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봉창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는 이봉창
출생 1900년 8월 10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한성
사망 1932년 10월 10일
일본 일본 이치가야 형무소
사인 교수형
거주지 대한제국 대한제국, 일본 일본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 보통학교 졸업
직업 상인,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한인애국단원)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일제 강점기한국의 항일운동가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상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원이 되었다. 1932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 (櫻田門) 앞에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쇼와 부자를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적중하지 못하였다. 일본식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일본어: 木下昌藏)이다. 경성부 출신.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유년시절에 대한 다른 기록[편집]

도왜실기[편집]

이진규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랐다. 이봉창의 선대는 경기도 수원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버지 이진규는 농업을 계승하여 중류층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토지가 철도건설 계획지점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땅을 일본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생계를 꾸려나갈 길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거주하였다[1]고 '도왜실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진위가 의심스럽다.

그의 아버지는 44년에 사망하고 형 이범태와 조카딸들은 해방직후에도 생존해 있었다.

이봉창 자신의 주장[편집]

이봉창 자신의 신문조서 진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농업이 아닌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하고 있었고, 선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아닌 당시 건축수요의 증대로 인해 자신이 자산을 모은 신흥자본가였다.[2]

소학교[편집]

가정 형편이 안되었던 이봉창은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릴 때는 집에서 글씨를 배우고 10세 이후 어렵게 용산의 문창보통소학교에 입학하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1], 이도 사실이 아니다.[2] 당시에는 서당이나 집에서 글을 배우다 늦게 소학교에 입학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도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다가 소학교김중환 교장의 권유로 소학교 학생이 되었다. 이봉창의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 이후 본처를 버리고 첩과 생활하게 되면서 가정 형편이 매우 나빠졌다.[2]

일본 체류[편집]

일본 오사카로 가다[편집]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1919년 이후 일을 그만두고 동해를 건너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3] 그뒤 조카인 이은임과 함께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철도국을 그만 둔 일본인 지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하여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타전해오자 자신의 조카딸인 이은임을 식모로 주선하여 여비를 받았다. 이 여비로 일본인, 조카 이은임 등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온다.

철도를 그만둔 藤幡라고 하는 사람이 내지로 돌아가면서 조선인 식모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하므로 나는 대단히 좋은 기회라고 여겨 조카인 銀任을 식모로 고용하고 그 급료를 가불 받아 그것을 내 여비로 충당하여 내지로 간다는 생각을 짜내고 어머니와 銀任에게 의논했더니 다행이 승낙해 주어 나는 銀任을 데리고 藤幡씨와 함께 출발하여 오사카에서 銀任을 藤幡씨에게 건네고 나는 오사카에 남아 취직 자리를 찾았던 거입니다.[4]

이후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일본어: 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이후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노동과 장사 등에 종사하였다.

일본 정탐 활동[편집]

1929년 2월부터 9월까지 오사카시의 비누상점에 취직하였으나 수금한 매상금 100원을 갖고 도쿄로 달아났다. 이후 카코우(坂口) 해산물 도매점의 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동업자와의 경쟁에 싫증이 나 친구집에 머물거나 요시와라에서 여자를 사귀는 등 이틀 사흘밤 주인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가 공장 기숙사의 주인으로부터 한심스럽다는 질책을 받자 회사를 그만둔다. 그 뒤 가방점의 외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판매금을 탕진하고 그만두었다.

1930년 30세의 이봉창은 미혼이었다.[3] 일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과 함께 노동으로 허기를 채우며 적정을 정탐하기에 힘썼다.[3] 1931년 나고야에서는 병이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친구는 어느 일본인의 사위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봉창은 친구의 청을 거절하고 도쿄, 오사카 등지를 돌아다녔다. 이때 일본인의 말과 몸짓을 흉내내는 재주를 익혔다 한다.[5]

대한민국임시정부 합류[편집]

의심을 받다[편집]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6] 이후 생계비용이 필요하던 그는 상하이의 명선철공소에 입사하였으나, 임금이 너무 낮아 결근을 자주하다가 그만두게 된다.

그뒤 상하이에서 수소문 끝에 그는 1931년 1월 이봉창은 이름도 모르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그로부터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해 듣고 바로 그곳으로 찾아갔다. 밤중에 찾아오자 2층에는 비밀회의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갑자기 허름한 손님이 나타나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하고 행색이 몹시 수상해 보이므로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이봉창은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하자 임시정부의 사람들은 그를 더욱 의심하였다.[7]

그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었고 일본식 옷에 게다(일본 나막신)를 끌고 다니는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상당히 거슬렸다. 임정 요인들은 그를 왜늙은이라 하여 일단 경계하였다.[7]

김구와의 만남[편집]

임시정부 사람 중 2~4명의 청년들이 그를 일본의 밀정으로 여기고 급히 문밖에서 내쫓으려 했으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애원하였다. 이때 김구는 2층에 있다가 지켜보고 그의 말하는 태도의 비범함을 간파한 뒤 잠시 인근 여관에 머무르도록 일렀다.[7] 이봉창이 여관을 정하고 숙박하자 김구는 은밀하게 방문하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신변 이야기에 그칠 뿐이었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이때 이봉창도 임시정부 통신처를 왕래하였으나 주위의 의심이 풀리지 않아 임정 사람들은 김구에게 그를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8]

김구는 이봉창을 어떻게 시험할까 궁리하다가 3~4명의 청년을 데리고 그를 방문하였다. 방문후 연회를 마련하였는데 취중에 이봉창은 김구와 임정 요인들에게 일왕을 처단하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주위 사람들이 이봉창을 비웃으며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처단하지 못하느냐고 비판하자 이봉창은 '나는 작년에 동경에 있을 때 하루는 일본 임금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다면 큰일을 한번 해볼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일왕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라고 말 하였다.[9]

한인애국단[편집]

이봉창의 옥중 수기 일보 (1932년 2월 13일자)

김구는 이봉창의 말을 듣고 그를 비범하게 보았으나 못들은체 하고 내색하지 않았다.[10] 이봉창의 취중 장담을 기억한 김구는 며칠 뒤 여관으로 다시 찾아왔고 이봉창은 계획한 바를 설명하였다. 김구는 그가 비범한 뜻을 품었고 여러 사람들이 의심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라 깨닫게 되었다.[10]

1931년 2월 김구는 이봉창에게 상하이 홍구 방면에서 종적을 감추고 일본인 행세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기노시타라는 가명으로 홍구에 거주하며 양수포의 일본인 인쇄공장에 취직하여 다녔고 몇 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의 종업원으로 근무하여 일본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김구 선생과 3,4개월에 한번씩 비밀리에 만나기로 약속했다.[10] 그뒤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

도쿄 사쿠라다몬 사건[편집]

1932년 1월 8일 체포된 이봉창
1932년 1월 10일자 중앙일보에 보도된 이봉창 의사 의거 보도.[11]

폭발물 마련 등 오랜 준비 끝에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傀首,우두머리)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했으며, 12월 17일 도쿄로 출발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됐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직후 그는 처음에는 김구가 누군지 모른다고 일관하다가 뒤에 김구의 존재를 시인하고 그의 지시를 받았음을 진술하였다.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은 사건에 대해 제1차 공판을 하고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이봉창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2]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미혼으로 처자식은 없었다. 당시 그의 향년 32세였다.

상세한 행적[편집]

1932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이봉창 의사 의거.[13]

12월 11일 김구는 이봉창을 불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리고 일본왕을 죽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공작금을 받아가지고 행장을 꾸려 일본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12월 12일 이봉창은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일본 왕을 죽일 것을 선서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14] 12월 12일 저녁 김구는 이봉창과 여관에서 지새며 상세한 밀계를 세우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의 일을 의논하였다. 12월 13일 장원루에서 함께 술을 마신 뒤 지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마지막 사진을 찍은 뒤 작별하였다. 김구와 작별한 이봉창은 홍구로 돌아왔다.[14]

사후[편집]

효창공원 삼의사의 묘

그의 거사는 실패하였으나 그의 뒤를 이은 윤봉길은 1차 거사에 실패하고 2차 거사에 성공한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기사회생하는데, 이봉창과 윤봉길의 잇단 거사로 침체기에 빠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임정에 대한 한인 교민단체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하게 된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다시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三義士墓)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그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하였다.[15]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은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데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었다.[16]

역사적 의의[편집]

이봉창'의거'의 의의와 가치는 조동걸교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인간주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봉창은 가난한 노동자로,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 평범한 삶에서 남 모를 식민지 사람의 고뇌가 있었고, 그럴수록 정직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다 민족문제를 느끼고 일왕의 저격을 결심한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처럼 어릴때부터 무슨 민족을 외치고 영웅이 되려한 것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인간의 길을 갔다. 더욱이 영웅적 거사를 마치고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이봉창은 이처럼 식민지인으로서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다가 의열투쟁에 나섰다. 그의 범상한 생애 자체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서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할 수있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거창한 영웅주의를 내세운 여타의 경우와 다르다.

  • 한인애국단 결성에 결정적이었다.

김구주석은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로를 찾던중 이봉창과 조우했다. 이봉창은 애국단의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여 '최선봉장'이 되었다. 역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애국단은 당시 위기에 처한 임정의 활로를 열었는데, 그 애국단의 제1호 투쟁이 이봉창 의거로 나타남으로써 사실상의 출범식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이 되어 광복군 창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 이봉창 거사는 임시정부를 부활시켰다.

지금은 자랑스런 임정으로 기록되지만 당시 임정은 내분과 어려운 여건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있었다. 집세도 낼수없는 형편이었고 국내외의 동포로부터도 지지를 상실하여 존재가치를 잃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이봉창 의거를 단행케 한다. 이로써 무엇보다 임정이 죽지않고 건재하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한 셈이고 대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이어 윤봉길 의거까지 성공해 국제적 지원까지 얻게 되고 임정은 민족적 기반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임정은 이로써 청사에 빛나는 위업을 달성할 수있게 된 것이다.

  • 인류정의의 길을 확립했다.

당시 일왕은 국가이면서 신의 직계혈통이 흐르는 존재였다. 모든 침략과 만행은 일왕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대한 비인간적 야수성과 불의에 대한 책임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류 양심의 이름으로 그를 처단하는 것은 옳고 이봉창은 이를 실현했다. 비록 폭탄의 위력이 약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국의 언론조차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고 하면서 일왕을 처치하지 못한 것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이도 인류 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하겠다. 이렇듯 이봉창은 세계 인류적 정의와 양심의 수립에 기여했다.[17]

평가[편집]

효창공원 삼의사의 묘

김구는 거사의 실패를 크게 아쉬워하였다. 만일 자금의 제한을 받지 않아 더 성능좋은 폭탄을 마련해 주었다면 윤봉길 의거 이전에 일왕을 성공적으로 사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18]

인물평[편집]

김구는 《도왜실기》에서 그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품은 마치 봄바람과 같이 온화하면서도 의지가 굳고, 열정이 불꽃처럼 뜨거웠다. 이런 까닭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함에 있어서 인자함이 있으면서도, 의협심이 강하여 한번 노하면 두려움 없이 칼부림을 하고 1천만 명이라도 물리칠 듯한 기세였다. 술을 마심이 호걸이었으나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교제에 능하여 일본인의 창가를 잘 불렀다. 그래서 홍커우에 도착한 지 1년도 안되어 그와 가깝게 사귀는 일본인 친구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특히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는 그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다" 했고 유독, 이봉창에게 '선생'이라는 호칭도 사용함으로로써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19][20]

가족[편집]

  • 아버지 : 이진규(李鎭奎, ? ~ 1944)
  • 어머니 : 밀양 손씨
  • 아들(양자) : 이실(李實)
  • 형 : 이범태(李範泰, 1891)
    • 조카 : 이은임(李銀任, 1909)
    • 조카 : 이실(李實)
  • 동생 : 이봉준(李奉俊, 1903)
    • 조카 : ?
      • 종손 : 이세창(李世昌, 1946 ~ )

상훈[편집]

  •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함께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주석[편집]

  1.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37~38
  2. 기노시타 쇼죠,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배경식 저, 너머북스) p25-32
  3.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0
  4. 이봉창의 진술서
  5.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0~41페이지
  6.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1페이지
  7.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2페이지
  8.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2~43
  9.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3페이지
  10.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4페이지
  11. 보도내용에 “천황폐하 환행도중 돌연 폭탄을투척/범인은 조선 경성 생(生) 이봉창”이라는 제목으로 중앙일보에서 보도했는데, 당시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대불경’사건이라면서 격렬히 비난했었다. 당시 중앙일보 사장은 노정일.
  12.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36페이지
  13. 동아일보역시 이봉창 의사 의거에 대해 '대불경 사건 돌발, 어로부에 폭탄투척 폐하께옵서는 무사어환행, 범인은 경성 생(生) 이봉창.'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고,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격렬히 비난했었다.
  14.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7
  15.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50페이지
  16. 홍인근《이봉창평전》나남출판-195,198쪽
  17. 홍인근,이봉창평전,나남,353,355쪽
  18.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8페이지
  19. 〈백범일지〉돌베개,323쪽
  20.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45페이지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