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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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 사건
(신미양요의 일부)
날짜 1866년 8월 21일 ~ 9월 4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 대동강
이유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쇄국 상태인 조선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통상을 빙자하여 납치, 약탈, 살인을 함.
결과 제너럴셔먼호 소각 및 선원 전원 사망.
교전국
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
조선 왕국
미국
미국 상선
지휘관
박규수
신태정
이현익
백낙연
항해사(Pilot) 겸 통역관--
토마스 목사 (aka 최난헌)
선주 프레스턴
선장 페이지
항해사 윌슨
병력
스쿠너 한 척,
서양인 5명,
중국인 13명,
말레이인 3명,
피해 규모
전원 사망.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1]

경과[편집]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고종 3년)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횡포를 부리다가 관민들의 저항으로 는 소각되고, 선원들은 처형된 사건이다.

통상요구와 거절[편집]

톈진(天津)에 머물던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셔먼호는 영국의 메도스(Meadows) 상사와 결탁하여 비단·유리그릇·천리경·자명종 등의 상품을 적재하고 프레스턴을 비롯하여 윌슨(Willson), 선장 페이지(Page), 영국인 호가스(Hogarth) 및 런던 선교회 소속의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Thomas)를 항해사 겸 통역인으로 삼아 19명의 말레이시아인 및 청국인을 태우고, 중국 정크선의(선장 유화태--Yu WauTai) 인도로 8월 20일(음력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유화태는 1865년말 토마스가 황해지역에 왔을 때 타고 왔던 배의 선장이며 토마스에 의하면 20년 이상 조선인과 무역을 하였다.

마침, 프랑스의 군함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평양에 온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탑승한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항해 목적에 대하여서는 상거래뿐임을 강조하며, 그들이 가져온 비단·자명종 등과 ·사금·홍삼·호표피 등과의 교역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서양 선박의 내항과 통상의 요구는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미루어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이유로 거절하고, 그들에게 즉시 출국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공격과 평양성 군민들의 반격[편집]

8월 21일(음력 7월 12일) 조선 측의 이와 같은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官民)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셔먼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하여 강변의 군민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맞서 대항하고,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은 배를 타고 가서 이현익을 구출해 내었다.

영국인 최난헌이(매천야록에 미국인 최난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난헌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의 한국이름이다.) 군함 1척을 이끌고 조수를 타고 대동강에 들어왔지만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군함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2] 당시 며칠씩 계속된 비로 강의 수위가 높아졌다가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평상시 수위로 돌아가게 되자 셔먼호는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선체가 걸려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대포를 발사하는 등 폭력을 자행하여 평양 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박규수는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구하던 중 한 교졸이 지원했다. 이 교졸은 어촌의 괴피선(작은 배) 수백 척을 동원하여 배안에 기름을 끼얹은 뒤 섶을 가득 실어 불을 지르게 하고 궁수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을 당기게 하였다.[2]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8월 30일(음력 7월 21일)부터 포격을 가한 뒤 대동강 물에 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승무원 23명 가운데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배에 불이 번지자 영국 선교사 토머스와 중국 상인 조능봉이 뱃머리로 기어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박규수는 이들을 강안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성난 평양부민들이 삽시간에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나머지 생존자들도 전원 사망했다.[3]

박규수는 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고, 미국 군함은 한번에 화살세례를 받았으며, 군함 안에 있던 인화물질로 인해 군함은 불타고 말았다. 미국 상인들은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 도망쳤지만 그들을 추격해 대포를 쏘아 4, 5명을 쓰러트렸다. 이것이 조정에 전해지자 박규수는 승자(품계가 승진됨)하였고 교졸 또한 진장이 되었다.[2] 이후 박규수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를 얻게 되었다.

영향[편집]

당시 조선의 흥선대원군 정권은 이 사건과 같은 해 음력 9월에 일어난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서양 기술이 집약된 증기선을 복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0개월 만에 복원하기는 했으나,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러나 그 뒤에 통상수교거부 정책이 한창임에도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4]

제너럴셔먼호[편집]

  • 포획: 1863년 1월 29일
  • 미국 정부의 구매: 1863년 3월 18일
  • 취역일: 1863년 2월 4일
  • 민간에 판매: 1865년 8월 17일
  • 배수량: 614톤
  • 길이: 38.81미터 (127피트 4인치)
  • 선폭: 10.5미터 (34피트 6인치)
  • 흘수: 503센티미터 (16피트 6인치)
  • 추진방식: 요트(Sail)
  • 승무원: 150 명
  • 무장:
    • 4 X 8" Sg.
    • 16 X 32 pdrs
  • 원래 영국 군함이었는데, 1863년에 포획되었다. 남북전쟁에 북부군 군함 USS Princess Royal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공경매로 민간에 팔려서 제너럴셔먼호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미 해군이 보유한 기록과 다르다.
  • 미국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의 민간 판매 시점이 평양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이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 대동강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제너럴셔먼호 탑승자[편집]

  • 선장 페이지(Page, 덴마크인)
  • 일등 항해사 윌슨(Wilson, 미국인)
  • 선박 소유주 프레스턴(Preston, 미국인)
  • 조지 호가스(George Hogarth, 영국인)
  • 13명의 중국인
  • 3명의 말레이인
  •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한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통역으로 탑승하였다.)

참고[편집]

함께 읽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1. 문일평, 《호암전집》 제3권, 서울: 조광사, 1939년, 267~268쪽.
  2. (2011) 《매천야록》, 정동호 옮김, 일문서적, 34쪽
  3. (1866년 7월 27일) 〈3권〉, 《고종실록》, 1쪽
  4.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84~186쪽. ISBN 978-89-85407-35-9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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