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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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三一運動)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장례식날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2개월 가량 전국적인 폭력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일제는 대대적인 학살과 만행으로 탄압했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목차

[편집] 배경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식민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통치는 “3.1독립운동”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만주 지린에서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1918년 말 무오 독립선언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한 2·8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삼일운동은 고종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되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위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1]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폭력화되었다.

[편집] 준비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공약 3장을 덧붙였다[출처 필요].

준비 과정에 일어난 신철에 관한 일화가 있다.[2]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를 빼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손병희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는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뀐다.[2]

[편집] 기미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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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당시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한 글이다.

[편집]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3]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2]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부분 (현대어역)[4] ,

한편 오후 2시에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5]

[편집] 전국적인 시위와 폭력 진압

경성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6]

[편집] 탑골공원 시위

독립선언서가 본래 낭독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가 발생하였다.

[편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 일시: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 장소:천안 아우내 장터
  • 경과: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7]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만세운동이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과 그 모친 최씨가 총탄에 맞아 즉사했으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8]

[편집]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 일시: 1919년 3월 4일[9][10]
  • 장소: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 경과: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때 사천시장 부근에 있던 사천헌병대에 이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하던 기독교 계열의 인사들이 사전 적발되어 구금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천헌병주재소의 소장 사토(일본어: 佐藤實五郞)와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규, 박요섭 등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참가자 수십명을 살상했다. 이들은 돌을 던지며 맞선 시위대에게 그 자리에서 함께 살해당했다.[11] 이 사건은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 관련자: 조진탁 (사형), 고지형, 지석용

[편집] 삼진 의거

  • 일시: 1919년 3월 28일, 4월 3일[12]
  • 장소: 경상남도 창원
  • 경과: 제1차와 제2차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삼진의거는 당시 창원에 속하는 현 마산시 일대의 연합 대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연고지에 돌아온 변상태가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에서 동조하는 인사들을 모아 모의했다. 단일 시위로는 마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였으며,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연합시위로 기록되었다. 제1차 삼진 의거에서 검거를 피한 주모자들이 태극기를 제작해 제2차 삼진 의거(4·3 삼진의거)를 재차 계획했으며,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서 약 3천여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일본 헌병대와 유혈 충돌하여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 관련자: 변상태, 변갑섭(사살), 변상복(사살) 등

[편집] 제암리 학살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제암리 학살 사건입니다.
  • 일시: 1919년 4월 15일
  • 장소: 경기도 수원시
  • 경과: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수원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편집] 맹산 학살 사건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왜병이 도착하여 독립운동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혹혁을 하여 사람들이 격분하여 석방을 요구하러 헌병분견소로 몰려드니 왜병은 이들을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기고 60여명을 사살하였다. 그 중 셋 사람이 도망하여 왜병이 추격하였지만 잡지못하였다.

[편집] 대구 학살 사건

대구에서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왜병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하였다. 김용해의 아버지가 이 시위의 주모자로 독립선언을 낭독했는데, 김용해는 체포하러온 왜병과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부자가 투옥되어 며칠 후 사망하였다.

[편집] 합천 학살 사건

3월 16일 합천군 야로면에서 지역사람들과 해인사의 승려가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3월 18일 합천군 강양면의 시장에서 시위가 있었다. 일본의 군인과 경찰이 쇠몽둥이나 장검으로 해산시키려 했으나 어려워지자 발포하여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했다. 19일 합천군 대정면에서도 지역 유지와 노동자들이 고현시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주모자 5명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 22일 상백,백산,가회,삼가 등 다섯 면의 사람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3만여 명이 모였다. 질서있는 평화시위를 벌였음에도 왜병이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중상하였다. 그날 초계면 유림과 학생들도 시위를 하기 위해 모였는데 8천여명이 되었다. 왜병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수십명의 중상자를 냈다.

[편집] 남원 학살 사건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는 4월 3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이기 위해 19개 면장에게 글을 보내어 일제히 사직하게 하고 식목을 핑계로 수 만명을 모아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헌병이 주모자를 체포하였으나 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성을 향해 행진하였는데, 그 행렬이 30리에 뻗쳤다. 일본 헌병이 발포하여 11명이 즉사하였다.

[편집] 이리장날 만세운동

기독교인이었던 군산의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과 장경춘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12시 쯤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고, 그에 따라 기세가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13]

이 때 문용기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14]

[편집] 피해 규모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편집] 반응 및 파급 효과

[편집] 일본

3·1 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평가는 다른 점도 있다.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千葉了)는 자신의 글 〈조선독립운동비화〉에서 3·1 운동에 대해 “민족 본능의 지하수의 분출” 또는 “천변괴이의 상”이라고 표현하였다.[6]

[편집] 해외

인도의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운동이었다.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대만의 독립운동과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에서 영향을 끼쳤다.특히 인도의 시성이자 문학가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929년에 지었던 시(詩) 동방의 등불에서 한국을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5] [16]

[편집] 결과

이 부분의 본문은 일제강점기입니다.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조선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삼일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삼일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세계적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편집] 함께 보기

  • 한국의 독립운동
  • 무오 독립선언 - 1919년 2월 1일, 중국 동북부 길림성에서 조소앙, 신채호 선생 등 만주와 러시아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추어 조국독립을 요구한 독립선언서이다. 다음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 2·8 독립 선언 -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다음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편집] 주석

  1. 김완섭 (2003).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서울: 춘추사, 65-72쪽. ISBN 8995280220. 이 책에서는 친일파의 논조에 따라 3·1 운동 당시에 조선 지역에는 일본군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한겨레신문 - 일제 ‘제암리 학살’ 은폐공작 드러나중앙일보 - 일제 제암리학살 은폐 입증 조선군사령관 일기 발견 기사) 당시에도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해 있었다. 다만 그 명칭이 군대가 아닌 “헌병 경찰”이라는 점을 들어 “경찰”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헌병”(Military Police, 군대 경찰)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실제 그들의 역할도 경찰의 구실뿐만 아니라 헌병의 구실과 말단 행정 관소의 역할까지 하였다. 또한 당시 시위를 진압한 이들 가운데 일부가 경찰의 지위가 아닌 군인의 지위(예를 들면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 등)를 가지고 있었다.
  2.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기미년 3월1일에 있었던 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199~210쪽. ISBN 89-7474-870-3.
  3. 종래에는 정오(낮 12시)로 알려져 왔다.
  4. 기미 독립 선언서(己未 獨立宣言書)
  5.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171~173쪽, 서문당, 박은식
  6.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125쪽. ISBN 8971990368.
  7. 진명학교는 성공회 병천교회(1906년 설립)에서 운영하던 근대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1908년 설립되었다
  8. 성공회신문 2005년 12월 18일자, 성탄에 즈음하여 김구응을 생각하다,우덕기 신부(마가,성공회 병천교회)
  9.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조진탁
  10. 《디지털보훈신문》 (2006.8.8) 광복 61주년, 독립운동가 313명 포상
  1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6년 12월). 〈강병일〉, 《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548~551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1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년 12월). 〈이용원〉, 《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1325~1329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13. 현대인물-문용기, 익산문화원
  14.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 20,21쪽, 서문당, 박은식
  15. http://www.koreafocus.or.kr/design2/layout/content_print.asp?group_id=102423
  1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6/20090226017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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