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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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趙素昻, 1887년 4월 10일 파주 ~ 1958년 9월 10일 북조선)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 정치인이었으며 납북후 북조선에서도 활동하였다. 경기도 파주 출신.[1]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조소앙은 1887년 경기 파주군 월롱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맏형이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었으므로 조소앙은 자연히 국제정세에 밝게 되었는데, 그의 맏형을 통해서 열강의 동향 등 국제정세를 비교적 자세히 배울수 있었다.[1]

조소앙은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황실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에 유학, 동경부립 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칙학원에서 영어를 배운뒤 일본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였다. 명치대 학생때 기독교에 입교했으며[1] 1911년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던 이승만도쿄에 들려 강연을 하였는데, 이 때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에 뜻을 품게 된다.[2] 1913년 중국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에 본격 참여하였다. 1913년 신규식·박은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하여 청년들을 교육했고, 진영사(陳英士)·황각(黃覺) 등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아시아 민족의 반일단체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2] 1915년 민족의 대동단결과 정신적 유도를 목적으로 구국종교인 육성교(六聖敎)를 창시하였다. 이는 단군은 '독립사상', 불타는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孔子)는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치(智德合致)', 예수 그리스도는 '애인여기(愛人如己)', 마호메트는 '신행필용(信行必勇)'으로써 연결하여 육성 일체를 구상하는 것이다.[2]

[편집] 독립 운동

1918년 무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1919년에는 신규식의 지시에 따라 일본 도쿄으로 파견되어 2·8 독립선언을 위하여 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4월 10일 3·1운동 이후 국내 서울에서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고 정도령에 손병희, 부도령 및 내각총리경에 이승만을 임명해서 내각을 구성할 때 조소앙은 교통무경에 임명되었다.[2]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과 함께 혁명당(革命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임시헌장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는 초대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개회되고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구성될때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2]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어 본 국에서 군자금 모집, 송금, 임시정부 선전, 독립사상 고취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 공산당대회를 참관하고 돌아왔으나, 만주리선언을 통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표현했다. 1919년 8월에는 스위스네덜란드에서 연이어 열린이 기구의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사회주의국제연맹 총회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석하기도 하였다.[1] 1922년 국제연맹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보좌하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또한 상해에서 김상옥을 만나 재등 조선총독의 암살에 대해서 결의를 고취하여, 김상옥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지도록 하였다.

1926년 이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학무총장으로 선입되었으며 국무원으로 선출되고 이듬해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김구와 함께 특무대를 조직하여 일본의 요인 암살에 노력하였다. 1927년 11월 이동녕, 김구, 안창호, 이시영, 홍진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때, 이동녕, 김 구, 이시영 등과 함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정치균등, 경제균등, 교육균등을 기조한 삼균주의를 창시하고 이를 당헌과 당강으로 기초하여 통과시켰다. 1930년 7월 국무위원장 이동녕과 함께 국무위원 외무장에 임명되었다.[2] 1933년 1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과 임시정부 내무장(內務長)에 임명됐다가, 3월 6일 해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35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주로 이전하자 국무위원 외무장에 재선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내무장으로 임명됐다. 3·1운동 제17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한국독립당의 명의로 된 기념선언을 발표하였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출되고 외무장에 임명되었다.[2]

1940년에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재건파 등 3당이 통합되어 한국독립당을 재창립할 때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었다. 1945년 2월 28일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편집] 삼균주의

조소앙은 1930년대 초에 삼균주의를 제창하였다. 그의 삼균주의는 자본주의사회주의를 적절히 배합하되 평등에 보다 역점을 두었다. 그의 삼균주의 이념은 '정치의 균등(균정권)', '경제의 균등(균리권)', '교육의 균등(균학권)'으로 구성된다. 각 항목을 하나의 축으로 삼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등, 민족과 민족 간의 평등, 국가와 국가 간의 균등을 다른 축으로 삼아 두가지 이상의 차원에서의 삼균(세가지 모두 균등)을 강조하였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하였는데, 삼균주의의 채택 후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서, 김원봉 등과 함께 좌우합작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편집] 해방 후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때, 조성환, 김성수와 함께 공동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3]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4]

1946년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자, 3월 5일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김구, 조완구, 유림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았다.[5]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48년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여 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사회당 당수,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거에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조병옥을 2위로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원 등으로 활약하다가 6·25 당시 북한에 납북되었다. [출처 필요]

납북 후 북쪽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지냈다. 1958년 9월 10일 타계했으며 1970년대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 [6]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전 임
(초대)
제2대 국회의원(성북구)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
사회당
후 임
김일

[편집] 참고자료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김학준. “소앙 조용은”, 《동아일보》. 2008년 8월 7일에 읽어봄.
  2. 인물정보 조소앙 (게시물). 보훈처 나라사랑광장. 2008년 8월 7일에 읽어봄.
  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14쪽
  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06쪽
  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4~15쪽.
  6. 연합뉴스 (2000년 12월 21일). 납북 제헌ㆍ2대 국회의원 현황. 2007년 10월 3일에 읽어봄. “독립운동가 조소앙씨는 지난 58년 9월 10일 타계했으며 지난 70년대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 조씨의 묘비에는 "조소앙 선생,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 1887년 4월 8일생 1958년 9월 10일 서거"라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