수훈 복무 훈장 수훈 비행 십자장 은성 훈장 동성 훈장 퍼플 하트 욱일장 |
| 기타 이력 | 일본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는 미국의 군인이다.
목차 |
[편집] 생애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Arthur MacAthur Jr.)(중장 예편)는 행군때 자신도 사병들과 똑같이 걸음으로서, 어린 맥아더에게 지휘관이 먼저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편집] 사관학교 생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사관학교 당시 만연한 학교내 폭력문제로 방황하기도 하였다.
당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는 권투나 체벌을 빙자한 선배들의 가혹 행위때문에 일부 사관 후보생들이 자살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폭력이 심각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지시로 의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졌는데, 이는 청년 맥아더에게 심적인 방황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맥아더는 학교폭력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들을 고발할 것인가, 아니면 군인으로서 입을 무겁게 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했다고 한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사관학교 근처의 호텔에서 묵으며 아들을 뒷바라지 했다고 한다.
[편집]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등에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무지개부대(42사단)를 이끌고 프랑스에서 복무하였다. 1918년 육군 준장, 1919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고, 1925년에 최연소 육군 소장이 되었고, 1930년 윌슨 대통령때 미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후버 대통령때인 1932년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무력으로 해산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1935년에서 1937년까지 필리핀 정부 최고 군사 고문을 지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초기인 1937년 퇴역하였다. 그해에 필리핀 육군 원수가 되었다. (미군 역사상 육군원수 직함을 가진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그의 아버지는 필리핀 총독을 지냈으며, 2대에 걸쳐 맥아더가문은 필리핀에서 막대한 이권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35~41년에는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對日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중인 1941년 7월에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현역으로 복귀함과 동시에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고, 1944년 원수가 되었다.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하였으며,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8월 30일 일본 땅에 첫 발을 디뎠다.[1]
[편집] 일본에서의 군정 활동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이기도 한 맥아더는 일본인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일본 천황의 “덴노는 인간” 발언을 이끌어 낸 것으로도 유명하며, 성서를 대량으로 유포하는 등 종교로써 일본을 순응시키려고 하였다.
즉,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한 신토를 무력화시켜 전쟁 도발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그외 일본에서의 맥아더의 탈군국주의화 정책으로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묵인을 통한 자본가 견제(자본가들이 군대와 협조하지 못하게 하려는 정책), 교과서 내 천황 신격화 금지 조치,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재벌해체, 전쟁 책임이 있던 공직자 2만명 공직추방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들은 한국전쟁 이후 일본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의미가 없게 되었다. 공직추방령이 해제되면서 전전의 극우성향 정치인,공직자들이 모두 복귀했으며, 해체되었던 재벌은 다시 재결합하였다.
[편집] 정부(情婦) 미야자와 요시코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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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1945년 9월2일이었다. 65세와 23세의 만남. 그날 오후 ‘에도만보(江戶晩報)’에 실린 ‘미주리호 선상의 승리와 패배’라는 신문기사를 본 맥아더는 기사를 쓴 기자를 호출했다. 일부 내용이 언짢아서였다. 늦은 밤, 미야자와 요시코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기자가 맥아더 앞에 나타났고, 그녀를 본 맥아더의 가슴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쳤다. 맥아더의 요청에 따라 요시코는 비서가 됐다. 9월 20일 전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가 포함된 1차 체포 대상자 40명의 명단이 작성돼 언론 공표를 앞두고 있었다. 요시코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친구는 도조 히데키의 딸이었다. 도조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죽지않고 체포됐다. 2차 체포 명단에 포함된 전 관동군 총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자살했다. 요시코는 그의 조카였다.
맥아더는 연이은 자살사건을 수상하게 여겼지만 요시코가 관계된 일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의 집무실과 침실은 도쿄 제국호텔 10층에 있었는데 한편에 요시코의 침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자주 요시코의 침실을 찾았고 요시코는 그때마다 문을 열어주었다. 전범(戰犯)으로 구속된 요시코의 친척 8명이 석방된 것은 침실에서 건네받은 맥아더의 선물이었다. 사람들이 은밀히 요시코에게 접근해 보석 등을 주며 석방을 부탁하자 요시코는 배짱좋게 맥아더의 이름을 팔아 전범들을 석방시켰다. 맥아더가 연합국 몰래 1800여명의 전범을 풀어주는 틈을 갖고 이용한 것이다. 연합국이 거세게 항의하자 맥아더는 다시 석방된 전범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전범들이 다시 수감된 날 수명의 중년여인이 요시코를 찾았으나 휴가를 떠나고 없어 다른 보좌관이 그들을 만났다. 여인들은 뇌물로 풀려난 자신의 남편이 다시 체포됐으니 뇌물을 돌려달라고 했다. 맥아더가 석방자 명단을 조사해보니 자신이 서명한 석방자보다 138명이나 더 많은 1985명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요시코는 영문도 모른 채 예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맥아더 품에 안겼다. 곧 사태를 눈치챈 요시코가 “용서해달라”며 매달렸지만 맥아더의 마음은 저 멀리 떠나 있었다. “이 여자를 당장 총살해!” 1946년 7월 4일이었다.
[편집] 한국전쟁
| “ | 군대에 민주주의는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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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워커 장군의 명령을 옹호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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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 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한국군의 군세를 돌아보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허세가 높은 반면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하여 채병덕의 면전에서는 채병덕을 극찬한 반면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단 둘이 있을 때 채병덕의 보직을 해임시키라고 건의한다.
[편집] 일본군 기뢰 제거 부대 투입
미군은 극비리 한국에 일본 소해정부대를 투입하여 기뢰를 제거하게 했다. 그리고 731 부대의 세균전문가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은 1951년 미국과 일본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이 재무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편집] 미 공군의 무차별 공격
미군은 지상군의 화력을 만회하려고 공군을 사용하여 무차별 공습을 하였다. 이로 인해 적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군 폭격기에 수많은 한국군과 피란민들이 희생을 당했다.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큰 이유는 인민군의 학살,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 노근리 등에서 벌어진 미군 학살과 무차별 폭격이었다.
[편집] 인천 상륙 작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솔하에 감행된 인천 상륙 작전은 워싱턴등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으로 상륙한다는 것을 최측근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비밀로 하고 '군산상륙작전'이라는 허위 사실을 작전상 고의로 유포했다. 특히 인천의 앞바다는 전세계적으로 조석간만의 차, 즉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큰 해변으로 유명했는데 맥아더의 군산상륙작전의 발언이 이래서 더욱 신빙성이 높아졌다.
이 사실이 북한군에게도 알려져서 북한군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했는데 맥아더는 오히려 이 점을 노렸던 것이다. 군산으로 쳐들어가는 척 하면서 맥아더가 실제로 노렸던 곳은 인천이였다. 이 작전은 성공하였고 맥아더의 작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북한군은 이 작전에 의해 인천을 빼앗긴 이후 1.4후퇴가 도래할 때까지 연전연패했다.[2]
[편집] 트루먼과의 불화와 해임
| “ | 노병은 사라질 뿐 죽지 않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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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인해 해임당했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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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불신으로 인해, 한국 전쟁 후 미국에서 매카시스트 즉, 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추종자로 낙인찍힌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정규군(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을 무시하다가 중국이 전쟁에 수십개 사단급 병력을 보내어 개입하자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와 장개석총통 지휘하의 대만군 동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무모하고 극단적인 주장들은 만약 그가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지 않았다면, 세계대전이 한번 더 일어났을 것이라는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보급/충원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에 항공폭격 허가를 본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소련에 참전빌미를 줘 확전되는 것을 우려하여 불허했다. 중공군 참전 이전에 대만을 연합군에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중공에 대한 자극을 피해보려는 이유에서였다.
소련의 힘과 의지를 과대평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 실수와, 2차대전 종전 직후 대다수의 부대를 해체하여 동원가능병력이 극히 줄어든 것이 확전을 피하려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기미를 눈치챈 소련은 비공식적으로 공군조종사를 중국에 보내 한-만국경에서 미군 폭격기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미국 국내에서 인기 없는 전쟁이었다. 기간이 길어지자 여론의 종전압력도 커졌다. 이로 인해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편집]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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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이미 전선의 크기를 정해놓고 전쟁을 하였다. 그래서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하는 것을 막았다. 또 당시 중국군은 홍콩, 마카오를 통해 다수의 미국 무기를 수입해서 사용했다. 이는 미국이 2차대전이 끝나고 자국의 군수업자들을 위해 전쟁을 방조한 증거 중에 하나이다. 스탈린은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로 김일성에게 전쟁을 승낙했고, 미국은 군수업자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대만의 장개석은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대만해협을 건너 중국 본토를 침공하려 했으나 미군이 대만해협을 막았다. 또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모택동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대를 이끌고 티벳을 침공했다.
[편집]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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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군인에 관한 부분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편집]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