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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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국
琉球國

 

 

1429년 ~ 1879년
국기 류큐국의 국장
국기 국장
류큐국의 위치
수도 슈리 성
북위 26° 13′ 1.31″ 동경 127° 43′ 10.11″ / 북위 26.2170306° 동경 127.7194750° / 26.2170306; 127.7194750
공용어 류큐어
정부 형태
군주제
정부 수립
 • 건국

1429년
면적
 •
 
2,271 km²

류큐국(오키나와어: 琉球國 류추쿠쿠)은 동중국해의 남동쪽, 현재 일본 오키나와 현 일대에 위치하였던 독립 왕국이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것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건국하였다. 류큐국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1609년사쓰마 번침공을 받은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아 1879년에 일본에 강제로 병합(류큐 처분)되어 멸망하였고,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었다.[1]

명칭[편집]

정식 명칭은 류큐국(琉球國)이나, 일본에서는 류큐 왕국(일본어: 琉球王国 (りゅうきゅうおうこく)), 조선에서는 유구국 또는 류구국이라고 불렀다.

역사[편집]

정치 및 행정[편집]

류큐국의 정치 행정조직을 수리왕부라고 하는데, 수리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 결정기관이 평정소(評定所)이다. 평정소의 수장을 '섭정'이라고 하였으며, 실무를 담당하는 3인의 실력자를 '삼사관'이라고 하였다.[2]

종교[편집]

류큐사
류큐 제도의 역사

선사 시대의
류큐 제도

 

틴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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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슌틴
인수
난잔 추잔 호쿠잔
(제1차 쇼씨)   
류큐국   
   (제2차 쇼씨) 사쓰마 번
일본 지배기
류큐 처분 ( - - 오키나와 현)
미국 통치기 (MG - CA)
코자 폭동
일본 반환기
오키나와 반환 (730)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v  d  e  h

고유 종교[편집]

류큐에는 고유의 종교가 있었다. 슈리에는 키코에 대군어전(聞得大君御殿 (きこえおおきみうどぅん)), 슈리전내(首里殿内 (しゅりどぅんち)), 마카베전내(真壁殿内 (まかべどぅんち)), 기보전내(儀保殿内 (ぎぼどぅんち))가 있었다.

기독교[편집]

류큐국에 기독교(로마 가톨릭)가 전파된 것은 쇼호 왕 치세인 1622년으로, 야에야마에 서양 선박이 도항하고 전교하면서부터이다. 일본에선 기독교를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종교로 간주하여[3] 1612년에 기독교 금령을 내렸고, 사쓰마 번의 침공 이후(1609년) 일본의 조공국이었던 류쿠국도 기독교의 전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자와 섬이나 루손 섬에 왕래하던 서양 선박이 가끔 류큐 제도에 기항하여 전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기리시단 참조)

불교[편집]

류큐국은 조선에서 준 불전(佛典)을 연못(圓鑑池 엔칸치[*])안에 섬을 만들어 거기 세운 건물(辯財天堂 벤자이텐도오[*])에 보관했다.

문화[편집]

류큐국의 문화는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류큐국의 '테'는 일본에 전파되어 가라테 원형의 일부가 되었다.

문학[편집]

쇼세이 왕에서 쇼호 왕의 통치 기간(1531년에서 1623년)에 류큐 최고의 가요집(歌謡集) 《오모로소오시》(おもろさうし)가 편찬되었다.

대외 관계[편집]

한국과 류큐국[편집]

한국과 류큐국의 공식 교류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389년에 류큐국은 왜구에게 붙잡혔던 고려인을 보호하여 고려로 돌려보냈으며,[4] 조선왕조실록에 류큐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왕조는 류큐국에 1416년(태종 16년), 이예를 사신('유구국통신관')으로 파견하였다. 이예는 왜구에게 잡혀 유구에 팔려간 조선인 44명을 쇄환하여 돌아왔다. 1430년대에는 류큐과 조선 사이의 뱃길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고, 조선에 와서 류큐국 국사(國使)라고 사칭하는 일본상인이 있었다는 위사(僞使)문제가 생겨 그 뒤로는 중국을 통한 간접교류로 바뀌게 된다.[5]

또, 류큐국(유구국)에서 사람들이 제주도경상도에 표류하였다는 기록이 여럿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인도적으로 처우하여 돌려보내졌다. 반대로 제주도 주민이 류큐국 영역까지 간 일도 있었다. 1477년(성종 8년)에 귤을 진상하려던 사람들의 배가 풍랑을 만나 류큐국의 요니구시 섬에 도착하게 됐다. 류큐 왕국은 표류민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어 이들은 1479년염포(현재의 울산 방어진)로 도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류큐국[편집]

임진왜란 앞서, 일본은 조선에 명나라를 칠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반면,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 협력하여 명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조선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류큐국 사신이 일본 침략준비에 대해 같은 내용을 알려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명나라는 이에 조선, 류큐국, 섬라(暹羅: 지금의 타이)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먼저 조선을 침략하였다.[6]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과 그 길목에 있는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류큐에 협조할 것을 명령했으나, 류큐는 명의 책봉국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으며, 역으로 명에게 일본을 칠 것을 제안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김정숙, 《조선시대 필기,야담집 속 유구(琉球) 체험과 형상화》, 2011년, 한문학논집, 제32집, 37-57면 중 39면 참고
  2. 정하미, 류큐왕국의 ‘兩屬‘문제’와 페리의 상륙, 2011년 2월, 일어일문학, 제49집, 417-432면 중 418면
  3. 기독교의 교리 중 '자살금지'가 있는데, 이는 일본의 사회질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할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의 맹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의 2차 전국전쟁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와 손잡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맞섰지만 패배하여 결국 할복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는 기독교 신자란 이유로 할복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처형한 후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4. 고려사 신창(辛昌) 원년(1년) 8월 참조.
  5.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 세종 5년 정월(1월) 4일 참조.
  6. 조선왕조실록

읽을 거리[편집]

  • 유철인, 연구보고논문: 류큐 ( 유구 (流球) )의 가계계승과 조상, 2000년, 비교문화연구, 제6권, 제2호, 317-342면
  • 이토 요시히데, 류큐(琉球)지역의 「아샤게(アシャゲ)」와 제사구조, 2001년, 한국민속학, 제34집, 181-199면
  • 박훈, 유구처분기(琉球處分期) 유구(琉球)지배층의 자국인식과 국제관, 2005년, 역사학보, 제186권, 135-172면
  • 차혜원, 명조(明朝)와 유구(琉球)간 책봉(冊封) 조공(朝貢)외교의 실체 -만력년간(萬曆年間)(1573-1620), 명조의 유구(琉球)정책을 중심으로-, 2008년, 중국사연구, 제54권, 129-160면
  • 정진희, 양속기(兩屬期) 류큐(琉球)개벽신화의 재편과 그 의미, 2009년 5월, 아시아문화연구, 제16집, 244-270면
  • 김정숙, 조선시대 필기 야담집 속 琉球체험과 형상화, 2011년 2월, 한문학논집, 제32집, 37-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