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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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출생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사망 1947년 7월 19일
조선 경성부 혜화동 로터리
사인 암살(화기에 의한 사망)
국적 대한제국의 국기 대한제국, 조선인민공화국
별명 몽양(호)
학력 난징 금릉대학교 영문학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가, 언론인
종교 기독교
배우자 유씨, 진상하
부모 여정현, 경주이씨
친척 동생 여운홍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한국독립운동가·언론인이며 정치가이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고 언론인으로는 타스 통신사 직원과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건국동맹을 결성, 해방 뒤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등을 결성하였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하였으나 1947년 서울특별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배후가 불확실한 한지근의 저격을 받고 암살된다. 호는 몽양(夢陽)이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출생과 가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여정현과 경주이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1], 세 형이 일찍 사망하여[1] 가문의 9대 종손이 되었다.[2] 조부가 꿈에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여운형은 뒤에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했다고 한다.[출처 필요] 그의 집안은 양반가문 출신이었으나 소론계열이었으므로 권력의 주류에서는 밀려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조부는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직접 만날 정도로 독실한 동학(천도교) 신도가 되었다 한다.[3]

어려서 부모가 격렬하게 다투는 것을 본 그는 자제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하는데, 분노가 치밀어 오를때 입술을 스스로 깨물어 참았다 한다.[4] 한편 그가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다가 들켜서 도망쳐 나오다가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안 여운형의 부친은 아들을 꾸짖는 대신 과수원에 달려가 나무들을 도끼로 찍어버렸다고 한다.[5] 분명히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인데도, 양반의식이 깊은 부친이 상민의 과일나무를 잘라버린 것을 본 어린 여운형은 신분제도에 저항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고, 양반들에게 무시와 억압을 받는 평민과 천민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게 하였다.[4] 그래서 말을 타고 서울로 왕래할 때 길가에서 농부들이 잠시 일을 쉬고 을 먹는 모습을 보면, 항상 먼지를 날려서 그들의 소중한 식사시간을 방해하거나, 무례한 일이 될까 하여 항상 말에서 내려서 조심스럽게 지나다녔고[6], 동리에 상사가 났을때, 특히 노비와 상민의 장례일수록 더 보살펴서 양반과 동등하게 밤을 세우며 돌아가신 분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분이 말끔한 모습으로 저승에 갈 수 있도록 치장해드리는 염습도 하였으며, 한번은 상민 소년의 관을 직접 들고 장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6] 어린 시절의 여운형은 삼국지를 즐겨 읽었으며 그 중에서도 관우를 좋아했다고 한다.[4]

[편집] 소년기, 기독교 입교

1900년 미국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족숙 여병현의 영향으로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7] 이만규에 의하면 이 무렵 장로교회선교사들이 세운 개신교 교회인 상동교회의 인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8]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 그는 1년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당에서는 날마다 학생들을 예배당에 출석시키고 이것을 어기는 학생들은 교실에 남아서 한 시간 동안 자습을 시켰으며, 몽양 자신도 반 아이들과 남산에 놀러가느라 주일 예배를 빠졌다가 예배에 불참하였다 하여 담임선생에게 체벌을 받았다. 당시 몽양은 담임교사가 정직한 학생은 벌주고, 오히려 속인 자들을 봐 주었다고 보아, 부당한 체벌에 자퇴로 반발하였다. [9][10] 배재학당을 그만둔 여운형은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로 전학했다가 다시 그만두게 되었다.[11]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나라에서 운영하던[9]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하였다.[11] 우무학당 재학 중, 우무학당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자 그는 우무학당 학생 20여 명을 모아 학교인수 반대운동을 일으켰다.[11] 졸업 후, 우무학당은 여운형을 우무국 기술관으로 채용하겠다는 채용통지서를 보냈으나 그는 일본인들이 통신원을 가로챈 것이라며 반대하고 취임하지 않았다.[11] 당시 첫 월급은 27원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였다고 한다.[11]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 이 진사가 여운형을 찾아와 우무국 기술관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 진사를 가리켜 역적이라고 통박하여 소동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다.[11]

[편집] 청년기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06년 양평군 양평읍 묘골에 교회를 세웠는데, 교회 설립 후 그의 문중 일족들을 전도하여 잇달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만규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노력으로 이후 예배당과 학교가 세워지고, 힘써 전도활동을 하였다고 한다.[12] 1928년장로교회에서 발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의하면 묘골에 살던 탁인한(卓仁漢)이 여운형 일가의 기독교 입교를 도왔다고 한다.[12]

평양신학교(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중국 난징금릉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08년 부친의 3년상을 마친후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들을 불사른 뒤 집안의 모든 노비를 해방시켰다.[2] 동생 여운홍의 증언에 의하면 이는 링컨의 노예해방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13] 집안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모두 땅에 매장하고, 집안에 있는 터주, 성주, 군웅 등의 단어가 적힌 서적들을 꺼내 모두 불살랐다고 한다. 이 일로 주변의 선비들로부터 책망당하고 백안시 즉, 무시를 당하기도 하였다.[12]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초기 민중교회였던 승동교회[14](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위치)에서 조사(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으며,[15][12]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승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12],[15] 그뒤 공산주의를 접하고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16] 1910년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격하였다 한다.[9] 1914년 집안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17]

1917년 중국 국민당의 원수 쑨원을 만나 교제하였다.[18] 1918년에는 상하이에서 서병호·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당수를 맡았다. [19]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에접하면서 개혁사상을 갖게된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스스로 해방하기도 하였다.[20] 이어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편집] 독립운동

[편집] 상하이 활동

천진에 있던 김규식을 초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21] 또한 장덕수에게 해외 소식을 비밀리에 전달하는 임무를 주어 일본 동경과 국내에 파견하여 3.1운동 의 불씨를 제공하였다.[21]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22] 1919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임시의정원이 창설되자 동생 여운홍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4월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에 선출되었다.[출처 필요]1919년 여름부터 여운형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19] 그해 11월 일본의 초청으로 장덕수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동경에 도착한 여운형 일행은 제국호텔에 머물렀는데, 일본의 국방대신, 내무대신, 체신성 대신, 척식국장관 등을 연속으로 면담하여 조선의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제국호텔을 방문한 내외신의 주요 인사들과의 면담에서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23]

[편집] 외교 활동

1921년 말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23] 1922년 1월 극동근로자대회에 참석하여 레닌의 조선민족주의 운동 지지 노선에 대한 견해를 직접 들었다.[23] 1918년 7월에 발표된 소련 러시아국 외무위원장 치체린의 중국지원 성명, 1919년 7월 발표된 러시아 외무위 부위원장 카라한의 성명을 접한 후 감동한 여운형은 볼세비키 당에 참여하게 되었고, 임시정부와 볼세비키 당과의 제휴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23] 치체린과 카라한이 발표한 성명서는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각종 이권을 중국에 되돌려준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러시아가 강제로 빼앗은 동청철도(東淸鐵道)에 대한 각종 이권 포기 내용도 있었다.[23] 이를 본 여운형은 볼세비키들이 참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고 신뢰하게 되었다.

1923년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때 여운형은 임시정부를 떠났다. 국제공산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200만루블을 원조하기로 하였고[24] , 이동휘, 김립 등은 그중의 60만루블만을 받아가지고 와서 자의로 쓰는 바람에 140만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24] 그러나 국제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조선민족을 도우려고 한 것이 확실해지자 몽양은 고려공산당에 가입을 결심하게 된다.[24] 그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순전히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고 진술하기도 했다.[24]

그 후 그는 고비사막에서 야영을 하면서 소비에트 연방모스크바에 도착 총리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게 된다.[24] 면담에서 레닌은 "한국에서는 공산주의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에 주력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 의견에 공감한 여운형은 볼셰비키들과의 연대하여 활동하게 되었다.[24] 그는 그 후에 중국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리인격인 보로딘중국 반제국주의운동에도 참가하여 활동하게 된다.[24]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25] 5월 30일 영국 경찰이 불평등 조약에 반대하는 중국인 젊은이 20여 명을 살해한 5.30 사건 이후 중국 혁명에도 참가하게 되었다.[23] 반영 시위는 26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23] 이 기간 중 그는 중국국민당 대표 사오리쯔와 공산당 대표 취추바이 등과 함께 운동의 방향에 대해 일주일에 두세번 이상 만나 토의하기도 하였다.[25] 1925년부터 1927년까지는 상하이에서 소련이 새로 시작한 타스 통신사에 취직하여 근무하게 된다.[24]

1926년 1월 국민당 2차 대표대회에 국민당 정부 주석 왕징웨이의 초대로 참석하여 연설을 하였으며[25] 보로딘과 함께 왕징웨이의 자문활동도 하였다.[25] 1927년 장제스가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을 하면서 그의 중국 혁명 활동도 중단되었다.[25]

[편집] 국내 활동

1930년대 이후에는 〈조선중앙일보〉사장과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중도적인 정치노선을 걸었다. 특히 식민지 조선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청년들밖에 없다고 생각한,그래서 1905년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청년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으며, 체육을 좋아하였던 그는 조선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손기정과 가까이 지냈다.

1936년 9월 조선중앙일보손기정의 운동복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간행하였다. 이 일로 조선중앙일보는 자진휴간된 뒤 한동안 복간되지 않았고 여운형은 한동안 결혼 주례와 스포츠행사 참석 등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26] 안창호가 국내에 압송된 뒤 수감당하자 조만식·이광수 등과 함께 수시로 안창호의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1942년 11월 동경에 미군 폭격기의 공습을 목격하고 일본의 패배를 예언하였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수감되었다.[26] 이때의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육해군형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법 위반, 안녕질서에 대한 죄목 등이었다.[26] 1943년 7월 석방되었고, 석방 직후 안재홍의 방문을 받았다.[26]

당시 여운형의 회상에 의하면 '일본 헌병들이 자신을 때리고 매달지 못하는 대신, 여러 일본경찰들이 번갈아가며 달라붙어서 자신을 90여 시간 동안 의자에 묶어놓은 채 흔들고 잡아당기며 잠을 못자게 하는' 고문을 했다고 하였다.[26] 이 뒤로 감옥에 이감된 뒤에도 신경쇠약에 걸려 잠을 못이루었다고 한다.[26]

[편집] 해방후 정치활동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좌파민중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여운형을 접촉하였다. 1945년 8월 14일 여운형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이었던 니시히로로부터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운형은 5개항 보장 조건을 전제로 엔도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27] 송진우는 여운형과의 협력마저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 여운형이 행정권 또는 치안유지권을 인수하게 된 것이었다. 여운형은 8월 15일에도 사람을 보내 송진우의 참여를 요청하였고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송진우로부터 "경거망동을 삼가라. 중경 정부를 지지하여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28]

1945년 8월 15일 밤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위원장을 맡았다.[29] 1945년 8월 16일 여운형은 서울 휘문중학 운동장에서 연설을 하였다. [30]

이어 인민위원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한반도의 분단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때는 8월하순이었다. 북위38도선 이북을 소련군이, 그 이남은 미국군이 각각 점령한다는 연합국의 방침이 경성에도 알려지게 되었다.[20]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는 곧 건준을 공식적인 정부로 선포해 하나의 기정사실화하고 곧 경성에 진주할 미군으로부터 추인받는 길을 밟으려 했다. 그리하여 9월6일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변모시켰다.[20] 박헌영건국준비위원회 내에 민족주의자들이 많다며 개조를 요구하였다. 여운형은 부위원장 안재홍을 찾아가 협의하였는데 안재홍은 박헌영을 멀리하라며 그에게 충고를 하였다고 한다.[31]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은 밀사 손치웅을 평양에 파견하여 조만식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여운형 등의 호의는 감사하나 북에 남겠다고 하였다. 조만식은 여운형에게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며 사양하였다.[32]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은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된 이승만과 함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33] 9월 10일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등은 미 군정장관 등을 만나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묘묵도 명월관에서 미군정 관리들에게 여운형과 안재홍이 잘 알려진 친일파이며 인공은 공산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34]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의 환국때 그는 중경 임시정부 추대에 반대하였다.[35]

인공의 좌경화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그 매개체 역할을 자임하는 정당을 결성하게 된다. 그는 11월 12일 건국동맹이 모체가 되고 몇 개의 군소단체가 합류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여운형은 창당대회에서 '해방된 오늘,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 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반동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라 하였다. 인민당 창당엔 미군정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고, 조선인민당은 당기에 태극을 넣어 보수층으로부터도 호감을 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인민당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하였고, 박헌영계의 프락치들이 많아 훗날 분란을 일으키게 되었다.[36] 이어 11월 조선인민당의 당수가 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37]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38]

[편집] 임시정부와의 관계

1919년 여운형은 동생 여운홍과 함께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외무부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에 왕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창조론, 개조론으로 나뉠 때 여운형은 임시정부를 떠났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1진이 망명길에서 돌아오자 여운형은 경교장을 방문했다. 여운형은 경교장에 들어가 옛 동지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임정 수위에게 끌려나가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39]

[편집] 좌우합작운동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송진우, 김성수 등의 불참, 9월 16일 박헌영 축출을 요구했으나 들어지지 않자 반발한 안재홍계 세력의 비판과 탈당[40], 11월 인공의 지도자로 지명되었던 이승만, 김구의 취임 거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주장하는 우익 진영의 반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그 뒤 조선인민당을 창당하여 당수로 활동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3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박헌영과 당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다가 암투를 벌이게 되었다.

1946년 7월 좌우합작운동의 좌측 대표에 선출되었다.[26]

1946년 8월 여운형은 미군정청에 박헌영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41].[42] 한편 박헌영김일성에게 서신을 보내 여운형을 비판하였는데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라며 비판하였다.[41] 한편 그는 북의 김일성·김두봉이 민족주의자들로서 박헌영의 반미적 노선에는 반대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42] 46년 5월에 김일성이 남한을 미제국주의와 총독정치라고 평가하며 8월에는 남한을 완전히 해방시켜야 한다는 연설을 했던 것을 여운형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42]

[편집] 남로당과의 갈등과 암살

1947년 여운형은 남로당을 탈당, 따로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박헌영 계열의 스파이들이 침투하였다.

1947년 4월 26일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열었고 5월 24일5월 25일에 열린 근로인민당 창당대회에서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장건상을 각각 선출하였다.[43] 그런데 한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은 근로인민당남로당과의 차이점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소련측에 들어가 소련군정의 5월4일자 보고서에 올라가게 됐다. 문제의 발언은 "남로당은 미군정청과 투쟁하는 정당이다. 나는 미군정청과 협력하는 당을 만들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43]

그뒤 좌파·우파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온건 우파의 우사 김규식, 안재홍 등과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던 중 좌우합작 문제 때문에 납치와 폭행을 당할 뿐 아니라 자택에 대한 폭탄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44]

다른 연설에서 여운형은 "남로당은 극단적으로 좌익이며 오직 우리 당만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고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 발언을 보고한 남로당의 한 간부는 "그러한 식으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해 있는 구 인민당 구성원들과 사회노동당 구성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문화학생 조직들 속으로도 침투하려고 시도한다"고 보고하였다.[45]

1947년 3월 16일에는 여운형의 집에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가옥이 파괴되었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의 증언에 의하면 폭탄테러가 좌파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증언하여 남로당의 개입을 시사하였고, 이정구, 이상백 등은 이 음모가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 지적하였다. 여운형과 남로당의 관계가 폭력을 사용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자 여운형의 측근들은 1947년 당시까지도 삼가하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44]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우익 청년단체 백의사의 멤버인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암살되었다.

[편집] 암살 배경

여운형의 암살 배경은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여운형 암살 사건은 한지근 혼자가 아닌, 우익 청년단체인 백의사에서 조직적으로 살해한 조직성을 가진 범죄였다는 시각이 있다.[46] 반대로 당의 주도권을 놓고 여운형과 다투던 박헌영계열이 암살했다는 주장도 있다.[47][48]

범인으로 발표된 19세 소년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이고, 나이도 통상 알려진 19세와는 다른 21세였다. 김두한의 회고록에 따르면 범인은 자신이 고문으로 있던 비밀결사 백의사 소속이며, 자신이 한지근에게 총을 주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후, 김두한은 수도경찰청에 불려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않았나. 그저 혼만 내주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라는 나무람을 들었다고 회고하였다.[20]

여운형이 암살당한뒤 2개월 뒤, 존 하지 사령관은 경성을 방문한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에게 보호하기를 6월 말까지 북한 공산당은 여운형을 배반자라고 맹공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추도하겠다는 등 야단을 부렸다고 한다.[49]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과 김일성은 공산당의 주도권확보를 위해 공동의 적인 박헌영을 타도할 목적으로 손을 잡고 뭉쳤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하게 되고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게 되자 모의내용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 한다.[50] 박갑동에 의하면 월남한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남파시켜 자연스럽게 우익청년조직인 백의사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暗殺하였다는 것이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6.25를 만나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50]

한편 그의 둘째딸 여연구에 의하면 부친을 암살한 것은 종파분자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가리킨다.[43]

[편집] 평가와 비판

1947년 6월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다.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견해가 있다.[51][52]

여운홍에 의하면 남들에게 후한 사람이라 하였고, 윤보선은 그가 세련된 인물이고 활기찬 사람이며 웅변에 능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교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53] 유병묵은 그가 천재적이었다고 보았고 강원용은 마음이 열렸으며 폭넓은 사고를 하였다고 평가하였다.[53] 한편 송건호는 그가 사망했을때 기회주의자라서 그의 죽음이 조롱당했다는 증언을 하였다. 송건호도 그들의 의견에 따랐으나 나중에 다시 생각하니 여운형이 옳았다는 것이다.[54]

[편집] 당대의 여론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33%가 여운형을 지목하였다.[55]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때는 1957명 중 78명이 여운형을 지목하였다.[55]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95표를 얻어 1위였다.[55]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89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한다.[55]

[편집] 1990년대 이후의 평가

사회주의 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채 있다가, 2002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가 조직되어, 여운형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기 위한 운동을 하였다.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그가 받은 건국헌장은 2급훈장이어서, 조선의 독립과 청년들을 위해서 헌신한 여운형의 업적에 비해 너무 인색하다는 비평도 있다.그동안 여운형에 대한 건국헌장 추서는 그동안 제대로 사상문제로 대접받지 못하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의 시작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정식 교수에 의하면 "힘든 과정을 통해서 몽양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들을 격려했고, 이끌었습니다. 몽양 자신은 때를 잘못 만났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그는 겨레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길이 남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43] 국가 보훈처에서는 2005년 2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2008년 3월 1일 행자부로부터 1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받았다.

[편집] 비판

정치적 반대파의 입장에서 볼 때 여운형의 현실주의적 행보는 기회주의적인 정치가의 전형이라는 혹평을 받았다.[56] 여운홍에 의하면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으로의 개편 과정에 대해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여운형에게는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 되었다고 평하였다.[57] 한편 나용균은 그가 자기의 선전을 너무 많이 한다고 보았고[53] 강원룡은 생각이 모호하다, 남의 영향을 쉽게 받았다고 평하였다.[53]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고 우왕좌왕하다 희생당했다는 비판도 있다.[58]

[편집] 가족 관계

동생 여운홍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슬하에 4남 3녀 중 둘째딸 여연구, 여원구, 막내 아들 여붕구(1991년 사망)만 월북했었다. 둘째딸 여연구와 막내딸 여원구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 활동하하고 있거나 현재 활동중이다. 이중 둘째 딸인 여원구는2002년 8월 14일 대한민국을 8·15공동행사 민족통일대회에 북한측 대표단 단원으로 참여,방문한 바 있다.


[편집] 여운형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기타

윤보선상하이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59] 사회주의자라는 견해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60]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출범을 놓고도 이견이 존재한다. 인공의 출범은 여운형이 완전히 소외된 가운데 박헌영허헌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여운형은 인공 내각 명단에 자신이 부주석으로 오른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기는커녕 박헌영허헌의 돌이킬 수 없는 경거망동을 한탄했다는 것이다.[61] 밖으로는 인공이 여운형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것 만큼 여운형은 우익진영의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62]

여운형의 자녀 중 5세 가량인 막내아들 붕구가 있었는데 모친은 일본인 여성이라 한다.[50] 여운형이 기생에게 낳은 아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적과 동지’를 저술한 강준식에 따르면, 일제가 여운형에게 미인계로 제공한 일본인 밀정이었다고 주장하였다.[50] 또한 딸 '효기'의 어머니는 부인 진상하의 먼 일가벌로 일본에 유학중이던 진옥출(陳玉出)이었다고 한다. 진옥출은 아이를 여운형에게 맡기고 뒤에 연안 독립동맹으로 갔으며 거기서 결혼했는데, 그 남편 허모씨는 일본 밀정이라 총으로 남편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출처 필요]

[편집] 참고 자료

[편집] 주석

  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참조.
  2. donga.com[여성동아]
  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0쪽 참조.
  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3~244쪽 참조.
  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참조.
  6.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8~259쪽 참조
  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7쪽 참조
  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9쪽 참조
  9.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
  10.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7~259쪽 참조
  1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7~259쪽 참조.
  1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9~260쪽 참조
  1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4쪽 참조.
  14. 승동교회 보도자료에 따르면 승동교회는 1893년 미국인 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했으며, 설립당시 백정 등 천민들이 주요 신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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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근무한 신학자 이정식은 여운형 선생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공산주의자라는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하였다. 《기독신문》2004년 5월 4일자 기사
  1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61쪽 참조
  1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7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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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donga.com[뉴스]-몽양 여운형/김학준(해방공간의 주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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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대한민국 건국 영웅들(3)) 조만식 -그는 누구인가? - 위클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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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다큐멘터리 《인물현대사》여운형 편,한국방송
  47.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 네이버 뉴스
  48.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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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좌·우를 넘어] 해방정국의 중도파들 ④몽양 여운형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5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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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근무한 신학자 이정식은 여운형 선생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공산주의자라는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기독신문》2004년 5월 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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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관련 서적

[편집] 같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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