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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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李舜臣
1545년 4월 28일(1545-04-28) ~ 1598년 12월 16일 (53세)
여해 이순신.JPG
황의돈의 <증정 중등조선역사> (1946·서울교육박물관 소장) 69쪽에 있는 이순신의 초상화.
시대 조선 중기(16세기)
자(字) 여해(汝諧)
시호 충무공(忠武公),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 증(贈) 좌의정, 가증(加贈) 영의정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관직 정2품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급)
주군 선조
가문 덕수 이씨
부모 아버지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배우자 상주 방씨 (온양 방씨, 方氏)
친척 형 이희신, 이요신 동생 이우신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

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 원년) 4월 28일[1] (음력 3월 8일) ~ 1598년 (선조 31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포만호,만포첨사,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관직은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의정부우의정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의정부좌의정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2]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있다.

생애[편집]

임진왜란 이전[편집]

어린 시절[편집]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이순신은 1545년 4월 18일(음력 3월 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지금의 인현동1가 40번지)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이름 순신은 삼황오제중 순임금에서 나온 것인데, 이순신의 형제들 모두 복희씨, 요, 순, 우 임금을 따라 시대순으로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지어졌다.[3]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중종 17년)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4]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 동네에서 살았던 류성룡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징비록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 이로 인해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청도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온양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이순신 장군이 결혼 후 살았던 아산의 집은 장인이었던 보성군수 방진(方震)이 물려준 집이다.[5]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8명씩을 증여 받았으며, 충청도 은진(恩津)(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온양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6][7][8]

무과에 응시, 급제[편집]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32세 나이가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이순신의 나이 36세가 되던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이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9]

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편집]

1587년(선조 20년)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여 그해 가을 풍년이 들었다. 이순신이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고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楸島)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책루(柵壘)를 지키고 있던 수장(戍將) 오향(吳享)과 임경번(林景藩) 등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도 약탈당했다. 당시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北兵使)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무관 생활[편집]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선조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10]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편집]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쓰던 거북선 모형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일본군 약 16만 명의 선봉인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5월 26일(음력 4월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6월 8일(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9일(음력 4월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옥포 해전[편집]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땅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유린되고 있었다.

사천 해전[편집]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7월 8일(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 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7월 12일(음력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13일(음력 6월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16일(음력 6월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편집]

한산도대첩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8월 14일(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8월 10일(음력 7월 4일) 출발, 12일(음력 7월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 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의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 다음 배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리고 때로 적함에 승선해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8월 15일(음력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6일(음력 7월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부산 해전[편집]

음력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원균과의 불화[편집]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1]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의 내용에 대한 입장차가 심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 에서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아주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평가한다.

웅포 해전[편집]

1593년 2월 10일(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고 조선수군도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지리한 공방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아서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아서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전라도 수군은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충무공 장계)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한다.

삼도수군통제사[편집]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두 번째 백의종군[편집]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2]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4월 11일(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4월 19일(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5월 26일(음력 4월 11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소식은 4월 13일에서야 종 순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슬픔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편집]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 해전에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憶祺)는 전사하며, 원균은 상륙후 행방불명된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0월 9일(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편집]

명량 대첩[편집]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이었던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한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그들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전세를 조선군에 유리하게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노량 해전과 전사[편집]

노량해전 지도

1598년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5천명이었다.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던 왜군 500여 척을 상대로 싸워 하룻밤 새 그 절반가량인 200여 척을 격파했다.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정오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계속 추격하였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다가 탄환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전사하였다. 이 때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과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13]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군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14]

사후 관직[편집]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함께 1,2위에 선정된다.[15][16]

친족관계[편집]

  • 고조부 : 이효조(李孝組)

충무공 가계[편집]

이순신은 한성을 떠나 외가와 처가(온양 방씨)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주했다. 조선 중기까지도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으로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은 부인과 처가의 위상을 높였다.

이순신의 처가는 상주 방씨(온양 방씨)이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중매를 섰다.[17]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 방씨에게 청혼하고 결혼하였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方震)이다. 방진의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方震)의 격려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방진으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11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기로 유명하였고, 친정 집에 들어온 도둑들을 지혜를 이용해 물리치기도 했다.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만큼 내조도 잘했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1567년 출생), 이울(1571년 출생), 이면(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아들들을 통해 충청도 아산 본가에 있던 방씨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다녀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방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잠을 설치며 걱정했을 뿐더러 점까지 칠 정도였다.[18]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그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李舜臣妻方氏告身敎旨)(1591, 선조 24)가 전해진다.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이다.

  • 장인 : 방진(方震)
    • 본인 : 이순신(李舜臣)
    • 부인 : 상주 방씨(尙州 方氏) (온양 방씨로 합본)
      • 장남 : 이회(李薈) 
      • 차남 : 이울 또는 이예(李䓲)
      • 삼남 : 이면(李葂)
      • 장녀 : 덕수 이씨
      • 사위 : 홍비(洪棐)
    • 사돈 : 홍가신(洪可臣)
    • 처종형(妻從兄) : 황세득(黃世得)
    • 후첩 : 해주 오씨(海州 吳氏)
      • 서자 : 이훈(李薰)
      • 서자 : 이신(李藎)[19]
      • 서녀 : 덕수 이씨
      • 사위 : 임진(任振)
      • 서녀 : 덕수 이씨
      • 사위 : 윤효전(尹孝全)

평가[편집]

국내 이순신의 평가[편집]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 …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 선조,《卒逝後賜祭文》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

 
— 《人皆謂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사관(史官)》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 《서애 유성룡

무후(제갈량)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순신)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제갈량)가 죽은 뒤엔 한(漢) 나라(촉한)의 종실(宗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다.

 
—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 《연천 홍석주

국외 이순신의 평가[편집]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青柳南冥),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 著 《이순신각서(李舜臣覚書)》

[20][21][22][23][24]

이순신을 이용한 정치적 의도[편집]

若無湖南 (약무호남), 是無國家 (시무국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한 말로,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다”는 뜻이다.)

[25][26][27][28]

1593년 7월 16일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1564년(명종 19)∼1627년(인조 5)}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따르면

삼가 생각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가 없는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이런 까닭에 어제 한산도에 나아가 진을 쳐 바닷길을 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난리 중에도 옛 정의를 잊지 않고 멀리서 위문편지를 보내시고 아울러 각종 물품도 받게 되니, 진중(陣中)의 귀물이 아닌 게 없어 깊이 감격하여 마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에야 더러운 적을 소탕하여 없애고 예전의 종유(從遊)하던 회포를 실컷 풀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대하니 슬픈 마음만이 간절할 뿐입니다.

이 내용에 원래의 뜻인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는 호남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는 초토화 상태였으며 호남지역이 곡창지대이고 유린당하지 않은 곳으로 호남을 보루로 막을 거란 뜻으로 ‘호남 예찬론’도 아니요, 호남에 대한 밀어도 아닌 호남을 사수하지 않으면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에서 나온 말이었다. 또한 명량해전1597년에 일어난 해전이다.[29][30][31]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경상도장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유지된다.

慶尙將卒 招集乃饋軍穀則默然食之 而戰鼓鳴卽 皆夜半逃散也

경상도 장졸은 불러 모아 놓으면 평소에는 말없이 군량을 받아 먹다가도 일단 출진의 북이 울리면 죄다 야반에 도망하여 흩어지고 마는도다.

慶尙徒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劫姦 又甚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의 무리는 앞머리를 깎고 왜옷을 걸치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 전라지역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오히려 왜적보다 심한 바가 있다.

위의 세 인용문은 난중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32][33]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中)

[34][35]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방영 당시에 불멸의 이순신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의견에 중국 5명, 일본 7명의 학자가 8년간 (1990년 ~1998년) 연구해 총 32권으로 된 책이라는 등 진위논쟁이 있었으나,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36]

성격[편집]

매사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군율에 철저하여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칼같이 이행했다. 한산도 대첩에 출전하기 하루 전에 부하 병사 중 도주하다 붙잡힌 황옥현의 목을 베고 장비 및 훈련상태 등을 수시로 검사해서 불량할 경우 곤장 20대를 때리는 등의 처우로 군율의 무서움을 부하들에게 각인시킨 일면이 있었으나 주어진 임무가 제때 완료되거나 장비 및 훈련상태가 우수하면 큰 상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명량 대첩에 출진하면서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부하들을 독려한 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음을 각오하면 살아남을 것이요, 살려고 발버둥치면 죽을 것이다.)'는 후세에 길이 남는 명언이 되었다.

주요 저서[편집]

이순신은 일기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들을 남겼다.

이순신과 관련된 것[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대한민국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문화재와 사적이 8개가 있다.

이순신의 이름을 따거나 기념하는 것[편집]

100원 동전에 그려진 이순신

대한민국 해군[편집]

KD-2 구축함의 1번함은 충무공이순신함이다. 대한민국 대양해군의 주축인 구축함으로서 현재 6척이 건조되었다. 장보고급 잠수함의 9번함은 이순신함이다. 충무공이순신의 부하인 동명이인의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땄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 해당하는 것은 해군 3함대로서 목포시에 함대 사령부가 있다. 사령관은 소장이며, 함대 기함은 양만춘함이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 해군 참조.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대한민국에 방문하기도 하였다.[39][40][41][42]

이순신과 관련된 대중문화[편집]

역대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 드라마

◈ 영화

기타[편집]

같이 보기[편집]

관련 서적[편집]

  • 난중일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기술한 전쟁 일기.
  • 충무공이순신전서》: 유고 전집으로 정조의 어명으로 교서관(校書館) 관리 유득공(柳得恭)의 주도 아래 찬수를 시작하여 정조 19년(1795년)에 간행되었다.[43] 14권 8책의 활자본.
  • 《이순신전》(李舜臣傳): 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신문에서 1923년 2월에 박은식(朴殷植)이 편저하여 발행하였다.
  • 《구국의 명장 이순신》: 최석남이 쓴 이순신의 전기, 이순신의 자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1992년, ISBN(13) : 9788909002318

주석[편집]

  1. 충무공 탄신일
  2.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3. <심상훈의 부자팔자>‘붓 대신 칼’ 잡은 이순신, 작은 선택이 큰 역사 이뤘다, 《이코노믹리뷰》, 2014년 7월 1일
  4. 시장의 물가조절을 전담하던 조선의 행정기관
  5. 충무공 자택서 명사 강연 펼친다, 《뉴스천지》, 2012년 5월 21일
  6. 장군님의 어린시절와 조부님 기묘사화에 여부 관련에 대한 답변
  7. 이백록
  8. 유석재 기자. ""이순신 장군 어릴 적 가난은 과장됐다"", 《조선일보》, 2008년 4월 27일 작성.
  9. 김병륜.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84>이순신 무과급제 교지", 《국방일보》, 2005년 9월 7일 작성.
  10. 조선왕조실록 선조 25권 선조 24년 2월 18일 첫 번째 기사 《간원이 초수된 이순신을 개차하고, 나주 목사 이경록의 체차를 청하다.》
  11. 《백호전서》(白湖全書), 윤휴(尹鑴).
  12. 조선왕조실록 선조 82권 1596년 11월 7일 3번째 기사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과 함께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13.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무등일보》, 2014년 4월 29일
  14. 성웅 이순신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의문
  15. 조철현 기자. ""부모-세종대왕-이순신 順 존경"", 《문화일보》, 2005년 4월 28일 작성. 2010년 2월 2일 확인.
  16. 송남석 기자. "직장인이 꼽은 존경하는 인물 1위는 이순신", 《EBN》, 2007년 4월 25일 작성. 2010년 2월 2일 확인.
  17. 김덕수 교수, <나는 맨주먹의 CEO 이순신이다>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무과 도전 집중 - 방씨 부인과의 결혼으로 이순신 부자반열에 오르다②, 《금강일보》, 2014년 6월 10일
  18. 이순신 ⑧ 사랑론 결혼, 삶의 진로를 틀다, 쿠키뉴스, 박종평(역사비평가), 2012년 8월 24일
  19. 주간한국 : [이순신 부활하다] 이순신의 후손들
  20. 충무공 이순신 도고 헤이하치로
  21. 충무공 이순신
  22. 충무공 이순신
  23. "(방송) 日해군, 매년 충무공 진혼제 이유는…", 《한국일보》, 2003년 6월 12일 작성.
  24. 역사스페셜 (2003년 6월 14일). KBS1 역사스페셜 특집 이순신 2부작. KBS 역사스페셜.
  25. ""湖南(호남)없인 國家(국가)없다"", 《경향신문》, 1990년 2월 28일 작성.
  26. 김지영 기자. "여야간에 血戰(혈전)해선 안돼", 《경향신문》, 1986년 9월 6일 작성.
  27. "횡설수설", 《동아일보》, 1988년 5월 31일 작성.
  28. 성한용 정치부 기자. "약무호남 시무노통", 《한겨레》, 2005년 6월 26일 작성.
  29. 조운찬 문화1부장. "(옛글의 숨결) 호남", 《경향신문》, 2006년 11월 28일 작성.
  30. 이한우 차장대우. "('무호남 무국가'의 진실) "호남땅마저 함락되면 조선은 망한다"", 《주간조선》, 2006년 11월 18일 작성.
  31. 선조 92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9월 20일(정미) 5번째기사. "흠차 부도어사가 우리측에 보낸 자문",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20일 작성.
  32. 충무공 이순신
  33. "난중일기", 《성웅 이순신》.
  34. 박경호 (시발점).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의견》, 2005년 7월 6일 작성.
  35. 이승철. "첨망대에서 충무공을 기리다", 《오마이뉴스》, 2005년 10월 27일 작성.
  36. 해군사관학교
  37. 석천사
  38. 디지털여수문화대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39. 박영수기자. "18개국 해군장성 “거북선 놀랍네요”", 《문화일보》, 2008년 10월 10일 작성.
  40.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만나러 왔습니다”", 《국방부》, 2007년 8월 3일 작성.
  41. 김영훈 기자.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눈앞에서", 《오마이뉴스》, 2005년 7월 28일 작성.
  42. 송한진 기자. ""23전23승 해전 영웅 충무공 만나러 왔어요"", 《뉴시스》, 2007년 8월 3일 작성.
  43. 조선왕조실록 《충무공이순신전서를 발간하다.》, 1795-09-14

바깥 고리[편집]

전 임
-
제1대 삼도수군통제사
1593년 8월 30일 - 1597년 1월 27일
후 임
원균
전 임
원균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8월 3일 - 1598년 11월 19일
후 임
이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