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 윤치호 | |
|---|---|
윤치호 (1945년)
|
|
| 출생 | 1864년 음력 12월 26일 |
| 사망 | 1945년 12월 9일 (80세) 오후 4시경 |
| 사인 | 뇌일혈과 중풍, 일설에는 자살설 |
| 거주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경성부 종로방 견지동→중국 장쑤 성 상하이→미국→일제 강점기 경성부 종로방 견지동→미군정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견지동→개성부 송도면 |
| 국적 | |
| 별칭 | 호 좌옹(佐翁), 창씨명 이토 지코(伊東致昊) |
| 학력 | 미국 에모리 대학교 신학석사 |
| 직업 | 문신, 정치인, 사상가, 민권운동가, 독립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 교육자, 종교가 |
| 종교 | 유교(성리학)→개신교(감리교) |
| 배우자 | 진주 강씨, 마애방, 백매려, 2명의 첩 |
| 자녀 | 아들 윤영선, 윤봉성, 윤광선, 윤장선, 윤기선, 윤정선, 딸 윤봉희, 윤용희, 윤문희, 윤무희, 윤은희, 윤명희, 윤보희(음악가), 윤영희, 윤정희 |
| 부모 | 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이씨 이정무, 서모 다옥, 서모 김정순(金貞淳) |
| 친척 | 윤경희(친 누나), 윤영렬(숙부), 윤치왕(이복 동생), 윤치창(이복 동생), 윤치소(사촌), 윤치오(사촌), 윤치영(사촌), 윤보선(종질), 윤원선(종질), 윤연선(이복 조카), 윤영구(손자) |
| 웹사이트 | 해평윤씨 홈페이지 |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이토 지코(伊東致昊), 1864년 음력 12월 26일 ~ 1945년 양력 12월 9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이고 대한제국의 개혁, 민권운동가·언론인·교육자, 한국의 정치가·교육자·독립운동가·사상가·언론인·종교가이며 기독교운동가였다.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귀국, 독립협회 활동, 독립신문 발행인과 제2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연, 계몽활동과 민권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운동·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서재필이 강제추방된 이후 독립협회와 애국계몽운동 활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민중의 호응 미진, 정부와 황국협회 등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민중 역시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면서 실망,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고,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후 관직에 투신하여 덕원감리사 겸 부윤, 삼화감리, 외무부협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관하고 귀국하면서 서구 문물을 통한 계몽, 변화를 확신한다. 이후 한영서원,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뒤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교육활동으로는 한영서원을 창설하여 지도하고, 송도고보로 바꾸어 재단 이사장과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사립학교의 재단이사로도 참여,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노동을 경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지적, 농·공업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영서원의 학생들에게 농업, 목축 등의 실업교육을 지도했다. 사회활동으로는 YMCA청년회 총무·회장,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회장, 1929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한민족 대표자로 참석하였고,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 단원으로 만주에 다녀온 뒤 흥업구락부 회장 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는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9대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귀족원 의원 및 임전보국단 고문에 선임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기도 하였다.[1] 한국인 스스로 자치능력이 부족하다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도 일정 부분 거리를 두었다. 이솝 우화와 걸리버 여행기를 국내에 처음 번역해서 소개하였다. 또한 윤치호는 한국에서 최초로 자신의 노비를 전원 석방시켰다.
1930년 모교인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선조때의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흔의 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과 전주 이씨의 아들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 형이며,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었다. 박규수(朴珪壽)와 어윤중(魚允中)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호(號)는 좌옹(佐翁)이다.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출신.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출생과 가계 [편집]
좌옹 윤치호는 1864년 음력 12월 26일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서얼 출신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이일영(李日永)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치호의 위로는 2년(또는 3년) 연상의 친누나인 윤경희(尹慶姬)가 있었다. 그리고 서모 김정순(金貞淳)에게서는 30년 터울 이복 동생인 윤치왕(尹致旺), 윤치창(尹致昌) 등이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윤두수의 둘째 아들 예조판서를 지낸 윤흔(尹昕)의 후손이었다.[2]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윤택영 일가와는 먼 일족이었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 뒤 고조할아버지 윤발은 관직을 얻지 못했고,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을 지냈으나 일찍 사망한다. 증조부 윤득실의 대에 까지 경기도 수원부에서 거주했으나 수원 화성을 건축하기 위해 천안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그의 집안은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다.
할아버지 윤취동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아산으로 분가,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증조부 윤득실은 술을 좋아하다가 일찍 죽고 가세가 몰락했지만 일찍 고아가 됐던 할아버지 윤취동은 빈 손으로 재산을 마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와 석곡리에 여러 농지를 사들여 대지주가 되었다. 이후 할아버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아버지 윤웅렬, 숙부 윤영렬이 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할아버지 윤취동은 늦도록 아들이 없어 염수대에 기도를 드린 뒤 서자 웅렬과 영렬을 얻었다.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된 할아버지 윤취동과 역시 자수성가하여 관직에 오른 아버지와 숙부 덕에 윤치호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유년기에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충남 아산 둔포면 고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100칸에 가까운 대저택에서 생활하였는데, 이 저택은 아버지 윤웅렬 사후 매각되었다가 여러차례 주인이 바뀐 뒤 이복동생 윤치창이 매입하여 일시 거주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였고, 3세가 되기 전에 글을 읽었으며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버지 윤웅렬은 글재주가 있고 암기력이 좋은 장남 치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은 자신이 서자 출신[3] 이었다는 점이 아들과 자손들의 앞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유년기 [편집]
윤치호는 9세에 한성으로 유학하여 서당에 입학하여 2년간 한학을 배웠다. 1875년 11세 때부터 개화파 인사 서광범(徐光範)의 친척 김정언(金正言)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하였으며, 영특했던 그는 15세에 스승 김정언에게 과거에 응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 김정언의 인척 서광범이 그의 사랑에 있었는데 스승 김정언은 나이가 되지 않았다며 거절하였으나, 이를 목격한 김정언과 서광범은 그의 글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1879년 15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 진주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7년만인 1886년에 사별하였다. 부인 진주 강씨 역시 서자 출신이었으나 자신을 양반가문이라 속이고 그와 결혼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역시 서자였으므로 이해하려 하였으나 강씨는 그가 출타중인 사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발각되었고 그는 상심하게 되었다. 1885년 백랑 등 첩들을 정동 집으로 들이면서 본부인 강씨는 본가로 되돌려보냈다. 친정으로 돌려보낸 강씨 부인은 이듬해 사망한다.
아버지 윤웅렬이 향반에다가 서얼 출신 무관이라서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게 된 그는 열심히 한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한편 아버지 윤웅렬의 주선으로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생이 된다. 이때 그는 서재필, 김옥균, 서광범, 안경수, 홍영식 등을 만나게 되는데, 뒤에 그는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수학과 소년기 [편집]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실학과 외부 신문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중국 밖에도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서구의 선진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고, 이어 신분제 철폐, 서구 문물 개방 및 수용, 민중들의 권리 향상, 민중의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키게 된다. 또한 여성을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는 유교적 가치관 역시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1894년 중국 여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을 만나, 그해 3월 재혼한다. 마애방과의 사이에서 윤영선(尹永善), 윤봉성(尹鳳成, 요절) 윤광선(尹光善), 윤봉희(尹鳳姬), 윤용희(尹龍姬)를 두었다.
인내심이 강하고 배려가 깊던 마애방은 남편의 방황과 정치적 불운, 생계를 돌볼수 없는 환경, 유흥가 출입 등을 모두 너그럽게 이해하였고, 자신이 직접 길쌈과 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히려 마애방은 시대를 앞서간 남편 윤치호의 불행을 위로하였다. 그녀는 1905년에 병사하지만 윤치호는 오래도록 마애방을 그리워하였다. 마애방이 죽은 뒤에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혹은 '천당에 먼저 가 계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 윤웅렬은 무관이나 서얼출신으로 제2차 수신사 일행을 따라가 메이지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파 인사로 활약하였으며 교련병대 창설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은 높았지만 몰락한 향반가에다가 서얼이었던 신분 탓에 아들 치호가 문과 과거에 응시, 급제할 길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김옥균과 민영익과 접촉, 그들에게 부탁하여 아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였다. 1881년 1월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했다. 어윤중은 성리학자였지만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며 개화 사상에 눈떴기에 그에게도 기회가 닿는다면 일본, 청국 등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접하라는 말을 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개화승 이동인과도 교류하며 아들의 유학을 주선하였고, 그의 스승 어윤중 역시 그의 도일을 적극 추천, 지원하였다.
출국과 일본 유학 [편집]
아버지 윤웅렬 등의 노력으로 윤치호는 1881년 17세 때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조사(朝士)였던 어윤중의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선의 첫 공식적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서얼의 후예였던 그는 농업학교와 기술학교 중에 택일하게 되었으나 아버지 윤웅렬의 부탁과 노력으로 기술학교나 농업학교 대신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가까이하며 이노우에 가오루의 주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했다.
비상한 기억력과 암기력이 눈에 띄어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을 수시로 만나 면담했다. 일본 체류 중 그는 일본이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가 시대의 정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보다도 서양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를 한 뒤, 1882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밀레트(L. G. Millet)와 도쿄제국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등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여가에 그는 김옥균(金玉均)·서광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물과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 후쿠자와(福澤諭吉), 동인사의 경영자이며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당대 일본의 문명 개화론자을 만나 가까이 지냈다. 한편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지목된 아버지 윤웅렬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곧 귀국하였다. 윤웅렬은 일본에 있는 동안 아들과 함께 보냈다.
이때 영어를 배우는 것을 두고 고민하던 중 김옥균이 비밀리에 그에게 일본어와 영어를 익혀두라고 충고하였다. 그의 충고로 그는 일본어를 수학하고 뒤이어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여행을 하며 견문을 시찰하기도 했다. 동시에 낙후된 조국 조선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일본을 통해 신분 차별이 없고, 적서 차별이 없고, 남녀 차별이 없는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조선의 문명개화에 뜻을 두고 본격적인 개방, 문명개화노선을 걷게 되었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4]
김씨, 조씨에 이어 민씨 척족 세력이 전권을 장악하고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임오군란 무렵 유길준과 윤치호는 대원군을 타도하기 위한 일본군의 파병을 청하는 서한을 일본정부에 보냈다. 양쪽 모두 모처럼 시작된 개화가 무산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5]
청년기 [편집]
조선인 영어 통역사 [편집]
1883년 1월~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주일본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 씨에게 영어를 배웠다.[4]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체류하였고 이후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접한뒤, 직접 신학문을 배웠다. 당시 그는 미국 사회에서 인맥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에 따라 공개채용하는 제도를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또 1883년 5월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될 때는 초대 주한 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원어민이 아닌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어설픈 수준의 영어 실력이었지만 당시 영어 통역관이 없는 조선에서는 그의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통역관과 외무 아문의 주사로 활동하는 중에도 그는 틈틈이 미국인들을 찾아가 영어를 배우며 철자와 어투를 고치며 영어 실력을 가다듬곤 했다. 윤치호는 서서히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어법과 어투를 고쳐나갔는데, 1884년 봄에 이르면 당시 한글에 없던 단어까지도 명확하게 파악할 정도의 영어 구사 실력을 갖추게 된다.
2003년 그의 서한을 검토했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가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1883년~1884년에 그가 작성한 영문 문서를 보면 요즘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훨씬 고급으로 보인다[4] 고 평하였다. 그가 영문으로 번역한, 조선의 첫 공식적 도미(渡美)사절로 1883년에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신임장[6] 을 보면“비준”(批准:ratification)처럼 그 당시에 한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다 보입니다.웬만한 조선 선비 같았으면, 한자로 써도 정확하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윤치호가 이미 영어로 파악했다는 것이다.[4]
귀국과 갑신정변 [편집]
1883년 5월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오가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를 연결시키며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 배제와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과 민중들의 정치참여와 참정권 부여를 역설했다. 동시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의 민권사상과 문물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해 아버지 윤웅렬이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내린 것과, 별기군을 유임시킨 일로 탄핵을 받자 아버지 윤웅렬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상소를 써서 올리기도 했다.
| “ | 신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은 외람되게 특별한 은혜를 입고 나아가 곤수(梱帥)의 직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삼가 북백(北伯) 임한수(林翰洙)가 북청(北靑) 유생(儒生) 조면한(趙冕漢) 등의 말에 근거해서 정부(政府)에 올린 장계의 내용을 보니, 논계(論啓)한 것은 터무니없이 날조하여 모함한 것이 끝이 없었는데, 심지어 가렴주구 하였다고 말하기까지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의 아버지는 북청 관리가 백성들의 돈 1만 냥을 더 거둔 것을 조사해 내어 민간들에게 돌려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가렴주구라고 한다면 관름(官廩)을 착취하고 아전들의 급료에서 거두어들였다는 말입니까?
또 ‘열 집에 한 명의 병정을 내면서 어찌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대개 장정을 뽑아서 새로 군사 편제를 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본토에서 첨병(簽兵)을 모집하지 않고 어느 지방의 백성들을 모집하겠습니까? |
” |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 직전까지 그는 온건파 개화당의 일원으로 자주독립과 참정권,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영어 실력의 부족함을 느낀 그는 다시 주조선미국 공사관의 직원들과 교류하며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여 주조선미국공사관 직원 베르나든(J. B. Bernadon)이 이를 수락하였다. 5월 그는 1개월간 베르나든에게 하루 한 시간씩 영어 개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초기에 윤치호는 정변 계획을 접하고 혁명의 성공을 기대하였다. 당시 김옥균을 믿고 따랐던 그는 18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윤치호는 아버지인 윤웅렬과 함께 '개화당의 급진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개화당의 급진성을 겨냥, 근신을 촉구하는 입장을 보였다.[7][8] 며칠 뒤 윤치호는 김옥균에게 "가친(아버지)이 기회를 보고, 변화를 엿보아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7][9]"라는 말을 전했다.
서광범,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가까이 지냈고 혁명의 성공을 내심 기대하였지만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는 개량적 근대화론자로서, 주도층과의 시국관 차이로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10]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음력 10월 18일 윤치호와 윤웅렬은 "(개화당)이 무식하여 이치를 모르고, 무지하여 시세에 어두운 것"이라고 논했다.[7][11] 윤치호는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는데 고종 만을 믿을 수는 없다고 봤다.
그러나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10] 을 느껴 출국을 결심하게 된다. 사실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감했던 그는 망명할 계획을 미리 세워놓기도 했다.
유학과 서구 문물 수용 [편집]
갑신정변의 실패와 망명 [편집]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4년 12월 27일 그는 해외로 나갈 뜻을 건의했고, 1885년 1월 고종의 윤허를 얻어 1월 19일 출국한다. 이때 척족 대신들은 그가 유학을 빙자하여 도피하려 한다고 탄핵했으나 고종의 특별 배려로 출국할수 있었다. 고종은 그에게 지도(知道)라는 친필 서명을 한 서신을 그에게 내려주어 출국을 허용하였다. 명성황후는 그에게 어느날 꿈을 꾸고 보니 네가 앞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 같다고 점을 쳐주었는데, 훗날 윤치호는 왕비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1885년 1월 19일 오후 프트 공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배를 타고 인천항을 출발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월 23일 청나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고 싶었으나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청나라에서 유학하였다. 상하이에 도착 직후, 윤치호는 그길로 청나라로 망명하여 주한미국 총영사 G. 스탈을 찾아갔다. 스탈의 알선으로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 the Anglo-Chinese College)[12] 에 입학했다. 그러나 척족 대신들은 그를 제거할 자객을 상하이로 보낸다.
망명 직후 조선에서 파견한 자객들을 피하여 스탈의 연락을 받은 미국인의 집에 은신하였다. 이후 며칠동안 윤치호는 갑신정변의 실패와 성급한 계획에 대한 통한, 동지들의 아까운 희생을 슬퍼하며 통곡,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직후 그는 아무일도 못했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고국에서 어머니가 부쳐주는 생활비에 의존하며 겨우 연명하였다.
방황과 재각오 [편집]
갑신정변의 실패에 절망한 그는 상하이에서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한달 가까이 여관방에 틀어박혀 크게 대성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상하이 체류 한달여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려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20대 초반의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색루'(사창가)에 수시로 출입했고, 음주에 몰두[13] 했다. 후일 정운현은 그의 <일기>(日記)에 따르면 초기 2년간(1885년 2월∼1887년 2월) 음주 횟수 67회, 밤의 여성과 동침횟수는 11회. 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고 분석하였다.[14] 각혈하여 거리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개혁의 실패에 좌절한 그는 술과 사창가에서 살았고, 양깅방의 일본인 기생 오꼬마상(낙랑)에게 2백원 이상의 거금이나 민괴 향수 등을 선물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를 암살하려 파견된 자객들 역시 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그대로 되돌아갔고, 더이상 그를 추격하는 추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방황하던 중 그를 발견한 한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를 만나 그의 설득에 감화받고, 선교사의 인도로 교회에 나간 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태어나기로 다짐하고 공부에 몰두한다. 또한 목장과 밭일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청나라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를 보고 처음에는 구토를 하는 수준이었으나 이내 적응한다. 청나라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에 실망한 그는 중화사상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선교사를 통해 그는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더이상 사창가를 출입하거나 음주와 흡연을 그만두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뒤로도 1년 이상을 사창가에 출입하게 된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는 다시 조선의 개화를 위해 투신할 것을 재다짐한다.
상하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윤치호는 더럽고 냄새 나는 중국인을 보며 조선인의 미개한 삶을 더욱 부끄럽게 생각했다.
청인(淸人)의 집은 음침하기 측량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
— “여인의 악수에도 놀랐던 그들, 문명(文明)을 동경하다”, 《조선일보》, 2009.12.05 작성.
당시까지도 조선내에 중국을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고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의 은혜를 외치던 소중화주의자들을 심히 경멸하게 된다.[15] 대역무도(大逆無道)의 주범 김옥균의 잔당으로 몰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선을 떠나야 했던 윤치호는 고국과의 지리적 이별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단절을 하게 된다. 서자(庶子)의 아들이었던 윤치호는 강요된 출국 이전에도 그를 진짜 양반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 사회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16]
개신교 개종과 중국 유학 생활 [편집]
중서서원에서 3년간 공부하며 윤치호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중서서원 재학 동안 열심히 서양의 문물을 접하며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던 조선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낙후된 조선과 중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낙후된 조선 사회의 현실에 절망, 조선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청국(淸國) 사회에 대한 그의 소감은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이었다. 반면 일본은 ‘동양의 한 도원(桃園)’이었다.[14] 윤치호에게는 본부인 진주강씨 외에 두 명의 첩이 있었던 듯 하다. 그가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두번째 첩은 다른 남자에게 개가했다.[17] 1886년에는 그의 첫 부인인 진주강씨가 사망했다. 그가 상하이로 망명하고,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능주로 유배되었을 무렵이었다.[18]
이후 윤치호는 10여 년간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문물을 접하고, 서구 민권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그는 부유했던 집안의 지원과 동시에 그를 높이 평가한 개신교 선교사들,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 일본인 개화인사 등 여러 곳에서 지원받으며 마음껏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영 J. 알렌과 W. B. 보넬 교수의 영향으로 개신교에 귀의를 결심하여 1887년 4월 3일 상하이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가 개신교 신자가 되게 된 배경에는 4년 여되는 기간 동안의 개신교 연구와 수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19].
그는 노동을 천시, 경시하는 사농공상의 풍조와 출세욕, 관직열에 빠진 조선의 배관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학기간 중 그는 서구의 민권사상과 합리주의, 직업윤리 의식, 민중의 참정권을 수용,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 “ | 내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견디겠도다. | ” |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8년 12월 29일자
|
| “ |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 ” |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90년 5월 18일자[20]
|
1890년대 초반 미국 체류시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을 최고의 진리로 받아들여 중국인들에 대한 미국 사회의 무시와 억압과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차별 행위까지도 옹호했다.[21] 그러나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시절 [편집]
1888년 중국 짱수 성 상하이에서 일하던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교영어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중에 그는 감옥의 수인선교를 위해 1년 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미국인 죄인들에게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19] 조지아 주에 가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기도 했다.[19]
한편으로 그는 학비걱정이나 일본 학생친구들과의 대화, 교수들의 초청과 교제, 자신의 이성이나 성적인 혹은 음주문제의 고민, 그 절제를 위한 노력과 실패 등도 언급하며 자신의 수련의 결의를 때로 ‘머리를 깎는 삭발’로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떠나지 않는 고뇌는 역시 약소하고 미개하며 썩은 관료들로 인해 피폐한 조선을 구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여러 미국의 스승들 중에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와 성경사 교수 호스, 워런 A. 캔들러(Warren A. Candler) 총장 등은 특별한 영향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특히 캔들러는 윤치호의 정치 사회 역사의식이나 기독교적 원숙한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19]
이때 그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 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14] 내심 미국의 민주주의와 청교도적 합리주의 사상과 일한만큼 받는다는 사상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차별대우를 보고 그는 분개했다.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그는 주로 신학(神學)과 영어 등을 배웠으며, 1891년 초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밴더빌트 졸업 직후 윤치호는 조지아 주로 건너가 조지아 주 카빙턴(Covington)에 있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1891년 가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한다. 이 기간 중 그는 캔들러 박사, 호스 박사, 에비 호스 부인, 조선에 있던 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이씨, 삼촌 윤영렬 등이 보내주는 용돈 외에도, 스스로 강연과 상점 점원, 사탕수수 농장, 식당 서빙, 오렌지 농장, 커피 농장의 열매 수확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한다. 낮선 환경에서 넉넉치 않은 환경은 그의 체력과 학업에 어느정도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에모리 대학 수학과 졸업 [편집]
그러나 다시 1891년 미국 조지아 주 옥스퍼드에 정착한 뒤 다시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등에서 2년간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을 수학하였다. 1893년 가을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인 중 손꼽히는 미국내 대학 졸업생의 한사람이었다. 한편 그에게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미국 남감리교회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배편으로 귀국한다.
귀국 전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22]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22] 윤치호는 서재필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 윤치호는 기독교와 민주주의, 과학문명 등을 목격하였고, 기독교 사상, 민주주의, 과학 문명에 기초한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경험하면서[10] 조선의 체제에 실망을 느끼는 한편 이를 조선의 근대화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적 기초는 '힘의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으로 변모해갔으며, 사회개혁에서는 미개한 전통사회를 선교와 교육이라는 국민개조를 통하여 근대사회를 형성한다는 국민계몽의 이상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조선 사회에 대한 경멸감도 품기도 했다.
졸업과 귀국 [편집]
1893년 9월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교의 캔들러 총장에게 $200를 기탁하며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9]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세례와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음을 감사히 여기며 조선에도 그와 같은 교육이 시행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 “ | 내가 모은 돈 200달러를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그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23] | ” |
윤치호는 갑신정변의 혼란 속에서 중국 상하이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했다. 수구파의 승리로 개혁이 좌절되고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유학을 마친 윤치호는 학교를 떠나면서 원장 켄들러 박사에게 이같은 편지를 썼다.[23] 이 일을 계기로 남감리회는 동양 선교관리 담당 핸드릭스 감독에게 선교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리드 선교사가 답사차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23] 그의 편지를 계기로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인천과 경성을 비롯하여 조선에 공식 포교를 시작하였다.
1894년 3월 중국 여성 마애방(馬愛芳)과 재혼하였다. 마애방과의 결혼은 연애결혼이었다.[18] 마애방은 미국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맥티여학교를 졸업한 여성으로[18] 박노자는 마애방이 기독교 신도이자 매우 서구화된 중국 여성이라고 지목했다.[21] 마애방과의 사이에서는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가 태어났다.[24] 귀국 직후 그는 캔들러 박사가 보낸 남감리교 선교사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조선의 풍속과 경성부, 인천에 거처와 예배당지를 마련하는데 동참, 이들의 통역을 하고 남감리교회 선교사들의 정착을 적극 도와주었다.
차별대우와 인종주의적 사고로 변화 [편집]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주의적, 흑인을 차별하는 태도를 목격하면서 백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미국 체류 중 황인종을 멸시하는 백인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가끔 얻어맞기도 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을 거절당해 정거장에서 밤을 지샜는가 하면,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인 선교사에게마저 늘 은근히 - 그리고 가끔은 매우 노골적으로 - “왕따”당하는 처지였다.[4] 귀국 이후에 조선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들도 비슷하게 그를 대우했다.
당시의 그에 대해 후일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의 마음 상태[25]'를 지적하기도 했다.
| “ |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 ” |
|
— 1893년 11월 1일자 일기[26]
|
그는 평소 조선인들의 불결한 위생과 겉치레, 감정적 대응 등을 내심 경멸해왔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사상과 일한 만큼만 댓가를 받는다는 청교도 정신, 합리주의의 수용을 통해 이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평소 기독교선교사들로부터도 자기 일 처리도 못하는 작은 아이, 원주민,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의 대접을 늘 받아 온 윤치호는, 인종주의야말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4] 그 뒤 그는 조선에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정신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봤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사상과 개척정신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심 백인종을 혐오하는 이중적인 태도와 인종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어느 교회에서 남부 출신 남감리교회 목사들이 예배 시간에 흑인을 박멸해야 된다는 설교,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해야 된다는 설교를 듣고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목사인가 기독교인인가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흑인이 백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는 분노하면서도 흑인에 대해서는 1893년 2월 17일자 일기에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20] 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귀국 이후 그는 국내 인사들이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의존하거나 일제와는 다른 선량한 국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비판, 경계하기도 했다.
청나라 체류, 중서서원 교사 생활 [편집]
1893년 11월 배를 타고 청나라의 상하이에 도착했다. 청나라로 건너간 윤치호는 이듬해 7월 25일 청일 전쟁이 터지자 8월 모교인 상하이 중서서원의 교사가 되었다. 1893년 8월부터 1895년 1월까지 그는 중서학원에서 영어, 영문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이나 청나라인,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칠 만큼의 영어 회화 실력을 갖추었다.
청나라에 체류 중 그는 남궁억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조선을 상징할 국화를 결정하기 위해 은신해 있는 윤치호를 찾아왔다. 1893년에는 남궁억과 의논해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했으며 그로부터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를 넣었다고 전해진다.[27]
청나라 상하이에서 체류하면서 지냈을때인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는 김옥균과 홍종우등 일행을 맡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28][29]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28][29]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텔)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다음날 3월 28일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저격, 암살당했다.[28][29]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개화파, 계몽 활동 [편집]
귀국과 초기 개화파 시절 [편집]
1895년(고종 32년) 2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 2월 13일 배편으로 입국하여 돌아왔다. 귀국 후 김홍집 내각에서 외무부협판을 지냈다. 박영효 내각에서는[10]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끊이지 않았고, 그는 김홍집 등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경호원을 데리고 다녔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측에서 그에게 경호원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해왔으나 마음만 받겠다며 조용히 거절하였다.
그 뒤 총리 대신 비서관을 거쳐 1895년 6월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이상재(李商在), 서재필,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 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했고,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였다.[30] 윤치호는 1895년 귀국한 이후 개화파 정권에서 김홍집-유길준 일파와 박영효 일파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개혁 정책 추진에만 힘을 쏟았다.[31] 또한 강연 활동을 다니며 서구 세계를 알지 못하는 민초와 식자들에게 미국과 유럽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선진문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한편으로 독립신문사의 주필,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칼럼과 논설활동 및 신문 발행 제반에 직접 참여하였고, 황국협회(皇國協會)와 척족 정권의 압력과 맞서 자신의 재산을 비용으로 투자하여 신문과 독립협회의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한성부의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에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32]
을미사변 전후 [편집]
1895년 8월 윤치호는 함경남도 북청에 주재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감독 비숍 핸드릭스(Bishop E.R. Hendrix) 등에게 조선의 선교를 위한 방문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19] 그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은 헨드릭스는 1895년 10월 13일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 F. Reid) 등과 함께 한성에 와 남감리교의 시작이라 할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33] 그해 9월 26일 사촌동생 윤치오와 함께 특파대사 수행원에 임명되었다.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하자 그는 일본 및 일본인의 협력자들을 규탄했다. 조선땅을 처음 밟은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쉽게 찾아내서 살해하는 데는 조선인 협력자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명성황후의 암살에 국내에서 자발적으로 가담한 조선인 가담자와 내통한 조선인 고위 인사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조선인 고위층의 민비 암살 협력설은 무시당하였다. 그의 주장은 그의 일기에도 나타나는데,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34]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34] 한편 유길준은 그의 친한 친구이자 그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몇안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시중의 여론에는 반대했다. 무능했으며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였고, 부패한 친정 일가들을 등용한 점과 무속인과 점술가들을 맹신해서 고위직을 내리는 등의 미신행위 등으로 국정의 문란을 초래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인 협력자들이 왜 나타났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의 반론에 시중의 시선은 냉담하였다. 유길준은 자신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것을 폭로한 윤치호에 대해 불쾌히 여겼으나 다시 그를 가까이한다. 을미사변 뒤로도 윤치호는 유길준과 친하게 지냈고, 유길준 사후에도 유길준의 아들 유만겸과 유억겸 형제, 동생 유성준 등과도 계속 가까이 지냈다.
은거 생활과 개혁활동 준비 [편집]
1895년 12월 독립협회의 동지 서재필이 복권되어 귀국했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35] 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던 것이다.[35]
귀국 직후 서재필은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생활 중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반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서재필에게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조정과 무지한 민중들에 대한 원한과 경멸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서재필은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되도록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일부 기록해두었다.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윤치호의 권고를 거절한다.
| “ | 서재필은 갑신정변 사건으로 천민(賤民)이 되어 자살한 전처의 무덤을 찾아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거지꼴이 된 양부(養父)가 찾아오자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냉혹하고 거만한 사람이다. | ” |
그는 갑신정변 직후의 쓰라린 기억을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고, 오히려 냉정해지려 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윤치호를 비롯한 동지들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반감을 주게 된다. 한편 서재필은 다른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히 냉담하게 대하였다.
| “ | 그의 미국인 고우는 그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 ” |
|
— 윤치호 일기 1898년 1월 15일자
|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가 그에게 구걸하러 오는 조선인 거지를 발로 걷어차고 모욕을 해도 그는 이를 지켜보면서 방관하였고 윤치호는 이를 보고 불쾌히 여겼다. 영어를 주로 구사하는 그의 태도를 의문스럽게 여긴 윤치호는 왜 영어만 쓰느냐고 물었고 그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를 알던 윤치호는 '나는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는 모든 것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 사절단 파견과 베트남 방문 [편집]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35] 서재필, 이승만 등에게 양해를 구한뒤 러시아 파견 사절단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징계명령이 내려졌으나 고종의 특사로 철회되었고, 2월 12일 학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896년 4월 1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대한제국의 사절단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 4월 11일 러시아로 가는 길에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임명되었다.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그는 러시아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 비해서 영토는 넓으나 기술발전이 훨씬 느렸던 사실을 눈치챘으나, 러시아의 군사력만은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차르와 제실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인사들의 움직임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또한 그는 장차 러시아가 군사 강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와 수행원들은 열차편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때 윤치호의 귀국은 늦어졌는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프랑스에 들렸다 오느라고 늦[35] 어졌다.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그해 유럽을 순방하고 1896년 12월 윤치호는 유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트남의 항구 사이공(西貢)에 들렀다.[36] 사이공을 체류할 때 윤치호는 프랑스인들이 베트남 농민들과 상인들에게서 빼앗은 세금으로 닦은 사이공의 '파리 수준 이상'의 깨끗한 도로들을 보고 감격했다.[36] 1896년 사이공에서 윤치호는 일본의 공식 사절단을 만났다.[36][37] 사이공을 떠난 뒤에 홍콩(香港)으로 가서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한 건물을 본 후 "유럽의 인종이 확실히 자연을 정복하는 기술을 잘 익혔다."는 결론을 내렸다.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서구 열강 세력에 대해 "신대륙의 초원과 밀림을 새로운 제국과 공화국으로 만들"만큼 세계 문명화의 큰 일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우월한 인종'이라 평가했다.[36]
독립협회 활동과 사회 활동 [편집]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편집]
귀국 후 1897년 중반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윤치호는 열정적으로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38] 윤치호는 배재학당 졸업식 연설에 참석하였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의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38]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38] 토론회의 호응도는 높았고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39]
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35]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35]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1893년 에모리 대학교 졸업 직후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22] 1897년 8월 28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부임했으며, 10월 28일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독립협회 참가 이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승만·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와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에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反) 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여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898년 이종일, 남궁 억, 사촌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京城新問) 창간에 참여하였다. 학무 아문참의를 거쳐 1898년 7월 8일 다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7월 22일 국왕에게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소득이 없었다. 도리어 구 관료들을 탄핵한 상소가 구 관료, 척신 세력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는 배척과 동시에 황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획책하려 한다는 모함, 음해를 당하기도 한다.
기독교 선교 활동 [편집]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도 그는 은근히 무시와 모욕을 당하곤 했다.[4]
| “ | 나에게 짐을 미리 배에다가 실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던 휴제스(Hughes) 부인(한 선교사의 부인 - 인용자의 주)이 끝내 내가 너무 지나치게 강요를 해서 대단히 미안한데, 우리 선교사 같으면 당신네들을 보통 작은 아이로 보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습관이 나에게도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강요를 합니다. 당신이 우리네 선교사들을 아시잖아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 내 마음을 질러버렸다. 그녀는, 우리 원주민들이 우리 일을 스스로 처리 못할 만큼 다 우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원주민들을 그렇게 보는 그들이, 민감한 일본인들의 분노를 그토록 많이 유발하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내가 선교사의 조수가 되고 싶지 않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많은 영적인 보스 밑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휴제스 부인에 대해서 하등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녀는 충실하면서 선심이 많은 선교사인데, 이처럼 우리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것이, 인종주의적인 오만과 편견이 강한 미국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 ” |
|
— 윤치호 일기, 1897년 4월 23일자
|
| “ | 오늘 아침에 레르(Loehr) 목사가 중국 학생 신도들에게 교회에서 예수가 악마를 이겨서 천당을 쟁취하셨듯이 일본이 중국을 이겨 대만을 얻었다고 설교했다. (…) 중국인들에게 설교하는 자리에서 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이 왜 예수에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선교사 자신들이 그들의 주택의 접견실에서 원주민들을 절대 대접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원주민들도 마음을 열 리가 없다. | ” |
|
— 윤치호 일기, 1897년 6월 31일자
|
선교사들의 고압적이고 거만한 태도 내지는 원주민에 대한 멸시에 처음에는 의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이자 반감을 갖게 된다.
| “ | 1899년에 언더우드(Underwood)박사와 그 부인이 (내가 지방관으로 있었던) 원산으로 잠깐 들렸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그 부인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이 1주일 후에 원산을 떠날 때 우리 집을 지나가면서도 우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 예의를 정확하게 지키는 데다 우리에게도 자신들에게 예의 지키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그들이기에, 그러한 행실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우리에게 인류 평등의 원칙이 명백하게 적혀 있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처럼 그 원칙을 자신들이 위반하는 것이다 (…) 그들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나는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과 되도록이면 사교하지 않으려고 한다. | ” |
|
— 윤치호 일기, 1903년 1월 15일자
|
백인 선교사들의 이런 태도는 윤치호로 하여금 실망과 냉소를 가져다주었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적인 태도를 조국에서도 목격하게 된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기독교 사상만이 곧 진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기독교 선교 사업을 도와주는 일에서 한발 물러서,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노비 해방과 개혁안 [편집]
노비 해방 운동 추진 [편집]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한다. 한편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 명의 회중이 참석 한 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40]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상 에 대단히 불가하다' 를 선언 하였다. 이에 따라 전 주의 선정에 의거 하여, 주제 에 대한 찬성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주제에 대한 반대편 은 토론 이 잘못된 방향 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 에 자유롭게 토론하였다.[40]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 의 필요한 제도 이며 노비 제도(奴婢制度)는 그러한 용역 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 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 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 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 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 을 들어 설명하였다.[41]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 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 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 를 끝내었다.[41]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개혁안 제출과 탄압 [편집]
1897년,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강연하며 윤치호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 대표자를 선출하여 백성들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정폐지론이나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42] 군주의 존재는 별개로 국민이 선발한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되고, 관료임면권에 있어서는 군주나 인사임명권자만의 의견이 아닌 백성들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된다고 봤다.
황국협회 측은 '윤치호 대통령설', '박영효 대통령설' 등을 흘려 독립협회를 곤경에 몰아넣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43] 다.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구성하고 윤치호 자신은 대통령 내지는 부통령이 될 것이라는 루머가 시중에 유포되자 윤치호는 은신처를 물색했다.
이후 서재필의 암살이 불가능하다고 본 수구파에 의해 서재필이 국외 추방당하자[44] 조선 체류 중 서재필은 죽은 부인의 묘를 한번도 찾아 돌보지 않았는데 1898년 1월 15일, 갑신정변으로 고신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된 서재필의 전 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그에게 2달러의 돈을 주고 쫓아냈다. 윤치호는 이를 보고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지탄했다.
1898년 3월 8일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정교(鄭喬)와 최정식(崔廷植) 등은 그에게 시골로의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후 은신해있던 그는 서재필과 함께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를 주관한다. 3월 16일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수원부유수로 임명되면서 공직과 협회직을 겸할수 없으므로 서재필이 회장이 되었다. 3월 21일부터는 독립협회 회장 대리로 활동했다. 그해 5월 14일 서재필이 추방령에 의해 용산을 출발, 미국으로 추방되면서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독립협회 강제 해산 [편집]
1898년 5월 그는 이상재 등과 함께 서재필의 추방을 반대하는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출국을 만류하였으나, 서재필은 귀국 정부에서 나를 해고하였으니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여 경악하였다.
서재필이 추방된 뒤 그는 독립협회를 이끌어나가게 됐고 1898년 8월 제2대 독립협회회장에 선출 되었다. 10월의 만민공동회를 주최할 때는, 헌의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 11월 그는 최인환(崔寅煥)의 피습을 당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최인환은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의 측근이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최인환은 곧 경무청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대한제국 조정의 견제를 받다가 1898년 12월 강제적인 정부의 해산조처로 해산당하였다. 후속 조치로 12월 헌의 육조에 서명한 대신들이 파면당하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혁파와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킨 관보를 보고[45] 고종과 정부, 일본과 러시아를 비난하였다.
| “ | 이것이 국왕이라니! 어떠한 거짓말을 잘 하는 배신적인 겁쟁이라도 이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비열한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는 친일노예 유기환(兪箕煥)과 친러악당 조병식(趙秉式)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이 틀림없이 모종의 이권을 위하여 이 사건에 개입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 저주받을 일본놈들! 나는 그들이 대한의 마지막 희망인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유를 (민중들이) 알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45] |
” |
독립협회의 해산에 외국 세력을 등에 업은 자들의 농간이 작용했고, 그는 일본의 앞잡이로 유기환, 이완용 등을, 러시아파 조병식 등을 비판, 성토했다. 한편 그는 조선이 살 길로 미국과의 수교가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외세의 압력과 좌절 [편집]
이처럼 그는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고종과 수구파,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결탁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고종의 배신적인 비열한 행위를 매도하고, 일본의 탐욕적이고 간교한 행동을 저주했다.[45] 동시에 자신을 황제에 불충하는 역적으로 보는 민중들의 시선에도 크게 실망, 좌절하게 된다. 독립협회는 실패했고, 민중들은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게 되자 실망한 그는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된다.
그는 당시 대한제국 조정을 휘젓던 친일파와 친러파 모두를 매국노로 봤다. 그는 국익보다 개인의 이익과 정파의 이권과 이익을 위해 돈과 폭력배, 심지어는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기성 정치인들의 행각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친일파로 변절한 이완용에 대해서 시종일관 적개심과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그해 양력 11월 23일, 12월 15일~22일, 한성 판윤을 역임하였다.[46]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뜻이 없던 그는 사직할 의사를 내비쳤고, 12월 17일과 12월 18일 한성 판윤직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고, 12월 22일 면직되었다. 12월 22일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에 임명되었다. 이 기간 중 윤치호는 여러 번 탄핵과 제거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1898년 12월 24일 그를 제거하려는 대신들의 탄핵 상소가 있었다. 1899년 1월 2일 심상희(沈相禧) 등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윤치호와 고영근(高永根)에게 역적률로 다스릴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치호는 생명의 위험을 피하여 수시로 은신, 숨어 다녀야 했다.
| “ | 이 수치스러운 조선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왕조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정부는 500여년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47] | ” |
그는 조선의 군주들 중에서도 세종대왕이나 정조 같은 인물들은 예외로 보았다. 그러나 세습체제 하에서의 군주와 정치인들은 수준이 저질적인 인물들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보고 세습화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대를 이어서 정치를 하더라도 자기 실력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편집]
독립신문의 주필과 발행인을 하던 그는 신문사를 떠맡게 되어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이 되었으나, 관직에 임용되면서 사퇴하였고, 1899년 이후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탄압·해산 시 외국인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1899년 1월 7일자로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에 임명되었고, 윤치호는 1899년 2월 2일 이를 수락하였다.[48]
후에 유영렬은 '민중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윤치호에 대한 이같은 조처는 당시 법부대신 윤웅렬의 노력과 윤치호에 대한 고종의 친애감, 그리고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윤치호와 일부 관료들과의 친분관계가 트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았다.[48] 한편 윤치호 자신이 개화운동을 포기하고 타협한 것에 대하여 유영렬은 '윤치호에 대한 감리사직의 임명은 일종의 회유적 추방이었으며, 윤치호의 감리사직 수락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던 것[48]'이라고 보았다. 반정부 민권운동의 최고지도자가, 그것도.[48] 민중지도자들이 대거 체포 구금되는 상황에서, 극복의 대상인 수구반동하의 지방관직을 수락한 사실은 일종의 변절적 자세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전통적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의 불철저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49] 고 해석하였다.
1899년 1월 그에게 함경남도 원산부윤으로 임명되리라는 설이 돌았다. 1월 16일 오후 7시경 은밀히 일본인 집에 피신한 고영근의 행방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 윤치호를 만났던 고영근은 그에게 원산부윤직에 나갈 것이냐고 물었고, 윤치호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부대신으로 승진한 것은 만민공동회 덕택이며, 윤웅렬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산에 가담했던 척신파 대신 민영기와의 친분관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고영근의 언급에 불쾌했으나 논쟁을 하면 감정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 보고 언급을 회피하고 헤어졌다. 1899년 1월 그는 중추원 부의장을 사퇴하였고[50], 1월초 그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떠났다.[49]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활동하며, 개화파와 수구파 양쪽과 친분관계를 형성한 아버지 윤웅렬의 중립적인 태도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이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을 민중의 어리석음의 탓으로 보고, 민중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49] 이후 민족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타협적 개량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한일 합방 이후 1915년 무렵부터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독립불능론 내지 독립무용론으로 변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원산에 도착했던 윤치호는 '원산 사람들은 공공정신(에티켓)이 없고 구습과 미신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무지하고 게으르다.'라고 하고, '이 인종의 피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 그리고 새로운 종교를 갖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확신했다.[49]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민중을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윤치호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화를 당연한 벌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원산감리 시절 비서로 먼 일가인 윤직선(尹稷善)을 채용했는데, 윤직선은 후일 동화작가 윤극영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51]
외직 발령과 애민태과 [편집]
이후 윤치호는 계몽운동에 진력하며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실력 양성론은 후일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독립운동 세력은 김좌진, 홍범도 같은 무력 투쟁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이 큰 축을 이루고 있었고, 양자 사이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뭐든 해도 된다는 집단이 존재했다. 이들 제3그룹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경제 자립 기반 확보와, 교육 활동 및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무관 양성에 힘썼다.
1899년 이후 윤치호는 외직에 임명되었다. 1899년 원산감리로 부임한 뒤, 1901년 6월에는 다시 함경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으로 재임명되었다. 이어 원산항재판소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좌옹이 처음 덕원 감리가 된 것은 조병식 내각이 그를 중앙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의외로 치적이 훌륭하여 좌옹이 명성이 날로 높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은 다시 불안해져서 독립협회 시대의 정적이던 보부상들을 비밀히 파송시켜 좌옹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52] 나중에는 암행어사까지 출동시켜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政體)'라는 죄명으로 봉고파직을 시켰다.[52]
1902년 7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7월 12일 겸 삼화항재판소 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50] 로 발령되었다. 1902년부터 그는 기독교 남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이 경성부 종로방 고간동에 세운 캐롤라이나 학당의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천안, 직산, 무안군수 재직 [편집]
1903년 1월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7월 천안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광산 채굴을 하며 조선인을 함부로 잡아서 구타하던 백인 사업가를 유창한 영어로 호통쳐서 횡포를 막았다. 1904년 2월 무안감리로 발령받았다가 3월 12일 다시 외부협판 겸 칙임관 3등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있으며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3국제휴론'을 주장했으며, 일본을 비판하였으나 러일전쟁은 동양과 서양인의 전쟁으로 간주하여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한국의 장래를 비판적,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윤치호는 중앙 정계에서 좌절된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의 이상을 제한된 지방에서나마 실현시키고자 진력하였다.[53] 그러나 실효성은 없었고, 윤치호의 이와 같은 치적도 결과적으로는 독립협회 해체 후에 강화된 보수 반동정치에 협조하는 것이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53] 윤치호 역시 민권사상과 참정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황제에 대항하려는 역적 집단으로 보는 민중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윤치호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림을 받게 되었다.[49] 그러나 윤치호는 여전히 보수적 정치체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그 이념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교(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53] 윤치호는 1904년 잠시 군부대신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실망 [편집]
1904년(광무 7년) 김규식, 이상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20일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9월 주러시아 특파대사 이범진(李範晉)에게 귀국하라는 전보를 보냈으나, 귀국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12월 15일 관제 개정소 의정관(官制改正所議政官)에 임명되었다.
1905년 2월 14일 재혼한 아내 마애방(馬愛芳·1871~1905)이 아이를 낳다가 자궁외 임신으로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평소에 중국과 중국인들을 경멸, 야만시하는 윤치호였지만, 부인 마애방만큼은 거의 끔찍하다 할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54] 마애방이 요절한 뒤에 ‘하늘에 가 계시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인 윤치호의 영문 일기를 썼다.[54]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55] 윤치호는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55] 한국 조정에서는 민영환 이외 이준, 이상재, 이용익, 윤치호, 그리고 미국인으로 서울에 와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반일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55] 그리고 앨리스양에게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리놓아줄 것을 부탁했고, 앨리스양은 황제의 국서를 지닌 특사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쾌히 응낙했다.[55]
을사조약 직전 [편집]
미국을 정의와 자유의 국가라고 생각한 윤치호는 이번 일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고 한국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7월에 있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알게 되면서 윤치호는 미국에 대한 기대감 만큼 큰 실망감을 품게 된다. 이후 그는 세계의 정세는 이상이나 정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1905년(광무 8년) 9월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한다. 그는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56]'라며 일본에 의한 압제를 예상했다. 그의 예상대로 을사조약 이후의 일본의 지배는 한국인을 노예상태로 몰아넣는 폭정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56] 그는 '부패한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 소수독재정치로부터 조선 인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 정부와 낡은 체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다. 철저히 썩은 정부를 약간의 개혁으로 미봉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봤다.
강대국의 비밀 거래에 실망한 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민중들, 지식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민족의 미래는 스스로 찾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민족의 미래는 부패한 유교 사상이나 무속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의 합리주의 정신과 노력한만큼 받는다는 청교도 정신에서 찾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1905년(광무 8년)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57]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과 체념 [편집]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윤치호는 관직을 사퇴했으며, 정부로부터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하지 않고, 취임을 거부했다.[10] 정부를 장악한 이완용을 그는 심히 경멸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며 조선이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한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윤치호는 이미 정부의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당일에 외무부협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외무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에게 굴욕감과 동포들에게 증오감을 줄 것 외에 외무부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고 하여 그 수락을 거부했다.[56]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그는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56]"라고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곧 독립권의 상실로 인식했다.[56]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을사 보호 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2월 1일 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 “ | 지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58]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國庫)는 고갈되었으며 악화(惡貨)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强)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
” |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대한 광무 9년 양력 12월 1일자 5번째기사
|
이어 윤치호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을 파면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결국 어쩌지도 못하는 황제를 보고 그는 꼭두각시라고 보고 경멸하게 된다.
미국에 대한 불신과 민중에 대한 반감 [편집]
1905년(광무 8년) 12월 내내 윤치호는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역으로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윤치호를 비난했다. 윤치호가 을사조약 반대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먹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윤치호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나라인 미국에 기대를 하였지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을 접하고 미국에게도 실망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그는 체념하고 교육과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을사 보호 조약까지 이르게 된 것을 외부의 침략 이전에 지배층의 안일한 대응과 타락, 사회 내부의 부정, 부패, 온갖 비리행위와 차별 대우, 서자와 중인, 하층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 등이 복합된 결과물로 보았다.
| “ | 그 조약은 ...(이하 중략)... 지난 수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나는 한국의 모든 고난을 만든 운명의 여신(the Author and Finisher) 외에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56] | ” |
그는 을사 보호 조약을 돌발적인 사건으로가 아니고 과거 사건들의 결과로 또는 불가항력적인 현실로 받아들였다.[56] 결국 그는 미구에 닥칠 일본 혹은 제3세력의 침략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보게 된다. 체념한 윤치호는 이후 어떠한 공직 제의도 사양하고, YMCA 청년회 활동과 교육, 강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윤치호는 독립의 상실과 일본의 폭정을 수반하게 될 을사조약을 열강의 침탈경쟁인 러일전쟁의 불가피한 귀결이며, 개혁과 개선을 무조건 외면해온 한국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 또는 신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56]
도서관 설립 운동 [편집]
1905년부터 그는 경성부에 설립 예정이던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과 부지 마련에도 참여하였다. 발대 모임부터 시작해서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해 각 준비과정에 관여해 온 인물들을 당시 황성신문 기사에서 찾아보면 윤치호, 이봉래, 민형식, 이범구, 백상규, 이근상, 이용화, 민대식, 이병정, 이용문, 김동완, 오한영, 민영기, 이재극, 이완용, 민상호 등 최소 16명이었고, 이 중 오한영이 그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59]
1906년 3월 26일 도서관 평의회에 참여하고, 도서관 운영위원 겸 도서관평의회 평의원이 되었다.[59] 3월 26일 도서관 평의회가 소집되어 도서관 운영위원들을 결정하게 되었다. 도서관장에는 탁지부대신 민영기, 평의회 의장은 궁내부대신 이재극, 서적위원장에는 학부대신 이완용, 그리고 평의원에는 민상호, 윤치호 등 25인을 두고 있다.[59]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 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자 서재필은 윤치호에게 전보를 보내, 현직에 있으면서 정세를 바꿔보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하였다. 윤치호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상실한 매국노들의 소굴에 더이상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서 윤치호는 당시 고위 관리들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매국노들, 중간급 관리들은 세금만 축내는 무책임한 기생충들이라며 질타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편집]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조선이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정치적 독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윤치호는 정치인들이 썩고 부패했다면 백성들이라도 정신을 바로 차려야 되는데, 백성들부터 요령과 잔머리와 사기와 기만, 허위와 술수와 험담에 찌들었다고 지적하였다. 윤치호는 훗날 1919년 11월 9일 기독교 평신도주간 기념 범기독교대회 강연에서도 이를 드러냈다.
| “ | 내가 신시대(新時代)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내 강연의 요지는 이렇다. ⑴ 지금이 우리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신시대는 아니다. 사실은 조선이 일본과 처음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1876년이 첫 번째 신시대가 열렸다. 김옥균 어른이 정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1884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켰던 1894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일본이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냈던 1905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이렇게 신시대가 찾아왔을 때마다 뭘 했나? ⑵ 신시대가 열리면 어느 민족이든 일본인들처럼 신시대에 발맞춰 전진하든가 아니면 미국의 인디언들처럼 빛 바랜 옛날 과거에 파묻혀 살다가 결국에는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범적인 모델은 어느 쪽인가?[60] | ” |
그는 1919년의 연설에서도 조선이 일본과 처음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1876년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고, 김옥균이 정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1884년에도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60] 는데 그때마다 뭘 했느냐고 물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로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더욱 강해졌다. 1919년의 한 강연에서 그는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켰던 1894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일본이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냈던 1905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60]' 그는 이 때를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봤다. 1894년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했을 때나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몰아냈을 때 왜 자주국 내지는 중립국 선언을 하지 못하고, 국력 배양은 하지 못하고 정부 관리들이 이권을 챙기고, 파벌싸움에만 눈이 멀었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이렇게 신시대가 찾아왔을 때마다 뭘 했느냐[60]'고 질타하였다.
1906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06년 5월 4일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월 15일 그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일본 유학생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특별히 그의 사촌인 윤치오(尹致旿)가 되었다.
국권회복 운동 [편집]
이후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하였으며 대한자강회를 지도하였다.[1] 1906년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고,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10] 이후 교육 계몽 사업에 힘썼다.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그는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10]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은 무산되었다.
1906년 10월 그는 캔들러와 상의하여 개성에 한미서원(韓美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2월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 3월 어머니 전주이씨의 권유로 남포 백씨[24] 백매려(白梅麗)와 중매로 재혼하였다. 당시 윤치호는 43세였고, 백매려는 18세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열리자 그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그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전덕기·김구 등의 주도로 조직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배양'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으면서 만든 조직이었다.[61] 윤치호는 안창호의 '실력배양'에 동의하였다. 이에 동의한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안창호가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그 밖에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갑·이승훈 등 언론인·군인·산업인 등이 중심이 되었다.[61] 1907년(융희 1년) 7월 고종 퇴위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한편 고종 양위를 주도한 이완용 등을 성토하였다. 7월 21일 순종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특별히 외무부협판직을 제수했으나 불민함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대성학교와 한영서원의 교장 [편집]
1906년 5월 8일 이민설, 이능화, 장지연 등과 함께 경성의 불교 승려들이 세운 명진학교(明進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사로 초빙, 출강하였다.
신민회의 회원이자 회장으로 활동하며 명진학교의 교사로도 출강중이던 그는 1907년 9월 평양 시내에 안창호와 함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 10월 3일 현재의 송도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그는 미국 유학시절에 그를 후원했던 캔들러 박사와 편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했다. 캔들러 박사는 학교 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었다. 편지에서 캔들러 박사는 기독교 신학 학교, 혹은 기독교 계열 학교 설립을 추천했지만 그는 답장에서 기술과 상업을 가르치는 실업학교의 건립이 먼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게 하고,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미래는 기술과 노동에 있다는 점과 기독교는 일을 하고 악습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상, 종교로서 필요한 것이라 했다. 윤치호는 조선인들이 배관열과 관존민비, 문존무비 사상에 빠져있고 땀흘려 일하는 것을 천시한다며 조선인에데 땀흘려 일하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된다고 하였다.
그의 의견에 공감한 캔들러 박사는 미국인 건축, 기계, 농학 교수와 일본의 간섭에 대비해 기독교 선교사들을 파견해주었다. 한영서원은 처음 14명의 원생으로 출발했으나 1910년에는 원생 수가 4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한영서원은 한자와 유교, 영어 외에도 농업, 목공 기술, 측량, 축산법, 직물 등을 가르쳤다. 10월 3일 그는 한영서원의 초대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이사장직은 공성학에게 넘기고, 원장직도 곧 윌라드 크램(Willard G. Cram, 한국명 기의남)에게 넘겼다. 송도고보는 그 뒤 6·25전쟁 이후에는 인천으로 피난 와서 송도고등학교로 다시 태어났다.
주요한에 의하면 그가 한영서원을 설립한 것은 안창호의 영향이라 한다.[62] 윤치호가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은 안창호가 신민회 조직 2년 후인 1908년도에 평양의 유지인 김진후의 지원으로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윤치호가 안창호의 인도로 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얻은 경험이 동기가 되어 세운 것이라고 주요한은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에서 서술하고 있다.[62]
교육, 계몽단체 활동 [편집]
1909년 안태국(安泰國)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였으며,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하며 신사상과 신문물 수용, 개발 등 실력양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이 되었든 미국이 되었든 유학하여 선진국의 사상과 문물, 과학 기술을 배워와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의 자세와 소양을 살펴본 후 그는 여비와 식비를 제공하고, 장학금을 송금해준다.
1908년 11월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같은 조선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처음에는 일제의 조작이라며 의심하였으나, 사실로 드러나자 한국 독립의 가망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됐다. 1909년 한국의 유머 모음집 《우순소리》를 출간하였으나, 일본이 제정한 내부고시 제27호에 의해 '치안과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禁書) 처분을 받았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다며 한국통감부에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자신이 후원하던 캐롤라이나 학당의 새로운 교명을 고민할 때 학교명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1909년 박제순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자 그에게 외무대신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이를 거절했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조직에 가담한 후 안창호의 제의로 대성학교 교장으로 다시 초빙되었다. 한영서원과 송도학원, 대성학교 외에도 신앙 활동에도 전념했는데, 신앙 활동으로는 기독교청년회(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청년회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 등으로 일했다. 이후 이상재와 함께 기독교청년회를 지도하고 기독교 선교사업과 개척교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주력하였다. 1910년 4월 캐롤라이나 학당이 배화학당으로 개편되자 여성에게도 교육 계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배화학당의 공식 후원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활동 [편집]
한일 병합 직후 [편집]
1910년(융희 4년) 8월 27일 종2품에서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그러나 1910년 10월 한일병합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는 공직을 사퇴했다.[63] 아버지의 사망에 관계 없이 그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이었으므로 남작(男爵) 작위가 내려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윤치호에게 외무대신 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것도 역시 거부했다. 조선의 왕족과 고관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귀족이 되는 것을 보고 실망, 낙심한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경기도 개성부로 은퇴하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일병합을 재촉했다[64] 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조선의 패망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부도덕한 민중과 고관들의 탐욕, 무지, 인맥와 담합행위 등 내부적 부패 때문에 발생한 당연한 징벌로 여겼다. 그는 석호필 등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석호필이 "하나님은 조선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셨는데 조선사람은 긴 손톱을 택하고 나라를 버렸다."고 한 것을 두고 조선인들의 게으름이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한일병합 조약 직후 도산 안창호가 거국가를 남기고 출국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갈등, 방황하였다. 그는 병환중인 아버지와 노모와 아내, 2남 2녀가 있고 서모에게서 어린 이복동생 둘이 있어서 이들을 책임져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출국을 주저했다. 이상재는 그에게 여러 번 이승만, 안창호의 사례를 들며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후일 그는 이를 두고두고 통탄해하게 된다. 그해 10월 YMCA 기독교 청년회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고, 1910년 12월 4일 미국에서 열리는 선교회 공회에 참석차 출국하여 1911년 1월 귀국하였다. 이후 교육 활동 외에 토지 매입에 힘써 선산군 해평면 금산동(金山東) 산 72번지, 고양군 부암리(付岩里), 경성부 견지동,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일대의 대 농지를 소유하였다.
윤치호는 다양한 책을 두루 독서하며 시름을 달랬는데, 삼국지, 삼국지연의, 손자병법, 서유기, 수호전, 춘추, 한비자 등의 중국 고전에서부터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니체의 신은 죽었다 등의 서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1911년 9월 22일 아버지 윤웅렬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내심 존경하면서도 적극적인 애국심을 갖지 않은 것에 실망,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식적이나마 남작 작위를 다시 수여받게 된다.
일제 강점기 초반 [편집]
전향선언과 출옥 [편집]
1911년 105인 사건 때 다른 기독교인 및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의해 체포, 재판을 받았다.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49] 1912년 2월 5일 그는 최종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초기에 윤치호는 전향을 거절하였고, 1913년 10월에는 아버지 윤웅렬로부터 승계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1914년 1월 22일에는 일본 천황의 명의로 하사된 목배(木杯)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1915년에 윤치호는 전향을 선언했다. 윤치호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후 매일신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 의사를 내비쳤다.(인터뷰 내용은 위키인용집참조) 그러나 친일파로 전향한 것인지, 단지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운현은 그가 변절한 직접적인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그의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14]'고 분석했다.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의 저자 유영렬(柳永烈. 숭실대·사학과)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14] 곧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의 지도자였던 그를 소환하여 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하고 애국심을 고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자발적이지 않은 애국심, 강요된 애국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거절한다.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은 1880년경부터 근대화를 위해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 성향은 특히 그가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 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윤웅렬은 한일병합 직후 곧 사망했고,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와 공채 2만 5000원을 받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그는 이완용, 송병준, 윤덕영 등의 변절자들을 경멸 증오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이 나라를 판 댓가로 부귀를 누린다며 늘 한탄하였고, 먼 친척이었던 윤덕영과 윤택영에 대해서도 그들의 인격을 의심하며 멀리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는 주저하였다.
사회 활동 [편집]
출감 후 경성 YMCA기독교청년회의 총무와 회장에 선출되었고, 연희전문학교 재단이사, 기독연합재단법인 이사로 선임되었다. 1916년 4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고, 세브란스 의전은 연세대 의과대학 및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가 개교하자 세브란스 의전 재단이사로도 취임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의 참여는 소홀하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개성의 한영서원((뒤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온 의사이자 의학자인 이만규를 받아들였는데, 그는 한영서원에서 생물과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은밀히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쳤다.[65] 삼일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65] 윤치호는 그의 한글과 국사 교육을 묵인했고, 3.1 운동 이후 이만규와 관련되어 윤치호 역시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었지만 그는이만규의 일을 모른다며 일체 증언을 하지 않았다.
1918년 11월 양기탁이 중국 천진(天津)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양기탁에게 벽돌을 발로 걷어찰 필요가 없으며 담벼락을 머리로 들이받을 필요는 없다. 대화도 통할 인간하고 대화를 하는 법이라며 그를 얼마나 바보스러우냐며 조롱하였다. 1918년 12월 양기탁이 상하이에서 한반도로 압송,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居金島)에 2년간 유배형에 처해졌다. 양기탁이 거금도에 유폐되자 바로 그를 찾아 면회를 다녀왔다.
1차 대전 종전에 대한 회의론 [편집]
1916년 조선총독부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그에게 당국 시책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거절한다. 1916년 YMCA 기독교 청년회 제4대 총무로 취임한다.[66]1918년 겨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1919년 1월에 열리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회의적이었다.
1919년 1월 하순에 윤치호와 박희도(朴熙道)는 연희전문학교의 학생인 김원벽(金元璧)을 중간에 두고 강기덕(康基德)·주익(朱翼)·한위건(韓偉鍵)·김형기(金炯璣)·이공후(李公厚)·주종선(朱鍾宣) 등 학생들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협의하였다. 1919년 1월 17일에 신흥우가 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갈 의향을 타전해 왔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 “ | 신흥우 군이 찾아와 내게 유럽 파리에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계속해서 약소국에 소요가 일어나는 것과 조선에서 소요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대전과 관련 있는 약소국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틀림없이 안건으로 상정될 걸세. 그러나 조선은 거론될 기회조차 없을 거야.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암거래는 제쳐놓고, 직간접적으로 세계대전과 관련 있는 약소국들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할 걸세.[67]" | ” |
|
—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17일자
|
그날 송진우(宋鎭禹)가 찾아와 '국제연맹이 창설될 것이며, 약소국에 자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기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68]'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이상적인 방안이 거부된다면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을 것[68]'이라 주장했다. 송진우가 3·1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조선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중 어느 나라도 바보처럼 조선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독립만세 운동참여를 거절했다.[69]
윤치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송진우를 설득시키려 하였다. 윤치호에 다음 이유등을 들어 강화회의에 기대를 접을 것을 권고했다.
- 거창한 이상이 모두 그렇듯,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실제 활동에 들어가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걸릴 것이다.
-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 열강 중 누구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 미국이 단지 조선에 독립을 안겨줄 요량으로 일본과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68]
그러나 송진우는 윤치호가 일본인들의 힘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다.[68] 파리강화회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3.1 만세운동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외교독립론 조차 부질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그의 태도에 대한 청년층의 비난이 빗발쳤다. 1919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내세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호찌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순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70] 베트남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호찌민의 활동을 보고 그는 소용없는 행동으로 봤다.
윤치호에게 만세 운동에 적극 나서줄 것을 호소하려는 젊은이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는 정의롭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외관 상 평화와 정의를 표방하지만, 현실은 국력과 무력이 세계를 실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도덕적 이상은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했지만, 윤치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는 존재할수 없으며, 존재한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개인이 반드시 세상을 주도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며 반박하여 되돌려보냈다.
이어 종로청년회관으로 신익희가 윤치호를 찾아가 세계 대세와 국내 정형을 설명하며 독립운동에 동참을 권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기회가 아니라며 사절하였다.[71] 무참하게 거절당한 신익희는 그를 소인배라며 질타하고 일어섰다.
윤치호는 호찌민과 같은 청년들의 좌절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70] 미국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약소국이나 후진국을 도와주겠느냐는 것이었다.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고종 독살설과 자살설이 시중에 확산되고 있었으나 그는 시위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식인들이 유포한 루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는 궁궐에 이미 일본에게 매수당한 내관이나 의원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년 뒤, 사돈인 한진창에게서 고종 독살설의 전말과 고종 시신의 상태에 대한 것을 전해들은 뒤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편집]
1919년 3월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72] 그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선전, 선동을 하는 지식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다른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고 가는 저주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 “ | 이번 운동에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는 이렇다.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는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72] | ” |
그는 젊은이들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몰고간다며 일부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를 무책임한 인사라고 비판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선동이 독립을 불러오기는 커녕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인들을 더욱 가혹하고 엄하게 다룰 구실만 제공할 뿐이라고 내다봤다.
3.1 만세 운동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만세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했다.[72] 3ㆍ1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일제 경찰에 대한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다.[72] 이후 3월 5일~3월 7일 그는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다.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 |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 ” |
이 상황에 대해서, 일부 학자는 그 당시에, 윤치호가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며 일제에 저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일기에도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자)라고 썼다. 이때문에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73] 한편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의 1인인 권동진을 만났는데, 윤치호는 그로부터 처음에는 평화적인 선언서 낭독으로 이를 통해 신문 뉴스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로 결정했으나 학생들이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감정적인 시위로 변질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권동진이 처음 찾아왔을 때 그는 경멸적인 태도로 대하였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소 감정적인 태도에서 한발 누그러졌다.
호찌민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기대 역시 좌절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 않았고, 이후 김규식, 여운형 등은 소련 등 사회주의세력에, 송진우 등은 실력양성론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3·1 운동 직후 [편집]
1919년 3월 서대문에 설립된 경성보육원의 원장에 취임했다. 경성보육원은 1936년 9월 안양으로 옮겨 현재의 안양보육원이 되었다.
그는 독립에 대한 의지는 당연하지만 단순한 만세운동 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수 없다고 봤다. 기마경찰 앞에서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짓이었을 게다. 윤치호는 3월 2일자 일기에서 학생들의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했다.[74] 그들의 행동처럼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74]
만세 운동이 계속되자 4월말 조선총독부 형사 세키야가 그에게 학생들에게 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서 한장 낭독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는 형사의 요청을 거절했다.
| “ |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그런 성명서를 발표하면 시위가 진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역효과를 낼 것이오. | ” |
그는 만세 운동으로 조선이 독립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용기에 경탄했다.
임시정부 수립 전후 [편집]
1919년 4월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그에게도 임시정부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는 임정 참여를 거절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미국과 상하이를 오가는 김규식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서신과 유선을 통해 그는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활동 등의 정보를 수시로 교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을 담당했던 이시영과도 연락이 닿았다. 그는 김규식, 이시영, 안창호, 여운형, 이승만 등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도 상세히 접할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제국 당국에 임시정부에 대한 것은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 “ |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74] | ” |
1929년 4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명의의 서한이 조선에 살포되었다. 이승만의 명의로 된 훈령 중에는 조선인들은 절대 조선총독부에 세금을 납부하지 말고, 소송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일본인의 법정에 가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서한을 본 윤치호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1940년대까지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행사에는 불참했다. 그런데 3.1 운동 이후 학생들이 천장절 등 천황 일가의 생일 기념일에 교사나 동사무소 직원에게 떡을 받고는, 그 떡을 하수구에 던지는 것을 보고 호통치기도 했다.
| “ | 천장절 당일에 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이 교직원들에게서 받은 떡을 (하교길에 또는 교직원들 몰래) 학교 밖 도랑에 던져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것이라면 여학생들은 왜 그 떡을 받았는가? 일단 받은 것을 내동댕이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60] | ” |
일본 천황이 싫다면 떡이나 음식을 받지 말지, 왜 아까운 음식을 버리느냐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가난해서 굶어죽거나 아파도 진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아까운 음식을 받아서 하수구에 던져버리느냐고 반문하였다. 그해 5월 31일 7,8명의 젊은이가 종각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75]'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치론과 경제적 실력양성론 [편집]
윤치호는 1919년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 농촌을 무대로 '문화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활동을 다녔다. 3·1운동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윤치호는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쉽게 승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주장했으며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한국인들의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10]
기술과 자본과 시장이 없는 조선물산 장려 바자회가 무슨 수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지 안타까워 했다.[72] 윤치호는 한국이 독립하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실력 양성을 위한 바탕으로는 경제력과 국민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국민성을 개조하고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전까지는 독립은 고사하고 자치능력 조차도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 “ | 외국인을 초청해서 한식을 대접할 때면 창피해서 낯을 붉히게 된다. 버젓한 음식점 하나 운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경영하길 원하니,나 원 참 기가 막혀서. | ” |
이후 조선의 당면문제는 백성들에게 유해한,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경제적인 부분의 향상을 하고, 지적·경제적 측면의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10] 하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그는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농경지를 매입해 그 땅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을 더 현명한 애국자[76] 라고 평가했다. 토지는 생산력의 근본이었고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자원, 그 밖에 목축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지를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것을 예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식량의 자급자족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독립을 할수 있느냐며 반문을 제기하였다. 그가 봤을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토지를 팔아 자금을 대주는 것은, 곧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가축의 식량, 석탄과 광물 자원등을 모두 포기하는 매국 행위로 인식되었다.
사회단체, 언론 활동 [편집]
1920년 윤치호는 다시 YMCA 회장에 재선출되었다. 그해 8월 미국 의원단의 동양 3국 순방 소식을 접하고 양기탁과 함께 '미국의원시찰단환영준비위원회'(美國議員視察團歡迎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윤치호에게 미국 의원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는 것이 어떻냐고 권고했지만 윤치호는 미국에서 아무런 이익도 없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국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겠느냐며 회의적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의 윤치호는 친일파 로 규정짓기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77]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년∼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77] 그는 자신의 사재를 투자하는 한편, 홍보활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였다.
1921년 6월 조선인산업대회 연사, 범태평양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1922년 이상재, 이승훈,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78]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1920년대 초 미국 의원 시찰단 환영회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79], YMCA 회관에서 미국 의원 헐스맨의 통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79]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동정하더라도 동아일보 등지에서 언급하는 미·일 전쟁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9]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 [편집]
이승만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1919년의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1922년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다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워싱턴 회의에 또 다시 한국의 독립 청원을 계획하며 독립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승만 등 한국인 민족 지도자들의 기대를 "터무늬 없는 생각"이라 여겼다.[79] 그가 외교독립론 마저도 터무늬 없는 생각이라 여긴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을 미일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미국보다 일본이 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힘의 관계인 것만이 아니라, 전후의 국제사회 질서를 재편할 주도권과 부담을 갖고 있는 미국이 자국민과 자원의 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고, 국제관계가 감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미국의 이익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79] 미국이 자국의 국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한국의 독립을 도와주거나, 후원하겠는가 라는 것이었다.
1921년에는 이상재, 이승훈, 박봉승 등 기독교인 유지들과 함께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를 설립하고, 잡지 『신생명』을 통하여 문서로 한글 보급에 나섰다.[80]
1920년 8월 14일 미국의 의원단이 방한하자 양기탁은 미국 의원 일행이 서울역에 내릴 때에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위를 계획했다가 또다시 체포되었고, 양기탁의 재투옥 소식에 충격을 받은 그의 어머니는 8월 29일 사망했다. 8월 29일 윤치호는 조선총독부에 보석금을 제출, 인도적 차원의 석방을 탄원했고, 양기탁 역시 장례식을 이유로 보석금을 내고 일시 석방되었다. 그러나 양기탁은 바로 열차편을 이용하여 만주로 탈출했고, 양기탁의 일시 석방을 주도한 그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1921년에는 교풍회가 조직되자 이름만 등록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그해 워싱턴 회의 직전에 그는 한국인 대표의 한사람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대표가 될 것을 권하는데 대해서 "한국 대표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뭘 얻었냐?"고 반문하였다.[79] 그가 참여를 거절하자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워싱턴에 다녀오라고 여러번 권고하였으나 모두 거절했다. 또한 "대중목욕탕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하느냐며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기도 했다.[76]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도 윤치호에게 사람을 보내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본은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워싱턴에서도 파리강화회의 때처럼 어느나라도 한국의 문제에 무관심할 것이라며 일축했다.
그는 토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땅을 지키는 것이 일제에게 구속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땅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주고 자신과 자손들은 굶어 죽는 자 보다 조상 대대로 물려 온 자기 땅을 일본인들로부터 지키고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것이다. 또한 과거 조선왕조의 사농공상을 비판,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인문 교육 외에 실생활에 필요한 실업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실업 교육 [편집]
일제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한국을 근대화·문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위한 것이며, 철거하거나 없앴을 경우 일본이 조선보다 100배 이상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육성한 조선인 엘리트들의 존재 역시 그들이 사라졌을 때, 조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손해를 본다며 응수했다.
윤치호는 1922년 11월 1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제4대 교장(敎長)에 취임하였다. 송도고보를 맡게 되면서 그는 영어 교육과 신앙 교육 외에 국내에서 사용하는 물품은 국내에서 생산할수 있어야 된다고 봤다. 미국의 흑인교육자 부커 T. 워싱턴의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모방하여 실업계 과목 교육에도 역점을 두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장남 윤영선에게 목장과 낙농, 양잠업을 가르쳐서 이를 경영하게 하였다. 이어 송도고등보통학교 농과에서 운영하는 목장과 실을 생산하는 공장을 두었는데, 학교 부설 공장에서 생산된 송고직(松高織)은 질기고 물이 빠지지 않는 옷감으로 중국과 유럽에까지 수출되었다. 실업계 학생들 중 낮에는 목장과 방직공장에서 근무하며 밤에 야간반으로 활동하는 학생들은 반공생(半工生)이라 하였는데 이는 훗날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전공생을 두는 제도의 효시가 된다. 이어 윤치호는 졸업한 학생들 중 숙련된 학생들 중 일부는 학교 부설 공장과 목장에 두어 후배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을 돕게 했다.
그해 가을 만주의 한국인교민학교인 간도 영신학교가 경영난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11월 21일에는 재정난에 처한 간도의 영신학교에 현금 삼만원을 기부하였다.
1923년 1월 장남 윤영선이 개성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81]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81]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81] 이라 봤다. 1924년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부교장인 임두화(林斗華), 일본인 교사인 이노우에(井上)와 사토(佐藤)에 대한 불만이 폭발, 그해 6월부터 교감과 두 일본인 교사를 축출해달라는 학생들의 동맹휴학 시위가 있었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며, 기숙사에 재학중인 시위참여학생들을 기숙사에서 내쫓았고, 동맹휴학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쫓겨난 학생들의 생활비를 댄다고 모금운동을 하다가 시위에 동참했다. 일본인 교사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시위는 송도고보 2학년생들이 시작하였으나 5학년 생들도 동참하고 이어 전교생으로 확대되었다. 시위가 확대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반일시위로 의심했고, 24년 9월 윤치호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되 기숙사에서 추방당한 학생들은 모두 복귀시키고 학생들에게 일체 징계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켰다. 9월말 총독부 학무국에 불려가 교사의 훈육에 대한 학생들의 반항심리라며 총독부 당국을 설득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윤치호는 일본이 식민지 한국을 통치하면서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서울에서 조선인이 집을 지으려면 먼저 인가를 받아야 한다.[82] 그러나 일본인들은 먼저 집을 짓고 나서 인가를 신청한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자기들의 공평무사함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82]'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중반 [편집]
소극적 저항과 일선동조론 부정 [편집]
일제는 1890년대부터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다. 일본이 단군 조선과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이룩한 사회라고 보면서도, 일선 동조론을 근거로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호소하는 주장에도 회의적이었다. 1923년 1월 9일의 메이지 천황과 노기 마레스케를 추모하는 환등회에 참석하였으나 그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칙어실천회는 감수성이 예민한 조선 청년들에게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로 조선 각지에서 이 환등회를 거행하고 있다.[82] '이 프로그램은 일본인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82]'고 봤다. 그는 억지로 강요하는 애국심은 무의미하다는 논지를 내세우며 일본과 조선총독부 측에서 개최하는 어떠한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그 해 7월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1924년 1월 이상재가 그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독립을 탄원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고하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과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피를 흘리겠느냐며 대답하였다.[83] 한국내 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인을 무시하는 행동을 눈여겨보던 이상재도 더이상 미국으로 가라는 말을 그에게 권하지 않았다.
1923년 6월 이후 산사에서 벌인 박중양의 휴양, 유흥행위를 비난하던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 감싸주었다. 1923년부터 충청북도도지사 박중양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휴양지, 유흥지로 사적으로 남용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비난하면서 박중양이 압력을 행사했는데, 이때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설득하여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된다며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하였다.
교육, 사회 활동 [편집]
1925년 봄 그는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업무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며 사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학교 학생들과 동문들이 윤교장 유임운동을 벌이자 마지못해 승낙하고 동년 가을까지만 교장직에 있겠다 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송도고보의 국어 교사로 근무하던 한글학자 이만규(李萬珪)를 교장대리로 임명하여 교장직을 대신 수행하게 하였다. 야자 이만규는 한영서원 시절부터 생물과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은밀히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쳤다. 삼일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84] 그러나 이만규의 사람됨됨이를 신뢰했던 윤치호는 이만규에게 학교 교장대리 직을 맡겼다.
그해 4월 30일 배화학당이 배화여자전문학교로 변경되자 재단이사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 뒤 차미리사의 근화학당(근화여학교)를 후원하였고, 감리교회 선교사 메리 플래처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에 세운 이화학당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여성에게도 평등한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딸이 말대꾸를 했고, 재혼한 아내 백매려와 갈등했으며, 이복 동생 윤치창의 처 손진실과 갈등하게 되면서 여성에게 교육이 필요한가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후 총체적인 회의론자가 된다.
1925년 8월 강원도 철원군의 서석공립보통학교(瑞石公立補通學敎)의 신축 공사에 돈 1천원을 기부하였다. 그밖에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오산학교에도 1천원의 기부금을 기탁했다.
1925년 9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5년에는 조선인 산업대회에도 참여했다. 각도인민대표자대회, 조선인대회와 조선양성운동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각종 친일 어용 단체와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조선지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계명구락부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해 2월 2일의 계명구락부 회의에 참석, 1.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실행할 것, 2. 족보를 폐지할 것을 의결하였으며, 이날 회의에서 그는 계명구락부 이사로 선출되었다.[85]
사회단체 활동 [편집]
1926년 7월 광주에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가, 총독부에서 그가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표자들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는 바로 풀려났다. 1927년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장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이상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그해에 이상재와 최병헌이 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나자 윤치호는 이를 애도했고, 그의 몇안되는 지인이 사라지면서 고독과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1928년 5월 제2회 야구구락부 리그의 대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 11월부터 1937년까지는 제9대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을 지냈다.
1929년초 출국,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석차 둘째 아들 윤광선을 대동하고 출국, 백관수(白寬洙), 송진우, 유억겸(兪億兼), 김활란 등과 함께 한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가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의 자신의 사유지를 오룡리·봉암리·방각리(현 황금리) 세 마을의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었다. 소작인들은 1929년에 그의 영세불망비 1기를 세웠다.[86]
그는 조선총독부를 향해 참정권을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29년 1월 16일의 일기에서 그런 조선총독부가 영화 벤허의 상영을 허락한 것을 놀라워하기도 했다. '오후 3시, 아들 장선과 기선을 데리고 단성사(團成社)에 가서 벤허라는 영화를 보았다. 변사는 팔레스타인의 로마인 총독을 가리켜 감사(監司)라고 지칭했다. 내용을 알 텐데도 경찰이 조선에서 이 영화를 온전히 상영하도록 허가한 게 신기하기만 하다.[87] 는 것이다.
1930년 모교인 미국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가 윤치호 박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 수여받은 명예박사 학위 때문이었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만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이후, 윤치호는 친일단체를 한층 강화해 총독부 관료와 친일한국인 간의 친목단체인 토요회에 참여했으며[10] 이후 조선인교풍원, 조선대회, 조선칙선귀족원경에도 참여하는 등 부일 협력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31년 그는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를 부귀초등학교 건립 부지로 기증했다.[86] 그 기념으로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의미로 1931년 영세불망비를 세웠다.[86] 그리고 윤치호는 부귀소학교 건립 기금으로 2000원을 내놓았고[88] 업적을 기려 부귀면장이 1931년 그의 영세불망비를 건립했다.[88]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영세불망비 중 2기는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발견된 뒤 강제 철거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86]
한편 당시 조선에서 출애굽기에 관련된 작품들의 번안본과 벤허 등이 조선에 소개되는 것을 놀라워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그는 경성 종로의 한 영화관에 벤허가 상영되자, 아들 윤장선, 윤정선 등을 데리고 이를 관람하기도 했다.
충무공 유적지 보존과 이순신 후손의 빚 청산 [편집]
1930년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
충무공 종손가의 살림이 점점 영세해지면서 돈을 빌려 쓰다가 1300원의 빚을 지게 됐고 그 이자까지 총 2100원에 이르게 됐다. 1930년 9월 채권자였던 동일은행은 여러 번 빚 갚을 것을 독촉하고 그 해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위토 60두락(斗落)을 경매에 처분하겠다고 나선 것[89] 이다. 일본인 경매자가 가장 비싼 돈을 제기했고, 이순신 유적지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송진우, 정인보, 김성수, 최남선 등에게 연락하여 이 일만큼은 막아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의해 국민에 알려지면서 1931년 5월 26일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89] 윤치호는 충무공유적보존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2만 여명이 모금운동에 참여해 1만6021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윤치호 위원장을 포함해 남궁 억, 한용운, 정인보 등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성금으로 종손가의 채무 청산과 함께 현충사를 중건하고 위토를 추가 매입했다.[89] 이순신 유적지와 현충사의 위토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유족의 빚을 대신 갚는 일을 주도한 혐의로 그는 불령선인의 거두로 지목되어 내사를 당하게 된다.
일제의 협력 제의와 거절 [편집]
1931년 친일 단체인 토요회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송진우는 그가 토요회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비판해 주었다.[90] 송진우와의 언쟁 끝에 송진우는 그를 변절한 소인배라며 질타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송진우 같은 이는 내가 토요회와 같은 모임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나도 그런 회의 멤버가 되고 싶지 않다”라며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91] 이후 각종 강연에 억지로 참여하였지만 그는 일부러 자신이 연장자라는 점을 이용, 맨 끝으로 순위를 미룬다음 "이미 훌륭한 연설은 앞의 연사들이 다 했으니 따로 할말이 없다"거나 "오늘의 좋은 말씀은 먼저 연사들이 다 말씀하셨다"며 강연을 우회적으로 회피하였다. 1932년 일제는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윤봉길, 이봉창 사건으로 이반된 한국인의 민심을 끌어들이려는 일제의 술책임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끊임없이 조선인들에게 천황 폐하의 은혜를 역설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천황의 악의일 뿐이다.[82]'며 반박했다. 조선총독부와 일제는 일제가 한일병합 이후 조선에 철도, 도로, 항만 등과 공장 등 산업자본을 건설한 것을 홍보하며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일본의 은혜 주장은 당치도 않다며 반박했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탈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 도로와 철도와 교량, 항만이 파괴되었을 때 손해를 입는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내선일체론에 대한 저항 [편집]
그는 조선총독부가 1930년대부터 내세운 내선일체론에 반발했다. 다만 일본인과 똑같은 권리를 주되,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개별적인 민족, 인종으로 존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대제국이 되고 싶거든 다민족 대국가로 생각의 폭을 넓힐 것과, 조선인들에게 일본식으로 강요하지 말고 조선인들 나름대로의 특징은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1933년 그는 예종석의 대아세아 운동과 1934년 동아민족문화협회의 대아세아 운동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92] 또 1934년 최남선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자, 그가 일본의 국수주의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92]
1933년에는 아산 음봉면의 음봉보통학교에 토지를 기부하였다. 이는 음봉보통학교가 이전할 부지를 찾지 못하자 윤치호는 자신의 신항리 땅을 기부하였다. 이 기념으로 음봉초등학교 앞에는 윤치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33년 2월 19일 이화여자전문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였다. 1933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는 "각 방면의 유지 회합, 이전 후원회 창립"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25명의 위원도 선정했다고 보도했다.[93] 바로 윤치호는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정되었다. 창립총회에 이어 열린 위원회에서는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김일선을 선출하였다.[93] 그밖에도 윤치호는 숙명여자전문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에도 기탁금을 헌납하고, 재단을 후견하였다. 윤치호는 교육의 힘이 나라를 암흑에서 구원할 수 있다며 학생들은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할 것과, 선택받은 위치에 서 있음을 감사히 여길 것,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을 알기 쉽게, 실무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을 당부하였다.
1934년 근화여고보의 교장이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의 재단 이사장인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근화학원 재단 이사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한편 1934년 2월경 그에게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이 되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능력 부족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934년 3월 결성된 조선 대아세아협회에 가입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언문 철자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표기법이 달라지게 되자 윤치호는 최남선, 지석영 등 지식인 112인과 함께 '정음(正音)지' 제5호에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을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94] 그는 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개정이 누구를 위한 개정이냐며 개악은 아니냐고 비판하였다.
수연 거부와 고희연 [편집]
그는 1923년 육순 때의 생일 잔치를 성대하게 할 것을 누군가 권고했지만 내가 환갑상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거절했다. 이듬해 회갑 때에는 생모 이정무가 살아있었으므로 억지로 회갑잔치를 하였으나, 조촐하게 가족 친지들만 불렀다. 그러나 문장(종친회장)이었던 숙부 윤영렬의 후광 덕에 많은 일가 친족이 참여하게 되었다.
1934년 12월의 그의 칠순 생일도 그는 간략하게 추진하려 했다. 칠순 때의 생일 잔치는 인생칠십 고래희라 하여 흔치 않음을 들어 성대하게 할 것을 누군가 권고했지만 그는 큰 바위 얼굴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며, 자신이 사회적으로 생일축하를 받을 만큼 덕망 높은 사람이 아님을 들어 사양하였다. 그러나 양주삼, 김창제, 허정, 권동진, 신흥우, 조만식, 앨리스 아펜젤러 등이 특별히 좌옹선생 칠순 기념위원회가 조직하여 그의 칠순 잔치를 준비하였다.
1934년 12월 서울 종로에서 그의 칠순잔치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총독부와의 갈등, 교육 지원 활동 [편집]
1934년 12월 조만식, 김성수의 주도로 고희연이 성대히 개최되었다. 이광수 등이 참석했고, 총독부는 특별히 그의 고희연을 감시하였다. 12월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근화여학교(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의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하였다.
1935년 10월 일왕의 국민정신 작흥조서(作興調書)에 바탕한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등에 가입 활동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지만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중추원 의원직을 다시 제안하였으나 '내가 취임하는 동시에 그대들이 원하는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며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왕실을 핍박하지 않고 살려두었으며, 조선을 위해 도로와 철도를 놓아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무책임하게 일본 정부가 주는 왕,공위를 받은 조선 왕실을 규탄했고, 일본을 위한 도로 철도와 일본의 체면을 위한 조선왕실 보호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35년 12월 크리스마스 준비를 이유로 연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36년 2월 어머니 전주 이씨 이정무가 사망했다. 모친상 기간 중 그는 흰 옷을 입고 다녔다. 총독부는 그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는 신앙상의 이유와 모친상중임을 들어 신사 참배를 거절하였다. 모친상을 치루는 동안 그는 노부모의 존재 때문에 1910년 당시 조선 땅을 떠나지 못했던 것을 통탄해하였다.
1936년 윤치호는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재직 당시 그는 학교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96] 하기도 했다. 자신이 설립한 송도고보에도 운영 비용과 시설 비용을 지원하고 토지를 기부하여 운동장을 확장하고 체육관을 설립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보다 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인들은 송도고보의 크고 넓은 건물과 시설물, 넓은 운동장을 보고 질리기도 했다.
독서와 사색 [편집]
혹자는 윤치호의 직계선조인 윤근수, 윤두수로 그의 문중은 당색으로는 서인 소론 계열 출신이었지만 당색에 구애됨없이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유형원의 《반계수록》 등 남인계 실학자들이 쓴 저서들도 사서 탐독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 부친이 서출로 집안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반쪽양반이었다. 불우한 서출이 역시 역사의 배척을 받은 남인계 학자의 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잠이 적었던 그는 새벽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을 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잠이 줄어들어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졌다. 1894년 이후 조선에 수입된 커피 역시 그의 피로를 일시적으로 덜어주어 정력적인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돕는 역할을 한다.
| “ | 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97] |
” |
윤치호는 다산 정약용을 가리켜 조선왕조가 낳은 위대한 천재라며 격찬했다.[97]
1930년대 후반 일본 당국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과 타이완 등의 식민지와 포로들에 대한 징집, 차출, 공출량을 늘렸으며 황국 신민 교육을 한층 강화했다. 동시에 무장단체들의 활동도 격해져 갔다. 윤치호는 사회가 미쳐돌아가고 있다며 일본과 조선인 간에 벌어지는 광기와 적개심을 비판하였다.
일본의 감시와 충격 [편집]
일제로부터 협력 제의가 들어오자 그는 교육, 사회활동으로 만족한다며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조선총독력연맹에 참가하고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의 정책에 찬성 하고, 1937년 7월 총독부 학무국 주최의 시국강연회에 이어 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 강사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여 동기를 묻는 지인들에게 간단하게 언급하거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1938년 일제가 조선인의 병력자원화를 위한 제1차적인 조치로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결정했을 때, 이것을 내선일체의 합당한 조치로 보고, 환영하였다.
한편 그는 안창호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안창호가 쇠약해지자 보석 탄원을 냈고 1937년 12월 출감,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나 안창호는 간경화,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하수증, 복막염, 피부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고생했고 막대한 병원비가 들어갔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의 치료비를 김성수와 함께 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와 김성수의 비용 조달에도 고문으로 쇠약해진 안창호는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안창호의 장례식날 그는 대성 통곡하였다. 안창호의 죽음에 감정이 북받친 그는 일주일 이상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청년들과 가족의 만류로 겨우 진정한다.
1938년 초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중이라고 연락이 왔으나 그는 참여를 거부하였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경성부에서 결성되었으나 불참했다. 이때 그는 "내가 회장으로 지명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후에도 직책을 맡게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98]"고 하였다.
1930년대 후반 그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에게 불려가 협박을 당했다.[99] 미하시 코이치로는 자신이 윤치호를 공갈, 협박한 것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 “ | 윤치호를 집으로 불렀다. 당신도 스스로의 신앙이 있으니 확신이 있겠지만 자계(자숙)하지않으면 곤란하다. 그러면(자계하면) 우리 쪽에서도 세상의 말에 편승하지 않고 충분히 당신 쪽과협력해 우선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집에서 수시간에 걸쳐 설득했다. |
” |
1938년까지 그는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 · 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3월 18일 공익에 기여한 이에게 상훈을 수여할 때 그에게 포장(褒狀)이 수여되었지만 역시 불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파악, 기록해 놓았고, 그해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찰관 등으로부터 1938년 4월 29일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추궁당했다.
그의 일본인 친지였던 야마가타 데이사부로(山縣悌三郞) 역시 그가 총독부에서 주최한 천황 탄신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질문하며, 과거 일본 천황과 천황가의 경조사 기념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점, 총독부에서 그의 행적을 파악한다는 것을 귀띔해주었다. 일본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미행, 정탐했다는 것을 깨닭게 되자 그는 경악한다.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 [편집]
1938년 5월 23일 오후 2~3시 조선총독부를 방문, 총독과 정무총감, 경무국장을 상대로 자신이 중추원에 들어가는 것을 고사하는 이유를 해명하고 되돌아왔다.
일제는 민족주의 인사들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1937년 8월부터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을 날조하여 민족인사를 검거한다. 윤치호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을 하거나 탄원서를 작성하여 석방케 하였다. 1938년 5월경 흥업구락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는 그의 사촌동생인 윤치영도 연루되었는데, 윤치영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전기고문과 팔다리를 옭죄는 고문을 당하였다. 윤치영의 면회를 왔다가 고문장면을 본 동아일보 기자 서정억이 일본 경찰에 항의했다가 구타당하여 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치호는 윤치영 등의 신원보증과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고, 탄원서를 제출하여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언론인을 구타했다는 데 대한 일본 언론계의 항의와 기독교대회 참석차 방문했던 일본의 기독교 YMCA 청년회 인사들의 협력도 작용하였다.
동년 7월 황국신민화 실천운동의 조직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창립총회 준비위원 및 상임이사로 선정된 윤치호는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기도 했다. 1939년에 우가키의 중화민국과 합동하는 협상에도 반대한다. 그는 농촌 진흥 운동에 참가하기도 한다.[출처 필요]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내선일체'의 실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강연회에서 '반도민중의 협력'을 강조했다.[10] 한편으로 1934년에 윤치호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황민화 운동을 거쳐 농촌 계몽 운동과 사회주의, 광복군, 독립군, 임시정부, 경학사, 동제사 등의 해산을 주장하고 창조파, 개조파도 해산하자는 주장을 하는 조선총독대회와 조선력강연대회에 참가하였다. 국민참가조선참가대회 사장을 거쳐 국민조선총독력대회에 가담했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어학회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의 석방, 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로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1939년 1월 박희도가 창간한 잡지 《동양지광》의 고문으로 위촉도었다. 그해 2월 7일 배영동지회 회장과 지원병 후원회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봉급을 주지 않는 자리라서 내가 선출되었을 뿐이다[100]"라며 냉소적인 시각을 보였다. 2월 9일 동양지광사 창간 기념 시국강연회에 참석,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고, 2월 11일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3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의직을 다시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참의직 취임을 거절했다.
1939년 6월 일선장병 휼병금 2000원을 조선군 제20사단 사령부에 납부했다. 그해 7월 중국을 지지하는 영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의 회장을 맡았다. 8월 30여개의 지방 배영동지회가 연합한 배영동지회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식민통치 정당화 이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식민통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그는“도로를 놓고 학교와 병원를 세우는 등 조선에 큰 혜택을 줬다”는 일제 통치자들의 주장은 조선인들보다는 일본인 이주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간파[76] 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101] 윤치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101]
반영, 반미 활동과 소극적 저항 [편집]
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영국과 영미권 국가들에 대한 실망을 품게 되었다. 1920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김성수와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에 호의적이고,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인도의 독립운동가인 수바스 찬드라 보세, 마하트마 간디, 자와랄할 네루 등의 책과 칼럼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1934년에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세가 망명 중 한반도를 방문했는데, 그때 그를 직접 찾아가 면담을 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찬드라 보세의 저서 '질곡의 인디아(Fettered India)'를 구해서 탐독했다. 이 책을 읽은 뒤 윤치호는 영국이 인도를 잔인하게 학대, 억압통치한다는 사실을 접한다. 한때 일본의 통치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영국의 식민통치를 본받아야 된다고 봤던 그는 영국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1937년부터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서는 반미, 반영 활동을 강요하였다. 1939년 7월 23일 그는 경성부에서 인파 4만 명이 모인 전 조선 배영궐기대회 회장에 추대되어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장덕수 등은 영국을 흡혈귀라고 맹비난했으나 그는 흡혈귀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어쩔수 없이 참석한 그는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고 내빈석에 앉아있었다. 윤치호는 참석자들이 영국, 미국을 동아시아를 가로챌 강도, 혹은 영국은 동아시아의 흡혈귀라고 비난하였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이 대회에 참석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단지 자신은 '회장 자격이라서 어쩔수 없이 참여해야 한다.[102]'고 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각종 반영 시위, 반미 시위를 기획하고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때에도 초청장만 받거나, 참석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윤치호는 영국이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관대함을 베푼다고 보고 있었다.
| “ | 마하트마 간디가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나 영국 정부가 마하트마 간디를 위대해지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만약 스페인, 일본, 독일, 프랑스 조차 그런 인물은 30년 전에 죽여버렸을 것이다. 윤치호일기 1939년 4월 1일자 |
” |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를 통해 실망했으면서도 그가 영국이 그래도 관용을 베푼다고 확신한 것은 마하트마 간디 같은 인물들이 죽임당하거나 박해당하거나, 국외로 출국하지 않고도 국내에서 자유롭게 민족 독립운동을 하도록 방관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 [편집]
창씨개명 [편집]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103]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103]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1월 7일 그는 사촌 동생 윤치오의 집으로 형제와 사촌들을 소집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 윤치소,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윤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오는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03] 반면에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103] 윤치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103] 결정된 것은 없었고 윤치호는 고민하였다.
1940년 4월 그의 집에서 해평 윤씨 종친회가 열렸다. 숙부 윤영렬이 사망하고 공석인 후임 문장(門長, 종친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이때 그는 연령으로 최연장자였고 항렬 역시 가장 높았으므로 문장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그는 문장 자리를 사촌 동생 윤치소에게 양보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계속 압력이 들어오자 창씨개명을 고민한다. 가족들과의 논의 끝에 창씨개명을 다짐하고 성을 윤(尹)의 파자인 이토(伊東)로 정하였다. 그가 창씨개명을 하자 실망한 학생들이 그의 집앞에 와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당시 창씨개명은 그의 자의에 의한 창씨개명은 아니었다. 1940년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그는 이토 치코로 개명했다.
1940년 4월 29일자 일기에서 그는 문장(門長, 종친회장) 선출보다 중요한 안건은 '창씨개명 문제에 대한 윤씨 문중의 거취문제[104]'라고 기록했다. 당시 문장선출보다 중요한 안건은 창씨개명 문제에 대한 윤씨 문중의 거취문제였다.[104] 이때 윤덕영은 창씨개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이런 모임에 참가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던 나머지, 추종자들을 동원해 이 문제(창씨개명)가 아예 거론되지 못하도록 봉쇄하려 했다.[104] 그러나 참석자의 절대 다수는 이 문제를 안건으로 채택한 후, 만장일치로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했다[104] 는 것이다. 한편 윤치호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창씨개명 사태 중재 [편집]
1940년 5월 1일 오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한편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독립운동단체에서는 성과 이름을 바꿔서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다며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5월 1일 오전 11시, 미나미 지로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사회적 갈등 완화를 위해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 “ | 저는 내선일체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진하는 세 가지 이유를 총독 각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 이 주장에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마감시한을 오는 8월 11일로부터 6~10개월 정도 늦추면 어떨까 싶습니다.[104] |
” |
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고, 그 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창씨개명을 한 문중의 결의와 관계 없이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카 윤보선 같은 경우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이 자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봤다.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 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105]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난 차마 우리 아이들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창씨개명을 결정한 것[105]'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조선인에게 일본 시민권을 준 것이라는 찬양과는 달리 일본이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위한 작업이라고 봤다. 그는 '내선일체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하라고 격려하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민족을 일본의 근간이 되는 민족으로 틀어쥐기 위한 방법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105]'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940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양문화학회(東洋文化學會) 주최 동양정사(東洋事情) 강좌에 연사로 참석하다.[106] 그의 창씨개명은 자의라기 보다는 문중회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의 창씨개명이 한알려지면서 9월 그의 창씨개명을 비난하는 투서가 나돌아 서대문 경찰서에서 수사하기도 했다.
1940년 10월 4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을 등록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재단법인 송도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10월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장직에 취임해줄 것을 청하는 부탁이 계속 들어왔다. 여러번 고사하던 그는 12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수락한다.
| “ | 교장직을 수락해서 속을 끓이게 될 게 뻔하다. 만족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군당국, 경찰당국, 도청 및 총독부 당국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연희전문 내부에도 달래기가 쉽지 않은 파벌들이 도사리고 있다.[107] | ” |
12월 연희전문학교로부터 온 학교장직 수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태평양 전쟁 이후 [편집]
1941년 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에 선출되었다. 1941년 2월 제4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언더우드 2세 교장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반일 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추방된 뒤 연전 이사회는 재단 이사의 한 사람인 그를 천거했다. 미국에 유학한 일이 있는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실정을 동정하고 있었고 총독부에서도 명사 대우를 하는 터이므로 학교를 지키는데 다시 없는 적임자로 보여 이사회가 천거한 것이었다.[108] 사람들은 조선총독부가 연전을 빼앗기 위해 그 다리로 그를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했다.[108] 윤치호는 거부하였지만 이사회의 무기명 투표 결과 윤치호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 “ | 교장직을 수락해서 속을 끓이게 될 게 뻔하다. 만족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군당국, 경찰당국, 도청 및 총독부 당국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연희전문 내부에도 달래기가 쉽지 않은 파벌들이 도사리고 있다. | ” |
|
— 윤치호일기 1940년 12월 9일자
|
윤치호 역시 연희전문 교장직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1941년부터 3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뒤 태평양 전쟁 이후 그는 1941년 5월 1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에 임명되자[109], 이를 받아들였지만 3개월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5월 27일 사립연희전문학교 기독교재단법인(私立延禧專門學校基督敎聯合財團法人)의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이후 사망 직전까지 연희전문학교 재단법인이사장의 직위를 보유했다.
그러나 1942년 8월 17일 총독부는 연전을 아주 접수하면서 윤치호를 물러나게 하고 일본인 다카바시 하마치(高橋濱吉)를 교장으로 앉혔다.[110]
관변단체 선임과 회피 [편집]
그는 1941년 1월에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에 선출되었으나 총련 모임에 거듭 불참하다가 1943년 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참여로 바뀌었다.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을 조직, 결성하는데 참석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맞아서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14]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찾아와 한국이 독립할 것이며, 임정에서 조직한 독립군이 국내에 진주하게 될 것을 시사하였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면 한국의 독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미국이 승리한다면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능성을 두고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하느냐며 번민하였다.
이후 자신이 조직한 흥아보국단과 김동환(金東煥) 등이 이끄는 임전대책협의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1941년 9월에 조선임전보국단의 창설을 본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0월 21일 친일 단체들의 결집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식에 불참하였다. 10월 22일 윤치호는 조선임전보국단 조직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임전보국단 행사에 번번히 불참하고 행사를 펑크내어 임전보국단 인사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그해 말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 라는 주제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였다.[10]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좌절하였다. 이후 그는 두가지 가능성을 점지하였다. 일본이 승전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일과 일본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의해 패전하고, 조선은 독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내렸다. 전쟁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불교, 천주교인에 이어 기독교계에서도 전쟁을 자발적으로 찬양, 독려하자 그는 좌절한다. 1942년 8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그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하며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이후 그는 중추원의 정기 모임에 간간히 출석하였으며, 1943년 9월 23일에는 중추원 모임에 나가 점심을 먹은 뒤, 중추원 의원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10~20인이 출근한다는 기록을 남겼다.[109] 그러나 그에 의하면 중추원의 참의들은 출근하여 '1~2시간 동안 잡담과 흡연으로 시간을 보낸다[109]'고 질타했다.
1943년 8월 11일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재단법인 덕성학원(財團法人德成學園)의 재단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 [편집]
1943년 11월 윤치호는 이광수·박흥식·송진우·주요한·한상룡 등과 함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를 개최하여 학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간담회,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결의하였으며 5일간 진명학교 등 10개소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를 열었다. 11월 6일 언론에 '내 아들 이어든 속히 지원하라는 전보를 발송하자'는 제목의 담화문을 기고하였다. 그 날 중추원에서 개최한 단합회에 참석했고 학병제의 솔선협력을 결의한 후, 평남지역 독려강연반 연사가 되어 이튿날 90여 명과 함께 YMCA에서 학병제 경성익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월 12일 평양에서 열린 학도병독려 연찬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강연하였고, 매일신보에 학병 독려 담화문을 발표했다.
1941년 이후 그는 이승만의 미국의 단파방송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프로그램인 미국의 소리 VOA방송에 출연하였고, 그 단파방송이 라디오를 타고 조선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인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설령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되었으나, 일본이 패배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패배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전망했다.
이 기간 중 미국은 한국인 지도자 5명의 정치적 성향을 체크하기도 했다. 미국의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일제와의 협력을 강요받았지만, 한국에서의 위상이 아직까지 높기 때문에 연합군의 한국내 활동에 귀중한 협력자가 될 것[111]"이라고 전망하였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112] 이 되고, 1944년 5월 12일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0월 연희전문학교장 직을 사퇴하였다. 한편 그는 학도병 강연을 다니면서도 한국어로 학도병을 되도록 회피할 것을 주문하고, 일본이 패망할 수도 있으니 섣불리 저항하다가 화를 입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1944년 조선인 우대 감사 사절단의 단장으로 도일하였다.[113]
신앙 활동 및 기타 [편집]
1907년(융희 1년) 윤치호는 로마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기독교대표단의 단장으로 다녀왔다. 1910년(융희 4년) 미국 애틀랜타 주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석하였고, 미국 감리교선교부의 초청을 받고 영국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제1차 기독교 세계선교회의(I.M.C)에 참관하고 돌아왔다. 1916년에는 YMCA 청년회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 활동하였다.[1]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한 이상재를 도와 YMCA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이상재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그 뒤 남부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하고 선교하는 활동을 하였고, 국제 교회연합사업을 주관하였으며 1930년부터 윤치호는 한국내 남·북감리교회 연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새문안교회 건축공사비 중 40%를 원한경 장로가 섭외하자, 기독교계 원로인 윤치호는 거액헌금[114] 을 새문안교회 신축공사비로 기부하였다. 그밖에 오지 선교사들과 개척교회에 파송되는 목사들의 여행 경비를 직접 후원해주기도 했다.
1938년 5월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기독교의 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을 직접 선보였으며 기독교신앙인들의 신앙 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10]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38년 7월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감리교의 통합을 위하여, 조선감리교회와 일본의 메소디스트 교회의 합동을 논의하는 일선(日鮮)감리교회 특별위원회가 개최되자, 그는 김영섭(金永燮), 신흥우(申興雨), 양주삼, 유형기(柳瀅基), 정춘수 등과 함께 조선인전권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43년 10월부터는 각지의 기독교단체 및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지원을 목적으로 YMCA 재단법인 등록사업을 추진, 11월 10일에는 YMCA의 재단인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維持財團)을 구성하고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한편 1908년 그가 역술한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번역본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115] 1941년 부인 백매려가 사망했다. 이후 윤치호는 재혼하지 않았다.
광복과 죽음 [편집]
광복 직전 [편집]
1945년 2월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되었다. 2월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4월 박춘금을 위원장으로 앉히면서 그는 대화동맹 이사장으로 물러났다. 그는 태평양 전쟁 이후, 지하 한국인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을 인식, 감지하였으나 독립은 가망없다고 판단했다.[116]
1945년 2월 13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이 재단법인 송도중학교로 바뀌자 송도중학교 재단법인 이사가 되었다.
4월 3일 다시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의원에 재선임되었다. 6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재추대되었다. 8월 10일 광복 직전, 그는 개성의 광문암동 근처에 우거하고 있었다.
광복 직후 [편집]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패망, 방송을 통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이를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그는 친일반민족위원회 및 경향갤러리에 체포되어 명동재판소를 거쳤으며 3개월간 투옥당했다가 풀려났다.[출처 필요] 광복 직후 그는 애국가의 친필 사본을 셋째 딸 윤문희(尹文姬)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자신이 친일파로 규탄받는 시점에서 애국가에 관련된 것이 알려지면 애국가에 타격을 주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를 찾아온 지인들에게도 자신이 애국가의 원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붙여둘 것을 당부하였다.
1945년 8월 19일 개성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113] 그러나 피습은 실패하고 괴한은 도주했다. 이후 윤치호에 대한 비난과 규탄이 줄을 이었고, 외출시에도 그를 친일파, 매국노라며 매도하는 학생들이 나타나 돌과 휴지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의 비난과 투석에 개의치 않고 개성과 서울을 활보하였다. 고향 신항리 신촌에 세워진 '전 협판 윤치호 불망비'는 파괴되었고, 음봉면 음봉국민학교에 세워진 기념비는 학교 구내로 옮겨간 탓에 무사하였다. 9월 서울에서 한민당(韓民黨)이 창당되자 그를 원로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117]
1945년 9월 2일 인천을 통해 미국 육군 24군단이 주둔하였다. 이때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파견한 대표단은 미군정이 한국 정부의 조직에 활용하길 바라는 믿을 만한 인사들의 명단에 여운형과 여운홍, 안재홍 등의 건준 지도부와 당시 보성전문대학장인 김성수를 포함한 전, 현직 교육계 종사자 6명 등 모두 17명의 인사를 추천하였다.[118] 그리고 적극 배제해야 할 인사로는 미국과 기타 외국에서 교육받은 친일파로서 윤치호, 박흥식 등 14명의 명단을 제시하였다.[118] 이는 CIC보고서 'G-2, 1945. 9.9: I'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군정은 이를 무시하였고 그는 별다른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9월 23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면서 중추원 고문직에서 파면되었다.[119] 그러나 그는 의미없는 자리였을 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감정적 친일청산론에 대한 비판 [편집]
그는 미군정 주둔 이후 군정청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내지는 조선인을 적국민으로 다루는 것을 비판했고, 군정과도 충돌하였다. 그는 군정청 소속 군인들 사이이 세상에서 무서운 세가지가 다이어리아, 고우너리아, 코리아라는 농담을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 농담을 하는 저의가 뭐냐며 영어로 추궁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친일파 청산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이승만과 김구, 미국 군정청에게 각각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불가항력을 역설하는 편지서신을 보냈다.[120] 편지에서 그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애국자연 하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독립을 달성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이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딸들을 공장에 보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군국주의자들의 명령과 요구를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는 일본의 신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중략)...
우리는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운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잃었던 보석을 찾은 듯한 은혜를 입은 만큼,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소한 개인적 야심과 당파적인 음모와 지역간의 증오심일랑 묻어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나라의 공익을 위해 다 함께 협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민중들의 무지와 당파간의 불화 속에서 우리 조선의 미래를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열되지 말고 단결해야 합니다. ...(중략)...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성을 가지고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딜 가느 으스대며 다니는, 자칭 구세주들의 꼴이란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들은 아둔하거나 수치심이 없는-아마도 그 둘 다인-사람들인지라, 조선의 자유는 달나라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유만큼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중략)... 이른바 그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의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 뿐입니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저 허세와 자만에 찬 (자칭)'애국자'들은 어떤 사람이 큰 지팡이로 일본을 내쫓을 때까지 계속해서 동방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읊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저 '애국자'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121]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리며 수시로 규탄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이 개선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고 영웅심리에 들뜬 자들이라며 경멸하였다.
사망 [편집]
1945년 11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임정 요인 환국 직후 김규식이 그를 찾아왔다. 이후 여러 번 김규식의 방문을 받았으나 그는 김규식에 대한 정치적 지지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다시 친일파의 석방, 사면론을 주장하였다. "애국자들의 공갈협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보편적 정의로 일반 사면을 단행해야 하는[122]"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 의하면 친일파들을 사면, 석방해주어야 되는 이유로 그는 사이비 애국자들의 공갈과 위선, 폭력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11월초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와 면담하려 하였으나 모두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의 비서로 있는 사촌동생 윤치영을 통해 이승만 측과 교섭하였으나, 이승만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경교장 역시 윤치호의 방문 요청에 답변을 회피했다. 광복 직후 그는 친일 협력자 내지는 거물 친일파 정치인으로 수시로 규탄, 비판당하였고, 수시로 비난과 논쟁에 시달리며 이를 반박하였다. 11월 말 치아에 통증을 느낀 그는 경성부에 있는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오던 중 노상에서 갑자기 졸도하였다.
만년의 윤치호는 기간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다.[123] 이후 병석에 누워 있었다.
| “ |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123] | ” |
1945년 12월 6일 오후 4시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開城府松都面高麗町)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121] 임종 직전 그는 중풍으로 불편한 몸으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들은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했다.[123] 독립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시중에는 친일파로 몰리자 슬퍼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사후 [편집]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석곡1리 독골마을 선영에 안장되었다. 윤치호의 묘소는 둔포면 석곡1리 선영 중 가장 오른쪽에 있으며, 마애방, 백매려 두 부인과 합장되었고, 큰 평면 돌무덤으로 되어 있다. 묘소 옆에는 검은색 오석 재질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50년 1월 그의 장남 오당 윤영선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1960년 8월에는 조카 윤보선이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이후 그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대상에 선정되었으나 독립·계몽운동가였다가 후에 부일, 친일협력 활동 등이 감안되어 건국공로훈장 수훈에서 제외되었다. 1995년 광복회 주관으로 한 “윤치호 친일 협력에 대한 재평가” 강연이 개최되고[124], 1998년 4월 3일 서울 종로2가 YMCA 강당 2층에서 윤치호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2년 3월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는 7일 '친일파 윤치호 동상을 철거하라'는 성명서를 통해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정된 윤치호가 인천 모중학교 교정에 설립자로서 1968년 세워진 것으로 확인했다며, 해당 학교는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위해 이 동상을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5] 인천연대는 이와 관련 "윤치호의 동상이 인천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동상이 청소년의 배움터인 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2001년 12월23일 서울의 광신학원이 설립자 박흥식의 동상을 친일파라는 이유로 교정에서 철거했음을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바르게 심어주는 것만큼 중요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학교 당국이 윤치호의 동상을 스스로 철거하지 않을 경우 역사바로세우기 및 인천정체성 바로찾기 차원에서 철거운동을 벌여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125]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가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126] 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공개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27] 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대인,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2008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교수 박노자는 그를 영화화 할 역사인물로 추천하기도 했다.[13] 그에 의하면“윤치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사 최초의 ‘세계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애국가를 작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제 시절에는 ‘조선민족에 자립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대지주인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친일을 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성, 민족주의, 친일… 근대적 이념과 지향의 다면적 구도에서 한 개인이 배회하는 과정은 윤치호를 통해 대단히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를 영화화하자면 그건 ‘시대와 개인’의 극이 될 것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격변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는지, 개인으로서 새로이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보여주는[13] ”인물이라는 것이다.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윤치호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3기 중 2기가 발견되어 강제 철거당했다.[88]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2010년 4월 제보를 받고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현장을 답사, 부귀초에 철거 협조 공문을 발송하는 등 학교측과 부귀면의 협조로 일제잔재물인 윤치호 불망비를 철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88] 그러나 곧 반환되었다.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의 요람에 친일파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수치라며 불망비 2기를 철거했다.[128] 같은 해 7월 충북 충주에 위치한 민족문제연구소 일제강점기 역사관 자료실로 옮겨졌다.[129] 그러나 '친일이라도 진안군의 역사를 담은 문화재'라는 일부의 주장과 윤치호의 종중 후손들의 끈질긴 요구로 불망비는 2012년 반환됐다.[128]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비석 옆에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안내판을 함께 세워두었다.[128]
연보 [편집]
- 1865년 충남 아산 에서 군부대신, 판서를 지낸 해평 윤씨 윤웅렬의 3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어남. 누이 윤경희와 그는 전주이씨 소생이고, 이복동생 윤치왕과 윤치창은 서모 김정순 소생이다.
-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도진샤에서 수학하였다.
- 1882년 김옥균의 권고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를 다시 영어로 해석하는 것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당시 조선인 중 간단한 회화라도 할수 있는 몇안되는 사람이었다.
- 1883년 초대 주한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바로 외무아문 주사에 임명, 겸임하다. 이때 윤치호는 고종과 푸트의 통역을 담당했고 그때 통역하던 내용 일부가 보존되다가 아들 영선, 정선에게 전해졌다.
- 1884년 당시 근대화론자로 갑신정변을 지지했으나 급진성에는 반대하다. 그러나 정변 실패 후 상하이로 망명
- 1885년 고종의 허락으로 상하이에 가다.
- 1885년 봄 정변의 실패에 좌절하여 상하이에서 방황, 술과 기방에 출입하며 몸을 망치던 중 어느 선교사의 충고로 기독교인이 되어 거듭나다.
-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에서 수학(한국인 최초의 미국유학생)
-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에서 석사학위 받음 졸업
- 1895년 귀국, 외무부협판과 학부협판을 역임하다
- 1896년 조선인 축하사절단 대표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 러시아로 가던 중 선상에서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3등에 특별 임명되었다.
- 1896년 귀국하는 길에 베트남을 경유하여 귀국, 이때 베트남에 들어온 프랑스의 문물과 청결성을 보고 감탄, 충격을 받음
-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 서재필, 이상재, 유길준 등과 독립협회 운동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주최
- 1898년 제 2대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헌의 6조를 국정에 반영시킴
- 독립신문 2대 사장
- 1898년 12월에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
- 1899년 1월 중추원 부의장직을 사퇴
- 1899년 원산감리 겸 원산항재판소 판사
- 1901년 함경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 겸 원산항재판소 판사
- 1902년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이 되고 삼화항재판소 판사를 겸임하다.
- 1903년 함경도 안핵사
- 1903년 천안군수가 되었다가 인접 직산군수가 살해당했으므로 직산군수도 겸임하다.
- 1904년 무안군수 겸 무안감리
- 1904년 다시 외부협판에 임명
- 1904년 특명으로 외무협판 자격으로 하와이 이민자들을 시찰하고 귀국하다
-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조약의 무효성을 외치고 다녔으나 실패하다. 바로 책임자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뒤 관직을 사퇴,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 거부
- 1906년 도서관 설립 운동에 참여하다
- 1906년 대한자강회 조직,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 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
- 1907년 자헌대부로 승진
- 1907년 신민회 회원의 한사람으로 활동, 평양의 대성학교 설립에 동참하고 안창호의 양보로 교장에 추대되다.
-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의 이사, 부회장맡고 청소년 계몽운동을 통한 기독교구국운동 전개
- 1910년 10월 한일병합 직후, 윤치호 자신의 품계가 당시 정2품이었으므로 남작직을 수여받았으나 거절하다.
- 1911년 아버지 윤웅렬의 죽음으로 남작직을 습작받았으나 사양하다.
- 1912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복역
- 1914년 총독부에서 천황 명의로 목배를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 1915년 형문을 받던 중 반성문을 쓰고 특사로 풀려남
- 1917년 중앙 기독교 청년 회장에 취임
- 1918년 12월 신익희, 송진우 등이 찾아와 만세 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승산이 없다며 거절하다.
- 1919년 3월 3.1 운동 초반, 학생들이 체포되었으나 민족대표 서명자들이 나서지 않자 이들을 규탄했다.
- 1921년 미국에 가서 외교 활동을 하라는 이상재, 이승만, 서재필 등의 권고를 거절하다.
- 1922년 송도고등보통학교장에 취임
- 1930년 모교인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 받음
- 1930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피선되고, 흥업구락부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
- 1931년 충무공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나머지 빚을 갚기 위해 모금운동을 추진하다. 그해 5월 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재단이사의 한사람에 피선
- 1937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을 보증하고 석방을 탄원하다. 그러나 안창호 석방은 거부당하다.
- 1938년 1월 안창호의 병보석을 탄원하였다.
-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의 책임자로 일제로부터 취조를 당함
- 1939년 야마가타 테이사부로 등 일본인 지인들로부터 조선총독부의 내사, 감시를 당한다는 소식을 입수. 그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 주최 행사 중 상당수 불참했고, 일본 천황이나 일본제국주의의 영웅을 기리는 행사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 1940년 5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연행되었다 풀려났다. 곧 미나미 지로 총독을 찾아가 창씨개명을 연기해줄 것을 촉구하여 성사됨
- 1941년 종로방 가회동의 취운정을 매입했다.
-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임전보국단 주최 행사에 번번히 불참하여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하다.
- 1941년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임명됨
- 1945년 2월 귀족원 의원에 선임
- 1945년 8월 해방. 이후 그가 창씨개명이나 소극적 협력을 하게 된 배경은 무시당한 채 인신공격과 비난에 시달림당하다.
- 1945년 8월 자객이 개성의 집에 침투하여 피습을 당함
- 1945년 11월 경성부의 치과에 다녀오던 중 노상에서 졸도, 이후 몇번 쓰러져 의식불명
- 1945년 12월 개성 고려정 자택에서 사망
기타 활동 [편집]
1890년대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본인이 타고 다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130]
한국인 최초로 캐나다를 방문한 인물이기도 했다.[131] 미국에서 유학한 후 귀국길에 밴쿠버에 들렀던 것으로 전해진다.[131]
천자문을 본따 《유학자취》 (幼學字聚)라는 책을 출간하였다.[132] 천고지원(天高地圓)·일승월조(日昇月照) 등 모두 1,200자로 되어 있으며, 간편하고 쉬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초학자인 어린이들을 가르치기에 편리하게 엮었다.[132] 이 중 ‘효조오석(曉朝午夕)’이라 하여 “새벽에서 아침이 되고 아침에서 낮이 되며 낮에서 저녁이 된다.”든가, ‘주명야암(晝明夜暗)’과 같이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는 식으로 새로운 문자학을 도입한 것이다. 이 책은 개화기 아동교육을 위한 문자학습서로서 많은 노력과 연구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132] 라는 평가도 있다.
1895년 10월 민비가 암살되자 그는 민비의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존재했다고 확신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민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133] 민비가 암살당할 무렵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유길준와 일본인 이시츠카가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4]
한편 일본의 귀족화된 조선 왕족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이씨 조선의 지난 왕실에 대하여 무척 호의적이라고 뽐내 왔다. 동양역사에서 몰락한 왕조가 이토록 존엄한 대우를 받았던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134]
윤치호는 한일병합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책임을 통감한 인물이 의친왕 외에는 거의 없었다는 점과, 대부분의 황족들이 일제가 주는 공작, 백작, 남작의 작위를 받은 점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그에 의하면 일제에 협력한 양반고관 외에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았던 대한제국 황실 역시 한일병합의 원흉이자 무책임한 존재로 비춰졌다.
1909년 윤치호는 케롤라이나 학당의 이름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1898년 10월 2일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켐벨 여사가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세운 것이 '케롤라이나 학당'이었다. '배화'는 1909년 윤치호가 꽃을 기른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135] 이는 배화여중, 배화여고, 배화여자대학의 교명으로 이어졌다.
1929년 3월 12일 셋째 딸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136]
1945년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고 몰락했으나, 그의 이복 동생 윤치왕과 윤치창, 아들 윤영선(尹永善)은 연좌되지 않았다.[137] 4촌 동생 윤치영과 조카 윤보선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윤보선은 후일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원으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여섯째 사위 현영학은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민중신학자와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 윤효진은 1970년대에 피겨 선수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인 윤효진(미국 거주)과 주영순은 70년대에 주니어선수권에 도전했다.[138]
1900년대 중반 윤치호의 둘째 아들인 윤봉성(尹鳳成, 요절)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영서원 동창 최규남(崔奎南)은 몰래 남의 앵두밭에 들어가 앵두를 서리해서 배불리 먹고 있었다. 지나가다 이를 본 윤치호는 아들 윤봉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고 한다. 윤봉성이 호되게 매를 맞고 통곡하는 것을 본 최규남은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봉성이는 아무죄가 없어요 라며 윤치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였다 한다. 이를 본 시민들이 달려들어 윤치호를 말리니 윤치호는 내 아들을 도둑놈으로 만들 셈이냐며 분을 참지 못하고 아들 윤봉성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인간 관계 [편집]
그는 개인적으로는 서재필, 유길준, 안창호, 이동녕, 이상재, 양기탁, 박중양,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김규식, 이승만, 이광수 등과 친분관계를 쌓고 교류하였다. 이 중 서재필과 이승만, 김규식이 망명하고, 박중양은 3·1 운동 이후 절교하였으며, 유길준은 일찍 사망하면서 그의 인간관계의 폭은 다소 줄어들었다.
사회주의자였던 허헌 역시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성공 가능성을 장담못하면서도 대가 없이 그에게 광산사업에 쓰라고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애국가 작사자설 [편집]
그의 사촌동생 윤치영(尹致瑛)에 의하면 그는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일부 작곡했다고 한다.[139]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 목사는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139]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140]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141]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다시 고쳤다.
주요한[142] 과, 안태국[143] 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62]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안창호)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62]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62]
— 주요한, <안도산전서>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144]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144] 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기록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145]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62]
음악 평론가인 김종만은 1904년 부터 1920년 사이에 부른 미국 한인 찬송가 속에 “윤선생 티호 군 작사”로 적힌 현행 애국가를 보관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적십자가 발간한 “National Anthems-And How They Came to be Written” 이란 영문자 책에서도 애국가 작사자가 Chiho Yun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24]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140]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140]
이화여자대학의 김활란 박사는 윤치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124] 김활란이 해방직후 개성에서 은둔하고 있던 좌옹을 문안 하였는데 그는 당부하기를 "애국가를 내가 작사 했다고 말 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까[124]" 라고 당부 했다는 것이다.[124] 후일 김활란은 그 이야기를 연세대학교 교수 김동길에게 전하였다.[124]
그 후 윤치호는 죽음 직전인 1945년 10월에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 필사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가사지 사본을 셋째 딸인 윤문희(尹文姬)에게 주었다.
윤치호 일기 [편집]
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일기를 썼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다가 뒤에 한자로 쓰다가 뒤에는 영어 필기체로 기술했는데, 이때문에 후일 1968년부터 그의 아들 윤영선으로부터 자료를 기증받아 국역(한글본)으로 옮길 때 난해한 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타인이 자신의 일기를 볼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치호가 영어로 일기를 쓴 다른 이유로는 당시 조선에 '자유', '권리', '의회' 등 서구 시민사회의 산물을 번역할 만한 마땅한 국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문에는 언문일치나 고백체가 없어 '고백적 글쓰기'가 어려웠기 때문[146] 이기도 했다.
1883년부터 1943년까지의 일기이며 6.25 전쟁이 발생하자 개성에 있던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은 일기의 일부는 자신이 갖고 월남하고, 나머지 일제 강점기의 중요한 부분은 보존을 위해 미국에 체류중이던 윤장선에게 보냈다. 휴전 뒤 1968년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자신이 소장하던 일부 내용을 기증하면서 미국에 있던 윤장선 역시 형에게서 받은 일부를 택배로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
윤치호 일기는 1968년 그의 장남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한 이후, 난해한 필기체 영어와 상류층 언어, 지방 방언 등의 해독오류 등으로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일부만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2000년대 이후 다시 한글로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종 독살설 [편집]
윤치호는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종 독살설을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윤치호는 1919년 고종 사망 당시에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었으나 후에 고종독살설에 가능성을 두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 “ | 이태왕(李太王·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 ” |
|
— 1919년 1월26일자, 윤치호 일기
|
윤치호에게 고종독살설을 전한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147]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전했다.[147]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147]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 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147] 고 했다. 윤치호는 처음에 고종 독살설을 유언비어라며 부정하였으나 후에 조선총독부에 빌붙고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는 일부 구 대한제국 조정 대신들의 행위를 보면서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 그는 고종의 죽음을 '조선의 자결권이 끝내 소멸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148]'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안질환과 호흡기 질환 [편집]
평소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치호는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 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149]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치호 외에도 이승만, 윤보선도 단골이기도 했다.[149]
조선 최초의 영어회화 [편집]
조선인 최초로 영어를 배웠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영어사전을 저술하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저술했다.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
어느 노인과 승려가 길동무가 됐다. 노인은 상투를 틀었으나 머리가 빠져 상투가 엉성하게 되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승려는 노인의 상투를 자르고 노인에게 장삼을 입힌 뒤 도주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난 노인은 승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상투를 만졌으나 상투가 없었다. 노인은 거울을 보며 그러면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를 갔다는 말인가?
그는 1890년대, 1900년대 무렵 조선에서 영어를 구사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애민태과 손실정체 [편집]
그는 원산부윤 겸 덕원감리에 재직중 애민태과 손실정체라는 특이한 죄명으로 파직되었다. 1897년 덕원 감리의 관할지인 안변(安邊) 근방 김피(金皮)라는 산골에 서울에서 피난온 천주교도들이 한데 모여서 교당을 짓고, 파리에서 나신부(羅神父:Thomas Bouladoux)라는 프랑스인이 와 있었다. 나신부는 자기가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든가 또는 절을 하지 않으면 양반인 양대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크게 노하여 호령을 하였다.[150] 그리고 자기가 부리는 불량배의 말만 곧이 듣고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다가 무실한 죄명을 씌워서 자기 집 감방에 감금하였다. 관찰사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나신부에 대해서는 안변 군수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으며 어쩌다가 어쩌다가 有審問事 卽爲捉來(물어 볼 일이 있으니 곧 잡아오라[150])는 묵패가 나신부로부터 떨어지면 사람들은 마치 사형 선고나 당한 듯 벌벌 떨었던 것이다.[151]
그는 프랑스 말로 항의문을 써서 나 신부의 행장을 서울에 있는 프랑스 공사에게 상세히 알렸다. 문체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상당히 격렬한 것이었다. 그 항의문이 간 지 얼마 안되어 나신부가 서울로 불려 올라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151] 그에 따라 '감리사가 편지 몇 줄 쓰더니' 라는 말이 점점 확대되어서 나중에는 '양인놈 볼기를 쳤다'로 변하여 좌옹은 호랑이 감리로 갑자기 유명해지게 되었다.[151]
좌옹은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세금을 내고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특별 명령을 내리어 범법자가 있으면 비록 서양인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처벌하니, 외국인들도 자진해서 세금을 지참하게 되었으며[151], 원산항에 들어온 군함에서 도주하여 상륙한 독일 해병을 즉각 체포하[151] 기도 했다. 원산 해관 세무사로 와 있던 영국인 오이센이 봉화대 근처의 국유지를 매수하려[151] 하자, 외무부(外務部)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152]
1902년에는 장차 있을 러일 전쟁에 대비함인지 십수 명의 러시아 사관(士官)과 군인들이 원산항으로 들어와서 측량을 할 목적으로 여관에 투숙한 후 러시아의 국기를 높이 달았었다.[152] 이 소식을 들은 좌옹은 즉각 항의하고, 러시아 사관을 불러다가 외부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고 강경히 말하였다.[152]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여관 지붕에 달린 러시아 국기를 내리고, 일단 국경 밖으로 나가서 외부의 허가를 받은 연후에 다시 들어오라고 꾸짖었다. 그들도 하는 수 없이 위협을 하고 간청도 하다가, 나중에는 러시아 군함을 오게 해서 국경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152]
덕원감리로 재직 중 제정 러시아의 포경선 한 척이 고래를 쫓아서 원산 근해에까지 들어와 인심이 극도로 소란하던 때에 새로 부임해 온 감리가 외국 유학에서 얻은 신지식을 발휘하여 영해 침범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단호한 태도로써 포경선을 즉시 나포한 일까지 있었다.[153] 사대주의에 눈이 어두워서 외국인이라고 하면 그저 무서워만 하던 그때의 민중들은 덕원 감리 영감만은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보기드문 명관으로 믿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153]
그리하여 덕원에는 이임도 하지 않은 윤 감리의 송덕비까지 서게 되었는데, 중앙 정계에서는 세력 다툼과 파벌 싸움의 여파로 덕원 감리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무슨 히집이라도 잡아서 쫓아내려 했다. 암행어사 모씨가 덕원에 와서 비밀리에 감리의 잘못을 조사했다.[153] 그러나 백성들의 원성보다는 도리어 칭송하는 소리가 많았으므로 무슨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었다. 암행어사 모 씨는 생각다 못하여 한학자답게 새로운 죄명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이 즉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正體)'였던 것이다.[154]
덕원 감리 윤치호는 애민태과하여 정부의 체통을 잃었으니 봉고 파직한다.[154]
이리하여 좌옹은 죄 아닌 죄명으로 덕원 감영에서 쫓겨났다.[154] 비록 드러내놓고 떠들지는 못했으나 '애민태과'라는 전무후무한 죄명으로 덕원 감리를 파면당한 윤치호에 대한 동정이 점차 크나큰 여론으로 변하게 되니, 조정에서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사유를 고종에게 아뢰니, 좌옹은 얼마 안 가서 삼화 감리로 복직되었다.[154] 이때부터 '애민태과'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게 됐다.
사상과 신념 [편집]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당시 그는 무지한 조선의 민중을 계몽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가 미국 유학 당시 기독교에 입교하고 교리를 배우고 서구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를 조선에 받아들여 사회를 바꿀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독립,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을 그는 민중의 무지함 때문이라 보았고 이는 후에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는 것을 당연한 징벌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계몽과 개혁으로 근대 한국이 소생할 기회를 한국인 스스로 저버렸다고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되었다.
교육 입국론 [편집]
윤치호는 교육의 힘이 쓰러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울 수 있는 지름길, 기틀이라고 봤다. 그에 의하면 철없는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것보다, 농업, 공업 등의 기술, 의술, 역사, 문화, 예술, 인문소양, 국어 등을 가르쳐서 무지함을 일깨우는 것과 종교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 독립운동에 뛰어들도록 선동하는 것보다 더 큰 애국이라고 봤다.
| “ | 가난한 소년을 그의 아버지보다 더 똑똑하게 만들려고 학교에 보내는 사람이야 말로, 정치적 소요를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는 이들보다 더 많이 기여하는 것이다. 오도(誤導)된 사람을 성실한 종교적 삶을 인도하는 사람이야 말로, 우매한 민중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만들어 감옥으로 가게 하는 이보다 우리 조선민족에게 더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155] | ” |
이러한 확신에 따라 그는 가난한 고학생들의 학비와 장학금을 대가 없이 지급해주었고, 해외에 유학을 가는 학생들이 자신을 찾아오면, 유학 목적이 무엇이고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학비를 대 주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무지함의 탓으로 보고, 배우고 알고 깨닭는 것이 정치적 독립 이전에 선행되어야 된다고 봤다. 무지한 상태로는 독립이 된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나라의 식민지가 되리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나 맑스, 레닌 이념 교육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해 '한낱 이상에 불과한 이념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겠다.[156]'고 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레닌의 사례를 들며 '한낱 이상에 불과한 이념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겠답시고 자기 나라를 지옥에 빠뜨려, 끝내 이상이란 게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입증하고 말았[156]'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되 공산주의 이념에는 절대 빠지지 말라고 거듭 권고했다. 윤치호는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빠지는 것을 두고 "(그들의) 게으른 혓바닥을 굴리는데 사회주의는 참으로 이상적인 분야[157]"라며 비판했다. 그는 공산주의나와 맑스, 레닌 이념 교육은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자기 합리화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못박았다.
노비 해방과 신분제 폐지 [편집]
1895년 2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치호는 즉시 자신의 노비 문서를 태우고 즉시 노비를 석방시켰다. 윤치호는 아버지 윤웅렬과 숙부 윤영렬에게도 인간의 평등함을 역설하고 노비의 석방을 설득하여 1905년 윤웅렬과 윤영렬도 노비문서를 태우고, 자기 집의 노비에게 모두 재산을 나눠주어 석방시켰다. 인간의 평등함을 역설한 그는 족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95년 12월 서재필 귀국 이후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를 해방시킬 방안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이를 공론화시키기로 작정하고 1897년 이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상정한다.
1897년 11월 1일에 개최 한 토론회에서는 주제를 노비 제로 선정 하여 그 부당함에 대한 열띤 논의를 개진케 하였다. 이 때 주제가 " 동포 형제 간에 남녀 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 샹에 대단히 불가 하다는 문제" 였다.[158] 이 토론회 에서는 일반 회중이 토론에 자유로이 참가 하여 각자의 의견을 개진한 뒤 윤치호 와 서재필이 각각 노비제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여기서 윤치호 는 노비 제도의 폐해와 비 인간성을 구체적인 사례 를 들면서 지적하였으며 서재필의 경 우는 미국에 있어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참상을 이야기 하였다. 이들의 연설을 마친 뒤 이날의 주제에 대한 청중의 의견을 물어 투표한 결과 "노비제가 의리샹 불가하다." 는 주제에 만장일치 로 찬성 하였다. 주제에 찬성한 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해방 시키도록 하자는 동의도 함께 가결시켜 토론회가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158] 당시 참관자에 의하면 토론이 매우 진지 하였으며 토른 회의 결과 100 명 이상의 노비들이 자발적으로 해방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한다.[158]
한편 그는 계속해서 신분제 폐지, 노비 해방, 족보 폐지 등을 역설하였다. 1928년 그는 사회단체인 계명구락부에 이를 적극 건의하였다. 계명구락부는 1928년 1월 제 22 회 정기 총회에서 이사 윤치호외 6인, 평의원 에 허헌 외 14인을 선임하였는데, 이 때 음력을 폐지할 것과 양력을 실행 하며 족보 를 폐지할 것을 결정하였다.[159] 그는 모두 나라를 잃고 자유를 박탈당한 마당에 노비 제도를 유지할 이유가 없으며, 신분제도도 무의미하다고 꾸준히 설득하였다.
신분제 폐지는 근대국가 에 있어 국민을 구성 하는 개개인의 신분 해방을 뜻하며, 결국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거쳐야 할 필수적인 단계 였다.[158]
정치, 사회관 [편집]
유교 비판 [편집]
고려와 조선 1천여 년을 내려온 유교이데올로기에 부정적이었다. 그에 의하면 유교와 성리학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 억압하는 폭압적인 사상이었다. 윤치호는 1900년 12월 18일자 일기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보와 생동하는 내용도 없거니와 한국에 관한 내용도 없는, 진부한 고대 중국의 고전과 역사 위주의 교육으로 곧 한국인의 중국인화(中國人化)하는 교육이라고 비판했다.[53] 또한 실천하지 않으면서 위선적인 도덕군자를 양산하는 문화로 평가했다.
| “ | 현명한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학교에서 중국 서책을 금지시키는 일[53] | ” |
그가 중국 서책을 금지시켜야 된다고 주장한 주된 원인은 위선적인 도덕군자들의 이론적 근거로 중국의 유교, 성리학에 대한 것이 주로 인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교를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억압의 도구, 내지는 억압과 독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 “ | 유교는 국가에 대하여 국왕을 압제자로, 며느리에 대하여 시어머니를 압제자로, 아내에 대하여 남편을 압제자로, 노예에 대하여 주인을 압제자로 만들어 가정과 국가에서 모든 자유정신과 기쁨을 말살시켰다. 따라서 유교는 압제적 계서(階序)체계라 할 만하다.[53] | ” |
윤치호는 유교를 도덕과 정의를 앞세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한 성리학의 가례 역시 개인의 선택권을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체제로 규정했다. 또한 민족의 호전성, 상무 정신을 사라지게 만든 것도 유교의 일방적인 충효 강요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공자(孔子)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1900년 5월 27일자 일기에서는 공자가 "사람은 관직에서 군주를 섬기는 것이 최고의 의무"라 가르쳤고, 자기 스스로 "상가지구(喪家之狗)"[160] 처럼 관직을 추구했던 사실을 지적하고[53], 공자를 비판, 유교적 한국 사회의 이기적인 관직 추구열(출세지향 현상)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53] 그는 공자의 잘못된 사상이 동양사회를 2천년간 오도했다고도 주장했다. 동시에 노동을 천시하는 국내 민중들의 인식을 증오하였다.
유교가 무력한 것은 허례적인 효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161] 성리학적 계급, 서열체계에 집착하지 않고 맹자의 역성혁명론이나 순자의 법치주의 사상이 제대로 적용이 되었다면 무력한 사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내다봤다. 윤치호는 부모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가 없이 그렇게 해야만 선량한 인간으로 취급을 받기 위해 억지로 효자, 효녀가 되기를 사회가 강요한다고 하였다. 그는 1894년 3월 11일자 일기에서 효를 허례적인 존재라고 규정했다.
| “ | 유교의 교훈은 꽤 아름답다. 그러나 그 신봉자에게 그 교훈을 실천하게 할 힘이 없는 조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유교는 무력하다. 따라서 무용하다. 그 기초가 효 이상의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유생들은 효에 규정된 계울을 성취했을 때 그 덕의 원리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이 극히 진부한 덕은 방종, 복수, 거짓, 증오와 가식을 포함하고 있다.[161] | ” |
그는 성리학의 편협성이 예의를 가장하여 방종, 복수, 거짓 등을 내포한 위선적인 사회로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성리학의 교조주의적인 사상과 반자유주의적인 사상이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봤다. 그러나 유교 만을 일방적으로 문제삼은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포함하여 어떠한 종교도 처음에는 인민을 진작시키다가, 그것이 절대화 되면 인민을 퇴화시키고 억압한다고 보았으며[53], 그래서 한국의 모든 잘못을 유교에만 책임지우는 것은 불공정하다고도 했다.[53]
양반에 대한 조롱 [편집]
윤치호는 늘 조선 양반들의 허세와 허위 의식을 조롱하였다. 1896년 민영환 일행이 '대비달자(大鼻澾子·코 큰 오랑캐)의 나라' 러시아의 황제 대관식에 초청받아 가는 길에 동행했던 윤치호는 일기에 "Mr. Min은 전형적인 조선의 '양반'이다. 그는 모든 일에 하인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 옷을 입고 양말 신는 일, 코트의 단추를 채우는 일조차도 말이다. 나는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잠자고 먹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162]"고 기록했다.
민영익이 자신의 하인들에게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게 하고 시간을 묻는 것과, 이준용이 살이 쪘다고 고민하면서 걸어다니지 않고, 가마와 인력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도 게으르다며 노골적으로 조롱하였다. 조선의 양반들은 그의 콧대를 누르기 위해 조선총독부에 여러 번 부탁하여 그를 중추원 참의로 앉히려 했지만 그는 신앙의 이유와 자신이 중추원 참의가 되면 지금까지의 명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설득하여 참의직을 회피한다.
동학 농민운동 지지 [편집]
개화파 지도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윤치호는 상하이 망명 중 동학 농민 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이를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 윤치호는 1894년 2월, 상해 YMCA의 조선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그는 "평화적 또는 폭력적 내부혁명만이 조선의 유일한 구제책이다."라고 주장했고, 동년 5월 동학당의 봉기가 삼남지방에 만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악으로 물들고 피로 얼룩진 정부를 때려부스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환영하고 또 환영한다."라고 주장했다.[163] 윤치호는 소수 왕실과 외척, 부패 관료들만의 이권을 대변하는 사회, 폐쇄적인 유교 사상가들이 사회의 흐름을 가로막는 이런 체제는 과감하게 척결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윤치호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씻어내듯 조선을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조선의 현실을 최악의 상태로 인식했다.[163] 따라서 조선의 현상변혁에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164]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이 민씨 척신 정권의 부패에 견디다 못해 일어선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윤치호는 동학혁명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을 조선의 현상변혁을 위한 좋은 기회로 인식했다.[164]
윤치호는 청일전쟁을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청, 일 양국의 각축으로 인식했던만큼,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의 요구가 순수히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공언했던만큼 일본이 승리할 경우에, 만일 "조선 정부에 지혜와 애국심이 있으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조선을 개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164] 또한 그는 "일본이 조선정부에 제출한 개혁안은 내가 항상 실현되기를 원했던 것이다"라고 하여, 일본의 조선내정 개혁안에 대하여 전폭적인 공감을 표시했다.[164] 그는 동학 농민 운동이 부패한 정부를 타도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윤치호의 이같은 발언은 밀정, 청나라를 오가는 무역상, 외교관, 통역가들을 통해 조선에 전달되었다. 윤치호의 동학 농민 운동 지지 연설, 성명, 강연회는 국내에 그대로 전해졌고, 조선에 있던 그의 친지들은 당황해한다.
윤치호의 삼촌인 토포사 1894년 10월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의 토벌에 참여한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윤영렬은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다.[165] 별군관으로 차출된 그는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아들 윤치소 역시 창의하여 동학군 토벌에 출정하였다.
사촌동생 윤치소 역시 동학농민운동 당시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166] 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165] 윤치호의 발언에 이들은 처음에 당황해하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동학 농민 운동 토벌을 계속한다.
효 사상, 가족이기주의 비판 [편집]
그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는 억압과 폐쇄성, 배타성이며 사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사상으로 보게 되었다. 윤치호는 유교 의 '효 (孝)' 와 충을 '가족 단위 이기주의의 근원[167]'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교 사상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영문으로 기록 된 1880년대 후반 이후의 윤치호 일기는 그 단절을 잘 보여준다. 어렷을 때 익혔던 유교의 '효(孝)'와 같은 신성 불가침의 가치들에 대한 입장 변화가 그 극적인 예이다. 효를 가족 단위 이기주의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기독교적 이타주의의 윤리를 이상으로 삼으면서 사상적, 종교적 단절을 하게 되는 것이다.[167] 그는 실천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실용주의적인 입장에서 유교와 거리를 둔다.[167] 그는 가족주의와 효 사상을 거창한 핑계로 치장, 미화된 이기주의, 확대된 이기주의라고 지적했다.
| “ | 유교의 교훈은 꽤 아름답다. 그러나 유교가 우리 사회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신봉자로 하여금 그 교훈을 실천케끔 하지 못하는 유교라는 종교 체계는 어차피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는 미사여구에 가득 찬 중국 조정의 칙령처럼 똑같이 나쁜 것이다. 실천하려는 자들이 없으면 교훈이 무용지물이 된다. 유교의 기초가 효도 이상으로 되지 않은 고로 유교가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이다. 유교의 남존여비, 왕명에의 절대 복종 강요, 그리고 그 영원한 복고주의는 유교 부패의 씨앗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유교의 현실주의는 사람을 속물로 만든다. ...(이하 중략)... 유교에서는 젊은이들이 효도의 규율만 잘 지키면 도덕군자가 된다고 생각들 한다. 극히 진부한 효도의 원칙을 최고의 도덕으로 만들어놓고 (효도에 따르는) 모든 죄악 즉 방종, 복수심, 거짓말, 증오심, 대단한 위선 등을 덮어둔다.[167] | ” |
윤치호가 본 유교적 효도의 주된 결점은, 바로 공공성의 부재였다. 자신의 가정만, 자신의 부모만 위한다는 것은 바로 사회 전체 구성원에 대한 의무의 방기이자 가정 범위로 확장된 이기심에 불과했다는 것이 윤치호의 뼈아픈 성찰의 결론이었다.[167] 또한 윤치호는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 강요와 변화를 거부하는 영원한 복고주의는 사회를 썩고 부패하게 만드는 '부패의 씨앗'이라 지적했다.[167] 동시에 유교 사상의 허위적, 가식적인 도덕주의가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속물로 전락시킨다[167]'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어른에 대한 공경이라는 거창하게 치장된 또하나의 이기주의와 배타성, 변화를 두려워하고 맹목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는 것이 한국 사회를 폐쇄적이고 병들게 만든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모든 인간이 신 아래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상, 자유주의, 합리주의적 사고관 등이 한국에 적극 보편화되어, 한국인들을 구제하고, 속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민주주의관과 참정권 [편집]
윤치호는 미국에서 접한 의회민주주의 원리에 감격했다. 이후 그는 민중이 스스로 대표자를 선발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국정에 반영하거나 목소리를 내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중추원을 영국이나 미국의 의회식으로 개선하고, 중추원 의원을 민중들이 선발하는 것을 계획하였으나, 그가 왕정, 황제를 타도하고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을 가졌다는 루머가 확산되면서 실패하였다. 민중이 대표자를 선발하여 민중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국정에 반영할 것을 주장하였으면서도 그는 왕정이나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민중이 자기 스스로 대표자를 선발하려면, 판단력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이 필요하다고 확신했고, 그 이성은 교육과 서구 문물, 기독교의 청교도 사상, 합리주의 등을 통해 실현해야 된다고 봤다. 그러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공공정신(에티켓)이 없고 구습과 미신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무지하고 게으'른 것[49] 에 실망한 그는 '이 인종의 피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 그리고 새로운 종교를 갖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민중들이 합리적인 판단력을 내릴 때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편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 중 황제와 조정에서 역적으로 지목한 인사들을 무조건 역적으로 모는 민중들을 보고 경멸과 혐오감을 금치 못한다.
민권사회에 대한 기대 [편집]
윤치호는 조선에 언제쯤 자유가 도래할 것인가를 외치며 한탄하였다. 그는 조선이 인간의 자유가 존중되는 참다운 민주국가가 되려면 2100년경은 되어야 할 것이라며 좌절하였다.
| “ | 천만의 생명이 자유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나라,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포부가 실현되지 못하며, 애국심이 표현되지 못하는 나라, 지옥같은 전제정치가 수세대의 굴종과 빈곤과 무지를 낳는 나라, 삶 속에서 죽어가고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 도덕적 물질적 부패와 더러움이 해마다 수천의 생명을 앗아가는 나라, 이 같은 정치적 지옥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168] | ” |
그는 조선이 대대로 천만의 생명이 자유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나라[168] 였고,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포부가 실현되지 못하는 사회[168] 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거나 자기 포부를 실현하려다가는 반대파의 모함이나 이해집단의 흉계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 보통인 사회이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봤다.
그는 조선 사회를 단군 이후 '도덕적 물질적 부패와 더러움이 해마다 수천의 생명을 앗아가는[168]' 사회로 봤다. 그러나 미국의 한 외교관이 '태국과 지옥 중에서 부임지를 고르라면 태국을 고르겠지만, 조선과 지옥 중에서 고르라면 차라리 지옥을 고르겠노라[169]'고 하자 '그가 원하는 곳으로 발령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분개한다.[169] 그러면서도 다만 지난 70년 동안 조선이,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는 지옥보다는 더 나을 게 없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169] 고 인정하기도 했다.
| “ | 세월이 흐르면 조선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문명국이 될 것이다. 그 천만의 백성들도 언젠가는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세대가 당하는 노예적 예속을 웃으며 회고할 것이다. 마을마다 학교와 대학이 들어서고 아름다운 반도의 도읍에는 궁전같은 집들과 깨끗한 거리 그리고 공중기념물들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꼭 실현될 것이다.[168] | ” |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인 스스로가 제대로 된 민주국가를 조직하고 그 것을 운영해 나갈 수는 있을 것이라는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그는 한국이 시민사회로 발돋움하려면 빨리 잡아도 210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 봤다.
갑오경장에 대한 관점 [편집]
윤치호는 갑오개혁의 진행과정에서 개혁에 대한 회의감을 표시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국왕과 왕비와 대원군에게는 필요한 개혁의 능력도 의욕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정부 관인들이 국가의 장래보다는 자기 보신, 사리를 위하여 분열과 대립을 일삼는 조선의 정치풍토 때문이었다.[164] 그는 고관대작, 정승판서에서부터 말단 관료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자기보신과 개인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자들, 자신의 출세에만 눈이 먼 자들이 있을 뿐이라며 절망했다.
셋째로는,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면 인민의 반일감정으로 개혁이 진행되기 어렵고, 일본군이 철수하면 정부나 국왕이나 왕비가 청국을 끌어들여 개혁이 중단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164] 여기에 독선과 배타성, 폐쇄성이 강한 유교 사상가들과 변화를 무조건 두려워하는 백성들 역시 개혁의 발목을 잡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윤치호는 조선 개혁의 유일한 길은 표트르 대제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의 "명령과 힘"에 의한 것뿐이라 했고, 결국 부패한 소수독재로부터 조선 인민을 구하는 길은 "현 정부아낡은 왕조의 철폐" 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조선왕조하에서는 개혁과 희망이 없다고 믿었던 때문이었다.[164]
| “ | 청국과 조선은 그들의 개혁에 있어 외세의 배제를 원한다. 그러나 홀로 두면 청국과 조선은 절대로 개혁치 않을 것이다. | ” |
|
— 윤치호일기 1894년 12월 10일자[170]
|
그의 현상변화에 대한 열망과 부진한 개혁에 대한 절망은 당시의 정권은 물론 조선왕조까지도 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170]
일본의 개입에 대한 비판 [편집]
그는 갑오경장 당시 일본이 적극적으로 조선에 개입하려고 시도한 것은 크나큰 실책으로 봤다. 그러나 반일감정에 대해, 일본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 만큼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윤치호는 조선의 개혁에 있어서 일본인은 개혁의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데 그치고, 개혁은 조선인 스스로 담당하야야 한다고 생각했다.[170] 그러므로 그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혁강요를 대실책이라 평했고, "일본은 개혁을 조선정부에 맡기고, 단호하면서도 점잖게 개혁을 권고했어야 했다."했다고 했다.[170] 그는 일본의 노골적인 개입은 조선의 개혁을 방해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일본은 개혁의 후원자에 머물고 개혁의 주체는 조선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170]
국가관과 국민관 [편집]
국가관과 정부관 [편집]
그는 국가와 정부의 존재 목적은 국민의 권리를 존중, 보장해주고 지켜주는 것에 있다고 봤다. 따라서 '더 좋은 정부, 즉 인민의 복지에 애국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익을 가져다줄 정부를 가진다면 종속도 진정한 불행은 아니[171] 라고 보게 된다. 그는 같은 민족이 다스리는 폭력적인 독재정부와 이민족이 다스리는 정상적인 정부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수 있다고 하였다.
| “ | 현재와 같은 정부라면 독립은 국가에 구원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한편 더 좋은 정부, 즉 인민의 복지에 애국적이고 공감이 가는 이익을 가져다줄 정부를 가진다면 종속도 진정한 불행은 아니다. 더욱이 건실하고 번영한 국가는 어느 때엔가는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그런데 빈약하고 무지하며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인 정부에 의하여 가난하고 무지하며 연약하게 된 인민, 그러한 인민에게 독립이 뭐 나을 것이 있겠는가?[171] | ” |
그는 국가가 국민의 생존과 권리와 권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국가와 정부에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따라서, 1900년 초, 1880년대부터 만주나 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등장하자,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는 그들을 비판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통치가 조선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체제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56] 그러나 두 세대쯤 지나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이민족만 탓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는 국가 존립의 목적을 민권 보장에 두었다.[171] 국민을 압제하고 수탈하는 포악한 정부 하의 국가독립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그러한 국가는 존립의 가치도 없다[171] 고 보았다.
그는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 이민족의 관대한 지배가 오히려 낫다는 견해도 갖게 되었다.[171] 그가 주장한 참다운 의미의 국가 독립은 국민에게 권익을 보장해주는 국가로서의 독립이었다.[171] 국가는 국민의 권리,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정부는 국민의 대변자이지 상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국가가 국민의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 당연하며 국가가 국민에게 무조건 충성과 애국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정부나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수탈하거나, 국민의 권익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런 정부나 국가에 무조건 애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봤다. 정부가 국민의 권익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런 정부를 가진 독립,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 보다는 오히려 이민족에 의한 관대한 지배가 더 낫다고 보게 된다.
그는 영국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민도나 생활 환경면은 이상적인 사회에 어느정도 근접한 사회로 봤다.
국민관 [편집]
윤치호는 국민을 국가권력의 원천, 권력 설정의 목적, 그리고 국가의 주인으로 인식한 윤치호는 정부는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여야 한다고 인식하여 국가 정치의 존재양식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인민주권론적 인민관을 가졌다.[172] 1898년 유진율에게 보내는 편지와 독립신문 1898년 11월 26일자를 통해 정부가 백성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백성이 정부를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독립신문 1898년 11월 21일자와 관민공동회 상소에서 그는 나라는 백성으로서 근본을 삼고 백성으로서 권력을 세워 일백 관원은 백성을 위하여 베풀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민은 국왕과 양반을 위해 부림당하는 우마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172] 역시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함부로 부리거나 폭력을 행사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늘 인간에게는 생존권과, 신이 개개인에게 평등하게 부여한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어떤 지위나 직책에 있거나, 어떤 목적으로도 개인의 인권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내내 위험한 사상, 불순한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윤치호는 조선왕조와 일제 강점기 내내 국민의 참정권을 주장했다. 인민 스스로를 위하여 국정비판권과 국정참여권, 나아가 혁명권까지도 가진다고 보아, 인민은 국왕과 지배층에 그 운명이 내맡겨진 통치의 대상이 아니고 주권을 가진 정치의 주체라고 인식했다.[173] 이때 그의 주장 중 '혁명권[173]'에 대해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는 심한 반감을 드러냈고, 민중들 역시 그에게 거부감을 품기도 했다. 윤치호는 늘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인간에게는 생존권과 인권이 존재하므로 군주나 정치 세력이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봤고 이는 권력자가 교체되고, 어느 정부, 어느 권력층이 집권해도 변할 수 없는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 치하에서도 반복되었고, 그의 참정권, 정부비판권, 혁명권 요구는 일제로부터도 껄끄럽고 번거로운 사상으로 취급되었다.
민족성에 대한 관점 [편집]
그는 냉철한 판단 보다는 자기 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기 좋아하는 일반적인 한국인들을 경멸하였다.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역시 경멸의 대상이었다. 윤치호는 만약 일제가 독립을 허용해도 조선인들은 분파투쟁과 살육밖에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그는 조선인들이 능력과 능률면에서 일본인들을 따라잡으려면 최소 2세기는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174] 그는 조선시대의 문치주의로 인해 조선의 국력이 약화되었으며, 배관열과 공부에 대한 집착이 신성한 노동을 경시하는 풍조를 만들어 조선 경제,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이 인식의 개선 없이는 독립을 하더라도 그 것을 온전하게 지켜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 “ | 난 조선인들이 개인별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느 일본인들보다 못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책임감과 공덕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협동심과 정직성이 요구되는 사업을 경영할 수가 없습니다.[175] | ” |
|
— 윤치호일기, 1939년 7월 3일자
|
윤치호는 한국 사람들이 '정직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많음[176]'을 보고 실망하였다. 사소한 일 조차도 정직하게 하지 못하는 조선인이, 아무런 노력도, 개선도 하지 않고 고도의 자본과 무기를 가진 일본인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보았다. 그가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는 현실적인 조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민족의 자질과 능력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176]
| “ | 우리가 일본인들을 함부로 경멸할 자격이 있는가? 어디 한번 생각 좀 해 보자. 일본인들은 깔끔하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불결하다고 소문이 나 있다. 그들은 부지런하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게으르다고 소문이 나 있다. ...(이하 중략)... 우리 입장에서 최선의 행동은 일본인들의 뛰어난 자질을 가능한 한 많이 배우고 모방하는 것이다. 그들의 청결성, 근면성, 협동심, 기강, 응집력 등을 말이다.[176] | ” |
|
— 윤치호일기, 1920년 7월 26일자
|
그는 또 조선인들의 실패가 게으름, 불결함, 허위, 이기심, 공공정신과 단결력의 결여, 분파주의, 지역감정 등 조선인들의 저열한 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177] 그는 일본인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식민통치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일제가 도로를 놓고 철도를 개설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며 그들의 홍보를 전면 부정했다. 윤치호는 늘, 정치적 독립 이전에 정직성과 신뢰감을 키우는 연습부터 먼저 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신뢰가 없이는 어떤 일을 해도 되지 않을 것이며, 얄팍한 속임수 보다는 이익을 덜 얻거나,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
주체성에 대한 관점 [편집]
그는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정신과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상을 조선에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인들이 외부 사상을 무차별 맹신함을 지적했다.
그는 "우리 사람은 매양 이 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로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한 도덕과 주의는 없으니 이를 특색이라 칭하면 노예의 특색이다."고 지적하였다.
기독교와 조선 근대화 측면 [편집]
그는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합리주의, 민권사상의 도입을 통해 사회의 개혁을 주창했다. 그리고 사회의 개혁을 위한 발판으로 민중의 계몽을 역설하였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윤치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였으나, 독립협회가 좌절당한 이후 그는 민중을 경멸, 계몽의 대상이 아닌 개조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된다.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의 원인은 '민중의 어리석음'으로 보고, 민중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다.[49] 한편 그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76]"고 주장하여 한국인의 감정적인 대응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시 조선 사회에 거짓과 요령이 만연하다 보고, 거짓을 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거짓과 속임수가 통하는 조선사회에 있어서 기독교를 유일한 양심세력으로 간주하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조선에 문명교육, 애국교육, 실업교육이 필요하다고 봤다. "조선에 있어서 가장 깊게 자리잡고 있고 동시에 가장 널리 알려진 악은 거짓이다.[178]"라고 지적하였고, 사회 부조리로 지배층과 민중 모두에게서 정직성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요령과 눈치를 그는 부정과 부패의 근원이라 했다.
윤치호는 조선의 낙후된 사회를 개혁하고 조선을 구할 수 있는 대안으로 미국식 민주주의 사상과 합리주의정신,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지목했다. 미국식 민주주의 사상과 합리주의정신을 보급하는 것과 기독교의 선교와 기독교 사상의 전래를 통해 조선민중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에 그는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공화제 정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밑바닥에는 기독교 정신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179] 그러므로 한국의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남감리교단에 직접 연락하여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그 사업을 위해 자신이 먼저 선교 헌금을 하기도 하였다.[179] 여기에 그는 기독교 선교를 단순한 신앙 활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통해 정직성, 땀흘려 일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성실성, 청교도의 개척정신 등을 갖도록 변모시켜야 함을 역설하였다.
미국 정신문화에 대한 동경 [편집]
윤치호는 미국 사회 내 백인들의 극심한 인종 차별주의에 분개하면서도 그는 흑인들 중 깨인 인사가 나타난다면 백인들의 오만한 인종차별을 극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윤치호는 자기 자신을 "사상 신념 차원에서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사람"으로 규정하고, 문명의 최상을 구가하는 앵글로 색슨 인종의 용기·담력·근면성 등을 극구 찬양하였다.[180] 한편 인디언 학살 범죄에 대해서는 미국 측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미국인이 조선에서 전개한 기독교 선교 사업을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높이 평가하여 적극 협력하였다.[180] 그는 유교를 대안할 이념으로 미국과 유럽의 민권사상 및 기독교 정신과 신앙을 제시하였으나 이를 절대적으로 맹신하지는 않았다. 교조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은 인간의 이성과 정신을 병들게 한다고 봤다.
미국의 사상 중에 깊이 공감한 것은 자신들의 대표자, 대리인을 선거로 선발한다는 것과, 노력한 만큼의 댓가만 받아야 된다는 기독교 청교도적 가치관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어 있었다는 것과, 신분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가치의 상대성을 존중하거나 방관하는 자유주의적인 가치관 등이었다.
백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에 분노하면서도 그는 흑인들이 장차 차별의 굴레를 벗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흑인들이 장차 차별대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과는 반대로 조선 체제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품게 된다. 흑인들 중 깨인 인사, 배우려는 자들이 나타나는 반면에 깨이기를 거부하고, 부패한 사회인 줄 알면서도 현재의 틀에 안주하려는 조선인들의 태도는 경멸과 증오,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조선 체제를 세종대왕을 제외하고는 부패하거나 타락한 암군들 투성이라고 봤다.
외세에 대한 관점 [편집]
윤치호는 어느 국가든 외세의 개입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다고 내다봤다. 특히 약소국인 나라들은 더욱 외세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열국 경쟁의 시대에 조선에 있어서 외세는 피할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개혁에 있어서 필요한 존재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외세가 "축복이 될지 방해가 될지는 그 자신의 준비에 달린 것"이고, "일본의 간섭이 축복이 될 지 저주가 될지는 조선정부의 지혜와 애국심 여하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했다.[170] 무조건 외세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외부 세력이라고 해도, 조선 스스로가 자강과 개혁을 위해 노력한다면 외부의 자극은 조선 발전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외세의 개입이 반드시 개혁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개혁의 계기가 될 수도 있으며, 만일 관인들이 합력하여 그 기회를 선용하면 외세의 개입하에서도 어느 정도 자주적 개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170] 윤치호는 조선의 당시 국력과 지리적 위치로는 외세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전망하였다.
경제관 [편집]
윤치호는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조선 왕조 체제와 신분제 사회에서는 이런 공정하고 동등한 기회 부여가 불가능한 체제라고 인식했다. 서자(庶子)의 후손이었던 만큼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이 생애 초년에 당한 부당한 대우 역시 평등한 기회를 주장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는 한일 합방으로 조선이 멸망한 것 역시 사람들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기회를 공정하게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결과물은 같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노력하고도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결과를 얻고,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누가 열심히 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평등 사상은 신념적인 반공주의자가 되게 했다. 그가 주장한 평등론은 기회, 자격에 대한 평등론이었지, 노력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똑같은 결과를 주는 평등론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나 일본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한 배경으로 그는 경제적 성장을 지적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선생은 민족 자본 성립론을 주장했다. 후일 김성수가 운영한 경성방직의 모태는 윤치호의 지원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평소에 민족 자본이 커야한다는 소신으로 당시 4촌 동생 윤치소가 경영하던 경성직류의 재정난이 악화되자 어느 일본인 사업가가 고액에 사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듣고 윤치소를 찾아가 그와 의논하여 훨씬 낮은 가격이었으나 김성수에게 넘겼다. 김성수는 이를 바탕으로 경성방직과 오늘날의 동아일보, 고려대를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사업의 실패로 좌절하는 윤치소 등에게 미국의 워너메이커 백화점을 본딴 최초의 미국식 백화점인 가나다 백화점을 권장, 천도교 자리에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각국 대사관은 물론 일본에서도 음식, 물건을 구입하러 오기도 하였다.
노동관 [편집]
노동경시에 대한 비판 [편집]
윤치호는 조선 사회의 노동 경시 풍조를 비판했다. 정당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을 꺼리거나 경멸하고, 자녀를 잘 키워서 출세를 시키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1896년 1월 23일에 워렌 캔들러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조선인에게 정직한 노동이 수치가 아님을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의무의 하나이다.[181]"라고 지적했다. 이는 1908년 한영서원의 개교 전후에 캔들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되며, 한국의 미래는 기술과 노동에 있다는 점과 기독교는 일을 하고 악습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상, 종교로서 필요한 것임을 계속 반복해서 언급, 강조한다.
1897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강사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에도 그는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마라"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 정당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는 성경의 구절을 통해 정당한 노동과 함께 휴일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노동의 필요성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학생들에게 실업 교육을 추진했다. 1900년대초 윤치호는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을 지도하며 그는 실업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강조한 실업교육은 농업, 목축업, 원예업 등으로, 이론 보다는 생산업 위주의 교육을 강조하고, 졸업 후 소액의 자본으로 손쉽게 운영할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장남 윤영선(尹永善)에게 농업과 목축업을 가르쳐 개성에 목장 송고직을 운영케 하는 것으로 시범을 보였다.
공짜에 대한 비판 [편집]
윤치호는 조선인들이 공짜를 좋아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가 없는 결과물은 없는 것이며,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얻는 대가를 좋아하는 것 역시 버려야 될 것이라 판단했다. 공짜를 좋아하는 조선인들의 심리 역시 타인에게 의존하는 의타심을 불러오는 한 원인이라고 봤다.
그는 세상에 대가가 없는 결과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공짜를 바라는 것이 타인에게 의존하는 습성을 불러왔고, 이는 일본을 비난하면서도 일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봤다. 공짜를 좋아하는 사고방식을 버리기 전까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도 없고, 독립해도 정신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독립운동에 관련된 시각 [편집]
윤치호는 그를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거침없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과 구미위원부나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비정기적으로 자금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일정부분 거리를 두었다. 그는 다른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것을 보고 독립이 불가능하다 판단, 독립운동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유해한것으로 규정했다. 도덕적 독립, 지적 독립, 의식 수준의 독립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치적 독립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경제적인 부분의 향상을 하고, 지적·경제적 측면의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10]'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자금력과 경제력, 지식, 기술능력 등의 실력을 양성하여 한국인의 수준을 일본인이나 서구 시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민도를 올린 뒤에나 독립운동의 가부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농경지를 매입해서 그 땅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이야말로, 그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는 이보다 더 현명한 애국자다. 가난한 소년을 그의 아버지보다 더 똑똑하게 만들려고 학교에 보내는 사람이야말로, 정치적 소요를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는 이보다 더 많이 기여하는 것이다. 오도(誤導)된 사람을 성실한 종교적 삶으로 인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매한 민중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만들어 감옥으로 가게 하는 이보다 조선민족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지금은 조선인들이 배우며 기다릴 때다.
그는 땅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주고 자신과 자손들은 굶어 죽는 자 보다 조상 대대로 물려 온 자기 땅을 일본인들로부터 지키고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보았다. 그는 토지에서 식량이 생산되고, 고기 역시 토지에서 나는 곡물을 먹여서 키운다고 봤다. 경제적인 기반이 사라진다면 영원히 그 경제력을 가진 자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종속되지 않더라도 굶어 죽거나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수시로 연락하였고, 이시영, 김규식, 안창호, 이승만 등과 비밀리에 교류하였으며 그들에게 자금을 송금해주기도 하였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는 거부하였지만 그는 임시정부를 조선총독부에 한번도 밀고하지 않았다.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였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조차도 이승만, 안창호 등 온건파들에 대한 지원 조차도 비밀로 부쳤다.
무장투쟁론에 대한 비판 [편집]
또한 무장투쟁론에 대하여 그는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아무런 실력을 갖추지 않고 무조건 돌격하라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며 비판했다. 윤치호는 임시정부나 기타 단체에서 보낸 밀정에게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그는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으로 지원하는 것보다는, 땅을 하나라도 더 매입해서 토지가 일본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그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을 더욱 촉진시켰다."[182] 고 평가하기도 했다.
| “ | 에비슨 박사의 말에 따르면, 어떤 얼간이들이 사이토 제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 그를 빗나간 폭탄으로 인해 수명의 구경꾼들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난 이 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참말이지 애통한 일이다. 조선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일 병합을 재촉했다는 걸 잊었단 말인가. 바보들 같으니.[182] | ” |
강우규의 거사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1919년 9월 2일 경성역에서 강우규의 투탄 거사로 37명의 일본인 및 친일 고관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37명과는 관계 없는 일반 구경꾼과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에비슨 박사로부터 강우규 의거 소식을 전달받은 뒤, 의거 당시 민간인 부상자가 난 점을 지적하며 질타하였다.[182] 그에 의하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 정한론(한국 정벌론)을 외치는 일본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었다는 것이며 이같은 행위 역시 일본내 조선인 학살을 주장하는 세력의 입지만 강화시키는 짓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독립운동 단체들의 주요인사가 직접 오지 않고, 청년 대원이나 학생들을 시켜서 자금을 받아가는 것을 두고도, 자신들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타인만 위험에 빠뜨리려 든다며, 비겁한 행동이라고 비판을 가하였다. 윤치호는 무장독립투쟁이 순간적으로는 울분을 해소해 줄 수는 있겠지만, 일본이나 조선총독부 당국은 조선인들을 더욱 부정적으로 보게 될 것이며, 증거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주동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을 한층 강화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봤다.
외교독립론에 대한 비판 [편집]
그는 외교론을 통한 외교독립론과 같은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국인들 스스로 짚신이나 옷 한벌 만들줄 모르면서 어떻게 정치를 스스로 하기를 바라는가'며 독립운동에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외교를 통해 독립을 달성할수 있다며 그를 설득하려는 이승만, 김규식에게 미국이 자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이유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의 이상을 확신하며 그를 설득하려던 송진우와 김성수를 논파하여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3·1 운동 발발 직전 윤치호는 해외로 나가 구미 열강을 상대로 외교운동을 추진해달라는 최남선, 송진우, 신흥우 등의 요청을 거부했다.[183]
1920년대 초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 의원 시찰단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자는 주장에 회의적이었으며, 그 자신은 미국 의원들과 한국인 대표들과의 통역을 하였지만, 스스로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고 평가절하했다.[79]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동정하더라도 동아일보 등지에서 언급하는 미·일 전쟁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79] 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미국이 혹시 한국인의 처지에 동정한다 하더라도 미국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다.[79] 윤치호는 미국인들에 대해, '미국인들이 몽상가들이 아니라고 평가했다.[79] 미국이나 다른 국가들이 아무 이해관계 없이 한국을 지지하거나 한국의 독립을 순순히 도와줄 리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정의, 도덕에 대한 관점 [편집]
그는 정의와 도덕은 어디까지나 믿음이고 어느 정도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정의와 도덕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망상가들의 믿음과 달리 인간사회는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이며 냉혹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에 의하면 이론적으로라면 인디언이 미국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도록 놔두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다.[184] 그러나 백인들이 와서 인디언들의 황량한 사냥터를 인류 역사상 부강하고 강성한 공화국의 하나로 변모시켰다는게 엄연한 사실인 이상, 세상 사람들은 이 이론이라는 것을 바람에 기꺼이 날려버릴 것[184] 이라고 봤다. 그는 정의로운 척, 도덕적인 척 하는 사람들에게 심한 경멸을 보이기도 했다.
| “ | 인간의 본성은 어디나 누구나 다 똑같다. 다르기를 기대한다는 건 순전히 망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언제나 약하고 호전적이지 못한 국가가 강대국, 대신 욕을 먹고 곤경을 당하기 마련이다.[185] | ” |
그는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 역시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와 비슷한 룰이 적용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다 똑같으며 수단과 방법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강력하고 엄격한 법만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봤다. 결국 그는 총체적인 회의론자로 변해간다.[186]
그는 일부 망상가 지식인들의 바램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의와 도덕은 가뿐히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내다봤다. 따라서 민중이 선량한 존재라는 일부 지식인들의 견해에도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그는 정의와 도덕, 예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말하는 자들은 본심을 숨기고 정의와 도덕, 예의를 빌미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위험한 인물들이라 봤다.
반면에 그는 앵글로 색슨족의 발전은 성실과 정직이라는 덕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고,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분별있는 편인 민족이라고 보았다.[177] 그러나 그는 앵글로 색슨족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민족이라 보지는 않는다. 그는 우생학과 인종주의를 반대하였다. 앵글로 색슨족이 타 인종보다 우월한 것은 다만 그들이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겸비했기 때문에 동양인이나 흑인보다 우수한 문명과 합리적 선택을 이룩할 수 있었을 뿐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이나 실력 양성 이전에 의식 개혁, 계몽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위생적 불결함, 게으름, 속임수와 요령 등이 판치는 현재의 수준에서 독립한다 해도 그 독립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것이며 필시 다른 외세가 침략해 들어올 것이라고 봤다. 그는 조선인이 독립이나 실력 이전에 필요한 것은 인간성과 국민성의 변화라고 봤다. 윤치호는 도덕적인 독립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치적 독립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조선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수양에 의한 민족성 개조, 즉 성실, 정직, 신용, 공공정신, 노동존중 정신 등의 덕목을 함양해 민족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177]
인종 문제와 외국관 [편집]
소년기에 그는 일본보다도 서양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서구 민권사상을 수용하면서도, 백인종에 대한 거부감과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암암리에 드러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 서양의 선진 문물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약소민족에 대한 침략성을 적극 인식하고 알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이것을 어디까지나 강자의 당연한 도리[180] 내지는 어쩔수 없는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1893년 2월 17일자 일기에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20]'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이 세상에는 힘이 곧 정의이고, 이길 힘이 없다면 떠들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180] 인종차별을 비난하면서도 역으로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모순을 보이게도 되었다.
| “ | 인도주의ㆍ문명ㆍ도덕ㆍ자유 등을 구가하는 강대국—기독교 국가—간에서 자행되는 [노예제도ㆍ아편무역ㆍ주류밀수 등] 죄악은 모두 혹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것도 그 나라들의 문명정도에 비례하여 비판되어야 한다. 강대국들의 이러한 범죄는 요즈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나의 신앙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공정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어떤 민족은 약하게 그리고 다른 민족은 강하게 만드셔서 후자가 전자를 못살게 굴 수 있도록 만드셨을까? 혹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은 아니라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와 사실을 잘 살펴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적도(赤道)의 불볕 아래에나 한대(寒帶)에는 강건한 민족 혹은 국민이 도무지 없다. 뿐만 아니라 각 인종이 보유하는 정신적ㆍ육체적 능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왜 하나님은 모든 인종을 똑 같은 환경조건에 놓아두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모든 인종에게 똑같은 체력과 지력을 허여하지 않으셨나?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힘들다. 나의 신앙이 이러한 의문들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되겠다.[187] |
” |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9년 12월 23일자
|
윤치호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조선 침략 가능성을 보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을 축하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으로 가면서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서 백인의 아시아, 아프리카 침략으로 확대시키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인종 대 인종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후일 박노자는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의 마음 상태[25]'를 지적하기도 했다.
윤치호 등은 서구의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특히 윤치호는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유일한 반항은 일본 중심의 황인종 연대론에 동참해 백인종과 '인종적 대결'을 벌이는 것[180] 이 현명한 길이라 주장했다. 개화기에는 "지구의 천당인 일본에서 인종 차별을 당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개인적인 희망을 품었다. 이것이 러일 전쟁 때는 백인종 러시아에 대한 황인종 일본의 승리에 대한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 박노자는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황인종 연대론이 "소신 친일"하게 된 윤치호의 이념적 근거가 됐다고 봤다.[180] 윤치호는 1896년 민영환의 사절단의 통역원으로 러시아 방문 당시 러시아의 군사력이 우월한 것을 목격한바 있었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를 꺾은 것을 보고 황인종이 백인종을 이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황인종도 백인종을 이길수 있다는 사례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를 박노자는 '중국 멸시론'이라 규정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의 이러한 중국 멸시론은 심해지기만 했다.'고 평가했다.[188] 그에 의하면 중국인을 묘사하기를, 그는 "청결과 정직에 있어서 중국인을 믿는 것보다는, 천문학과 지질학에 있어서 돼지를 믿겠다.[189]", "입만 벌이면 개똥과 같은 더러운 냄새가 나고, 이빨을 닦지 않고 허풍떨고 떠들어대는 것만 좋아하고 게으르고 무의미한 고전이나 시가(浮文)만 잘 읽는" 중국인들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반감을 표했다.[188] 그리고 조선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와 민권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편집]
일제 강점기 내내 그는 친일파들이 말하는 일제의 혜택론을 반박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190], 천황의 악의이다.[183]'라고 단언하였다. 일본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며 일본의 덕에 조선이 개화가 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으며 1938년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사건,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기 전까지 그는 공공연히 일본이 조선을 위해 일한 것이 없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이후 조선을 위해서 해준 것이 무엇이냐는 항변을 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한국의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일제가 무단으로 한국을 점령해서 통치한다, 따라서 이는 혜택이라 볼수 없다고 봤다. 그는 일제가 힘을 앞세워 조선을 강제로 병합해놓고 조선인들에게 동화를 강요하고 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수탈과 차별을 실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190] 억지로 한국을 합병해놓고 식민 통치를 찬양하게 해 놓고 이것을 은혜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억지라는 것이다.
그는 조선총독부와 일제가 강요하는 애국심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이들이 비이성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관공서와 민간인 사무실을 불문하고 모든 사무실이, 심지어 병원들 까지도 다이쇼 천황의 장례식에 조의를 표하고자 문을 닫았다. 겨우 천황이 땅에 묻히는 일 때문에 이틀 내내 현대적 삶의 작동이 꽁꽁 묶인다는 건, 전 민족의 상식과 지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191]'는 것이다. 일본 통치자들이 조선인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특히 토지강탈정책과 조세정책을 중심으로 한 일제의 경제 정책과, 모든 부문에서 관행처럼 이루어지고 있던 민족차별정책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190] 그는 일본을 침략자 내지는 지배자, 정복자로 이해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편집]
무단통치기에 이어 문화통치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식민통치로 조선에 문명이 이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 설치된 각종 도로, 철도, 항구, 공장 산업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제가 조선을 문명화시킨 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지 조선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윤치호는 일제가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조선을 개발, 곧 근대화시키는 것이 조선과 조선인들보다는 일제와 일본인들에게 더 득이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닭고 있었다.[183] 그는 일본인들이 철도 및 도로의 확장, 관개사업 및 조림사업의 진전 등을 자랑삼아 자기들이 조선에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선전하는 것에 대해, '당장 그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제거되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비해 적어도 100배 이상의 (경제적) 손해를 볼 것'이라고 반박했다.[183]
윤치호에 의하면 일제가 한국에 철도를 놓고, 도로를 놓고, 항구를 개척한 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지 조선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일본이 조선의 공물과 곡식과 조선 땅에서 나오는 자원을 일본으로 약탈, 공출해가기 위해서 건설한 것이며, 조선인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윤치호에 의하면 어느날 그것이 없어진다 한들 경성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사흘은 잡는 조선인들에게는 별로 불편할 것도, 손해볼 것도 없다고 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홍보에 대해, 일제의 통치에 의한 조선의 발전이란 것이 사실은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발전'일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83] 그에 따라 1938년경까지 일제가 한국에 문명화와 선진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터무늬없는 주장에 대해, 반복적으로 어디까지나 이는 일본을 위한 것이지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니라며 일본과 친일파의 주장을 거듭 일축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상냥함과 친절함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어느 미국인이 윤치호에게 매사에 상냥, 친절한 일본인을 가리켜 기모노를 입은 천사라고 하자 그는 '일본인들은 그들의 나라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는 기모노를 입은 상냥한 천사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는 독사들이다.[192]'라고 반박했다.
친일파에 대한 반감 [편집]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을 규탄하면서도 이완용을 가장 경멸하고 혐오했다.[193] 이는 이완용이 당초에는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계몽운동에 동참했다가 적극적인 친일파로 돌변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 “ | 이완용 백작이 후작으로, 송병준 자작이 백작으로 특승(特陞)되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에 충직하게 봉사하기만 하면 후한 보상을 받는다는 걸 조선인들에게 환기시키려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매국노들이 보상받을 때마다 조선인들은 이들의 야비함과 조선민족의 애처로운 현실을 상기하게 된다. 두 명의 가증스러운 인간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려고, 1,700만 조선인들에게는 수치심과 참담한 심경을 안겨준다는게 현명한 정책일 리가 없다. | ” |
윤치호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가리켜 '가증스러운 인간들'이며 '허영심을 가진 자들[194]'이라고 지목했다. 동시에 이들이 이런 저런 감투와 시민사회단체의 고위직, 공기업의 고위직을 받는 것을 '조선민족의 애처로운 현실[194]'에 비유하였다.
애국심에 대한 관점 [편집]
그는 '애국심은 많은 무뢰한들의 피난처다.[195]'라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늘 애국심은 건달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라고 한 새뮤얼 존슨의 등의 말을 인용하여 애국심만 갖고 있다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하였다. 그는 애국심을 빙자하여 인간성을 말살시킨다던가, 애국심을 빙자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가 빈번해진다며 이는 일종의 명분에 불과하다고 했다.
1923년 칙어실천회는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메이지 천황과 노기 마레스케를 추모하는 전국적인 추모제를 기획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억지로 강요하는 애국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고 평가했다. 칙어실천회가 전국 각지에서 메이지 천황 칙어실천회는 감수성이 예민한 조선 청년들에게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로 조선 각지에서 이 환등회를 거행하고 있다.[82] '이 프로그램은 일본인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82]'고 봤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땅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는 것보다, 그 땅을 지키고,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일본 자본, 기타 외국 자본의 침투를 막는 것이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훈시했다. 그는 농업, 제약, 방제, 건축, 기계 등의 기술, 영어, 일본어 등의 어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을 호소하였다.
| “ | 농경지를 매입해서 그 땅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사람이야 말로, 그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는 이보다 더 현명한 애국자다.[155] | ” |
그 자신도 이러한 신념대로 한영서원을 통해 기술, 농업을 가르치고, 송도목장을 통해 우유를 생산하고, 학교 내부 공장을 통해 직물인 송고직을 생산, 이를 해외에 수출하기도 했다. 실업계 학과 학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1~2년 과정의 영어, 일본어 교육을 추가로 더 시킨 뒤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보내고 그 학비와 생활비는 전적으로 윤치호 자신이 다 부담하였다. 또한, 차미리사의 여자 실업교육을 높이 평가, 자신의 학교에 실업학과를 개설, 여학생들에게 농업, 건축 등의 기술을 가르치는 차미리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 “ | 여기에 두 명의 조선인이 있다. 한 명은 자기 논이나 상점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자기 가족을 편안하게 부양하고, 주변 사람들도 도와 가면서 성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만세를 부르고 다니지는 않는다.[60] 다른 한명은 도박꾼에다가 난봉꾼이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한다.[60] 하지만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만세를 부른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진정한 애국자일까?[196] | ” |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자와 자기 삶을 성실하게 사는 이 중 어느 쪽이 진정한 애국자인가 질문을 남기기도 했다. 억지로 강요하는 애국심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는 비인간적인 강요라고 평가했다. 이는 그가 유교의 일방적인 충효예를 비판한 것과도 연결된다.
사상적 관점 [편집]
획일주의에 대한 비판 [편집]
1940년 1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창씨개명을 하면 감동적일 것이라며 은연중에 창씨개명을 할 것을 권고했다. 그의 권고가 있자 총독에게 아부하려는 이들은 창씨개명을 주변에 강요하고 다녔다. 윤치호는 이를 비판적으로 봤다.
그에 의하면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화하도록 강요하는 이 열병이 꽤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처사라고 생각한다[103] 다양성이야 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당연히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점에서 똑같아지라고 강요하는 건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정책이랄 수 밖에 없다.[103] 그는 한 국가나 사회에 다양한 인종이 구성원으로서 살 수 있고, 그러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그 다양한 인종이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자율성을 존중해주어야 된다, 다원화를 인정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파시즘에 대한 인식 [편집]
그는 한때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 존경했다.[109] 이유는 볼셰비즘으로부터 이탈리아를 구했고, 자기 나라를 당당한 유럽 강대국의 일원으로 만들었다[109] 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였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망할 놈의 히틀러[109]', '염병할 히틀러[109]'라 하였으며, '히틀러가 가는 곳은 어김없이 지옥으로 변한다.[109]'며 그를 경멸하였다. 그가 아돌프 히틀러를 비난하는 이유는 히틀러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윤치호나 개신교계의 원로인 김창제도 한때 강력한 정치 지도자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197] 윤치호는 무솔리니의 자서전 을 읽고, "조선에도 무솔리니가 필요한데 무솔리니는 호전 적인 민족에만 가능하므로 조선에서는 (그러한 지도자가 나오기) 어려울 것" 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197]
1940년대 이후 무솔리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경멸로 바뀌게 된 것도 무솔리니가 히틀러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실패를 예견하며, '그는 자기 능력과 시간을 자기 나라의 내적인 번영과 동북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들의 평화적인 개발에 바쳤더라면, 이탈리아는 최근 20년 동안 유럽에서 강성하고 영예로운 열강이 되었을 것이다.[109]',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를 제국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흉악한 야망에 이끌려, 몬테니그로와 알바니아 같은 약소국들을 집어삼키는 약탈행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건 이탈리아를 부강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부채와 불행만을 안겨다 주었다.[109]'며 아쉬워했다.
그는 덧붙여 '내 생각에 그는 자기 보호의 필요성 때문에 기꺼이 염병할 히틀러 의 노예가 되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경제적 파산과 군사적 제약을 야기했다.[109]'는 평도 남겼다.
공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편집]
그는 한국의 첫 세대의 반공주의자(反共主意者)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윤치호는 공산주의가 한국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될 무렵에 공산·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를 이룰수 없는 사상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강하게 혐오하였다. 1943년 9월의 한 일기에서 그는 무솔리니를 한때 존경했던 이유 역시 볼셰비즘(공산주의)의 창궐을 막았기 때문[109] 이라 할 정도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약탈로 간주했다.
윤치호는 공산주의·사회주의와 유교를 모두 부정적으로 간주하였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하는 것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198]"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으로 의존적인 것과 일방적인 평등, 분배를 지적했고 한국인의 의존적인 성향[199] 과 결합하여 부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한반도에 확산, 유행하는 이유를 일제에서 찾지 않고 다른사람에게 의존하기 좋아하고, 공짜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기생주의 습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 볼셰비즘이 유행, 창궐하는 이유는 기생주의라는 한국인의 습성 외에 일본의 정책이 조선 사람에게서 먹고 살 수단을 빼앗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보았다.[198] 그는 대중이 사실상의 기아 상태, 그리고 기아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볼셰비즘은 뿌리뽑히지 않을[198]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 [편집]
윤치호는 박인덕, 나혜석 등의 이혼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박인덕과 나혜석의 선택은 개인의 취향이니 존중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유교의 가부장적인 질서를 비판했고, 남녀차별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규정했으면서도 1920년대 도입되기 시작한 여성주의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윤치호는 공산주의자이자 여성주의자였던 허정숙을 평하기를 '그(허헌)의 전처 소생(허정숙)은 그에게 골칫거리만 안겨주는 존재라는게 입증되었다[200]'고 비판하였다.
허정숙은 남편인 임원근(林元根)이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구속중이었을 때, 또다른 공산주의자인 송봉우(宋奉瑀)와 동거하는 등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서대문형무소에 본인이 복역 중에 출산을 위해 한때 가출옥했다가 다시 투옥되어 많은 화제를 뿌렸다.[200] 윤치호는 이를 질타하며 그가 허헌을 속썩이고 있다고 비토했다. 동시에 여성 해방을 주장하며 자유연애를 하는 여성들 역시 가정을 파괴하고 타락을 부추기는 존재라고 봤다. 그는 사회주의 만큼이나 페미니즘을 유해한 사상으로 간주하였다.
사회관 [편집]
지역감정에 대한 비판 [편집]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간의 지역감정 역시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였다.[136]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지도자들 간에도 지역간의 갈등이 있었다.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201] 그러자 여운형,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201]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신흥우,여운형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201] 그러나, 안창호는 1932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징역 4년형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상태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등이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것에 대해서는 앞뒤 정황이 맞지않고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반론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윤치호는 1929년 3월 12일 셋째 딸의 결혼 이후[136] 그는 자신이 지역감정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딸 문희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 결혼이 서울 명문가에서 평양 출신을 사위로 맞는 첫번째 사례이므로, 난 조롱과 비난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현명했다는 것을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202]" 당시 지역감정은 극심했고 충청남도 출신으로 기호 계열인 그가 서북 출신의 사위를 맞이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로 회자화되기도 했다. 그는 서북출신인 사위를 두고“내 평양사위가 성공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서북파의 거두인 이광수와 허심탄회한 교분을 형성하기도 했다.[136] 그러나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황병주는 그의 논쟁은 지역감정의 밖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휘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136] 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정의사회에 대한 의문 [편집]
윤치호는 이상사회와 현실사회와의 괴리,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와 진화론적 우승열패론 사이의 모순 속에서 심각한 갈등을 느꼈다.[203] 그는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힘이 곧 정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종종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을 의심하였다. 그는 '만약 하느님이 정의롭고 선하다면, 어떻게 온갖 불의와 죄악을 범하는 왕들과 황제들 그리고 다른 개인들과 국가들을 용납하거나 심판치 않고 놓아두는가?[203]'하고 절규하였다. 공적으로는 왕들, 황제들, 군주들, 그리고 각종 공직자와 벼슬아치들이 국민에게, 가정에서의 부모가 자녀에게, 형제자매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그리고 상대적인 강자들, 그리고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하는 폭력을 왜 반드시 벌주지 않고 가만 두느냐는 것이었다. 이 의문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요컨대 만일 하느님이 사랑과 연민이 없는 비정한 아버지가 아니라면, 특별히 한국에서 일반적으로는 세계에서 승리해왔고, 승리하고 있는 아버지 하느님의 부정(父情)과, 더욱더 그 부성(父性)에 의혹을 품게 한다.[203] 고 했다. 약자가 강자의 먹이가 되는 냉혹한 법칙으로 세계가 천지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절대자 하나님은 약자의 이해문제를 고려했는지 의심스럽다.[203] 고 하기도 했다. 이는 국가에서 정치인과 민중의 관계,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시부모와 며느리의 관계가 과연 사랑과 애정으로 이루어진 관계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결국 이 세계를 실제로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가 아니고 힘이다. 힘은 정의라는 것이 이 세계의 신이다.[203] 라고 결론 내린다. 현실사회에는 신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고, 힘의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따라서 정의와 평화가 수립될 수 없는 죄악의 사회로 인식했다.[203] 다만 국가에서만큼은 엄격하고 강력한 법만이 인간의 그러한 폭력성을 강제로 완화시킬 수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 한편 그가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것에 대해 일부 교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적자생존설과 사회진화론 [편집]
윤치호는 사회진화론과 적자생존설을 신봉하였다. 인간 세상에 적용되는 것은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킨다는 논리이며 도덕과 정의, 관습은 교묘하게 그런 것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그는 경찰, 법정, 감옥, 기타 여러 유형의 종교적, 사회적 억제책과 같은 다양한 강제수단에 의해서만이 도덕의 근본요소들이 인간 들 사이에서 힘을 발휘한다[204] 고 보았다. 이러한 억제장치들을 제거하고 나면 어떤 공동체에 속해있건 간에 모든 개인은 곧장 정글의 법칙으로 되돌아갈 것[204] 이라고 내다봤다.
따라서 그는 평등하면서도 엄격한 법률이 적용되는 법치사회의 구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은 한 국가, 민족 내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국가대 국가 사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공포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개인들이 두려움 때문에 착실하게 행동한다[204] 고 봤다. 윤치호는 일정 수준의 상류층이나 사회지도층 이외의 계층에게 도덕, 윤리적 잣대를 강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봤다. 어차피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대부분 도덕, 윤리를 잘 지키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사회진화론과 적자생존설을 신봉하는 점에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은 반감을 품기도 했다.
정의와 도덕은 피해자, 패배자들의 믿음에 불과하고 현실은 악과 술수가 판치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호전적인 본능이 있어서 인간세계에서 전쟁과 싸움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과,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하다고 인식하였다.[205] 그는 호전성이 강한 민족이 저항능력이 없는 민족을 멸시하고, 압박하고, 차별하는 것은 중력의 법칙만큼 보편적인 성질의 법칙이라고 단언하고, 인간에게 호전적인 본능이 있는 한, 또 인간성이 악한 상황에서는 지구상에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205]
성악설 [편집]
윤치호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목사의 설교나 인문학자들의 강의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신통한 존재라면 왜 수시로 범죄와 폭력을 자행하느냐는 것이 그의 반문이었다. 그는 사람이 돼지를 지저분하다 하면서도 사람은 겉모양만 청결할 뿐, 돼지보다도 더 지저분한 행동을 자행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기합리화를 시킨다 하였다.
| “ | 인간에게 종교를 줘봐라.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을 죽이는 명분으로 삼을 것이다. 회교도와 기독교도, 힌두교도와 회교도 간의 회교도 간의 살육을 보면 알 것이다. 인간에게 과학을 줘봐라. 인체에 치명적인 독가스와 폭탄을 발명할 것이다. 인간에게 사회주의를 줘봐라. 지상 천지를 볼세비즘의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206] | ” |
윤치호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성악설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인간은 하얗건, 노랗건, 빨갛건, 흑인이건 모두가 똑같은 존재들이었다.[205] 그는 약자라고 해서 특별히 선량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녀와 머슴을 구박하는 자신의 셋째 부인 백매려, 며느리를 구박하는 집안의 친척들을 보면서 그는 인간은 사악한 존재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자식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집착 역시 이기심의 연장으로 파악했다.
윤치호는 홈스의 '나는 인간을 믿는다. 인간의 본성을 믿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그의 말을 들며 그를 존경해 마지 않으며, 그의 낙관주의가 부럽기까지 하다고 했다.[207]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집안 여자들의 잔인하고, 허영심 많고, 더할 나위 없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노라면, 또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배신하는 온갖 유형의 남자들에게 속고 있는 꼴을 보노라면, 그리고 국가간 민족간의 극심한 이기심, 비열함, 무자비함을 보고 있노라면 성선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했다.[207] 오히려 고생하는 하녀를 구박하는 아내를 질타하며 하녀와 머슴들의 편을 들기도 했다. 그는 맹자가 인간이 본래 선한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역성혁명론을 내세운 점도 주목하였다.
윤치호는 늘 조선 사람들은 나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도 남은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기대를 저버리면 비난을 가하거나 험담을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은 늑대로 남기를 바라면서도 다른사람은 순진한 양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폭력과 압제를 행하는 동포의 정부보다는 다소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이민족의 통치가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미국 기독교의 목사나 장로들이 흑인들을 박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미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을 지적하며 인간은 야비한 짐승이라 규정한다.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하려고 선교사들을 보낸다. 속으로는 흑인들이 멸종하기를 바라면서[208] 라며 인간은 대단히 야비한 짐승[208] 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임에 틀림없다[207] 고 봤다.
학생들의 정치참여론 [편집]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 역시 부정적으로 봤다. 학생들은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무지함을 깨닭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본분이지, 정치 문제 개입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봤다. 오히려 그렇게 정치에 열심히 뛰어든 학생들이 자신들이 기성세대가 되면, 그 때의 젊은이들이 똑같은 짓을 할 것이 두려워 입학 시험이나 학교 교과목 공부 자체를 어렵게 만들도록 어떤 모종의 술수를 쓸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는 또한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들의 99%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에 "코를 묻고" 있는데, 그들의 "게으른 혓바닥을 굴리는데 사회주의는 참으로 이상적인 분야"라며 조롱조로 적고 있다.[157] 학생들이 정치에 관여, 간섭하고, 정치인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자기들의 게으른 혓바닥을 굴리기 위한 수단이며, 그럴 시간에 공부를 한 번 더 하고, 전공서적을 한 번 더 읽고, 영어책, 일본어책을 한번 더 보라고 지적했다.
| “ | 사람이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듯이, 어느 민족도 정치만 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신조는 이렇다. '혼신의 힘을 다 해서 정치를 사랑하라!' 조선인들은 정치와 무관한 삶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삶이라고 여긴다. 그들이 교육을 받는 유일한 목적은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다.[209] 조선인들은 정치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을 쉽게 무시해버린다.[209] 그리고 물론 그들은 이것을 가리켜서 애국심이라고 부른다.[195] | ” |
그는 정치와 출세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치를 두지 않는 조선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개척정신에 대한 예찬 [편집]
개성과 자립정신 [편집]
윤치호는 조선인들이 자기 주체성이 없다, 독창성이 없다, 개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남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성향까지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인들이 자기 주장,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점을 개탄했다.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를 두려워하고 겁내면서 어떻게 독립을 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들이 자기 생각대로 표현하기를 주저하는 것을 조선시대의 탓으로 보았다. 그는 조선왕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호전성과 개성을 파괴했다고 봤다.
그는 지난 500년 동안의 치욕스러운 이조시대에 우리의 호전성은 잔인하고 이기적인 전제정치가 고안해낸 모든 기제들에 의해 완전히 뿌리뽑히고 말았다.[210] 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조선왕조가 저지른 최대의 죄악으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를 가장 형편없는 왕조로 지적한 이유로 '국왕들이 군대를 지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누가 쳐들어올 기미만 보여도 도망쳤다[211]'고 지적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를 두려워하고 겁내는 풍조가 정착된 결과 남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풍조가 정착했고, '붓과 혀를 이용해서 남을 음해하고 음모로 적을 죽이거나 제거하는 수치스러운 계략'이 판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212] 윤치호는 자기 의사 표현조차 명확히 하기를 두려워하면서 독립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존재를 인식하여 조선왕조를 말할때는 이씨조선이라 지칭하였다.
자수성가에 대한 예찬 [편집]
그는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들을 특별히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고학생과 청년들에게 대가 없이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자수성가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였다.
윤치호는 교육자 차미리사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도 했다.[213] 열일곱 나이에 결혼한 차미리사는 3년이 채 못돼 남편과 사별하고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23살의 나이에 유학을 떠나 중국과 미국에서 공부한 뒤 34살이 된 1912년 귀국해 교육운동에 투신, 봉건적 여성 교육에서 1925년 근대적 여성 교육의 장으로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거듭나게 한 그는 대다수 문맹 상태에 있던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현했다. 60세 이던 1938년 차미리사는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칭, 현재 덕성여자대학의 전신을 일궈냈다.[213] 이후 차미리사는 주변의 재혼 권고와 탈선 유혹을 물리치고 가난한 학생들을 무료로 양육하였으며, 문맹에게 문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여자 역시 한사람의 인간의 몫을 하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여성에게도 농업, 목축과 건축, 측량술 등의 기술을 가르쳤다.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농업과 기술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윤치호는 차미리사의 견해에 적극 동조하였다.
평생 차미리사를 지켜보며 후견인 역할을 했던 윤치호는 "서울에 있는 한국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한 여인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남자나 여자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213]"며 그를 극찬하였다. 윤치호는 별다른 배경 없이 고학으로 자수성가한 인물들의 후견인을 자처하여, 실력가나 문벌 자제들에 비해 불리한 그들의 사회적 정착을 돕기도 했다.
청년 지원 [편집]
윤치호는 교육을 통해 무지한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사회 발전의 첫걸음이라 진단했다. 사회활동과 계몽운동 외에도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불우한 청년들에게 비밀리에 학비를 대거나, 유학비용을 부담해주거나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젊은이들이 다양한 세계와 사상을 접하고 눈뜨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양한 사상과 학문, 세계를 보고 접하고 느낄 것을 강조했다. 다만, 이른 나이에 어떤 편견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은 그 젊은이의 영혼과 정신세계 형성에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된다고 봤다.
그는 늘 YMCA중앙기독교청년회와 한영서원, 그밖에 각지에 연사로 초빙될 때 청년들에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세계와 사물을 접하되 편견과 독선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을 되도록 멀리하라고 충고하였다. 또한 젊은이들이 외국 여행 중 받을 피해와 상처를 예상, 외국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외국은 한국과는 엄연히 다르며 외국을 여행할 때는 그 나라의 관습이나 역사, 국민성을 반드시 사전 조사한 다음에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후원하던 학생들 중에는 한국 기독교 원로 목사 한경직도 있었다. 한경직의 회고록인 '한경직 목사 성역 50년 (제 2장, 6. 잊을 수 없는 그 돈 100원)'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그에 의하면 '한경직 목사가 젊은 시절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모든 유학 준비가 완료되는 중에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는 여비문제였다. 남강 선생을 찾았다. 소개서 두통을 써 주었다. 한통은 K 선생에게 또 한통은 윤치호 선생에게 였다. 먼저 K 선생을 찾아갔다. 일언에 거절을 당하였다. 다음은 윤 선생을 찾아갔다.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윤 선생은 쾌히 돈 100원을 주셨다. 그때 돈 100원이면 우리나라에서 미국까지의 선임이었다. 큰돈이었다. 당시 윤 선생의 말은 "공부가 끝나면 꼭 한국으로 돌아 와서 조국을 위하여 일해야 하오. 이 돈을 후에 꼭 갚겠다고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꼭 갚기를 원한다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같은 뜻으로 도와주면 될 것이오." 하였다는 것이다.
귀국 후 한경직은 한번도 이 고마운 돈 100원을 잊은 일이 없다고 한다. 귀국 후 교회건축, 6.25 동란 등 여러 어려움때문에 도무지 여유가 없었던 한목사는 부인 김찬빈 권찰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비로소 이 돈 갚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윤치호의 아들 윤영선이 당시 농림부 장관에 있을때 이기에 그 돈을 그분에게 갚기로 생각하고 부인이 내놓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윤 장관을 찾았다. "한목사님 내가 어떻게 이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한 목사는 "내 생각도 좀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친의 뜻을 받들어 좋은일 하실 때에 보태 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간신히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경직 자신은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노라고 한다. 고마운 분의 고마운 뜻은 영원히 갚을 수도 없지만 영원히 잊을 수도 없다고 한다. 마음비에 새겨 두고 그 뜻을 본받아 살고저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음악가 홍난파 역시 그가 후원하던 학생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난파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알게되었다.[214] 홍난파는 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난파는 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난파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214]
| “ | 홍영후(洪永厚 · 난파)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 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 승낙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협박까지 했다.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었다.[214] |
” |
윤치호는 실력양성이라는 그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는지 자선사업 목적에서였는지는 불확실하나, 여러 고학생과 유학생들을 후원하거나 꾸준히 장학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뒤에 자신이 지원한 학생들에게 빚을 갚으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신념 [편집]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 땅을 팔아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일본인 손에 땅이 넘어가지 않도록 땅을 사들이는 것이 애국이다.
저서 및 번역서 [편집]
저서 [편집]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 《우스운 소리》
- 《영어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영어 문법 사전
-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 《유학자취》(幼學字聚)
번역서 [편집]
번역서로는 이솝 우화의 첫 한글번역판과 걸리버 여행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찬송가의 한글 번역본인 찬미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화랑 [편집]
학력 [편집]
가족 관계 [편집]
|
|
|
|
|
|
|
|
|
|
|
|
|
|
|
|
윤취동 (尹取東) 1798~1863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전주이씨 (全州李氏) 1844~1936 |
|
|
|
|
|
|
반계 윤웅렬 (磻溪尹雄烈) 1840~1911 |
|
|
|
|
|
김정순 (金貞淳) 1879~1959 |
|
|
연구 윤영렬 (蓮龜尹英烈) 1854~1939 윤영렬 가계도 |
|
|
한진숙 (韓鎭淑) 1851~1938 |
|
윤씨 (尹氏) 1835~1920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윤경희 (尹慶姬) 1862~1931 |
|
|
좌옹 윤치호 (佐翁尹致昊) 1864~1945 |
|
|
남포 윤치왕 (南圃尹致旺) 1895~1982 |
|
윤치창 (尹致昌) 1899~1973 |
|
손진실 (孫眞實) 홍정욱 가계도 참조 |
||||||||||||||||||||||||||||||||||||||||||||||||||||||||
|
|
|||||||||||||||||||||||||||||||||||||||||||||||||||||||||||||||||||||
- 증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년 - 1823년 9월 25일)
- 증조모: 남양홍씨(1765년 - 1816년 5월 7일)
- 조부: 윤취동(尹取東, 1798년 7월 18일 - 1863년 12월 21일)
- 조모: 고령신씨(高靈申氏, ? - ?, 조부 윤취동의 본부인)
- 조모: 안동김씨(安東金氏, 1800년? - 1900년 10월, 아버지 윤웅렬 형제의 생모)
- 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
-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 1844년 9월 27일 - 1936년 2월 12일)
- 서모: 이름 미상
- 이복 동생: 윤길용(尹吉龍, 1894년 - ?)
- 서모: 다옥(茶玉, 윤웅렬의 기생 출신 첩)
- 서모: 김정순(金貞淳, 1879년 3월 15일 - 1959년 11월 16일)
- 부인 : 진주 강씨(晉州 姜氏, 1868년 - 1886년, 1879년 결혼, 1885년 이혼)
- 부인 : 마애방(馬愛芳, 1871년 2월 19일 - 1905년 2월 14일, 중국 사람, 다른 이름은 윤애방(尹愛芳). 1894년 재혼)
- 첫째 딸: 윤봉희(尹鳳姬, 로나(Launa[216]), 1894년 12월 31일 - ?) - 김긍선과 결혼. 경기도 개성에서 살았음
- 첫째 사위: 김긍선(金兢善, ? - ?, 소학교 훈도 역임)
- 첫째 아들: 윤영선(尹永善, 알렌(Allen[216])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 제3대 농림부장관
- 맏며느리: 민연희(閔蓮禧 또는 閔連嬉, 1905년 - ?, 민씨 척족인 민유식(閔裕植)의 딸)
- 둘째 아들: 윤봉성(尹鳳成, 1897년 - 요절)
- 셋째 아들: 윤광선(尹光善, 샌들러(Candller[216]), 1898년 11월 17일 -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 남궁억의 사위.
- 셋째 며느리 : 남궁자경[24], 다른 이름은 남궁삼인(南宮三仁, 1896년 - ?), 한국의 독립운동가 남궁억의 딸)
- 손자: 윤용구(尹龍求, 1919년 2월 16일 - ?)
- 손자 며느리: 한원희(? - ?)
- 증손자 : 윤시영(? - ?)
- 증손녀 : ?
- 손자: 윤정구(尹鼎求, 1927년 - , 기업인·고려원양(주) 전무 역임)
- 손자 며느리 : 박혜준
- 증손자 : 윤도영
- 손자: 윤명구(尹明求, 1930년 - ?)
- 손녀: 윤자희, 음악인
- 손녀서: 김명호(金明浩, ? - ?), 북한 개성시장위원회 부위원장[218], 개성시 인민위원장 역임[218]
- 손녀: 윤정희
- 손녀서: 채동규(蔡東圭, 1917년 - 2003년 12월 18일[219],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제2대 학장, 대한약학회 회장 역임
- 손녀: 윤성희(1929년 - )
- 손녀서: 원석연(元錫淵, 1922년 - 2003년 11월 5일, 화가)
- 둘째 딸: 윤용희(尹龍姬, 헬렌(Helen[216]), 1903년 - ? ) - 외국 거주.
- 둘째 사위: 백OO
- 외손녀 : 백연숙
- 부인 : 백매려(白梅麗, 1890년 8월 1일 - 1943년 4월 10일, 본관은 남포, 다른 이름은 백미려(白美麗). 1907년 재혼)
- 셋째 딸: 윤문희(尹文姬, 별칭은 마리(Mary), 1907년 9월 18일 - ?, 정광현(鄭光鉉,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과 결혼.)
- 셋째 사위: 정광현(鄭光鉉, 법의학자, 호는 설송(雪松), 1902년 - 1980년 12월 7일)
- 넷째 딸: 윤무희(尹武姬, 1912년 5월 4일 - 1914년 3월 10일)
- 다섯째 딸: 윤은희(尹恩姬, 1917년 11월 11일 - ?)
- 다섯째 사위: 정봉섭(鄭奉燮, 1912년 - ?, 의학박사, 산부인과 의사)
- 여섯째 딸: 윤명희(尹明姬, 1918년 2월 8일 - ?)
- 여섯째 사위: 조인호(趙麟鎬, ? - ?)
- 외손녀: 조영숙(1940년 - )
- 넷째 아들: 윤장선(尹璋善, 다른 이름은 워싱턴[216], 1920년 1월 27일 - 2005년 3월 25일) 전(前) 미국 샌프란스시코 총영사관
- 넷째 며느리: 기세선([24], 1922년 - 2007년 9월 28일[220])
- 다섯째 아들: 윤기선(尹琦善, 1921년 10월 22일 - ) 미국에서 피아니스트 활동, 2녀
- 다섯째 며느리: 이순복([24] ? - )
- 손녀 : 2녀
- 일곱째 딸: 윤보희(尹寶姬, 1923년 10월 19일 - , 음악가,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교수)
- 일곱째 사위: 현영학(玄永學, 1921년 - 2004년 1월 14일 오전 9시[222][223][224], 기독교 민중신학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장)
- 여덟째 딸: 윤영희(尹瑛姬, 1926년 3월 5일 - , 미국 거주)
- 여덟째 사위: 미국인
- 여섯째 아들: 윤정선(尹挺善, 요셉[216] 1928년 5월 24일 - 2008년 3월 4일) 미국에서 사망
- 여섯째 며느리: 김영주[24]
- 손자:
- 아홉째 딸: 윤정희
- 첩 : 백랑(白朗, 또는 정동랑, 기생 출신 첩[225], 1884년 정동의 윤치호 집에 들어옴)
- 첩 : 이름 미상,[17] 그가 상하이에 체류중일 때 다른 남자에게 개가하였다.
- 숙부: 윤영렬(尹英烈, 1854년 음력 4월 15일 ~ 1939년 양력 11월 4일)
- 숙모 : 청주한씨 한진숙(韓鎭淑, 1851년 ~ 1938년 2월 18일), 한말 전라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
- 서숙모 : 이름 미상[226]
- 사촌 여동생: 윤씨, 이름 미상
- 외종조카: 허현자(許炫子)
- 사촌 여동생: 윤씨, 이름 미상
- 외할아버지 : 이일영(李日永, ? - ?, 본관은 전주(全州))
- 이모 : 전주이씨
- 이모부 : 이동진
- 이모 : 전주이씨
- 이모부 : 이건혁(李健爀)
- 사돈 : 방일영(方一榮, 1922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
평가와 비판 [편집]
평가 [편집]
서재필 때문에 빛이 가려졌지만 윤치호 또한 당대 최고의 연설가였다.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이었다.[22]
또한 개신교 청년회의 주도자들을 처벌한 신민회 사건 이후 존폐의 위기에 있던 YMCA 청년회(현재의 서울 YMCA) 활동을 지켜냈다는 평가도 있다.[66]
근대사회의 보기 드문 합리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 냉철한 평가를 내렸던 그는 민중에 대하여 비판적이면서도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76]"고 하여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일제의 통치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든 유형의 독립운동을 반대하고 실력양성운동, 민족성 개조운동을 중시했던 윤치호는 안창호, 이광수 등과 사상적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76]'는 시각도 있다.
대학교수 겸 언론인 강준만은 한국근대사산책 3권 에서 그가 수구반동세력에게 타협하였지만 뒤에도 계속 독립, 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에 대해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227] 그에 의하면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227] 그러나 그는 독립협회 실패 이후로 민중의 우매함이 개혁, 계몽의 실패의 원인으로 봤고 이후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이승만과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228] 이주영은 윤치호에 대해서 “서구 문명을 여러 차례 접하면서 문명사회는 곧 민주사회와 기독교 사회라는 점을 알게 됐고, 한국이 주권을 잃자 기독교 교육을 통한 개인의 경제적·정신적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 자립을 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했다”고 평했다.[228] 이주영 교수는 '윤치호가 오늘날에 살았더라면 대통령이 되었을 큰 인물이었다.[179]'라고도 평가하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사교수 겸 평론가 박노자(Vladimir Tikhonov)는 그를 쉽게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봤다[1]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졌고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감방에서 6년이나 살았던 ‘민족주의자’ 윤치호의 행보는 희한하게도 친일로 수렴하게 된다.[1] 박노자에 의하면 '그는 선진적인 일본의 틀 안에서 한국인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1931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노골적인 친일인사가 된다. 그럼에도 그를 ‘친일파’라는 밋밋한 단어만으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최초의 근대인 또는 최초의 세계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1]'이라는 것이다.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교수 쿤 데 쾨스테르(Koen De Ceuster)는 60여년넘게 쓴 윤치호의 영문일기를 토대로 박사학위 받은 학자였다.[124] 그는 윤치호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1995년 대한민국 광복회 주관으로 한 '윤치호 친일 협력에 대한 재평가 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때문에 좌옹이 자기 민족에게 오해를 받고 있어요. 흑백논리가 강한 나라니까요. 일본이나 미국 어디에서나 좌옹 선생을 민족주의 애국자라고 말 하는데 그를 친일파라고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124]” 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독실한 감리교인 이기도 했다.[124]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17세에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중등 교육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884년부터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6개월, 1888년부터 미국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5년간 대학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 시대에 윤치호와 어깨를 겨룰 만한 인물로는 서재필과 유길준 정도 밖에 없었다.[31] 는 평가도 있다.
비판 [편집]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밖에‘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26] 는 비판도 있다. 정운현은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친일행적보다도 친일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 은 바로 이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다.[14]
서울대학교 교수 김상태는 "윤치호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끼치는 해악을 분명히 인식했으면서도, 성악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장해제하고 만 것이다. 이런 판단 아래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은 현상유지, 곧 현실 순응일 수밖에 없었다.[72]"고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수유연구실 윤영실 연구원은 "문명만이 절대 선이고 문명을 위해서라면 강대국에의 종속도 불가피하다는 신념에 따라 미국을 선망하고 조선에 열등감을 가졌던 윤치호가 결국 당시 동양의 문명국 일본에서 타협을 본다[146]"고 평을 내리기도 했다.
정운현은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 명색이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 만 것이다.[14]'라는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146] 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윤치호와 서재필의 비교 [편집]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31] 윤치호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소임을 해내는 인물이었다.[31]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31] 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22]
서재필이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22],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언제나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229]
반면에 윤치호는 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을 하나로 놓고 사유하는 윤치호의 선지자적 태도는 독립협회 회원 및 참여 민중 대부분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229]
윤치호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
- 1984년, 백윤식 - 《독립문》(KBS2 텔레비전 드라마)
- 1996년, 박찬환 - 《찬란한 여명》(KBS1 텔레비전 드라마)
- 2001년, 이원희 - 《명성황후》(KBS2 텔레비전 드라마)
같이 보기 [편집]
참고 자료 [편집]
- 윤치호 일기 - 문화일보 기사
- 윤영실씨 “윤치호 영어일기 속엔 美國을 향한 선망 가득" 동아일보 2003년 11월 20일자
- 개화기 친일파 지식인 윤치호 `합방이후 쓴 영문일기 번역출간` 한국경제 2001년 02월 17일자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윤치호 :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김도훈)〉,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좌옹윤치호문화사업회,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윤치호선집 1)》 (좌옹윤치호 외편, 을유문화사, 1998)
- 김영희,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윤치호선집 2)》 (김영희, 좌옹윤치호문화사업위원회, 1999)
- 해평윤씨 홈페이지
- 국제결혼은 애국심을 죽이는가 한겨레 2004.08.26
-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조선일보 2008.08.08
- 조선 유력인사 5명 美 인물평가 내용 조선일보 2008.08.08
- 윤치호는 왜 김교신과 다른 기독교를 배태시켰나? 오마이뉴스 2010.01.21
- 대통령과 청백리가 숨쉬는 곳, 아산 오마이뉴스 2003년 02월 27일자
- 윤치호일기 - 한국근대사
- 윤치호 일기 한국일보 2001.02.16
관련 서적 [편집]
- 김상태, 《윤치호 일기: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역사비평사, 2001)
- 김영희,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윤치호선집 2)》 (김영희, 좌옹윤치호문화사업위원회, 1999)
- 유영렬, 《개화기 윤치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윤치호, 《국역 좌옹 윤치호 서한집》 (윤경남 번역, 호산문화사, 1995)
- 이윤섭,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세계사 속에서 바라본 한국 근대사의 진실》 (평단문화사, 2009)
- 신용하, 《한국근대지성사 연구:신용하 저작집 40》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강준만, 《한국 대중매체사》 (인물과사상사, 2007)
- 좌옹윤치호문화사업회,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윤치호선집 1)》 (좌옹윤치호 외편, 을유문화사, 1998)
- 김상근, 《기독교의 역사》 (김상근 지음, 평단문화사, 2008)
-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대사강의》 (한울아카데미, 2007)
- 박노자 외,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푸른역사, 2005)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인물과사상사 펴냄, 2007)
- 윤치호, 《윤치호 일기 1(국역)》 (송병기 역,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 윤치호, 《윤치호 일기 2(국역)》 (박정신 역, 연세대학교출판부, 2003)
- 허경진, 정명기, 유춘동 외, 《윤치호의 우순소리 연구》 (보고사 펴냄, 2010)
- 조성기, 《좌옹의 길》 (뿔(웅진문학에디션), 2010)
- 이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조선 서얼의 꿈과 좌절 성공과 실패》 (청아출판사 펴냄, 2010)
- 박지향, 《윤치호의 협력일기: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도서출판 이숲, 2010)
- 최종고, 《인물과 전기》 (한들출판사, 2002)
-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7)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김상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기독교 역사》(김상근 지음, 평단문화사, 2006)
-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근대 조선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한울, 2009)
- 윤진헌, 《한국 독립운동사 (상)》 (한국학술정보, 2008)
- 이병근·권태억 외,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3권》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 박명수, 《한국 교회사의 감동적인 이야기》 (국민일보, 2006)
- 박노자, 《우승 열패의 신화》 (한겨레신문사, 2005)
- 박노자,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인물과사상사 펴냄, 2005)
- 김재용, 《협력과 저항:일제 말 사회와 문화》 (소명출판, 2004)
- 조성기, 《유일한 평전》 (작은 씨앗, 2005)
- 박노자·허동현, 《우리 역사 최전선》 (푸른역사, 2003)
- 최서영, 《한국의 저널리즘:120년의 역사와 사상》 (커뮤니케이션북스, 2002)
- 윤성렬, 《도포입고 ABC 갓 쓰고 맨손체조:신문화의 발상지 배재학당 이야기》 (학민사, 2004)
- 류대영,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제국주의 침략, 개화 자강, 그리고 미국 선교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 선우훈, 《민족의 수난: 105인 사건 진상 외》 (명성출판사, 2008)
- 임채욱, 《북한 상징 문화의 세계: 인공기와 애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화산문화, 2002)
- 신용하,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운동의 사회사:신용하 저작집 43》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 신소섭, 《한국교회음악사》 (아가페문화사, 2001)
- 유영렬·최기영, 《애국계몽운동: 정치사회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신용하 저작집 3》 (지식산업사, 2000)
- 국사편찬위원회 편, 《좌옹 윤치호 서한집》 (국사편찬위원회 편, 1995)
- 유영렬, 《개화기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 송건호, 강만길외, 《한국민족주의론, 3권》 (창작과 비평사, 2000)
- 김봉희, 《한국개화기서적문화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9)
- 박찬승,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 박정신, 《한국 기독교사 인식》 (도서출판 혜안, 2004)
- 공병호, 《공병호의 인생강독:좌절의 별에서 살아남는 법》 (21세기북스, 2010)
- 조맹기, 《한국 언론인물 사상사》 (나남출판, 2006)
- 독립신문강독회, 《독립신문 다시 읽기:백년전 거울로 오늘을 본다》 (푸른역사, 2004)
- 김상태, 「일제하 윤치호의 내면세계 연구」, 《역사학보》 (역사학회, 2000)
-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펴냄, 1999)
- 윤병희, 《유길준 연구:한국사 연구총서 6》 (국학자료원, 1998)
- 정진석, 《인물한국언론사:한국 언론을 움직인 사람들》 (나남출판, 1995)
-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1991)
- 유영익, 《갑요경장 연구》(일조각, 1990)
- 이광린, 《유길준: 닫힌 사회에 던진 충격》 (동아일보사, 1992)
- 유영렬, 「개화기 윤치호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1984)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 기독교사상 편집부, 《한국역사와 기독교:기독교사상 300호 기념논문집 2》 (기독교사상 편집부, 1983)
- 전택부, 《한국 기독교청년회 운동사》 (정음사, 1978)
-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민주주의 실험 천 일의 기록 지식 전람회(지식 전람회)》 (프로네시스, 2007)
- 황호덕,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소명출판, 2005)
- 손정숙, 《한국 근대 주한미국공사 연구:1883-1905》 (한국사학, 2005)
- 문옥배, 《한국찬송가100년사:해설,역사》 (예솔출판사, 2002)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 김을한, 《좌옹 윤치호전》 (을유문화사, 1982)
- 박용규, 《한국교회인물사 (6)》 (서울:복음문서선교회 출판부, 1975)
- 이광수, 《이광수 전집 제17권》 (삼중당, 1962)
- 연세대학교 박물관, 《윤웅렬·이씨부인·윤치호 유품:윤영선 기증》 (연세대학교박물관, 1976)
- 국사편찬위원회 편, 《윤치호 일기》, (국사편찬위원회, 1973∼76)
- 송병기, 《국역 윤치호 일기》(상·하), (탐구당, 1975)
- 김영의, 《좌옹윤치호선생약전》 (기독교조선감리회총리원, 1934)
- 三城景明, 《韓末を語る》 (朝鮮硏究社, 1930)
-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2003)
주석 [편집]
- ↑ 가 나 다 라 마 바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가 추천하는 윤치호 씨네21 2008년 12월 04일자
- ↑ 윤흔의 아들 부사직 윤취지(尹就之)의 5대손이었다.
- ↑ 황현, 매천야록 (두산동아, 2010) 126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윤치호와 유길준 프레시안 2003년2월 17일자
- ↑ 신동준, 《왕의 남자들》 (브리즈, 2009) 292페이지
- ↑ 윤치호가 번역에 참여한 것이다.
- ↑ 가 나 다 갑신정변 연구(박은숙 지음, 역사비평사, 2005) 104페이지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4년 9월 16일자(양력 11월 3일)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4년 9월 20일자(양력 11월 7일)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윤치호 - Daum 백과사전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884년 10월 18일자(양력 12월 5일)
- ↑ 가 나 다 둥우대학(東吳大學)의 전신
- ↑ 가 나 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54174&page=28&mm=005001001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대세순응주의 빠진 나약한 지식인의 말로 - 오마이뉴스 2004.10.17
-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병력 5만 명을 파견하여 상당수 전사한 것을 조선은 1910년 조선 멸망 시까지 은혜로 해석하였다.
- ↑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사상사, 2003) 128페이지
- ↑ 가 나 전파토론 연구회
- ↑ 가 나 다 윤치호 (2001). 김상태 역: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634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http://worldanew.net/sub_read.html?uid=56§ion=sc3§ion2=
- ↑ 가 나 다 “개화파 윤치호가 영문일기를 쓴 까닭은?”, 《동아일보》, 2003년 11월 20일 작성.
- ↑ 가 나 박노자 외 (2005).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푸른역사, 169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100페이지
- ↑ 가 나 다 [한국교회 120년―⑾ 서울 종교교회] 배움터서 출발한 신앙… 교계통합 이끌어 국민일보 2002.12.03
- ↑ 가 나 다 라 마 바 윤치호, 앞의 책, 635페이지
- ↑ 가 나 和而不同의 토론과 논쟁 프레시안 2003.09.05
- ↑ 가 나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311200268
- ↑ 무궁화,나라꽃 선정 유래… 고려 無窮花 명칭 첫 등장 구한말 우리나라 상징 꽃 부각 국민일보 2009년 08월 06일자
- ↑ 가 나 다 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43페이지
- ↑ 가 나 다 《인물로 보는 조선사》,p 437~p464
- ↑ 윤치호는 1881년~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였다.: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윤치호 :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김도훈)〉,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158쪽쪽. ISBN 978-89-7199-011-7
- ↑ 가 나 다 라 마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9페이지
- ↑ (이규태 역사에세이) 독일여성 손탁 이야기 조선일보 1999년 04월 29일자
- ↑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153;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I, p 444
- ↑ 가 나 다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 585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3페이지
- ↑ 가 나 다 라 <<인물과사상>> 2003년 1월호(인물과사상사, 2003) 126페이지
- ↑ 윤치호 일기 제4권(국사편찬위원회편, 1975) 339-341
- ↑ 가 나 다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1페이지
- ↑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2페이지
- ↑ 가 나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 (상)》 (일조각, 2006) 330페이지
- ↑ 가 나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 (상)》 (일조각, 2006) 331페이지
- ↑ 그러나 황국협회와 척신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은 그가 황제를 부정했다는 거짓말을 날조하여 유포했고, 윤치호는 결국 임금의 눈밖에 나게 된다.
- ↑ 조성기,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2005) 58페이지
- ↑ 서재필은 미국시민권자라서 대한제국 조정이 그를 살해할수 없었다.
- ↑ 가 나 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편, 《한국민족운동사 연구의 역사적 과제》(국학자료원, 2001) 355페이지
- ↑ 서울육백년사 홈페이지
- ↑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186페이지
- ↑ 가 나 다 라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252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253페이지
- ↑ 가 나 http://db.history.go.kr/front/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LCJPOHFKMMGA&pSearchWordList=LCJPOHFKMMGA&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GGKIGGKPGGJAGGIOLCJPOHFKMMGAGGIP&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 ↑ [그때 그 인터뷰] 은하수의 영원한 등대지기 동요작가 윤극영
- ↑ 가 나 좌옹윤치호문화사업회,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을유문화사, 1998) 75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254페이지
- ↑ 가 나 [한겨레 21] 국제결혼은 애국심을 죽이는가 한겨레 제524호(2004.08.26)
- ↑ 가 나 다 라 (이규태 역사에세이) 앨리스-헐버트 이야기 조선일보 1999.06.10일자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160페이지
- ↑ 박형우, 《금파 홍석후》 (연세대학교출판부, 2008) 65페이지
- ↑ 명성황후가 여무속인 진령군을, 고종이 박수무당 성강호를 총애하여 2품 관직을 내린 것을 지적한 것이다.
- ↑ 가 나 다 김봉희, 《한국개화기서적문화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9) 336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시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152페이지
- ↑ 가 나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교육만이 살 길이다》 (인물과사상사, 2007) 10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애국가 작사자, 과연 누구인가? 공감코리아 2005.11.29
- ↑ 그에게 부여된 대한제국의 품계인 정2품 자헌대부의 계급을 사퇴했다. 계급만 있고 직책은 없는 관리를 조선에서는 산관이라 하여 관리로 인정하였다.
- ↑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133페이지
- ↑ 가 나 식민지 의대 졸업생이 선택한 두 가지 길 프레시안 2010년 09월 13일자
- ↑ 가 나 (서울 YMCA) 민간 사회운동 앞장선 95년 조선일보 1998년 10월 25일자
- ↑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309페이지
- ↑ 가 나 다 라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310페이지
- ↑ 위기 앞에 선 언론 미디어 오늘 2002년 10월 17일
- ↑ 가 나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308페이지
-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136~137p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윤치호일기 한국일보 2001년 2월 16일자
- ↑ 이상재 역시 3.1 운동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이는 사회주의세력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 ↑ 가 나 다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元老의 誤判 조선일보 2004.03.05
- ↑ 윤치호일기 1919년 5월 31일자
- ↑ 가 나 다 라 마 바 <서평> 윤치호 일기 문화일보 2001년 2월 21일자
- ↑ 가 나 민립대학 설립운동 동아일보 2009년 10월 9일자
-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이이화, 한길사, 2006) 290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하영선 외 지음,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128페이지
- ↑ [교회언론회 논평] 『한글주일 제정』을 제안하며 크리스천투데이 2010년 10월 15일자
- ↑ 가 나 다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240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241페이지
- ↑ 윤치호일기 1924년 1월 3일자
- ↑ 식민지 의대 졸업생이 선택한 두 가지 길 프레시안 2010.09.13
- ↑ 동아일보 1928년 2월 2일자
- ↑ 가 나 다 라 부귀면 … '친일거두' 비석 기증 진안신문 2009년 07월 06일
- ↑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시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259페이지
- ↑ 가 나 다 라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친일파 윤치호 불망비 철거 대한뉴스 2009년 07월 29일
- ↑ 가 나 다 현충사관리소, 충무공 위토서 모내기 행사 대전일보 2009년 05월 31일자
- ↑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동아일보사, 1990) 140페이지
- ↑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한길사,1985) 248쪽
- ↑ 가 나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1) 39페이지
- ↑ 가 나 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 70년사 (1935년-2005년)》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104페이지
- ↑ "땡한민국? 5대 국새, 조선총독부 철자법 따라서야" 동아일보 2011년 05월 11일자
- ↑ 사촌동생 윤치소의 부인이고,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어머니이다.
- ↑ 윤치호, 《윤치호일기:1916~1943》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29페이지
- ↑ 가 나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 역사비평사, 2007) 613페이지
- ↑ 윤치호일기 1938년 6월 11일자, 1938년 12월 11일자
- ↑ 가 나 ② 송병준 매국 대가 1억5천만엔 요구:윤치호, 조선총독부 설득 수용 친일 변신 승낙 조선일보 2004.08.12
- ↑ 윤치호일기 1939년 02월 07일자
- ↑ 가 나 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
- ↑ 윤치호일기 1939년 7월 22자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1페이지
- ↑ 가 나 다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3페이지
- ↑ 동아일보 1940년 7월 16일자
- ↑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지석영과 오긍선
- ↑ 가 나 송우혜, 《윤동주평전》 (열음사, 1989) 230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99페이지
- ↑ 송우혜, 《윤동주평전》 (열음사, 1989) 231페이지
- ↑ “윤치호 활용도 최고… 이광수 신뢰도 보통” 서울신문 2008년 8월 9일자
- ↑ 편집부 지음,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한길사, 2004) 328페이지
- ↑ 가 나 坪江仙二, 《改正增補朝鮮民族獨立運動史》 (高麗書林, 1986) 410쪽
- ↑ 해방의 기쁨으로 숙원을 해결한 종탑예배당 크리스찬투데이 2010.08.25
- ↑ 김장훈의 ‘애국가’가 뜬다 - OSEN
- ↑ 건국동맹 등 지하단체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건국동맹 등의 단체는 비밀리에 움직여 활동하고 있었다.
- ↑ 한민당에는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 5촌 조카 윤보선이 조직에 참여, 몸담고 있었다.
- ↑ 가 나 저항과 순응의 역사 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7) 77페이지
- ↑ 매일신보 1945년 09월 29일자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37~138쪽.
-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38~139쪽.
- ↑ 공임순, 식민지의 적자들 (푸른역사, 2005) 346페이지
- ↑ 가 나 다 "윤치호 노인", 대중일보 1945년 12월 9일 일요일자, 제2면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애국가 작사자 / 이종혁 칼럼 한국일보 2009년 12월 22일자
- ↑ 가 나 "친일파 윤치호 동상 철거하라"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성명서 발표 - 오마이뉴스 2002년 3월 7일자 기사
- ↑ 조호진. “민노당 연대 학생위, 학내 친일인사 7명 명단 발표”, 《오마이뉴스》, 2005년 4월 6일 작성. 2008년 4월 11일 확인.
- ↑ 이승규.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 광복 6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 발간…친일인사 선정 근거 없고, 교단 차원 친일은 빠져”, 《뉴스앤조이》, 2005년 8월 6일 작성. 2008년 1월 4일 확인.
- ↑ 가 나 다 친일파 불망비, 친일행적 안내 현판의 불편한 동거 노컷뉴스 2012-08-14
- ↑ 윤치호 친일행적 알리려 안내현판 제막식 가져 전라일보 2012.08.13
- ↑ 윤치호가 미국에서~: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바람》(한길사, 2004) 49쪽.
- ↑ 가 나 [한.캐나다 수교 40주년] 1884년 윤치호선생 첫발 한국경제 2003-01-13일자
- ↑ 가 나 다 유학자취
- ↑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585페이지
-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
- ↑ (사람들) 배화학원 내일 창립 100주년 기념식 조선일보 1998년 10월 1일자
- ↑ 가 나 다 라 마<


