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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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
(大韓帝國 高宗)
Emper Kojong.jpg
조선의 제26대 국왕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대한제국의 초대 황실 수장
본명 이희(李㷩)[1]
재위 1863년 ~ 1907년
종교 유교(성리학)
출생일 1852년 9월 8일
사망일 1919년 1월 21일 (66세)
황후 명성황후
부친 흥선대원군
모친 여흥부대부인
이전 왕 철종 (조선)
다음 황제 순종황제 (대한제국)

고종(高宗, 1852년(철종 3년) 9월 8일(음력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은 대한제국건국조, 초대 황제 광무제(光武帝, 재위: 1897년 ~ 1907년)이자 조선의 제26대 임금(재위: 1863년 ~ 1897년)이다. 휘는 이희(李㷩)[1], 초명은 이재황(李載晃), 아명은 이명복(李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는 성림(聖臨), 는 주연(珠淵),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2](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연호는 건양, 광무이다.

흥선대원군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헌종의 모후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삼종숙(三從叔)인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초기 10년은 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 민씨 일족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열강의 개항 요구와 개항하는 즉시 청-일-러 3국의 3파전이 치열한 가운데 국권을 보존하려 노력해왔으며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었고, 1910년에는 이태왕이 되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한 뒤, 그가 독살당했다는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에 의해 그의 독살설이 기록으로 전한다. 독살설은 3·1 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008년 12월에 고종 황제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국새가 발굴되었다.[3]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63년부터 1864년까지 삼종숙모(三從叔母)이자 양어머니인 신정황후 조씨(神貞皇后 趙氏)가 섭정을 하였고 1864년부터 1873년까지 생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을 하였으며 1873년부터 1907년 퇴위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2009년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에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4][5]

생애[편집]

출생부터 즉위 전[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아버지 흥선대원군

고종은 헌의대원왕순목대원왕비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사저 운현궁은 처음 구름재댁으로 불리다가 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운현궁이라는 궁의 이름을 받게 된다. 처음 이름은 개똥이었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조선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 또한 처음 자(字)는 명부(明夫)였다가 즉위 후 성림(聖臨)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본래 영조사도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뒤에 고종 때 장종으로 추존)의 서자 은신군은 자신의 작은할아버지 연령군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가 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고, 다시 순조는 아들이 없던 서삼촌 은신군에게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7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을 사후 양자로 입양하였다. 이로써 남연군인조의 8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영조의 양증손자가 되어 왕위계승권을 획득했다.

고종에게는 생모 순목대원왕비 소생인 친형 흥친왕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다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복 형 이재선과 이복 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은신군의 이복 형이던 의소세자정조의 후손이 끊어지고 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계승권은 철종의 이복형인 회평군과 영평군의 아들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 사이로 압축되었다. 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친조카들이 있었으므로 흥선군효명세자빈 조씨(훗날의 조대비)전을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헌종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후사가 없던 신정왕후는 그런 흥선군의 조건을 수용한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후원으로 1863년 음력 12월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6]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7]

즉위 이전[편집]

친형 흥친왕 이재면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하면서도 아들의 왕위를 위한 꾸준한 계획을 세웠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8]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황현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8]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9]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즉위 배경[편집]

황제의 황룡포를 입은 고종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10] 또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재황을 안동 김씨 가문의 딸과 혼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하나는 김병학의 딸이었고, 다른 한명은 김병문의 딸이었다. 이런 밀계로 흥선군은 안동 김씨 일부를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흥선군은 조대비를 찾아가 물밑 교섭했다. 조대비의 아들은 헌종이었으나 헌종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전계군의 아들인 강화도령 덕완군 원범이었다. 철종이 헌종보다 윗 항렬이므로 헌종의 양자가 될 수 없었고, 익종에게도 동생뻘이기 때문에 익종의 양자가 될 수도 없었다.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는 이 점을 보고 철종을 간택하여 순조의 양자로 삼았던 것이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앉히게 도와준다면 조대비의 양자로 보내겠다는 밀계를 맺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조대비와 조성하, 조영하, 정원용 등은 비밀리에 옥새를 접수한 뒤, 흥선군의 적실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대왕으로 입승대통한다는 교서를 재빨리 발표한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초반[편집]

즉위 직후[편집]

고종의 친필 어제사언시 (1864년)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 대원군이 장악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으로 구 안동 김씨와 김씨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풍양 조씨 세력 역시 궁정에서 축출한다. 이들 외척들은 고종이 군주인지 흥선대원군이 군주인지 알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유포시켜 대원군 섭정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기도 한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기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 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하였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11] 이에 대원군은 소년 시절 김정희와 홍대용 학파 인물들로부터 전해들은 열기구를 본따, 열기구를 만든 뒤 학과 두루미 10만 마리를 잡아들여 그 깃털을 뽑아 아교를 녹여서 붙였으나 열기구는 얼마 날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의 섭정[편집]

모든 군사와 정무는 왕명으로 나갔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직접 처결하였다. 황현은 이를 두고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 없었다.[12]'고 하였다.

대원군은 국왕의 고유권인 인사권도 자신이 독자적으로 처결하였다.[출처 필요]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12]

친정과 재위 기간[편집]

친정 초반[편집]

개항과 친정[편집]

1869년 1월 31일(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명령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결국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13]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11월 4일(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청의 내정 간섭과 갈등[편집]
1884년의 고종.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고종 최초의 사진.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최후의 중국인 위안스카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청나라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을 것이며,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미국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이름했다.[14]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년)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온다.

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갑신 정변 전후[편집]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하는 사건(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동학 운동과 갑오개혁[편집]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1890년 한때 흥선대원군가의 식객이었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1894년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15]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1894년 음력 12월 12일(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한편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이재면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준용은 1895년 5월 13일(음력 4월 19일) 종신 유형에서 10년 유형(流刑)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된다. 그 뒤 이준용은 8월 2일(음력 6월 12일)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일본, 러시아의 내정 간섭[편집]

을미사변 (명성황후 암살)[편집]
을미사변 당시 침투한 일본인 낭인들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16]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16]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의 한사람인 유길준

1895년 명성황후경복궁에서 암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아들 황태자 척과 함께 일본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당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명성황후와 갈등을 빚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황후 시해에 이용하게 된다.[16] 일본은 1895년 낭인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17]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18]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유길준과 개화파, 한국 군벌 등이 일본인 낭인들의 길안내를 담당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내는데 협력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다. 흥선대원군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체를 소각하는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나중에 윤치호는 입궐하여 명성황후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있었다면서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주회, 이진호, 윤석우, 구연수 등의 존재를 폭로하였다. 여기에 개화파 정치인인 유길준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노라고 폭로하였다. 황후의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 고종은 충격을 받았다. 박은식 역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아관 파천과 도시 정비[편집]

1896년 2월 11일(1895년 음력 12월 28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의지로 왕세자(후에 순종황제로 즉위함)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오늘날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그때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13]

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를 놓는 계획(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13]

대한제국 성립[편집]

대한제국 선포[편집]
고종 황제의 어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
황제의 격에 맞춰 황룡포를 입은 고종
선글라스를 쓰고있는 고종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원구단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께서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 고종실록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8년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를 운행한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13][17]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준용의 쿠데타 기도[편집]

1899년 조카 이준용은 직접 쿠데타를 기획하였다. 이전까지의 쿠데타가 동학 농민군이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면 이번 쿠데타는 이준용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한 것이었다. 1899년에는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 적발되었다.

조카이자 정적인 이준용

이준용이 일본에서 다시 활동을 개시할 때 쯤에 벌어진 장윤상 발언 사건과 어용선 사건은 고종 정부를 자극하기 충분했다.[19]참봉 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1899년 1월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되거나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19] 이는 와전되어 "박영효가 반역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황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1899년 4월 12일 소문의 발원자인 장윤상은 교살형에 처해졌고, 그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유로 유학 신현표와 전 순검 이지현은 태 1백 대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9]

또한 3월어용선 등이 일본에서 그를 모셔다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공화정체를 표방해 대통령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19][20]

반정부 인사들이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나 움직임은 고종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장윤상 사건과 어용선 사건이 처리된 직후인 1899년 6월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의 옹립을 기도했다는 고발에 따라 윤태영 등 3인이 체포되었는데[19][21], 이는 고종 정부가 이준용 추대 모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00년 안경수, 권형진을 처형 직전 양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년 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은 결국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22] 이에 고종 정부의 고관들인 김성근, 신기선, 조병식, 윤용선, 민종묵 등과 재야의 유생들은 1900년 6월부터 역모를 자행한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가 처형하자는 상소를 되풀이하여 올렸다.[23] 그러나 고종은 그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일 궁내부협판 겸 대신서리 윤정구(尹定求)의 탄핵이 있자, 고종은 칙령을 내려 이준용의 궁내부 특진 관직을 박탈했다. 그러자 평리원학부에서 외부에 조회하여 1900년 6월 19일에 주일본공사 이하영에게 이준용을 즉각 잡아서 돌아오게 하라고 하였다.[23] 그러나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6월 20일 이하영은 "이준용이 꼼짝하지 않고 듣지 않으니 잡아서 돌려보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23][24][25]

이준용의 엄상궁의 귀비, 왕비 책봉 반대운동[편집]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 영친왕의 생모이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1899년 4월 이준용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왕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26]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왕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26]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국왕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왕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왕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왕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26]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이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19]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19]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정치 망명객이라는 이유로 이준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고종은 밀지를 내려 자객들을 일본 도쿄로 파견했지만 실패한다. 이준용 역시 양돼지라는 별명과 달리 거구에 비교해서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였고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이준용 제거 계획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러시아, 일본과의 갈등[편집]
서양식 제복 차림의 고종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27]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군대가 해산된다.[13]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황성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13] 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을사 늑약 전후[편집]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조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駐)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28]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토 히로부미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했다.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이토 히로부미를 달래어 내보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 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15]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29]

을사 조약 반대 운동[편집]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
중명전에 전시된 을사조약 체결 문서
을사조약이 조인된 중명전

조약의 체결은 한국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는 이를 억압하였다.(을사의병 참조) 1905년 12월 1일 윤치호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지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國庫)는 고갈되었으며 악화(惡貨)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强)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대한 광무 9년 양력 12월 1일자 5번째기사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후 강원도 삼척군울진군에서 을사조약 무효 선언과 동시에 의병이 일어났고 쇠퇴해가던 의병 활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힘을 얻은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영국에 전달된, 제2차 한일 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

이후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다.[30] 고종의 무효선언 발표는 훗날 한국에서 을사조약의 무효, 불법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는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당시 강박(强迫)이 사용된 점과 고종이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즉각 항의외교를 벌인 점을 들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31]

훗날 고종의 무효선언서의 존재를 확인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수교하는 조건으로 을사조약 무효, 파기를 요구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32] 후일 정상수 명지대 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나타나는 독일어 전보를 발견하였다.[33]

이준용의 귀국과 영친왕의 태자 책봉[편집]

을사 조약과 이전인 1904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이준용의 귀국을 허락하라고 강요하였다. 자신의 지위를 빼앗으려 여러번 쿠데타를 일으켰고, 명성황후 암살의 가담자라고 확신하고 있던 고종은 이준용의 귀국 요구를 불쾌히 여겼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계속 이준용의 귀국을 허락하라고 고종에게 강요했고 고종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수시로 고종에게 이준용 귀국을 요구한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이준용의 귀국을 강력히 반대하였다.[34] 그 이유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혹세무민하며 사회 혼란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35] 그러자 이토 통감은 이준용에게 일단 부산에 당도해 있으면 자신이 박영효의 경우처럼 힘써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토는 내각 회의를 통해 안경수, 권형진의 의옥사건에 대한 이준용 연루건이 무죄임을 결정하였다.[35]

이로써 이준용은 사복 일본인 경부 1인과 순검 2인의 보호하에 7월 14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34] 이는 정식 귀국이 아닌 밀입국이었다.

순종황제 즉위 전날인 1907년 7월 19일 경성부에 도착한 이준용은 신변 안전을 위해 정운복과 함께 진고개일본인여관에서 1박한 후에 운현궁으로 되돌아갔다.[36][37] 이로써 타의로 한국을 떠났던 이준용은 12년 7개월간의 해외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한국 생활에 들어갔다.[34] 그러나 일본 체류 중 이준용은 제때 진료받지 못하여 신장병심장병이 수시로 그를 괴롭혔고 결국 이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황태자 척에게 아들이 없는 점을 주목한 일본 정부는 태자 책봉이 유력한 의친왕 강의 존재를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또한 엄귀비는 아들 황자 은의 태자 책봉을 원하고 있었고 황태자 척이 심한 병으로 아들을 얻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고종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준용이 귀국하게 되면서 병약한 아들과 어린 아들들의 존재 때문에 고종의 염려와 불안은 극도로 고조된다. 황태자 척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우려한 고종은 의친왕을 병약한 황태자 척의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엄귀비의 간청과 일본의 영친왕 지지 등 여러 중론을 접하게 되면서 결국 영친왕을 잠재적 후계자로 낙점하게 된다.

생애 후반[편집]

일본의 침략과 강제 퇴위[편집]

고종과 황태자 시절의 순종

이처럼 일본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을 침탈하는 등 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 등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고종이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고종 양위 사건).

한편 1905년 4월 29일 근대적 형법전인 《형법대전》을 편찬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것을 1906년 2월 2일 법률 1호로 제1차 개정하고, 1908년 7월 23일 법률 19호로 제2차 개정하였다. 이 제2차 개정에서 총 880개조였던 법률 가운데 100개조를 개정, 252개조를 삭제하여 원래 모습을 없애 버렸다. 결국 1910년 《한국법전》에 형법으로 개명 삽입하였다. 일본 제국은 《형법대전》이 민권 신장의 성과였으므로 도리어 삭제해 버렸다.[13]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38][39]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34]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40]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이강은 졸지에 순종황제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40] 영친왕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점과 일본의 영친왕 지지를 내심 못마땅해 했지만 이준용의 존재는 그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이준용을 미워했던 그는 왕자 출신이 아닌 왕의 생가 형제와 조카들에게 내리던 군호(君號)의 작위를 친형 이재면에게는 자신의 즉위 37주년이 되는 해에 내렸고, 이복 형 이재선에게는 어떠한 작위도 내리지 않았다. 조카 이준용에게도 어떠한 작위조차 내리지 않았다.[41] 그러나 영친왕의 태자 책봉으로 지위가 격하된 뒤에도 이준용은 황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나 한일 합방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일제 강점기 초기[편집]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고종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의 작위를 받고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고종 이하 흥친왕, 의친왕, 영친왕, 영선군 등이 일본제국의 왕족 자격으로 황적에 편입되었다. 일부 일본 극우 귀족이 망국의 왕족을 왕족으로 대우해야 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자 일본메이지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 왕족가의 딸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1912년 5월 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그해 6월 그는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로서 일본 황적에 올리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장관 모두 덕혜는 사생아이므로 황적에 올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성대한 백일잔치(혹은 돌잔치)를 차려놓고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이왕직 장관실의 관료들, 일본의 일부 지한파 귀족들까지 두루 초청, 단상에서 "이 애가 내 고명딸"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조선총독부이왕직의 관료들 모두 덕혜를 일본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덕혜로 하여금 일본으로 인질로 끌려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죽음[편집]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 식민 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를 놓고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자살설, 그날 한약이나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향년 68세.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때 그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이는 사실 무근이라는 반론도 있다.

고종황제가 이 왕세자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1)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왕세자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한편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윤치호는 처음에는 독살설을 불신했지만 궁궐에 출입하던 인사들을 만나면서 독살설 쪽으로 심증을 굳히게 된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면서 이는 김규식의 편지서신과 함께 3·1 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고종 독살설[편집]

고종은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갑자기 뭔가를 마시다가 사망했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 때에도 심하게 부풀어져 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 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42]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2]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이태왕(李太王·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1919년 1월26일자 윤치호 일기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42]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42]고 했다.

사후[편집]

이문용(李文鎔)은 고종과 상궁 염씨 사이에서 본인이 태어났다고 주장하였지만 검증된바 없으며 관련 기록도 전무하다. 소설가 유주현이 이문용을 고종의 딸로 묘사한 장편소설 《황녀》를 발표하고, 1974년 같은 제목의 MBC 일일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황녀 여부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었다. 드라마 때문에 황녀로 알려지자 1975년부터 전주 경기전 내 조경묘 수직사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에 사망하였다. 황실 구성원들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왕실 족보 《선원계보기략》과 《승정원일기》에서조차 기록이 없는 이문용은 고종의 친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고, 당시까지 생존하여 있던 상궁도 이문용의 존재를 부정하였다.[43]

가족 관계[편집]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영친왕,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사친부 헌의대원왕(獻懿 大院王) 흥선대원군(興宣 大院君) 이하응(李昰應)
  • 사친모 순목대원비(順穆 大院妃) 여흥부대부인(驪興府 大夫人)여흥 민씨
  • 대한제국 건국, 광무 원년(光武 元年, 고종 34년, 1897) 10월 12일
  • 조선 고종대왕, 황제 광무제(光武皇帝) - 조선 제26대, 대한제국 건국조
  • 조선 명성왕후, 대한 명성 황후(大韓 明成 皇后)여흥 민씨
    • 2황자 왕자 (1871년) : 4일만에 사망, 조졸
    • 2황녀 공주 (1873년) : 222일만에 사망, 조졸
    • 3황자 황태자 척 (皇太子 坧, 1874년~1926년) - 조선 제27대, 대한 제2대 황제,순종황제, 융희제
    • 4황자 대군 (1875년), 조졸
    • 6황자 대군 (1878년), 조졸
  •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 1843년~1928년), 이순아(李順娥)
    • 1황자 완왕 선 (完王 墡, 1868년~1880년), 완효헌왕(完孝憲王), 완화군(完和君), 조졸
    • 1황녀 옹주 (1871년~1872년), 조졸
  •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덕수 장씨
  • 태비 순헌 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1911년)영월 엄씨
  • 후궁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 1887년~1970년), 이완흥(李完興)
    • 8황자 육(堉) (1914년~1915년), 조졸
  •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 1882년~1943년)
    • 9황자 (堣) (1915년~1916년), 조졸
  • 후궁 내안당 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 1847년~1914년)
    • 3황녀 옹주 (1879년~1880년), 조졸
  • 후궁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 1882년~1929년)
    • 4황녀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1989년), 이덕혜(李德惠)
  • 후궁 삼축당 상궁 김씨(三祝堂尚宮 金氏, 1890년~1972년), 김옥기(金玉基)
  • 후궁 정화당 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궁인 장씨(宮人 張氏)

외국인의 평가[편집]

긍정적인 평가[편집]

외국인들의 개인적인 견해[편집]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48]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13]

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49]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면서, 위 해링턴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데니는 본래 이홍장이 자신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조력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자신의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개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고빙한 서양인 고문중 한 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13]

또한 1895년한성신문 기자로서 을미사변에 직접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근대조선사》 상·하(1936년, 1939년, 鷄鳴社, 京城)에서 상당히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근대조선사》를 쓰기에 앞서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고종태황제실록》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의 논조는 대체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비슷하여,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일본 학자가 거론하지 않은 평양 이궁 조영(造營)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고종의 치적을 제정 러시아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시책이라고 평가하였다.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는데, 그 친서에는 일본황성을 침탈하게 됨을 고종이 이미 예측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동맹 요청을 평양 이궁 조영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고종 시기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나 받아들여진 서양 문물을 개화파독립협회의 치적으로 보지 않고 고종의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에 합병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산멸했다고 보았다.[13]

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견해[편집]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50]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 진보적이며 또한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50]

부정적인 평가[편집]

정치적 능력[편집]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51]

미국의 언론인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그는 1905년 황제와 조정 관료의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때 11월 25일자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루트(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과 12월 19일 루트가 민영찬 공사에게 보낸 회신 등을 근거로, 루스벨트나 루스는 “한 점 잘못 없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합당한 외교 조치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잘못은 오히려 고종 측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 의해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하였다. 그의 견해는 고종의 인물평이라기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지만, 1920년대에 제기되어 그 이후의 부정적 견해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13]

즉위 초반에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즉위 중반에는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것과 즉위 후반에는 명성황후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때 그의 신하였던 윤치호는 '용모가 상당히 출중했다.[52]'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 영국찰스 1세와 비슷하다.[52]'고 평가했다.

암약설[편집]

윤치호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황제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즉, 윤치호는 사람들은 황제를 “너무나 증오해서 그를 망신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것 같다. 그가 왕좌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사람들의 혐오감이나 정의감을 만족시킬 것 같다”고 보았다.[53]

해링턴(Harrington)은 한국 최초의 외국인 어의이자 미국 개신교회 선교사였던 앨런(Horace Newton Allen)이 톨레도에서 쓴 1903년 10월 14일일기를 근거로 삼아 고종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해링턴의 의견은 1903년 10월 14일자 일기 내용은 그저 앨런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내용이었을 뿐, 모든 분야에서 유약하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는 데에서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앨런이 고종에 대해 쓴 다른 날짜의 일기, 예를 들면 1885년 2월 3일(화요일)(1884년 음력 12월 19일)자 일기에서도 “대단히 진보적인 조치”(This is a very advanced step)라고 하거나, 1886년 양력 9월 11일(토요일)자 일기에서 “국왕은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다.”(The King is no fool)라고 하였지만 해링턴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13]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의 주선으로 경복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조선의 왕은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하며, 성실하고 유능한 군주이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다. 그에게 강인한 성격이 있었다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54]《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는 현존하는 고종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 가운데 가장 자세하면서도 가장 호의적이지만, 비숍의 평가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일본에서 고종이 암울하고 유약한 군주였다는 소위 “고종 암약설”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독립운동 불참과 일본 황적 편입 비판[편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되었으나 그는 일본에 적극 저항하지 않았고,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일합방 뒤에는 일본의 황적에 편입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직책과 일본 왕 메이지 천황이 주는 은사금까지 수령했다. 이 점이 국가 지도자로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편집]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수시로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55] 마침내 호조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돈을 주고 과거 합격증을 파는 일)까지 기승을 부렸다[55]고 한다.

그러나 국고 탕진에 대한 다른 자료는 없다.

연호[편집]

고종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서력 1864년 1865년 1866년 1867년 1868년 1869년 1870년 1871년 1872년 1873년 1874년 1875년 1876년 1877년 1878년
간지
(干支)
갑자
(甲子)
을축
(乙丑)
병인
(丙寅)
정묘
(丁卯)
무진
(戊辰)
기사
(己巳)
경오
(庚午)
신미
(辛未)
임신
(壬申)
계유
(癸酉)
갑술
(甲戌)
을해
(乙亥)
병자
(丙子)
정축
(丁丑)
무인
(戊寅)
고종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21년 22년 23년 24년 25년 26년 27년 28년 29년 30년
서력 1979년 1880년 1881년 1882년 1883년 1884년 1885년 1886년 1887년 1888년 1889년 1890년 1891년 1892년 1893년
간지
(干支)
기묘
(己卯)
경진
(庚辰)
신사
(辛巳)
임오
(壬午)
계미
(癸未)
갑신
(甲申)
을유
(乙酉)
병술
(丙戌)
정해
(丁亥)
무자
(戊子)
기축
(己丑)
경인
(庚寅)
신묘
(辛卯)
임진
(壬辰)
계사
(癸巳)
고종 31년 32년 33년 34년 35년 36년 37년 38년 39년 40년 41년 42년 43년 44년
서력 1894년 1895년 1896년 1897년 1898년 1899년 1900년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1906년 1907년
간지
(干支)
갑오
(甲午)
을미
(乙未)
병신
(丙申)
정유
(丁酉)
무술
(戊戌)
기해
(己亥)
경자
(庚子)
신축
(辛丑)
임인
(壬寅)
계묘
(癸卯)
갑진
(甲辰)
을사
(乙巳)
병오
(丙午)
정미
(丁未)
연호
(年號)
개국
(開國)
503년
504년 건양
(建陽)
원년
2년
광무
(光武)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11년
융희
(隆熙)
원년

관련 문화재[편집]

대중문화의 고종[편집]

영화[편집]

드라마[편집]

무용[편집]

연극[편집]

뮤지컬[편집]

고종을 소재로 한 작품[편집]

영화[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1919) 《고종태황제행장(高宗太皇帝行狀)》, 조선왕조실록 순종 부록 12년 3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2.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한자로는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3.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4.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2009년 2월 28일 조선일보
  5. “고종, 늑약 확인 거부땐 독살” 조선총독에 밀명 2010년 8월 23일 문화일보
  6.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47~48쪽.
  7. 박영규 (2003년). 《조선의 왕실과 외척》. 박영사, 433쪽쪽. ISBN 89-349-1256-1 03900
  8.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283페이지
  9.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284페이지
  10.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시공출판사, 2009) 281페이지
  11.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84~186쪽쪽
  12. 임용한, 《난세에 길을 묻다》 (시공사, 2009) 298
  13. 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5~134쪽.
  14. 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 조선일보 2004.03.25
  15. 한계옥, 〈‘국왕 생포 작전’과 왕비 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89~92쪽.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는 “조선 병사의 발포에 의해 우발적인 충돌이 시작되어, 일본군은 도리없이 응전하여 왕궁으로 들어갔다.”이다. 그러나 1994년 나라 여자 대학 교수 나카즈카 아키라[中塚明]가 발견한 일본군 참모 본부편 《淸日戰爭草案》(42권)은 그 모든 과정이 일본 외무성과 군부가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작전이었음을 실증하고 있다.
  16.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4~35쪽.
  17.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9~63쪽.
  18.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66~67쪽
  19.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8pp
  20.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13, '어용선 등 포박 운운에 대한 회답' 241페이지
  21.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13, '고종폐위... 윤태영 외 3인 체포' 448페이지
  22. 정교, 《대한계년사》 하 65~66쪽
  2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9pp
  24. 정교, 《대한계년사》 하 66~70쪽
  25.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14, '이준용에 대한 나포, 소환의 훈령 등 사본 송부건', 356쪽
  26.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7쪽.
  27. 《일성록》 광무 4년 윤8월 4일; 《승정원일기》 광무 4년 윤8월 4일; 《고종실록》 광무 4년 10월 1일; 《관보》 광무 4년 10월 1일.
  28. 제2차 한일 협약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 〈‘을사조약 중명전’ 버려진 역사〉, 한겨레, 2004.8.27.
  29.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ISBN 978-89-86072-03-7
  30. 더글라스스토리 , 《고종황제의밀서》(글내음, 2004년)
  31. Francis Ray, "La Situation Internationale de la Coree", Revue General de Droit International Public, Tome XIII, 1906, pp.40-58.
  32.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33. 윤완준 기자. "고종 “을사늑약 부당” 첫 외교문서 발견", 《동아일보》, 2008년 4월 5일 작성. 2010년 11월 25일 확인.
  34.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
  35.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3》 (국사편찬위원회, 1998) 39~40, 336
  36.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
  37.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
  38.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
  39.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
  40.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
  41. 이재선과 이준용은 순종 때에 가서 작위를 받는다.
  42.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96페이지
  43. 유인석. "이문용 할머니 타계뒤도 시비 재연", 《경향신문》, 1987년 4월 1일 작성.
  44. 조선 문조 혹은 익종(추숭) 혹은 효명세자(孝明世子), 순조 19년(1819)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순조 27년(1827)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 년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순조 30년(1830) 졸
  45. 추대음모사건에 연루, 사사됨
  46.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시호를 ‘의민(懿愍)’으로 정하였다.
  47.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시호를 ‘회은(懷慇)’으로 정하였다.
  48. 《조선왕 독살사건》, 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49. 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8-99쪽. “1886년 5월부터 1890년 2월에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겸 외아문 장교사(掌交司) 당상으로 고종을 도운 미국인 데니… (뒤 줄임)”
  50. 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9-102쪽.
  51. 위안스카이 ‘골수까지 병든 조선’ 의 최고 권력자 조선일보 2004.03.25
  52.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역, 역사비평사, 2001) 68페이지
  53. 박지향, 《윤치호의 협력일기》 (이숲, 2010) 112페이지
  54. 《한국과 그 이웃나라》,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살림.
  55. 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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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
제1대 일제 강점기 이태왕
1910년 8월 22일 - 1919년
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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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철종
한반도의 통치자
1863년 - 1907년
후 임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