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진
| 권동진 | |
| 출생 | 1861년 12월 15일 조선 충청북도 괴산군 |
|---|---|
| 사망 | 1947년 3월 9일 |
| 국적 | |
| 별칭 | 아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 도호는 실암(實菴). |
| 직업 | 독립운동가, 종교인, 정치가 |
| 소속 | 前 신한민족당 총재 |
| 종교 | 대종교 |
| 권동진 | |
|---|---|
| 1861년 12월 15일 ~ 1947년 3월 9일 | |
| 태어난 곳 | 조선 충청북도 괴산군 |
| 죽은 곳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복무 | 조선 관군 |
| 복무 기간 | 1881년 ~ 1882년 |
| 최종 계급 | 조선 육군 참령 |
| 지휘 | 조선 관군 장교 |
권동진(權東鎭, 1861년 12월 15일 ~ 1947년 3월 9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대한 제국 말기에 함안 군수, 육군 참령으로 있다가 그 뒤, 개화당에 들어가 구한말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였으나 1882년 임오 군란으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뒤, 천도교에 귀의하여 도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수감당했다. 출옥 후에는 신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 부회장에 피선 되었다. 뒤에 광주 학생 운동에 관련되어 다시 1년간 수감됐다가 풀려났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우파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아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이며, 천도교에서 받은 도호(道號)는 실암(實菴)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1], 경기도 포천과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의친왕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2] 어릴때 한성부로 이주하여 조선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관으로서 벼슬을 지내다가 개화파에 참가했다. 함안군수(咸安郡守)·육군 참령(陸軍參領) 등을 역임하고, 그 후 개화당(開化黨)에 들어가 혁신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피신, 망명하였다.
[편집] 독립운동
을미사변 이후 일본에 오랜 기간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만났다. 천도교에 입교한 그는 의기투합한 손병희, 오세창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하여 개화 운동을 계속했으며, 1907년 남궁억의 대한협회에도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을 주도했다. 각계에서 민족대표를 선출하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한다는 3·1 운동 초기 구상은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최린의 천도교인 네 사람의 의논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1927년 좌·우익 계열을 망라한 국내 민족운동 세력의 집결체인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는데 적극 참여하였다. 회장은 이상재가 선출되었고 권동진은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조병옥 등과 함께 연행되어 또다시 1년간 복역하였다.
[편집] 광복 이후
1945년 8·15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참여 요청이 들어왔으나 사양하였고, 9월 한민당이 창당되자, 이승만, 김구, 오세창 등과 함께 한민당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9월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봉대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김포비행장에 찾아가 그를 영접하였다.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3]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4]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4]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5] 곧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5]
[편집] 만년
이후 우익 민족진영의 원로로서 반탁 운동에 참가했으며,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여 당수를 지냈다. 신한민족당은 안재홍의 국민당과 함께 김구의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게 된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6]
1946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반탁 세력을 집결시켜 임시 입법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을 구성했을 때 의원으로 위촉되었으나, 이때 이미 86세의 노령이었고 다음해 사망했다. 귀국한 이승만, 김구 등과 함께 우익의 거두로 활동했다. 신한민족당은 한국독립당과 통합될 때 통합에 참여하였으나, 그의 사후 뒤에 미소공위 참가를 놓고 김구 등과 의견을 달리하여 한독당과 다시 결별하게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의 삼일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편집] 참고자료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 상세자료 - 권동진, 2007년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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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선정 이 달의 독립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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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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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 | |
| 천도교 | |
| 불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