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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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박열
출생 1902년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
사망 1974년 1월 17일 (7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朴烈, 1902년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박준식(朴準植)이다.[1]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광복 이후에는 우익 노선으로 전향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한인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1946.10 ~ 1948.8)을 지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학창시절

경상북도 문경에서 박영수(朴英洙)의 아들로 태어나 상주군 함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학과에서 수학했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3·1 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를 다녔다.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1920년 1월 일본에 있는 조선이 고학생들과 노동자 사회의 상부상조를 표면상의 목적으로 하는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의열단, 흑우회 등을 조직했다. 박열은 흑도회라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하였다.

[편집] 독립운동

1922년 김약수·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직접행동의 기회를 노리던 중, 그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일본 천황과 왕세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몇달 뒤 감옥 안에서 자결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박열은 22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수감 생활을 하고 살아남았다.

[편집] 광복 이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 풀려나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이때 저서로 《신조선혁명론》(1946)을 남겼고, 이승만 노선을 지지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2] 이승만김구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편지를 보내, 이승만김구의 화해를 촉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12월과 1947년 4월 2차례에 걸쳐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과 회담했다. 그후 19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정했다. 민단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 직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1948년 재정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했다가 한국 전쟁북조선으로 갔다. 1974년 사망 당시에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월·납북 정치인 모임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편집] 사후

대한민국에서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편집] 사상 전향 선언 주장에 대한 검토

1934년 일본 사법 당국은 박열이 사상을 전향하여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친 「감상록」을 썼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에 대한 사모의 정, 영화 〈금강산〉과 〈간사이 지방 폭풍우〉등을 본 느낌 등을 담고 있다고 한다.[3] 그러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의 저자 김명섭은 다음의 이유를 들어 이 사실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3]

  1. 사상 전향서의 문체가 1948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신조선혁명론』과 너무 다르다는 점. (예를 들어 전향서 내의 일본어투의 문장 및 "피안의 정토를 왕생하기 바란다"와 같이 불교와 전혀 인연이 없음에도 나타나는 불교적 문체)
  2. 주요 사상적 지지자들의 전향을 공격적으로 활용해 오던 일본 정부가 박열 전향 사실에 대해서는 소극적 홍보를 한 태도.
  3. 다른 전향자들의 즉각적인 석방과 대조적으로 다섯 차례나 전향선언을 한 박열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석방을 거부한 일본 정부의 태도. (1945년 10월 27일 출옥)
  4. 평소에 보여준 박열의 굳은 사상적 의지의 표출.

[편집] 기타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2009년 현재 건립중에 있고 기념관 옆쪽에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 등이 있다.

[편집] 참고자료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1. 《신동아》 (2000년 8월호) 개교 100년 경기고 신화
  2.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3. 김명섭 (2008).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 일본에서의 투쟁》. 이학사. ISBN 978896147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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