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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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아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이순신(李純信)도 있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의 초상
별명 충무공
태어난 곳 한성부 건천동 (인현동)
죽은 곳 노량해협
복무 조선
최종 계급 품계:정2품 정헌대부
관직:삼도수군통제사(종2품급)
지휘 조산보만호
전라좌도수군
삼도수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한산도대첩
명랑대첩
기타 이력 선무1등공신
덕풍 부원군
좌의정
영의정
이순신 동상

이순신(李舜臣, 1545년(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은 임진왜란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장수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격과 지도력을 갖추어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본관은 덕수, 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邊氏)의 아들로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1]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어린 시절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이순신은 1545년 한양 건천동(인현동)에서 이정(李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 관직을 지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변을 당한 일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이정은 백면서생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에는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러나 이백록의 기묘사화 연루 여부에는 논란이 있다.

[편집] 임진왜란 이전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하였다고 하며 22살의 늦은 나이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버드나무 가지로 부러진 다리를 고정하고 시험을 계속 응시하였으나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2][3]

1587년(선조 20년) 당시 조산 만호이던 이순신은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병력의 증가를 요구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해 가을 적은 병력으로 호인(胡人)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홀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록눈도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으나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친 이일의 모함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4]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고 벌을 회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군관들은 하나같이 이일을 싫어했다.

그 후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珖)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당시 비변사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유성룡이 천거하여 정읍 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종6품에서 종3품까지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선정이 칭찬을 받게 되어 정읍현감에서 1591년 2월진도군수(珍島郡守)승진하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의 추천으로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때도 부제학 김성일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편집] 임진왜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쓰던 거북선 모형

1592년 음력 4월 13일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편집] 옥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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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편집] 사천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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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편집] 한산도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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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음력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편집] 부산 대첩

음력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편집] 원균과의 불화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5] 원균에게 이런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권율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화포를 지원해준 이순신과의 친분으로 인하여 원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게 되었고, 결국 이순신이 삭탈관직된 이후 그 후임으로 원균이 들어오자 원균에게 매질로 일관하였다.[출처 - KBS역사다큐멘터리 역사에의 초대 - 임진왜란(진행 - 영화감독 신승수)]

[편집] 웅포 해전

1593년 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으로 겁먹은 일본 수군은 과감한 전투 대신 후퇴와 숨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편집] 삼도수군통제사

음력 6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편집] 백의종군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졌다.[출처 필요]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전략적인 이유에서 수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의 도움으로 결백이 증명되자,[출처 필요] 음력 4월 1일에 사면되었고[출처 필요]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편집]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칠천량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7년 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고, 원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憶祺)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음력 8월 29일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편집] 명량 대첩

이 부분의 본문은 명량 해전입니다.

음력 9월 14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 등을 구사하여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또한 92척을 파손 및 대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편집] 노량 해전과 죽음

이 부분의 본문은 노량 해전입니다.
노량해전 지도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6] 그는 54살의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당일, 유성룡은 조정에서 실각되었다...

[편집] 평가

[편집] 국내 이순신의 평가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 《서애 유성룡》,

[편집] 세계 속 이순신의 평가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명나라 장수, 《진린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이조사 대전)저자, 아오야 나기(靑柳南冥)》,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 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히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 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메이지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돼야 한다.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기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川田功)>》,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넬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7][8]

또한,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대한민국에 방문하기도 하였다.[9][10][11][12]

[편집] 거짓으로 밝혀진 평

若無湖南(약무호남), 是無國家(시무국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호남인들이 적극적으로 왜적에 대항한 결과로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는 말)

1593년 7월 16일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1564년(명종 19)∼1627년(인조 5)}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따르면

竊想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是以昨日進陣于閑山島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호남의 땅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내용의 뜻은 호남지역이 곡창지대이고 유린당하지 않은 곳이며 이곳만 통과하면 곧바로 서울과 평양까지 갈 수 있는 침략 해상루트라 미리 앞에서(한산도) 막을 거란 뜻으로 '호남인들이 적극적으로 왜적에 대항한 결과로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는 말'하고는 해석상에 차이가 있다.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경상도장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유지된다.

慶尙將卒 招集乃饋軍穀則默然食之 而戰鼓鳴卽 皆夜半逃散也
경상도 장졸은 불러 모아 놓으면 평소에는 말없이 군량을 받아 먹다가도 일단 출진의 북이 울리면 죄다 야반에 도망하여 흩어지고 마는도다.

慶尙徒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劫姦 又甚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의 무리는 앞머리를 깎고 왜옷을 걸치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전라지역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오히려 왜적보다 심한 바가 있다.

위의 세 인용문은 난중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와키사카 야스하루

[13][14][15]

위의 글은 한때 진위논쟁으로 논란이 있었으나, 거짓으로 판명되었다.[16]

[편집] 이순신 자살설

이 문단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어 논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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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이순신 자살설”이 그의 죽음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보다 그를 지원했던 인물인 유성룡이 적과의 화해를 주장했다고 공격을 받아서 관직을 잃을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전투 중 지휘관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순신은 왜 갑판 맨 앞에서 손수 일본군을 쏘다가 적탄에 맞았을까? 과연 이순신은 4각 철판이 부착된 방탄용 환삼을 입고 있었는가?[17]

이순신이 죽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순신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자신의 부장 이순신(李純信)으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외에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비밀리에 은둔 후 자연사하였다는 주장[18]도 있다.

[편집] 사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편집] 주요 저서

이순신은 일기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들을 남겼다.

[편집] 친족관계

  • 이효조(李孝組) (고조부)
    • 이거(李琚) (증조부)
      • 이백록(李百祿) (조부)
        • 이정(李貞) (부친)
        • 초계 변씨(草溪 卞氏) (어머니)
  • 상주 방씨(尙州 方氏) (본처)
    • 이회(李薈) (장남) 
    • 이울 또는 이예(李䓲) (차남)
    • 이면(李葂) (삼남)
    • 홍비(洪棐) (사위)
  • 해주 오씨(海州 吳氏) (첩)
    • 이훈(李薰) (서자)
    • 이신(李藎) (서자)
    • 임진(任振) (사위)
    • 윤효전(尹孝全) (사위)

[편집] 이순신과 관련된 것

[편집] 이순신의 이름을 따거나 기념하는 것

  • 대한민국의 100원 주화에는 이순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폐지된 500원 지폐에도 이순신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은 그 급의 제1번함이다.
  •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세종로에는 이순신 동상이 있다.
  • 대한민국 서울 중구 인현동(건천동) 명보극장 자리는 이순신이 태어난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 대한민국 서울에는 충무로라는 번화가 있으며, 그 곳을 지나는 지하철역은 충무로역이다.
  •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에는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인 현충사가 있다.
  •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는 한때 충무시와 통영군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시에는 이순신을 기리는 충렬사가 있다.
  • 4월 28일은 충무공탄신일으로, 대한민국에서 이순신의 탄생일을 기리고자 제정한 날이다.

[편집] 대한민국 해군

KDX-2 구축함의 1번함은 충무공이순신함이다. 대한민국 대양해군의 주축인 구축함으로서 9척이 건조되었다. KDX-2 구축함은 3척, KDX-3 이지스 구축함도 3척밖에 건조하지 않았다.

장보고급 잠수함의 9번함은 이순신함이다. 충무공이순신의 부하인 동명이인의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땄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 해당하는 것은 해군 3함대로서 목포시에 함대 사령부가 있다. 사령관은 소장이며, 함대 기함은 양만춘함이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 해군 참조.

[편집] 이순신과 관련된 대중문화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관련 서적

[편집] 주석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2. 김병륜.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84>이순신 무과급제 교지”, 《국방일보》, 2005년 9월 7일 작성.
  3. 충무공 이순신의 무과 과거 급제 이야기”, 《블로그》.
  4. 충무공 이순신
  5. 《백호전서》(白湖全書), 윤휴(尹鑴).
  6. 이분(李芬), 충무공 행장(行狀).
  7. 충무공 이순신
  8. 충무공 이순신
  9. 박영수기자. “18개국 해군장성 “거북선 놀랍네요””, 《문화일보》, 2008년 10월 10일 작성.
  10.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만나러 왔습니다””, 《국방부》, 2007년 8월 3일 작성.
  11. 김영훈 기자.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눈앞에서”, 《오마이뉴스》, 2005년 7월 28일 작성.
  12. 송한진 기자. “"23전23승 해전 영웅 충무공 만나러 왔어요"”, 《뉴시스》, 2007년 8월 3일 작성.
  13. 네이버.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을 존경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네이버》, 2005년 8월 6일 작성.
  14. 다음. “명나라장수.일본장수들이 본 이순신”, 《다음》, 2009년 6월 4일 작성.
  15. 이승철. “첨망대에서 충무공을 기리다”, 《오마이뉴스》, 2005년 10월 27일 작성.
  16. 충무공 이순신
  17. 《역사신문편찬위원회》, 《신문으로 엮은 한국 역사3 역사신문》, 1996, 사계절출판사, 100쪽.
  18.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남천우, 2004, 미다스북스.

[편집] 참고 문헌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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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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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삼도수군통제사
1593년 8월 30일 - 1597년 1월 27일
후 임
 원균 
전 임
원균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8월 3일 - 1598년 11월 19일
후 임
 이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