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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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출생 1545년 3월 8일(1545-03-08)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사망 1598년 11월 19일 (53세)
조선 노량해협
사인 전사(화기에 의한 죽음)
거주지 조선 한성부, 조선 충청도 아산읍
국적 조선 조선
별칭 여해, 시호 충무공, 작위 덕풍군, 덕풍부원군
학력 한학 수학
직업 군인, 관료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상주 방씨(정실), 해주 오씨(소실), 부안 여인(소실), 여진(소실), 최귀지(소실)
자녀 적자녀 3남 1녀, 서자녀 2남 2녀
부모 아버지 덕연 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친척 형 이희신, 이요신(李堯臣) 동생 이우신, 조카 이완, 조카 이요, 조카 이분(李芬), 친족 이이, 이기, 이행, 서녀사위 윤효전, 사돈 이원익, 사돈 허목, 사돈 윤휴, 사돈 윤희손
웹사이트 충무공 이순신
이순신(李舜臣)
1545년 3월 8일(1545-03-08) ~ 1598년 11월 19일 (53세)
별명 여해, 시호충무공
태어난 곳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
죽은 곳 노량해협
복무 조선
최종 계급 품계:정2품 정헌대부
관직:삼도수군통제사(종2품급)
지휘 조산보만호
전라좌도수군
삼도수군
주요 참전 한산도대첩
명량대첩
기타 이력 선무공신 1등 공신
덕풍 부원군
추증 좌의정
가증 영의정

이순신(李舜臣, 리순신, 1545년(인종 원년) 3월 8일 ~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관 중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만포첨사,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관직은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한 생활을 행하고 효심을 가진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의정부우의정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의정부좌의정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 이며, 조선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1]의 후손이다. 서녀 중 1명을 통해 남인 재상 이원익, 허목, 윤휴 등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사용된 대한민국의 지폐 5백원권의 도완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성웅' 또는 '장군'의 존칭을 붙이거나, 시호인 '충무공', '이충무공' 등으로 높여서 부른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임진왜란 이전

[편집] 어린 시절

이순신은 1545년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邊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중종 17년)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2]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88년,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3][4][5]

[편집] 무과에 응시, 급제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6] 1587년(선조 20년) 당시 조산만호이던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鹿屯島)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도망쳤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사실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친 이일의 모함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7] 이일은 정작 자신이 도망치고 이순신이 남아서 싸워 이겼지만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는 이 사실을 정반대로 보고했다. 그렇게 해서 이순신은 도망친 죄로 백의종군한 반면 이일은 오랑캐를 무찌른 공로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청도의 순변사로 승진했다. 이후 이순신은 함경도 순변사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다.

[편집] 무관 생활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종6품에서 종3품까지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선조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8]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편집] 임진왜란

[편집] 전란 초기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쓰던 거북선 모형

1592년 음력 4월 13일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 등을 잡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편집] 옥포 해전

이 부분의 본문은 옥포 해전입니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1592년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선조이양원, 변언수, 이전 등을 한성 수성대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어가를 타고 평양을 지나 의주로 몽양을 떠나게 된다. 이순신은 남해안 다도해상에서 조정의 파천소식을 접한다.

[편집] 사천 해전

이 부분의 본문은 사천 해전입니다.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1592년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편집] 한산도 대첩

이 부분의 본문은 한산도 대첩입니다.

한산도대첩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음력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그는 유명한 시 한수를 짓는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끊나니

[편집] 부산 해전

음력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일본군의 진지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길을 바꾸어 공격하고, 남해안을 통해 보급품을 운송한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진입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편집] 원균과의 불화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원균은 이순신이 자신의 공을 뺏기 위해 각각 장계를 올렸다고 주장하나 당시 사료들을 교차 검증해보면 원균이 이순신에게 공을 과장해서 보고해달라 부탁하였다가 거절당한 후 앙심을 품고 모함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조선시대 장계의 원칙은 연명', 즉 공동으로 이름을 올려 작성하는 게 가능한 '상소'와는 달리 당사자들이 각각 단독으로 작성해서 올리는 게 원칙이었다. 더군다나, 장계를 단순히 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임지의 책임자들을 비롯해 각지에 해당 장계를 서로 돌려보게 했기 때문에 정말 공이 있다면 장계를 단독으로 올린다고 남의 공을 묻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사건 이후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수군 내에서도 이순신파와 원균파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는 이순신에 대해 조사하러 내려간 이덕형의 장계에서 확인된다.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9]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0]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의 내용에 대한 입장차가 심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11] 다만 그 당시 사료들의 거의 대부분이 원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후대에도 원균은 매우 무능한 인물로 묘사된다. 원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자료는 후손들이 찬양목적으로 쓴 신뢰성이 낮은 사료인 원균행장록 정도이다.

[편집] 원균과의 불화 과정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12]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12]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12]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위에 적힌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먼저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내용이다.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당초 원균을 모함하면서 말하기를 ‘원균은 조정을 속였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멋대로 군공(軍功)에올렸다.’라고 했는데, 원균은 말하기를 ‘나의 자식은 나이가 이미 18세로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서로 대질했는데, 원균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군색하였습니다.”

[13]

하지만 3년 전의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입니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시행하소서.” -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14]

위의 언급과 달리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백호전서를 쓴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5]

[편집] 웅포 해전

1593년 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정면전 대신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고 조선수군도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지리한 공방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아서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아서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편집] 삼도수군통제사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편집] 선조의 관점 변화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이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다.[16] 그러나 선조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16]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16]"라고 언급한 바 있다.[16]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병력이 고갈되자 그 대책으로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16]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다가 그와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16]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17]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17]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 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17]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17]

[편집] 선조의 불신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17]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17] 동인 중에서는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

반면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은 광해군이 무군사(撫軍司)에서 이순신을 불렀을 때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선조의 명령에 대한 불복을 의미한다.[17] 이순신을 불신한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후 성실하지 않았다.[18]"라고 평가했다. 이는 그대로 이순신의 귀에도 전해졌고 원균에 대한 원한과 반감을 더하게 된다. 하지만 광해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선조의 발언은 다른 사료를 살펴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1594년 1월 15일 이순신에게 광해군의 분부를 전달하는 서한이 왔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이튿날 17일 이순신은 광해군에게 장계를 띄워 보냈다. 2월 2일 광해군에게 올린 장계의 회답이 왔고, 4일 광해군의 명령이 내려왔다. 9일 이순신은 광해군이 문책한 데 대해 답을 보냈다. 위 기록을 살펴보면, 그해 1월부터 2월 사이에 광해군과 이순신은 최소한 세 번 이상 편지를 주고받았다.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라는 명령에 대해 이순신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광해군이 이순시을 여러차례 불렀는데 응하지도 않았다는 선조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19]

[편집] 정유재란

[편집] 백의종군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20]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선조 30) 1~2월 명나라와 일본간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이순신은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수 없었다. 옥중에서 조카 완 등으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서찰로 전달받았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편집]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정유재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칠천량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7년 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憶祺)는 전사하며, 원균은 상륙후 행방불명된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교서로 내린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를 통해 이순신에게 잘못된 정책을 한 것에 대한 후회가 담긴 사과와 함께 다시 수군을 맡아 왜군의 공격에서 나라를 건져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발송하였다. 기복은 어버이 상중에 벼슬자리에 나아간다는 의미고, 수직은 통제사직을 준다는 뜻으로 기복수직교서는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벼슬을 내린 교서를 말한다.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부터 업적이 크게 떨치어 변방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할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날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그대를 평복 입은 속에서 뛰어 올려 도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도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다가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요해지를 지켜줄지어다.

– 선조, 기복수직교서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음력 8월 29일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편집] 명량 대첩

이 부분의 본문은 명량 해전입니다.

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 등을 구사하여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으며, 92척을 파손하고 왜군을 크게 격퇴시켰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일본 조정으로부터 회군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군은 급히 철수하게 된다.

[편집] 노량 해전과 전사

이 부분의 본문은 노량 해전입니다.
노량해전 지도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 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21]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22]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 류성룡은 조정에서 실각하였다.

한편, 일부에서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주장되기도 했으나,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일뿐 근거는 없다.[23]

[편집] 사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고, 덕풍군(德豊君)에 추봉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 (宣武一等功臣)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함께 1,2위에 선정된다.[24][25]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전사한 관음포 앞바다로 인근에 이락사가 있다

[편집] 기타

[편집] 이원익, 윤휴와의 관계

이순신의 서녀 중 한명은 광해군 때의 문신 윤효전의 첩이 되고, 사이에서 윤영(尹鍈) 태어난다. 윤효전은 작호를 받았는데 윤효전의 봉군호는 대원군(帶原君)이다.[26] 이순신의 서외손 윤영은 다시 남인 재상 오리 이원익의 첩이 낳은 서녀와 결혼하여 사돈관계를 형성한다.

[편집] 자살설 및 은둔설

[편집] 자살설과 은둔설 의혹의 모티브들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보다 그를 지원했던 인물인 류성룡이 적과의 화해를 주장했다고 공격을 받아서 관직을 잃을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전투 중 지휘관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순신은 왜 갑판 맨 앞에서 손수 일본군을 쏘다가 적탄에 맞았을까? 과연 이순신은 4각 철판이 부착된 방탄용 환삼을 입고 있었는가?[27]

이순신이 죽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순신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자신의 부장 이순신(李純信)으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추정된다.

이외에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비밀리에 은둔 후 자연사하였다는 주장[28]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왜란이 끝난 이후 국가에서 재물을 내려 국장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었는데, 별다른 이유도 없이 16년이 지나고 공의 묘를 이장한데서, 이때에 이르러 진짜로 사망한 충무공을 이장의 형식을 빌어 장사를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설과 은둔설에 모티브를 제공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당시 사회를 떠돌던 다른 성이 왕위에 오른다는 풍문이 있었고 선조도 이런 풍문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는 것이다.

전란이 끝나고 풍문으로 나마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어 역적으로 몰릴 경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 그리고 크게는 덕수이씨 가문 전체와 그를 천거하여 공적을 쌓을 수 있게 해주었던 류성룡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들과 자신과 같이 근무했던 재장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피화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활동한 김덕령의 의문이 가득한 역모사건으로 인한 사망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고 백성들에게 신망이 있던 인물들이 이러한 풍문에 연루되면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29]

임진왜란 중 일본과 휴전을 한 시기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벼슬에 물러나 있던 김덕령(金德齡)은 이 난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도로 향하다 난이 진압되어 회군하였는데,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를 위해서 벼슬에 물러나서도 난의 토벌을 위해 의병을 모집한 충정이 오히려 공격당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자신을 묶고 있던 포승줄을 힘으로 끊고 형옥의 담을 넘어갔다 되돌아오는 것으로 힘으로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지만 반역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않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옥사하였고 그의 부장이었던 최담령 또한 처형 당하였다.

같이 풍문에 연루되었던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홍계남(洪季男)은 다행히 풀려났지만, 이때의 풍문이 연결된 많은 의병장들이 옥사하였고,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장들이 이러한 풍문에 또 다시 연루될 것을 저어하여 의병들을 해산하고 운든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재우는 정유재란이 재발하자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정유재란이 끝나고는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다시 은둔하였다.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전사한 관음포 앞바다로 인근에 이락사가 있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이순신 자살설”과 "은신설" 그의 죽음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안방준의 《노량기사(露梁記事)》에 따르면

송희립(宋希立)이 적탄을 이마에 맞아서 갑판 위에 쓰러져 기절(氣絶)하게 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다가 그도 또한 적탄(敵彈)에 쓰러지게 되었는데, 기절하였다가 정신을 차린 송희립은 옷을 째어 이마 상처를 동여매고 앉으려 하니, 이순신의 아들인 회(?)가 곡(哭)을 하는지라, 송희립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이순신의 갑옷을 풀어 그 시체(屍體) 위에 얹어 놓게 하고,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치(旗幟)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독전(督戰)하니, 적군(敵軍)은 대패(大敗)하고 익사(溺死)하는 자 무수(無數)하고, 드디어 둔주(遁走)하거늘, 이에 비로소 이순신의 곡(哭)을 발(潑)하였다. 뒤에 공(功)으로써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任命)되었다.

– 《노량기사(露梁記事)》

송희립이 이순신의 전사를 목격한 뒤, 독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행록》이외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은 분명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그 후에 지휘권을 손문욱, 또는 송희립이 넘겨받았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 된다. 이처럼 《행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료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인정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논리적 모순이 지적되는 《행록》에 의존하여 은둔설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인품과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전쟁 중에 도피하여 전사를 가장한다는 것은, 폄훼적인 해석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살설에 대해서도 유효한 비판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류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순신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적탄을 빌어 죽음을 택한 것이든,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전사(戰死)를 위장하여 은둔 생활을 한 것이든, 확실한 단정은 할 수가 없다. 동시에 두 가설을 뒷받침 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존의 전사설을 전복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전무패의 경이적인 전공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과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순신의 극적인 일생에 주관적 정서가 개입한 ‘동정론’적 가설. 그리고 무능한 조정과 왕실에 대한 상대적 비판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깔린 ‘음모이론’ 모두가 공증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연구와 이론적 근거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0]

[편집] 원균 모함 논란

재야사학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하였다고 주장하나 관련 실록사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실록 곳곳에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하였다고 주장하는 원사웅의 전공과 옥포해전의 장계 또한 당시 시대상황과 관련사료들을 보면 모순점들을 쉽게 알 수 있다.

1.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는 옥포해전의 장계를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리고 단독으로 올린 것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때 원균은 이순신이 자신의 공을 가로채기 위하여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고 주장하였고 이후 이 사실은 원균의 친족[31]인 윤두수가 이순신을 탄핵하기 위한 주요 근거로 사용된다. 이때 윤두수는 위 사실을 원균에게 직접 들었다고 말하며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장계는 '연명', 즉 공동으로 이름을 올려 작성하는 게 가능한 '상소'와는 달리 당사자들이 각각 단독으로 작성해서 올리는 게 원칙이었다. 더구나 장계를 단순히 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임지의 책임자들을 비롯해 각지에 해당 장계를 서로 돌려보게 했기 때문에 정말 공이 있다면 장계를 단독으로 올린다고 남의 공을 묻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이순신의 죄에서 빠지지 않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역시 선조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일 뿐이다. 이 사건은 결국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은 채로 종결되었고, 안위도 정여립의 조카라는 약점이 있었는데도 처벌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조는 이순신이 안위의 공을 빼앗았다면서 안위가 한 게 맞다는 뉘앙스를 보였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고 안위가 부하들과 계획해서 벌인 것이므로 안위에게 상을 주라는 장계를 올렸는데 이순신이 안위의 공을 빼앗았다면서 비난한 것은 그것이 정말 이순신의 죄가 아니라 선조가 이순신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냈다는 것을 뜻한다.

3.이순신이 보고한 원균의 아들에 대한 군공도 이덕형이 잘못했다고 조사한 내용과는 달리 이순신은 첩의 아들이 그러한 잘못을 했다고 지적한 반면 원사웅은 정실의 아들인 적자였고 또한 이 조사내용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부정된다.

참고 《인간 이순신 평전》박천홍 저 (북하우스,2005)

[편집] 충무공 유적지 및 위토 매각 사태

1930년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됐다. 이 소식을 접한 윤치호(尹致昊)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윤치호가 이 사정을 듣고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

충무공 종손가의 살림이 점점 영세해지면서 돈을 빌려 쓰다가 1300원의 빚을 지게 됐고 그 이자까지 총 2100원에 이르게 됐다. 1930년 9월 채권자였던 동일은행은 여러 번 빚 갚을 것을 독촉하고 그 해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위토 60두락(斗落)을 경매에 처분하겠다고 나선 것[32]이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의해 국민에 알려지면서 1931년 5월 26일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32] 윤치호는 충무공유적보존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2만 여명이 모금운동에 참여해 1만6021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윤치호 위원장을 포함해 남궁 억, 한용운, 정인보 등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성금으로 종손가의 채무 청산과 함께 현충사를 중건하고 위토를 추가 매입했다.[32] 이순신 유적지와 현충사의 위토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편집] 평가

[편집] 국내 이순신의 평가

국내에서의 이순신 평가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한 성웅으로 기록된다.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 …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 선조,《卒逝後賜祭文》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

 
— 《人皆謂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사관(史官)》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 《서애 류성룡

무후(제갈량)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순신)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제갈량)가 죽은 뒤엔 한(漢) 나라(촉한)의 종실(宗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 《연천 홍석주

충무공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은 전쟁이 끝난지 수백년이 지난 순조 때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 순조 11권, 8년(1808 무진 / 청 가경(嘉慶) 13년) 1월 10일(정미) 2번째기사

그는 사후 영웅의 대명사, 애국심의 화신으로 추도되었으며, 사후 정조 때에 영의정으로 추존될만큼 널리 각인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그가 활약하던 해전지 주변의 일부 무당들은 그를 무속의 신으로서도 숭배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가 자신을 띄울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이순신을 추켜세웠다는 반론도 있고, 원균의 공적을 묻히게 했다는 비판도 있다.

[편집] 국외 이순신의 평가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青柳南冥),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 著 《이순신각서(李舜臣覚書)》

[33][34][35][36][37]

[편집] 책임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16]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편집] 주요 저서

이순신은 일기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들을 남겼다.

[편집] 친족관계

  • 이효조(李孝組) (고조부)

[편집] 충무공 가계

  • 방진(方震) (장인)
    • 이순신(李舜臣) (본인)
    • 상주 방씨(尙州 方氏) (본처)
      • 이회(李薈) (장남) 
      • 이울 또는 이예(李䓲) (차남)
      • 이면(李葂) (삼남)
      • 덕수 이씨 (딸)
      • 홍비(洪棐) (사위)
    • 해주 오씨(海州 吳氏) (첩)
      • 이훈(李薰) (서자)
      • 이신(李藎) (서자)[38]
      • 덕수 이씨 (서녀)
      • 임진(任振) (사위)
      • 덕수 이씨 (서녀)
      • 윤효전(尹孝全) (사위), 그는 윤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부안 여인 (첩)[39] [40]
    • 여진(女眞)
    • 최귀지(崔貴之)

[편집] 이순신과 관련된 것

[편집] 이순신의 이름을 따거나 기념하는 것

100원 동전에 그려진 이순신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편집] 대한민국 해군

KD-2 구축함의 1번함은 충무공이순신함이다. 대한민국 대양해군의 주축인 구축함으로서 현재 6척이 건조되었다. 장보고급 잠수함의 9번함은 이순신함이다. 충무공이순신의 부하인 동명이인의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땄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 해당하는 것은 해군 3함대로서 목포시에 함대 사령부가 있다. 사령관은 소장이며, 함대 기함은 양만춘함이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 해군 참조.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대한민국에 방문하기도 하였다.[43][44][45][46]

[편집] 이순신과 관련된 대중문화

이 밖에도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숭고한 정신은 후세에도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오늘날에도 역사소설, 역사설명문, 인물연구사, 인문서, 위인전, 영화, 드라마, 역사 다큐멘터리, 뮤지컬, 컴퓨터 게임, 자기계발서, 교양서적, 기행문 등 끊임없이 문화예술작품들의 소재가 되고 있다.

[편집]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편집] 텔레비전 드라마

[편집] 영화

[편집] 연극, 뮤지컬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관련 서적

[편집] 주석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2. 시장의 물가조절을 전담하던 조선의 행정기관
  3. 장군님의 어린시절와 조부님 기묘사화에 여부 관련에 대한 답변
  4. 이백록
  5. 유석재 기자. “"이순신 장군 어릴 적 가난은 과장됐다"”, 《조선일보》, 2008년 4월 27일 작성.
  6. 김병륜.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84>이순신 무과급제 교지”, 《국방일보》, 2005년 9월 7일 작성.
  7. 충무공 이순신
  8. 조선왕조실록 선조 25권 선조 24년 2월 18일 첫번째 기사 《간원이 초수된 이순신을 개차하고, 나주 목사 이경록의 체차를 청하다.》
  9. 조선왕조실록 선조 107권 1598년 12월 7일 5번째 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10. 《백호전서》(白湖全書), 윤휴(尹鑴).
  11. 이후 1960년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현창사업에 의해 원균의 잘못이 집중 부각되었으나 이점을 놓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
  12. 이종호, 《과학으로 파헤친 세기의 거짓말》 (새로운사람들, 2003) 204페이지
  13. 1596년 2월 4일 선조실록
  14. 조선왕조실록 선조 107권 1598년 12월 7일 5번째 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15. 《백호전서》(白湖全書), 윤휴(尹鑴).
  16.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38페이지
  17.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39페이지
  18.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40페이지
  19. 박천홍, 《인간 이순신 평전》(북하우스,2005)
  20. 조선왕조실록 선조 82권 1596년 11월 7일 3번째 기사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과 함께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21. 이순신 생존설에 의하면 이때 이순신은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이 죽었다고 증언해달라는 부탁을 한 뒤 죽음으로 위장하여 배 안에서 대기했다가 탈출했다고 한다. 이순신으로부터 금은보화를 받은 진린은 이순신이 죽었다고 적극적으로 진술하게 된다고 한다.
  22. 이분(李芬), 충무공 행장(行狀).
  23. 성웅 이순신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의문
  24. 조철현 기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 amp;oid=021&aid=0000104988 "부모-세종대왕-이순신 順 존경"]”, 《문화일보》, 2005년 4월 28일 작성. 2010년 2월 2일 확인.
  25. 송남석 기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9& amp;oid=120&aid=0000022862 직장인이 꼽은 존경하는 인물 1위는 이순신]”, 《EBN》, 2007년 4월 25일 작성. 2010년 2월 2일 확인.
  26. 국왕의 아버지에게 부여되는 대원군과는 관련없는 다른 뜻으로, 대원은 지명이다.
  27. 《역사신문편찬위원회》, 《신문으로 엮은 한국 역사3 역사신문》, 1996, 사계절출판사, 100쪽.
  28.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남천우, 2004, 미다스북스.
  29. * 질투의 화신 선조는 못 말려
  30. 성웅 이순신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의문
  31. 조선왕조실록 선조 82권 1596년 11월 7일 3번째 기사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과 함께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32. 현충사관리소, 충무공 위토서 모내기 행사 대전일보 2009년 05월 31일자
  33. 충무공 이순신 도고 헤이하치로
  34. 충무공 이순신
  35. 충무공 이순신
  36. (방송) 日해군, 매년 충무공 진혼제 이유는…”, 《한국일보》, 2003년 6월 12일 작성.
  37. 역사스페셜 (2003년 6월 14일). KBS1 역사스페셜 특집 이순신 2부작. KBS 역사스페셜.
  38. 주간한국 : [이순신 부활하다] 이순신의 후손들
  39. 축출하였다.
  40. 한산도에서 난중일기를 읽다 프레시안 2008년 06월 26일자 기사
  41. 석천사
  42. 디지털여수문화대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43. 박영수기자. “18개국 해군장성 “거북선 놀랍네요””, 《문화일보》, 2008년 10월 10일 작성.
  44.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만나러 왔습니다””, 《국방부》, 2007년 8월 3일 작성.
  45. 김영훈 기자.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눈앞에서”, 《오마이뉴스》, 2005년 7월 28일 작성.
  46. 송한진 기자. “"23전23승 해전 영웅 충무공 만나러 왔어요"”, 《뉴시스》, 2007년 8월 3일 작성.
  47. 조선왕조실록 《충무공이순신전서를 발간하다.》, 1795-09-14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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